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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주일] 십자가 흔적(痕跡)이 있는 부활 (요 20:1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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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예수께서 또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열 두 제자 중에 하나인 디두모라 하는 도마는 예수 오셨을 때에 함께 있지 아니한지라.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가로되 내가 그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하시고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도마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 되도다 하시니라."

오늘 봉독해 드린 요한복음 본문에 보면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두 손과 옆구리를 보여 주셨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보지 못한 ‘도마(Tomas)’는 그의 눈으로 직접 그 손의 못 자국을 보고 옆구리의 창으로 찔린 자국을 손으로 만져보기를 원하였는데 본문 26절 말씀을 보면 다시 나타나신 주님께서 도마(Tomas)의 욕구(欲求·慾求)를 충족시켜 주셨습니다. 주님의 부활하심을 의심하던 도마였으나 주님의 십자가 흔적(痕跡)인 못 자국과 창자국을 확인한 후 믿게 된 것입니다(요 20:24). 그 때 도마는 즉시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이라고 신앙고백(信仰告白)을하였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분명히 변화되신 분이었습니다. 19절 말씀을 보면 '제자들이 문을 모두 잠그고 있었고 아무도 출입문을 열어주지 않았는데 예수님은 제자들 가운데 나타나셨다.'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단순한 인간의 몸을 가지신 분이 아니라 변화된 몸을 가지고 계심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26절에 예수님께서 <'자신의 손과 옆구리를 보이셨다.'>는 것은 거기에 십자가에서 당하신 고난의 흔적을 가지고 계심을 보이시기 위하여 제자들에게 확인시켜 주셨다는 사실을 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육체가 부활하여 변화되었다면 못자국도 또 창에 찔린 상처도 모두 없어지고, 새 몸이 되었을 것이지만, 요한복음 기자는 예수님께서 당시 제자들에게 십자에서 가지신 상처 흔적 그대로 ‘못 박히고, 창에 찔리신 상처 자국’을 가지고 나타나셨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본문에서 지금까지 ‘도마(Tomas)의 불신앙’에만 주목해 온 것이 사릴입니다만, 복음서 기자가 관심을 둔 것은 그것이 아니라 바로 그의 불신앙을 통해서 부활하신 주님을 바로 알리려는데 목적이 있었음을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던 예수님은 환상을 본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죽으셨던 바로 그 분임을 강조하고, 동시에 도마의 신앙고백을 빌어 요한복음의 중요한 참 인간이시지만 하나됨 되심을 절정으로 삼고자 하는 데 목적이 있었슴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사실 갈릴리 출신의 어부였던 ‘도마(Tomas)’는 열정적이면서도 이성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충성된 마음으로 헌신하기로 작정한 도마(Tomas)'는 예수님을 위해서라면 어떠한 위험이라도 감수할 각오가 되어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뜨겁게 사랑하였던 도마(Tomas)는 예수님께서 병든 나사로를 방문하시려고 할 때 다른 모든 제자들의 반대에 맞서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고 선언할 만큼 ‘담대하고, 의리가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 하시는 예수님을 죽일 음모를 꾸미고 있는 유대 땅에 간다는 것은 곧 생명을 내놓는 행위였습니다.

이런 도마(Tomas)에 관한 기사를 기록한 요한복음의 저자의 의도는 '십자가와 부활'을 각각 다른 사건인 것으로 인식하려는 당시의 제자들을 위시한 모든 사람들의 오해를 없애고, 그것이 '하나의 사건임을 보여 주려 한' 의도가 분명하다는 사실입니다. 아니 성경을 읽고, 말씀을 듣는 미스바교회 성도 여러분들께서도 분명히 믿어야 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가 다시 살아나심으로 도마(Tomas) 뿐만 아니라 그 현장에서 십자가의 흔적(痕跡)을 확인한 제자들은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이 되신 것입니다. 동시에 이 시간 우리 성도들의 고백이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인 메시야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 하려는 것이 요한복음을 기록한 목적이었는데, 마지막 부분에서 분명히 그 목적을 확인시켜 주고 있습니다.

