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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믿는 사람이 많으니 (행 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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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이 홀로 광야로 들어가서, 하룻길을 더 걸어 어떤 로뎀 나무 아래로 가서, 거기에 앉아서, 죽기를 간청하며 기도합니다.
“주님, 이제는 더 바랄 것이 없습니다. 나의 목숨을 거두어 주십시오. 나는 내 조상보다 조금도 나을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불과 몇 시간 전까지만 하더라도 바알 선지자 400명과 갈멜산에서 대결해서 이기고 그들을 다 물리쳤던 선지자 엘리야라고 누가 생각할 수나 있겠습니까?
엘리야가 제단에 제물을 올려놓고 제물과 제단 주위에 물을 가득히 부어 적신 다음 앞으로 나서서, 이렇게 기도합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을 돌보신 주 하나님, 주님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시고, 나는 주의 종이며, 내가 오직 주의 말씀대로만 이 모든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오늘 저들이 알게 하여 주십시오. 주님, 응답하여 주십시오. 응답하여 주십시오. 이 백성으로 하여금, 주님이 주 하나님이시며, 그들의 마음을 돌이키게 하시는 주님이심을 알게 하여 주십시오.”
그러자 주의 불이 떨어져서, 제물과 나뭇단과 돌들과 흙을 태웠고, 도랑 안에 있는 물을 모두 말려 버렸습니다. 온 백성이 이것을 보고, 땅에 엎드려서 말합니다.
“그분이 주 하나님이시다! 그분이 주 하나님이시다!”
엘리야가 그들에게 말합니다.
“바알의 예언자들을 잡아라. 한 사람도 도망가게 해서는 안 된다.”
백성은 곧 그들을 사로잡았고, 엘리야는 그들을 데리고 기손 강 가로 내려가서, 그들을 모두 죽입니다. 그리고는 엘리야가 아합에게 말합니다.
“빗소리가 크게 들리니, 이제는 돌아가셔서, 음식을 드십시오.”
아합은 돌아가서, 음식을 들고 엘리야는 갈멜산 꼭대기로 올라가서, 땅을 바라보며 몸을 굽히고, 그의 얼굴을 무릎 사이에 넣었습니다. 그리고는 그의 시종에게, 올라가서 바다 쪽을 살펴보라고 합니다. 시종은 올라가서 보고 와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엘리야가 다시 그의 시종에게, 일곱 번을 그렇게 더 다녀오라고 합니다. 일곱 번째가 되었을 때에, 그 시종은 마침내, 사람의 손바닥만한 구름이 바다에서부터 떠올라오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엘리야는 아합에게 사람을 보내어서, 비가 와서 길이 막히기 전에 어서 병거를 갖추고 내려가라는 말을 전합니다. 그러는 동안에, 이미 하늘은 짙은 구름으로 캄캄해지고, 바람이 일더니, 곧 큰 비가 퍼붓기 시작합니다.
궁으로 돌아간 아합 왕이 엘리야가 한 모든 일과, 그가 칼로 모든 예언자들을 죽인 일을, 낱낱이 왕비 이세벨에게 알려 주자 이세벨은 엘리야에게 심부름꾼을 보내어 말합니다.
“네가 예언자들을 죽였으니, 나도 너를 죽이겠다. 내가 내일 이맘때까지 너를 죽이지 못하면, 신들에게서 천벌을 달게 받겠다.”
이 소리를 듣고 엘리야는 두려워서 급히 일어나, 목숨을 살리려고 도망하여, 유다의 브엘세바로 갑니다. 그 곳에 자기 시종을 남겨 두고, 자신은 홀로 광야로 들어가서, 하룻길을 더 걸어 어떤 로뎀 나무 아래로 가서, 거기에 앉아서, 죽기를 간청하며 기도하였던 것입니다.
놀라운 역사의 주인공이었던 엘리야가 갑자기 이렇게 약한 사람으로 바뀐 이유가 무엇입니까?

먼저 생각할 것은 우리는 결코 고난과 약함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요 고난 뒤에는 반드시 놀라운 은혜와 복이 따라온다는 것입니다.
