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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의의 병기로 드리자 (롬 6: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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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 말씀을 중심해서 ‘의의 병기로 드리자’라고 군대용어를 사용해서 제목을 잡았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일본과 우리 사이에 독도 근처의 해저탐사를 둘러싸고 굉장히 고조가 되고, 심지어는 대통령께서 거의 선전포고에 가까운 담화를 발표하시는 지경까지 이르는 독도 영유권 분쟁을 계기로 해서 일본과 우리의 해군력을 소개를 해 드리고 싶습니다.

지난해 나온 국방백서 재인연감의 통계에 따르면 우리 한국 해군은 삼대 함대 사령부가 있는데, 해병대 2만7천명을 포함해서 우리 해군은 68,670명이 되고, 일본은 아직 정식 군대가 아니기 때문에 해상 자위대라는 표현을 쓰지만 일본 해상 자위대는 일개 기동함대와 오개 지방 함대가 약 45,842명의 해군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해군의 숫자로만 따지면 우리가 한 2만명 이상 숫자가 많습니다만은, 내용으로 들어가 보면 전혀 다른 해군의 예산을 보면 한국은 일년에 약 3조원 정도를 해군이 사용하는데 반해서, 일본 해상 자위대는 10조원 가량을 사용을 하고 있습니다. 3배가 넘는 예산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지요.

전투함이나, 구축함의 상황을 보면 한국 해군은 최근에 4천 5백톤급의 강감찬호를 포함해서 우리가 약 123척의 전투함을 포함하고 있는데, 일본해상 자위대는 7천2백5십톤급의 이지스함을 포함해서 62척의 전투함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전투함의 숫자는 우리가 많지만 작은 규모가 많고, 일본은 큰 규모가 많은데, 이것이 이지스함이라고 하는 한 대가 한반도의 모든 육해공군을 커버할 정도로 대단한 장비인데, 일본은 이 이지스함이 무려 네배나 가지고 있고, 지금도 약 5척 정도를 건조 중에 있습니다.

반면에 우리는 이지스함이 한 대도 없는 상황입니다. 이미 이지스함의 상황만 보아도 일본과 우리의 해군력은 어른과 어린이 수준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뭐, 잠수함 같은 경우도 우리는 아주 작은 북한에서 남한에 공비를 침투시킬 때 쓰는 그런 작은 200톤급 돌고래함 그런 정도이지만, 일본은 2750톤급의 오야시모라는 잠수함들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제가 국방백서와 재인연감을 보면서 한국과 일본의 해군력을 비교해 보니까 이건 정말 골리앗과 다윗처럼 너무나도 비교가 안 되는 그런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독도근해의 일본이 거기서 해저탐사를 하겠노라고 탐사선을 보낸다고 하니까 우리 방송뉴스 화면에 큰 해군 함정들과 해군 정찰 함대들이 5- 6대가 일렬로 서 가지고 일본 탐사선이 들어오기만 하면 밀어낸다고 하고 그게 안 되면 발포를 하고, 시나리오를 이야기 하는데, 뉴스를 보니까 배가 너무 조금해요. 너무 작은 거예요. 파도치는데 배가 너무 종잇장처럼 약해 보이는 거예요.

일본사람들이 그 뉴스를 보면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 더 놀라운 것은 해안경찰청 소속된 그 함정들에게 장착된 기관총 30m- 50m들이 2차 세계대전 때 쓰던 거랍니다. 그러니까 출동하면 모양은 갖췄지만 정작 쏘라고 하면 그 실탄이 나갈지 안 나갈지 모르는 기가 막힌 그런 장비들을 가지고 있는 것이지요.

일본은 이지스함 한 대만 동해에 딱 떼어 놓으면 육해공군 전부를 다 감당해도 이길만큼 대단한 전력을 가진 그런 나라가 뉴스에 나오면서 온 국민이 흥분하고, 대통령까지 막 흥분해서 그러는데, 그 사람들은 콧방귀도 안 뀌는 거지요. 어른과 유치원생들과의 싸움도 안 되는 수준입니다.