‘부활의 최초의 기록’이라고 볼 수 있는 ‘고린도전서 15장’에 보면, 사도 바울이 전해 받은 가장 중요한 신앙고백(信仰告白)을 적고 있습니다. "그것은 곧 그리스도께서 성경에 기록된 대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셨다는 것과 무덤에 묻히신 것과 성경에 기록된 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신 일입니다."라고 고전 15:3-4절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죄에서, 사망에서, 마귀, 사탄의 종된 자리에서, 영원한 하나님의 심판에서 구원해 주시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던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이 곧 복음입니다.' 따리사 사도들의 ‘설교 내용이 바로 십자가의 흔적(痕跡)을 가지신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메시야요, 구세주’라고 증언한 것입니다. 제자들이 그냥 부활의 주님을 전한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주님, 그분은 죄가 없으신 여자의 후손, 하난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인류를 구원하러 오신 메시야'임을 전파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와 부활은 별개의 것이 아니라 <구원의 역사에 있어서 분명한 하나의 사건>임을 우리가 분명히 알고 믿음으로 고백할 때 우리의 신앙은 온전한 것이 될 수 있습니다. 할렐루야!

오늘 저는 이 시간 '십자가의 흔적(痕跡)이 있는 부활(본문 이해: Meaning & Significance)'에 대하여 말씀드리므로 다시 한 번 저와 여러분들의 신앙고백(信仰告白)이 되도록 성경말씀을 통해 확인(確認)시켜 드리려고 합니다.


1. 부활의 주님을 의심하던 제자들이 십자가 상처를 검증(檢證)함으로 과거에 그들이 따랐던 주님임을 확(確認)인하였습니다.

본문 19절 말씀에서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하신 말씀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즉 '샬롬'을 선언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그저 단순한 인사가 아니라 여러 가지 의미가 함축되어진 말씀이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십자가를 통하여 인간의 모든 죄를 대속하심으로 이룩된 평안'을 선언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라고 말씀하신 후에 본문 20절에서 '곧 손과 옆구리를 내어 보이셨다.'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셨던 분'임을 확인시켜 주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자신은 하나님께서 인류 역사에 개입하셔서 '공의로우심"으로 예수님께서 자신의 죄 때문에 십자가 처형을 받으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은 완전한 죄 없는 인간이며, 메시야 되심을 증몀해 주신 것입니다. 즉, 죄인은 그 죄값으로 사망에 이르지만 죄가 없으신 예수님께서 그 죽음의 권세를 깨트리고, 다시 살아 부활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 사실을 믿지 못한 제자들에게 부활하시되 십자가 흔적을 보이시기 위해 찾아오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와 부활이 동시에 제자들 앞에 펼쳐지면서 그가 이 땅에 오신 의미를 알려준 엄청나고, 놀라운 순간'이었습니다. 할렐루야!


그러므로 십자가를 통해서 인간을 얽어매던 모든 죄가 대속되었고, 따라서 '죄로 말미암아 사망과 심판에 이르게 됨으로 신음하던 모든 인간에게 죄사함과 사탄과 마귀로 부터의 영원한 자유와 해방의 확인을 준 부활로 평강이'이 찾아오게 되었으며,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과 공포가 살아지게' 된 것입니다. 믿습니까? <아멘!>

십자가 흔적(痕跡)이 있는 부활을 통해서 '예수그리스도가 메시야요.', 예수님은 '창세기 3장 15절에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인류의 구세주로 오신 여자의 후손이요'. '하나님의 아들이요', '완전한 죄 없으신 인간이며,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인간의 역사의 현장에 찾아오신 하나님 되심'이 사실로 입증(立證)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자들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참된 평'안이 이루어지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주님은 제자들에게 오셔서 바로 이렇게 이룩된 평안을 제자들에게 선언하신 것입니다. 모인 집의 문을 모두 잠그고 있어야 할 만큼 ‘불안과 공포에 떨던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이제 그 모든 '불안에서 벗어나 평안을 갖도록 찾아와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고, 평화를 가져온 것이지만 그러나 ‘부활이 있기 전에는 제자들에게 그 십자가는 여전히 공포의 대상이요, 패배의 상징’이었을 뿐입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모습으로 저들 앞에 찾아 오심으로 ?'십자가는 분명하게 평안'으로 받아 드려졌습니다. 이제 더 이상 '십자가는 공포의 대상이 아니라 그것은 구원과 평화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할렐루야!