엘리야가 당당하게 바알 선지자와 맞섰던 것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비록 자기는 혼자이지만 사실은 살아계신 하나님이 함께 계심을 믿었기에 그토록 당당하게 바알 선지자와 함께 맞설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토록 놀라운 역사를 일으켰던 장본인이 그래 왕비 이세벨이 사자를 보내어 “너를 반드시 죽여 버리겠다”는 말을 전하자 갑자기 이렇게 약해지더란 말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달라졌습니까? 달라진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단지 죽여 버리겠다는 말을 들었을 뿐입니다. 지금까지 결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엘리야였는데 새삼스럽게 무엇이 두려워서 죽임을 당하기보다는 스스로 죽기를 기도하고 있단 말입니까?

우리가 살아가면서 이렇게 그냥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어떤 미묘한 감정이 우리를 사로잡을 때가 있습니다. 말 한 마디로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할 수 있다는 것이 그래서 나오는 것입니다. 달라진 것은 단 하나, 죽이겠다는 말을 전해들은 것밖엔 없습니다. 그런데도 이렇게 약해질 수 있는 것이 우리의 마음입니다. 그렇다고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사라진 것일까요? 그건 아닙니다. 그래서 무엇보다도 지킬 것은 우리의 마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믿음이 변함이 없을 때 그 누구로부터 어떤 말을 들어도 흔들림이 없습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별 것 아닌 말 한 마디 때문에 우리가 깊은 좌절의 수렁으로 빠져들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들어야 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인 것이요 우리가 보아야 하는 것은 우리와 함께 계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아름다운 문” 앞에 앉아서 구걸하던 걸인, 날 때부터 한 번도 걸어본 적이 없는 사람을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걷게 한 놀라운 일이 벌어진 다음 모여든 사람들 앞에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는 베드로와 요한을 잡으려고 제사장들과 성전 수위대장과 사두개파 사람들이 몰려왔습니다. 그들은 사도들이 사람들을 가르치는 것과, 예수의 부활을 내세워 죽은 사람들의 부활을 선포하고 있는 것에 격분해서, 사도들을 붙잡았으나, 날이 이미 저물었으므로, 다음날까지 가두어 두었습니다.

한 마디로 기적의 현장입니다. 그리고 그 기적이 어떻게 일어난 것인지를 설명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증거했습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하나님께로부터 상급이 주어져야 마땅한데 오히려 저들이 붙들려 감옥에 갇히게 되는 일이 벌어집니다. 아니 도대체 좋은 일을 했으면 칭찬이나 상을 주지는 못할망정 오히려 감옥에 데려다 가두다니요?
이게 인생입니다. 이것이 믿음 안에 삶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주를 위해 충성하고 온 몸과 마음을 다해 헌신하고자 할 때 당연히 은혜와 상급이 우리 앞에 펼쳐질 것으로 우리는 기대를 합니다. 그런데 상급보다 먼저 우리에게 오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믿음을 시험하는 고난입니다.

베드로가 풍랑 가운데 물 위로 걸어오시는 주님을 보고 “정말 주님이시면 저로 명하여 물 위로 걷게 하여 주십시오” 하고 청하니 주님께서 물 위로 걸어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물 위로 걸어가는데 그렇다면 주님 앞까지 당당하게 계속해서 걸어야 하는데 그만 눈앞에 풍랑이 몰아닥치더란 말입니다. 그래서 금방 겁에 질려 물속으로 빠져 들어가고 맙니다. 하지만 그래서 베드로가 물에 빠져 죽었던가요? 아니죠? 주님이 그 손을 잡아 주십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힘써 수고하는 모든 일에 아름다운 상급이 따른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잘 압니다. 하지만 상급보다 앞서 먼저 우리 앞에 고난의 현장이 펼쳐지더란 말입니다.