우리는 감정으로 극해서 온국민이 애국심으로 이길 것 같지만, 그들은 감정으로 하는게 아니라 실력으로 하는 것이지요. 우리는 냉정한 현실을 우리가 좀 비교해 볼 때, 우리가 감정만 가지고 전쟁에 이길 수 있는 건 아니다. 만약 한국과 일본이 해군만 가지고 전쟁에 붙는다면, 우리는 아예 이야기도 꺼낼 수 없는 상황이다 하는 것을 마음 아프게 비교해 보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믿음으로 사는 것도 마찬가지, 내가 신앙이 꽤 있는 것 같고, 내 믿음이 꽤 있는 것 같아서 감정으로 그것이 뒷받침 되어 주니까 굉장한 것 같지만, 껍질을 벗겨 놓으면 사실 별 것도 아닌, 아무 것도 아닌 그런 우리의 모습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지요.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라. 우리가 세상에 사는 동안에 죄의 병기로, 죄의 도구로 우리의 지체들이 얼마나 쓰여졌는지 모릅니다. 그 중에 제일 많이 쓰여진 지체가 무엇입니까? 우리의 혀이잖아요. 우리의 혀로 상대방을 얼마나 상처를 주고, 우리의 혀로 불신앙의 이야기를 쏟아내 놓고, 안 됩니다, 어렵습니다, 말도 안 됩니다, 안 된다고 기도한다고 다 됩니까?

이런 기가 막힌 말들을 이 새치혀로 얼마나 많은 경우에 쏟아내었습니까? 그러면서 믿음으로 살려고, 말씀으로 살려고, 하나님을 의지해 살려고 하는 사람들의 기를 얼마나 꺾어 놓았습니까?

그러면서 우리의 손으로, 우리의 발로, 우리는 얼마나 잘못 된 일들을 하나님이 원하지 않는 일들을 얼마나 많이 했습니까? 우리의 병기를 불의의 병기로 죄 짓는 도구로 우리의 지체를 얼마나 많이 사용했느냐 하는 것입니다.

전에는 우리가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가 우리 몸에서 왕노릇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우리는 그 밑에서 죄의 노예처럼 살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너의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의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몸을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는 결단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에베소서 6장에 보면 사도바울은 에베소 성도를 향해서 권합니다.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어라.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에 관한 것이 아니라 정사와 권세와 이 세상 어두움의 주관자들과 하늘의 영들에 대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시지요?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생각해 보세요. 제일 먼저 진리로 허리띠를 띠고, 의의 흉배를 붙이고, 평안의 복음을 예비한 신을 신고, 그리고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구원의 투구를 쓰고,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이것이 의의 병기로 무장된 성도의 모습인 줄 믿습니다.

진리의 허리띠라고 하는 것은 뭐예요? 여러분, 요즘은 남녀가 다 바지를 많이 입는데, 바지를 입으려면 허리띠를 해야지요. 허리띠를 하지 않으면 자꾸만 바지가 내려가지 않겠습니까? 허리띠를 하지 않으면 힘을 줄 수가 없어요.

만약 여러분들이 줄다리기를 한다고 하면 줄다리기를 하는데 허리띠가 없는 펑퍼짐한 그런 몸빼 같은 것을 입고 줄다리기를 한다고 하면 굉장히 애로사항이 많을 거예요. 허리를 단단히 조이고, 여러분 역도선수들 보세요. 그 넓은 가죽허리띠로 가슴을 조일 듯이 허리를 조이고, 그리고 나서 그 무거운 100㎏씩 되는 무거운 역기를 들어올리지 않겠습니까?

허리에 힘을 주어야 그래야 온 몸에 힘이 모아지는 거예요. 우리가 그 허리띠를 띠어야 하는데, 그 허리띠는 어떤 것입니까? 진리로 허리띠를 띠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힘을 얻어도 다른 것이 아닌 세상의 잘못 되고 오염된 것이 아닌 진리의 허리띠를 띠어야 힘을 얻을 줄로 믿습니다.