오늘 우리의 상황도 마찬가지 입니다. 신앙을 가졌으나 다락방에 모여 문들 모두 잠그고, 숨어있던 제자들이 상황과 비슷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우리는 국가적으로 오늘 우리를 위협해 오는 남. 북간의 문제, 주변국 일본과의 독도문제와 관련된 외교적 어려움뿐만 아니라 정치적인 불안과 경제적인 위기, 최근의 고 유가와 환률하락으로 인한 어려움, 그리고 자연의 오염 등으로 중국에서 날아오는 황사 등을 포함하여 예기치 않은 천재지변 등 갖가지 요인들로 인하여 불안과 공포에 휩싸여 믿음을 가졌으나 전전긍긍하며, 좌절하며, 어찌할 바를 몰라 두려움에 살아갈 때가 종종 있습니다.

또한 개인적인 문제, 사업의 문제, 직장의 문제, 가정의 문제, 자녀의 문제와 위기뿐만 아니라 불의한 세력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처럼 오늘도 불의한 세력들이 진리를 왜곡하고, 정의를 핍박하며, 의로운 백성들을 십자가에 못 박고 있는 것을 보면서 한편으로 울분을 가지며, 한편으로는 두려움을 느끼고 살아갑니다.

심지어 조그만한 어려움에 봉착할 때 우리는 탄식하면서 ‘왜 하나님은 신앙으로 사는 나에게 십자가와 같은 고통을 주십니까?’라며 항변을 하는 어리석음을 가지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에 불의한 세력들을 다 몰아내고 속히 의로운 사회, 참 평화를 이룩한 나라를 허락하시지 않는가라고 호소를 하게 됩니다.

그러나 제자들이 그렇게 무서워서 도망가 숨어있는 그 순간에 <예수님의 십자가에서는 인간을 꽁꽁 얽어매던 죄의 사슬이 끊어지고 있었습니다. 인간을 지배하던 악마의 세력이 패배를 당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제자들이 꼭꼭 문을 잠그고 숨어있는 동안 <예수님의 무덤에서는 부활의 역사가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인 이 귀한 진리를 발견하고 돌아가시기 바랍니다. 오늘 내가 불안에 떨고 있는 이 순간이 바로 진리의 역사가 승리하고 있는 순간이며, 죽었던 의의 세력들이 부활하고 있는 순간이며, 하나님의 간섭과 도우심이 나에게 진행되고 있는 순간임을 확실히 믿으시기 바랍니다.<아멘>

그러나 중요한 것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직접 나타나셔서 '손과 옆구리를 보여 주시며, 샬롬을 선언해 주심으로 비로소 제자들이 그 공포에서 해방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당하고 있는 불안과 공포에서 해방되는 길은 부활의 주님을 만나야 해결됩니다.> 부활의 역사를 오늘 내가 체험하고, 모든 불의들이 깨어지는 모습들을 영의 눈으로 볼 수 있을 때 우리는 '샬롬'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못 자국을 가지신 부활의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므로 오늘의 고난과 아픔들은 그것이 결코 최후가 아니며, 오히려 진리가 승리하고, 의가 실현되고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고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십자가 흔적인 못 자국을 가지고 계시며, 부활하신 주님이 오늘 우리 앞에 서 계시면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라고 하시는 그 모습을 날마다 뵈올 때 우리는 <불안과 공포 대신에 기쁨과 용기>를 가지게 될 것입니다. 십자가의 흔적을 가지시고, 부활하신 주님을 날마다 교회에서 만나시기 바랍니다. 설교를 듣고, 성경을 읽고, 기도하고, 묵상하다가 만나시기 바랍니다. 믿음의 눈으로 만나시기고 평강을 누리시기를 복 빌어 드립니다.


2. 도마(Tomas)에게도 변화(變化)가 일어났습니다.


십자가의 흔적(痕跡)을 가진 부활의 주님을 만났을 때 도마는 본문 28절에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이라고 분명한 신앙을 고백하였습니다. 다른 제자들 역시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그를 뵈옵기 전까지는 믿지를 않았습니다.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도마가 다른 제자들보다 의심이 더 많은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이런 설교를 듣고 '설마'라고 생각하십니까?