한참 수고합니다. 열심을 냅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힘이 쫙 빠져버리고 맙니다. 예배 시간이 몹시 기다려지고 그렇게 즐겁고 했는데 어느 순간 괜히 예배에 빠지고 싶은 마음이 들고 예배에 참석하여서도 아무런 감동도 없는 일이 벌어집니다. 방언을 받고 신이 나서 기도를 하였더랬는데 어느 순간 기도하기가 싫어집니다. 어떤 직분을 맡아 신도 나고 정말 열심히 해 보려고 했는데 어느 순간 정말 내가 이 일을 하기에 합당한 사람인가 하는 마음이 들어 그냥 다 내려놓고 도망치고만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런 일들이 그냥 생기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는 나도 모르게 내게 들려진 어떤 상처 되는 말들이 있고 내게 보여진 상처 되는 일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앞서서 수고하는 이들을 끊임없이 격려해주고 붙잡아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거기서 머물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런 과정이 바로 우리가 반드시 통과해야 할 은혜와 믿음과 사랑으로 나가는 통로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을 다시 보십시오. 베드로와 요한이 아직도 사람들에게 말하고 있는데, 제사장들과 성전 수위대장과 사두개파 사람들이 몰려오지를 않습니까? 저들이 와서 “야 정말 신기한 일이다. 어쩌면 이런 놀라운 일이 생길 수 있을까? 우리도 함께 들어보자”라고 했습니까? 아닙니다. 그들은 사도들이 사람들을 가르치는 것과, 예수의 부활을 내세워 죽은 사람들의 부활을 선포하고 있는 것에 격분해서, 사도들을 붙잡습니다. 아니 사도들이 사람들을 가르치는 것과 예수의 부활을 내세워 죽은 사람들의 부활을 선포하는 것이 뭐가 어때서 그들이 그토록 격분해서 체포를 하느냔 말입니다. 그것도 하나님을 앞장서서 믿는 제사장과 성전 수위대장과 사두개파 사람들이 말입니다. 물론 사두개파 사람들이야 원래 죽은 자의 부활을 믿지 않으니 그렇다고 쳐도 제사장들을 달라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오히려 부활을 전한다고 사도들을 체포하다니요? 아니 저들이 그렇게 체포되기 전에 하나님이 저들의 마음을 바꿔 주실 수도 있지가 않나요?
그래서 우리가 기억할 것은 우리가 주를 위해서 충성하고자 할 때 그 모든 어려움과 핍박들이 세상으로부터만 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니 누구보다도 가장 가까운 사람들, 앞장서서 같이 주님께 헌신하고 충성하던 사람들이 우리의 마음에 상처를 주고 우리로 하여금 힘이 빠지고 주저앉게 만드는 장본인이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아니 지금 이 자리에서 말씀을 전하는 하나님의 종 된 제가 여러분들의 마음을 상하게 만들고 힘이 빠지게 만드는 당사자일 수도 있습니다. 저의 말이나 어떤 행동이 여러분들의 마음을 상하게 만들 수 있고 여러분들로 힘이 쏙 빠지게 만들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를 위해 여러분들이 끊임없이 기도해 주시기를 부탁을 드립니다.

어쨌든 가장 가까운 분들, 믿음에 관한 한 앞서 있는 분들, 열심을 내어 충성하는 분들, 아니 함께 믿음 안에 있는 부부임에도 불구하고, 이 모두가 다 나의 마음에 상처를 줄 수 있고 나로 하여금 깊은 수렁에 빠지게 만드는 당사자가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지킬 필요가 있고 어떤 경우에도 우리의 믿음이 흔들리지 않도록 주님만 바라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 모두는 앞서서 수고하는 모든 분들은 볼 때 그들 마음에 상처가 되지 않도록 말 한 마디를 해도 힘이 될 수 있는 말들을 전해줄 수 있어야 하고 모든 것을 긍정적인 눈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왜 그래야 합니까?