흉배는 화살이 가슴 심장에 다가오는 것을 막아주는 것입니다. 이 흉배는 세상의 공격을 막아주는 것인데, 의로 공격을 막아야 된다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거룩한 의로 세상의 공격을 막아내야 한다는 것이지요.

뿐만 아니라 신을 신어야 하는데, 복음의 신을 신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우리 성도들이 어디를 가든지, 복음으로 사람들을 만나야 할 줄로 믿습니다. 식당을 가도 이 식당 주인에게 어떻게 하면 복음을 전할까? ‘아주머니, 예수 믿습니까? 아주머니, 교회 다녀요?’ ‘아휴, 교회 다녀야지요.’ ‘그럼 꼭 교회 다니십시오.’ 물건을 팔고 싶으니까 거절은 안 하거든요.

가야지요. 다녀야지요. 그럴 때 그녀에게 교회를 소개하는 전도지를 주고, 안내지를 주면서 다음에 우리 교회에 꼭 오십시오. 그 다음에 또 가서 전하고, 또 전하면서 우리가 친구들을 만나고, 여행을 해도 우리가 복음의 신을 신었기에 누구를 만나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라 칭하는 복음의 전도자가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파트의 빌라에 일년을 살아도 이웃집에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우리 교회 내가 나가는 교회 한 번 나가보자고, 한 번 건네 보지 못하는 그런 삶이라고 하면 얼마나 부끄러운 삶이겠습니까?

여러 가지 이유는 있겠지요. 내 삶이 부끄러우니까, 내 삶이 떳떳하지 못하니까 말을 못하는 그런 연약함도 있을 수 있을 거예요. 청소하자면 한 번도 나와서 빌라 청소하지 않으면서 예수 믿으라고 말 못하겠지요. 생활이 뒷받침 안 해 주니까 아마 그런 연약함도 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 층계에 늘 쓰레기가 뒹굴고, 층계에 지저분한 광고지가 뒹굴어요. 다니면서 이 놈의 동네는 더러워 죽겠다고, 이사가야 되겠다고 그래요.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제가 볼 때는 이 5층 정도의 빌라면 한 20분 정도만 투자하면 층계부터 입구까지가 깨끗해 질 수 있을 텐데, 그 20분 투자하면 여기에 10가구가 4,50명이 드나들면서 우리 빌라는, 아파트는 깨끗해서 올 때마다 깨끗하다고 생각할텐데, 이 20분 투자를 못해서 이 놈의 빌라는 더러워 죽겠다고 이사가야 되겠다고 그렇게 살아야 되겠느냐?

당신이 이 수많은 사람들을 위해서 10분만 투자한다면, 여기 출입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여기 빌라는 늘 깨끗해 하면서 그렇게 상쾌하게 출퇴근하지 않겠느냐는 거지요. 여러분들은 어떤 삶을 살고 싶습니까?

오늘 우리는 주님 앞에서 우리의 삶이 복음의 신을 신기에 부족함이 없는 삶을 살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방패입니다. 상대방의 칼과 무기들을 막아줄 수 있는 방패들을 가져야 하는데, 그 방패는 물질적인 방패, 권력의 방패, 명예의 방패가 아니라 믿음의 방패여야 할 줄로 믿습니다.

우리를 막아주는 것은 믿음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절대적인 신뢰,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두려워 하지 않는다는 그 고백, 그 신뢰, 그 믿음의 방패가 있는 한 우리는 늘 강건할 줄로 믿습니다.

구원의 투구입니다.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이 머리부분을 보호해 주는 투구, 이것은 구원의 확신으로 무장하였을 때 우리의 삶이 온전해 질 줄로 믿습니다. 마지막으로 모든 무장을 다해서 결국 무기가 있어야 하잖아요.

지금까지는 공격을 막아주는 수비형의 그런 장비였다면, 이제는 공격형 장비가 있어야 하는데 그것은 칼입니다. 이 칼이 성령의 칼이라고 했는데, 곧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인 줄로 믿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말씀이 무장이 되어야 합니다. 말씀이 무장이 되어져야 어느 곳에 가서나 하나님의 말씀이 성령의 검의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지요. 전에는 우리가 불의의 병기로써 죄의 도구로써 쓰임 받을 수 밖에 없었어요.