요한복음 14장에 예수님께서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너희가 알고 있다"라고 말씀하셨을 때 도마가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주님,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도 우리가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겠습니까?" 다른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이 무엇을 뜻하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어도 그저 듣고만 있었는데, 도마만은 그대로 있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솔직히 “모른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는 분명하게 알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저에게 대답하여 주셨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무도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도마가 그 제자들보다 의심이 더 많았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부활의 사건에 있어서도 도마는 다른 제자들과 달랐습니다. 그는 유독 예수님의 '못자국과 창에 찔린 자리'를 확인하고 싶어 했습니다. 도마의 관심사는 그들 앞에 나타나신 주님이 과연 그들과 함께 갈릴리 해변을 거니시던 그 예수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면서 처절하게 십지가 위에서 일곱마디를 남기시며, 부르짖으시던 그 예수님이 부활한 분인지를 확인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만일 그 분이 갈보리의 인간 예수와는 전혀 다른, 다만 신적인 환영(幻影)에 지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별로 의미 없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평화를 이야기 하고, 죄사하는 권세를 주시는 부활하신 주님은 필연코 십자가에 달리신 바로 그 분이어야 한다.’는 생각이 도마에게 분명히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만일 그의 죽음이 살아계신 주님이 아니시라면, 우리는 또 다시 헛된 꿈 때문에 큰 실망을 맛보게 될 것이 아닌가?’ 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만약 도마가 이와 같은 생각에서 행동했다면 도마는 단순히 의심 많은 제자로서의 낙인되어 말하여 왔지만 저는 오히려 사려 깊은 '신학자'로서 존경받아야 마땅하다고 말씀드립니다.

예수님께서 도마를 위해서 특별히 다시 나타나 ‘도마의 생각대로 손과 옆구리를 만져보도록 허락’하셨습니다. 이 짧은 기사 속에 ‘손과 옆구리가 세 번’이나 언급된다는 것은 그것이 갖고 있는 의미가 이미 말씀드리고 강조한 것처럼 크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도마(Tomas)는 확인 후 즉시 예수님께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이라고 신앙을 고백하였습니다. 도마(Tomas)의 이 신앙고백적인 대답은, 그가 <골고다(Golgotha)의 예수와 부활의 그리스도가 완전히 같은 분>임을 확인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었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 바로 이 십자가에 못 박힌 흔적을 가지고 계신 분이기에 그는 나의 주님이시고, 나의 하나님이 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한복음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을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하게 하려고 기록된 한> 것입니다. 오늘의 역사 속에서 <십자가의 신학과 영광의 신학을 함께 지켜 나갈 때 우리에게 복>이 있는 것입니다.

도마는 당시에 직접 자기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지만, 2,00년 역사가 지난 신앙을 가진 우리는 그렇게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오늘 우리가 부활의 주님을 직접 뵈옵지는 못한다 할지라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나와 인류 의 죄 때문에 죽으신 세상죄를 짊어진 속죄 제물되신 분이시요, 그리고 무덤에서 3일 만에 살아나신 분임을 믿을 때 나도 구원받으며, 영생의 부활에 동참하는 복을 받게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복음 안에 간직된 이 두 가지 사건 곧 ‘십자가와 부활’이 서로 떨어져 나갈 위험 속에 살고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십자가의 고난만을 강조하는 행동주의자들이 있는가 하면, 또 한편으로는 축복만을 간구하면서 영광만을 좇는 열광적인 신자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두 가지 다 바람직스러운 것이 못됩니다. 신약성경에서 결코 '십자가의 엄격성'을 낮게 평가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신약성경은 항상 '수난의 금요일'을 '부활의 날의 조명'에 의해 <구원의 완성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또한 고난을 통한 대속을 부활의 권능으로 완성하여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과 진정한 교제를 항상 연결 짓고 있습니다. 신약성경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예수 그리스도를 "고난 받는 종이시며, 동시에 영광을 받으시는 메시아"이시기에 구원의 길, 하나님과의 참된 관계회복이 이루어 졌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고난 없는 영광은 가치가 없고, 천박한 것이며, 영광 없는 고난은 수고와 고통은 있었지만 무의미한 것입니다. 따라서 고난과 영광이 함께 연결될 때 고난도 영광도 의미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도마의 고백이자 우리가 고백해야 할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이라고 우리가 고백하는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 고난의 흔적을 가지신 주님이십니다. 그렇자면 이제 이런 신앙고백을 하는 교회들은 오늘의 고난에 동참하여 이 역사 속에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기를 힘써야 할 것입니다. 동시에 이 고난 받는 역사에 부활의 소망을 전파하므로 이 고난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용기와 믿음을 불러 일으켜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미스바교회 성도 여러분! 우리가 믿는 주님은 못 자국을 가지신 부활의 주님이십니다. 고난 받는 종으로서의 예수요, 부활하여 영광 받으신 그리스도이십니다.