보십시오. 제사장들이나 성전 수위대장 그리고 사두개인들은 자기들의 생각에 사도들의 가르치는 것이 옳지 않다고 보았습니다. 즉 보는 관점이 달랐습니다. 그들이 믿는 바와 사도들의 가르치는 것이 다르기에 그들 입장에서는 이건 아니라고 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한데 사도들의 가르침이 틀렸습니까? 아닙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믿음의 눈으로 보지 못했다고 해서 그들만을 나무라기보다는 그들이 바른 믿음으로 볼 수 있도록 기도해 줄 필요도 있습니다. 아울러 내 생각과 상대방의 입장이 다르다고 하더라도 그 다른 것도 받아들여 줄 수 있는 넓은 마음을 우리는 가질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또 하나 생각해야 할 것은 고난과 시련이 있다고 해서 낙심할 이유가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 보십시오. 비록 베드로와 요한이 사람들을 가르치는 것과, 예수의 부활을 내세워 죽은 사람들의 부활을 선포하고 있는 것에 격분해서, 제사장들과 성전 수위대장과 사두개인들이 몰려와서 사도들을 붙잡습니다. 하지만 비록 사도들은 그래서 감옥에 갇혔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들의 말을 들은 사람들 가운데서 믿는 사람이 많으니, 남자 어른의 수가 약 오천 명이나 되었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진리입니다. 비록 사람들은 매이고 갇힐지 몰라도 하나님의 말씀은 결코 매이거나 갇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아무리 핍박이 닥쳐오고 시련이 닥쳐와도 그래서 우리 마음은 낙심이 되고 깊은 수렁에 빠질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은 여전히 놀랍도록 역사하더란 말입니다. 사도들이 감옥에 갇힌 것만을 가지고 생각한다면 이게 뭐냐고 할지 몰라도 보십시오 그들의 말을 들고 믿는 사람이 남자 어른의 수만도 약 오천 명이나 되었다고 하지를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복음을 전해야 하는 것이요 어떤 상처될 일이 있어도 낙심할 이유가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목요일마다 나가서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복음을 전해서 예수를 구주로 영접을 해 놓고도 교회에 나오지를 않고 있는 사람들을 봅니다. 아니 교회에 나오기는 하는데 향남교회가 아닌 다른 교회에 가서 등록을 하는 분들도 봅니다. 그럴 때 힘이 빠질 수 있습니다. 낙심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생각을 바꾸십시오. 오히려 그들이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고 주님의 품에 안긴 것으로 우리는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수고에는 반드시 아름다운 하나님의 은혜와 상급이 따를 줄로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우리가 수고하는 모든 일에 어떤 훼방거리가 생기고 힘이 빠지고 낙심될 일이 있다고 해도 누가 나를 비난하고 욕하고 시비한다고 해도 거기서 주저앉지 말아야 합니다. 물론 당장의 모습만 본다면 이렇게 열심을 내고 수고하는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고 할 수도 있습니다. 내 자신이 너무도 비참하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아닙니다. 거기에 속지 마십시오. 우리가 그러한 상황에 매이지만 않는다면 다시 말해서 여전히 변함없이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주님만 바라보고 우리의 생각과 믿음에 흔들림이 없어야 하는 이유는 그런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역사는 계속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잘못했다면 당연히 욕을 먹어야 하겠죠. 하지만 잘못한 것도 없는데 비난이 돌아올 때 얼마나 마음이 힘들겠습니까? 또한 열심 내어 수고하는데 삶은 더 피곤하기만 하고 힘든 일만 생길 때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하지만 그게 바로 사단이 노리는 바입니다. 거기서 주저앉게 만들려고 하는 것이 바로 사단의 전술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나를 주저앉게 만드는 사단에게 속지 말고 나를 향해서 손을 내밀어주시는 주님을 바라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나를 위해 십자가에 죽어주셨던 주님이 다시 부활하시어서 무어라고 하셨습니까? “너희에게 평강이 있으라”고 하셨지를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마음에 평강을 잃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또 서로의 평강을 지켜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주님이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으로 채우신다고 하시지를 않았습니까?

기억하십시오. 아무리 고난이 우리 앞을 가로막는다고 해도 복음의 역사는 놀랍도록 일어나는 것입니다. 비록 제자들이 체포되어 감옥에 갇혔어도 그들이 외쳤던 말씀은 오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믿고 돌아오게 만들었지 않습니까? 오늘 향남교회와 우리들의 삶 속에도 이런 귀한 역사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지금 우리들은 귀한 생명을 건져 구원하기 위해서 그들을 우리 마음에 품었습니다. 이미 그들을 만나 예수 그리스도를 전해 주기도 하고 또 전하려고 준비를 하고 계실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수고를 할 때 좋은 일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마음에 상처가 될 일들도 있습니다. 산다는 것이 정말 힘들게 느껴지도록 그렇게 우리 삶이 어려움에 부딪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거기에 조금도 흔들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누가 무어라고 해도 거기에 주눅 들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삶이 힘들다고 해서 또한 주저앉지 마십시오. 오히려 힘들기에 마음이 아프기에 더욱 복음의 산 증인이 되도록 하십시오. 우리의 삶이 우리를 힘들게 합니까? 주님만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고난의 뒤를 따라오는 영광과 충만한 은혜와 넘치는 복을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담대하게 증인된 삶을 살아가십시오. 그래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놀라운 산 증인된 삶을 사실 뿐 아니라 초대교회처럼 우리 향남교회도 이렇게 믿음의 사람들이 넘쳐나게 되는 귀한 역사가 있기를, 그리고 이 역사의 중심에 우리 모두가 함께 서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홍인덕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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