그러나 이제는 의의 병기로써 하나님의 거룩한 도구로 사용되기를 축원합니다. 후안 카를로스 오르띠즈 목사님은 말씀합니다. 현대에는 영적 전쟁의 시대인데, 우리 성도들은 군함을 탄 하나님의 군대가 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때때로 성도들이 교회를 유람선으로 생각합니다.

먹고 마시고 놀고 즐기는 취미생활을 하는 유람선으로 생각을 해요. 유람선에는 누가 탑니까? 유람객들이 타잖아요. 노래하고, 먹고 노는 즐기는 사람들이 타는 곳입니다. 유람선은 먹고 놀다가 침몰해 갑니다.

하지만 군함은 군대입니다. 무기가 있습니다. 싸울 수 있습니다. 영적 전쟁의 이 시대에 이 평안의교회는 하나님의 군대가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이왕이면 아까 한 일간에 해군 전력을 비교했는데, 이왕이면 평안의교회는 이지스함이면 좋겠어요. 이지스함 한대면, 동해에 이지스함 한 대만 뜨면 남북한 육해공군 통 털어도 걱정할 것이 없는거예요. 평안의교회 이 교회만 이 소사구에 한 교회만 있어도 이 지역에 사탄마귀의 세력 걱정할 것이 없는 그런 의의 병기로 무장한 평안의 공동체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우리가 살다보면 여러 삶에 도전에 직면합니다. 그러나 그런 도전에서 우리가 승리하기 위해서 주님은 우리로 하여금 전신갑주로 무장하기를 요청합니다. 우리의 삶의 태도도 중요합니다.

히말라야에 고산족들이 양을 매매할 때에 모습을 보면서 저는 많은 교훈을 얻었습니다. 그들은 양을 매매할 때 양의 크기에 따라 값을 매기지 않고, 양의 성질을 따라서 값을 매긴다고 그래요. 양이 10㎏, 5㎏짜리냐 하는 크기가 아니라 성질에 따라서 값을 매긴다는 거예요.

그래서 내용을 보니까 양을 팔 사람과 살 사람을 만나서 양의 우리에서 양을 끌고 오는데, 그 히말라야는 보통 3천, 4천, 5천에 고산지대에서 고산족들이 사는데, 양을 어떻게 테스트하냐 하면 양을 끌고 와가자고 가파른 언덕에 놓으면 양이 가파른 언덕을 막 찾아 올라가면서 틈새에 풀을 뜯어먹는 양은 상향성 양이 되어서 값을 높이 쳐주고, 양을 끌고 왔는데 산 비탈로 내려가면서 풀을 뜯어먹는 양은 하향성 양이 되어서 값이 절반으로 뚝 떨어진다는 것이지요.

지금 현재는 양이 토실토실하고 건강해 보이지만 상향성 양과 하향성 양은 성향이 값 차이가 그렇게 많다는 거예요. 왜 그러냐 그러니까 상향성 양은 지금은 힘들지만 계속해서 위를 바라보면서 올라가는 양은 계속해서 무궁무진하게 초장을 향해서 나아갈 수 있지만, 양은 멀리 못 보기 때문에 자기 눈 앞에 있는 것만 보고 가는데, 하향성 양은 눈 앞에 있는 편리한 길을 찾아서 내려가면서 찾아가다 보면 결국은 계곡 밑에까지 내려가는데, 계곡 밑에 가면 결국은 굶어 죽는다는 거예요.

지금은 편안하지만 죽는 길을 찾아가는 법, 지금은 고달프지만 사는 길을 찾아가는 법, 그래서 값을 매길 때 상향성 양을 크게 쳐주다는 것입니다. 양 한 마리의 가격도 미래를 보고서 가격을 정하는 그 히말라야 고산족들을 보면서 우리는 큰 교훈을 얻습니다.

우리 성도들의 삶의 모습이 어떤 것입니까? 독수리는 성경의 여러 부분에서 성도들의 이미지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주를 앙모하는 자 올라가, 달려가, 이것은 상향성의 삶을 의미하는 이미지입니다.