그가 고난 받으심으로 우리가 죄 사함과 의로움을 받았고, 그가 부활하심으로 우리가 기쁨과 소망과 영생과 천국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부활하신 주님과 더불어 영광 받을 자리에 오를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었습니다. 그러기에 이제 ‘용기’와 ‘희망’과 ‘사랑’과 ‘소망’을 가지고, 이 고난의 역사를 극복해 갑시다. 더 이상 고난은 우리를 짓누르는 무거운 짐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를 위협하는 공포가 될 수 없습니다.

이제 담대하게 불의와 맞서며, 부활하신 주님의 증인이요, 진리의 파수를 위해 헌신할 때가 된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오늘도 우리 곁에 계시면서 우리에게 십자가에 못 박히심으로 이룩하신 참 평강을 우리에게 주심으로 오늘의 상황이 어떻게 변화해 간다고 해도 그 평화는 우리에게서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의 이 뒤끓는 역사 속에서 주님이 주신 이 평화를 누리면서 용기와 믿음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해 가는 여러분의 생활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부활에 십자가의 흔적(痕跡)이 있다면?


3. 죽었다가 부활한 사람처럼 살아야 마땅합니다.

로마서 6장 8절에서 9절에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줄을 믿노니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사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고 하시고, 11절에 중요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자로 여길 지어다."라고 했습니다. "여긴다."는 말은 "마음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순간순간 "옛 사람은 죽고 새 사람으로 살았다."는 것을 인정하고, 고백하며 살라는 말씀입니다. 그렇게 될 때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이 우리의 생활 속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스펄젼(C.H. Spurgeon) 목사님>은 "당신은 살아서 주님이 재림하실 때 변화를 받겠느냐?, 죽었다가 부활 하겠느냐?" 어느 하나를 선택하라고 한다면 "죽었다가 부활하는 편을 택하겠다."고 하면서 예수님이 죽음을 거쳐 부활 하셨으니 자기는 예수님이 거치신 과정을 거치는 것이 더 좋겠다고 했습니다.

얼마나 확신에 찬 말입니까? 그리고 그는 "차라리 죽읍시다. 우리 대장 예수께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통과 하셨으니 부하된 우리들도 즐거이 따릅시다."라고 했습니다. 얼마나 확신(確信- 굳게 믿음. 확실히 믿음.)에 찬 말입니까?

반드시 죽음을 거쳐야 영광의 부활을 얻을 수 있는 것처럼 우리들도 지금 이 세상에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죽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할 때 우리 옛 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 난 것입니다. 그리고 장차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 우리의 육신도 부활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과거에 죽은 것처럼, 믿고, 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 것처럼, 믿고 현재의 삶을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삶 속에서 마치 과거에 죽어서 천국에 갔다가 지금 부활해서 돌아온 것처럼 살아야 된다는 말씀입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님을 믿고 술을 끊었는데도 퇴근하고 돌아올 때 한 술집 앞을 지나오게 되는데 그때마다 술 냄새가 코로 솔솔 들어와서는 들어가 한 잔 하고는 주일날 괴로워서 울며 회개하곤 했는데 "옛 사람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이제 나는 새 사람이다."라고 외우며, 그 술집 앞으로 지날때 무사히 유혹을 이길 수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와같이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에 대하여는 산자로 여길 지어다[로마서??6:11]."라고 하신 말씀을 명심하고 신앙생활에 적용하시기 바랍니다.


그뿐 아니라 모든 '가치관도 죽었다가 천국을 갔다 온 사람처럼 달라진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바로 그렇게 산 사람입니다. 고린도후서 12장 2절에 이하에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한 사람을 아노니 14년 전에 그가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자라."고 고백했습니다. 이것은 사도바울은 '세상을 분토와 같이 여기며' 살수가 있었고, '결혼도 하지 않은 채 복음만을 전하다가 담대해 순교'까지 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존전(尊前- 임금이나 높은 벼슬아치의 앞, 존경하는 사람의 앞.)에 설 때 나를 유혹하던 악의 세력도 벗어 버리며, 세상 것으로 아무리 찬양하여 늘 아쉽고, 세상에 대한 집착을 버릴 수 밖에 없고, 세상의 부귀영화가 아무리 좋다고 해도 하나님의 나라의 것과 족히 비교 할 수가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도 날마다 그리스도 안에서 나는 죽고, 내 속에 계신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산자 같이 살 수 밖에 없습니다.

육의 사람이 죽지 않고는 부활의 새 생명이 나타날 수가 없습니다. 죽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의 일에 아무 소용도 없는 것입니다. 죽지 않은 옛 사람은 아무리 잘나고, 지식이 많고, 착하고, 재주가 많아도 하나님께는 무가치한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죠지 뭘러 (George Muller)가 말하기를 "나는 어떤 날 죽었다. 죠지 뮐러에 대해서 죽고, 세상이나 친구들의 칭찬에 대해서 죽고, 책망에 대해서도 죽었다."고 했습니다. 죽은 사람은 욕을 해도 꼬집어도 모르고, 송곳으로 찔러도 모르는 것입니다. 우리 옛 사람이 죽었다는 믿음으로 살 때에 불쾌할 것도 없고, 실망할 것도, 억울할 것도 없는 것입니다. 칭찬을 듣는 다고 우쭐하고 교만할 것도 없고, 책망이나 비방을 듣는다고 실망하거나 불쾌할 것도 없습니다.

다 같이 한번 따라 합시다. "나는 십자가에서 죽었다. 황영복(자기 이름을 넣어서)은 이미 예수 믿는 그 순간 죽었다." 주님과 함께 죽은 '십자가의 흔적이 있어야 부활의 영광'에도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성공하거나 칭찬 들을 일이 있으면 주님께 감사하고 영광 돌리고, 불쾌한 일이나 근심스러운 일이 있으면 나와 함께 하신 주님께 맡기면 되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이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신앙 성숙의 극치를 바울은 고백했습니다.

그러므로 새 생명이 나타나는 생활은 믿음으로 옛 사람은 죽고 새 사람으로 다시 산 것 같이 살 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칭의'와 '구원'은 단번에 순간적으로 이루어져 변함이 없지만, '새 사람의 생활', 즉 '성화된 생활'은 믿음의 긴장 속에서 지속적으로 이루어져 나아가야 합니다. 아무리 <성화된 성도라도 옛 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는 믿음의 긴장이 풀어지면 죄악의 옛 성품이 다시 나타나게 마련입니다.> 육성이 죽지 않고, 깨어지지 않는데, 그 속에 든 영적 생명의 능력이 나타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죽음을 거쳐야 부활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할렐루야!

그러므로 로마서 6장 13절에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고 권고합니다. 여기서 "드리라"는 말은 "yield"(생산하다, 주다. 양도하다.)의 뜻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의식적으로 하나님께 맡기는 생활>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생활을 하였기에 갈라디아서 6:17절에 바울은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고 하였습니다.


미스바교회 성도 여러분! 주님을 위해 나를 얼마나 포기해 보셨습니까? 신앙 때문에, 사명 때문에 얼마나 손해를 보았습니까? 주님 때문에, 교회 때문에 얼마나 억울한 일을 당하고, 욕설을 얻어먹고, 매를 맞아보고, 조롱을 당해 보셨습니까? 하나님께서 나에게 맡겨주신 직분과 사명의 십자가를 지고, 힘들게 수고하고, 맡겨준 직분을 감당하기 위하여 얼마나 몸부림을 쳐 보았습니까? 감당하기 어려워도 주님을 따르기 위해, 주님께서 맡겨주신 귀한 사명에 최선을 다하기 위해 얼마나 애쓰며 살아보셨습니까?

저는 이 시간 성경을 근거하여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그런 성도만이 <예수님의 흔적(痕跡)>을 가질 수 있습니다. 순교까지는 못해도 주님을 위해 수고하고, 힘들어 하고, 아픔을 느끼고, 손해까지 자원해서 감당함으로 예수의 흔적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부활의 날에 주님께서 십자가의 흔적을 가지고, 내 손을 잡아 주실 때 나도 '십자가의 흔적'을 가진 모습으로 주님 앞에 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십자가의 흔적(痕跡)을 가진 신앙과 헌신과 충성으로 주님께 인정받고, 충성된 종으로 칭찬받는 미스바교회 모든 성도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진심으로 복 빌어 드립니다. 할렐루야! (황영복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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