내려가는 것이 아니고, 편하다고 지금 내려가는 것이 아니라 달려가는 것입니다. 올라가는 것입니다. 주님을 향해서 앙모하는 삶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써 의의 병기로 쓰임받는 삶의 이미지는 올라가는 모습인 줄 믿습니다.

지금 편하다고 쉬운 길로 내려가는 하향성의 그런 삶을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지요. 여러분, 주님의 일 하는 것도 열심히 하는 사람은 쉴 틈이 없어요. 안스러울 때도 있지만, 그들을 보면 언제나 영적으로 건강하고, 육체적으로 건강합니다.

의학자들이 통계를 내는데 자녀를 5명 이상 키운 부모는 정신병에 드는 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자녀를 키우는 일에 온 힘을 다 기울이기 때문에 그 부모가 병들 틈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녀를 한 두명씩 키우는 부모들은 여러 가지 병에 시달린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주님의 일을 하는 일에도, 주님의 자녀로써 사는 일에도 생각해 보면 정말로 빈틈이 없이 쉴 틈이 없이 우리의 삶이 분주하지만, 주의 일에 분주한 성도의 삶의 특징 중에 하나는 건강하다는 것입니다. 영과 육이 건강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직장생활도 그냥 하루 그냥 원없이 잠 한 번 자 봤으면 좋겠다 싶지만 여러분 명예퇴직을 당하고 하루 종일 구들장 지고 잠 잔다고 생각을 해 보세요. 그것은 한 두 번 해 볼 만한 일이지, 그것은 2- 3일 밖에 못하는 일이거든요. 출근하는 사람이 얼마나 부럽고, 일하면서 바쁘다 바뻐 하는 것이 얼마나 부러운지 모르는 거예요.

우리에게 노동을 우리에게 직장을, 일터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입으로는 쉬었으면 하지만 그러나 우리가 일 할 수 있고, 출근할 수 있는 직장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이지 몰라요.

우리가 하나님의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주님의 일에 분주하다고 말하지만, 바쁘다고 말하지만, 하나님이 나를 필요로 하시고, 교회가 나를 필요로 해서 이 모양, 저 모양으로 나를 요청할 때에 얼마나 감사할 일인지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필요로 하실 때 귀하게 쓰임받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세상에 영적 전쟁의 현장에서 나를 의의 병기로 쓰시겠다고 할 때 주님 내가 무장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전신갑주로 무장되어 있으니 나를 필요하시는데 사용하세요. 언제나 부르심에 응답할 수 있는 준비된 의의 병기로 여러분들이 살아가실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막상 쓰려고 하니까 2차 세계대전 때 사용하던 거라 실탄이 나가지도 않아요. 불발탄만 터지는 거예요. 맨날 외양적으로 그럴 듯 하지만, 사진 찍으면 괜찮아 보이지만, 써 보려고 하면 아닌 그런 우리의 모습이어서는 곤란합니다.

하나님 나로 하여금 이 시대에, 21세기에 하나님의 거룩한, 하나님의 의의 병기로 하나님의 쓰실만한 의의 병기로 강력한 힘을 가진 의의 병기로 하나님, 이 종을 사용하여 주옵소서. 평안의 온 성도들이 하나님의 의의 병기로 쓰임 받기에 부족함이 없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이제는 너희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너의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자비하신 하나님, 전에는 우리가 여러 모양으로 사용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일에 우리의 지체가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을 고통을 주고, 상처를 주는 일에 쓰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회개하며 돌이켜 하나님 앞에 의의 병기로 사용되길 원합니다. 붙잡아 주고, 세워주고, 바른 길로 인도하는 길에 저희들이 쓰여지길 원합니다. 주님, 의의 병기로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도구로 사용되기를 원합니다. 말씀 속에 다짐을 주시고, 말씀 가운데 용기를 주셔서 이 세상 하나님의 거룩하고 귀한 의의 병기로 우리 평안의 모든 성도들이 사용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황요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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