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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너희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마 5:1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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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 로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예수님께서 서기관과 바리새인 보다 낫지 아니하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셨는데 ‘저는 한 가지 더 첨부해서 무슬림보다 낫지 못해도 천국에서 작은 자가 될 것이다.’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현재 우리나라를 포함해서 전 세계적으로 무슬림이 산불처럼 번져가고 있습니다. 반면 기독교는 점점 쇠락하여 가고 있습니다. 무슬림이 기독교국가에 들어가기만 하면 금방 기독교인들이 무슬림으로 개종을 한다고 합니다.

우리가 믿는 기독교는 아니지만 다른 신앙을 가진 사람들의 신앙생활을 우리의 신앙생활과 비교해 보면 느끼는 바가 많습니다. 이집트와 요르단 두 나라는 아랍국가입니다. 국민들의 대부분이 무슬림을 신봉하는 무슬림국가입니다. 우리는 흔히 무슬림이라고 하면 머리에 두건을 쓰고, 총을 잡고 테러를 일으키는 <알카에다나 빈 라덴>을 떠 올리게 됩니다. 얼마 전에 "인솰라"에 대한 설교, 즉, ‘신의 뜻을 찾는 민족’이 그들입니다.??빈 라덴‘도 테러를 신의 뜻인 거룩한 전쟁으로 잘못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불행인 것입니다.

사실 그들은 기독교를 적대하고, '예수님의 메시아 됨을 부정하는 사람들'입니다. 어떻게 하든지 이들을 개종을 시켜서 예수를 믿게 해야 할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많은 선교사들이 아랍지역으로 선교를 떠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들을 개종시키는 것이 말처럼 쉽지 않다는 이야기를 듣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무슬림에 대해서 알고 있는 상식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매스컴을 통해서 알고 있는 무슬림에 대한 것은 많은 부분 편견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무슬림의 경전 코란이 옳고 그르다는 것을 말씀드리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또한 그들이 믿는 신앙이 옳으냐? 그르냐는 것을 논외로 하고자 합니다. 이것은 신학적인 논쟁이 필요한 일입니다. 단지 이들이 어떻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가 하는 신앙생활의 방법, 또 그것을 지켜보면서 배우고 깨닫고 반성한 것을 함께 나누고자 하며, 본문의 뜻을 살펴보고자 합니다.(본문 이해: Meaning & Significance)

첫 째 ‘서기관’과 ‘바리새인’처럼 최소한 정기적인 기도생활을 하여야 합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최소한 기도생활을 본받아야 합니다. 그 유명한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에서 바리새인은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눅18:11-12)고 하였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자기를 자랑하는 의(義)가 포함된 기도의 내용은 잘못되었지만 <정기적인 기도 습관>은 당연히 본받아야 마땅합니다. 또한 무슬림들이 믿고 있는 '코란'에는 우리 기독교에서 믿고 있는 십계명과 같은 다섯 가지 계명이 있습니다. 그 중에 한 가지가 기도생활입니다.

초창기에는 ‘하루에 아홉 번은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최소한 다섯 번은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슬림'들이 예배를 드리는 곳을 '모스크'라고 합니다. 무슬 림은 20명만 모이면 모스크를 짓는다고 합니다. 모스크에 가서 하루에 다섯 번씩 기도합니다. 그러나 모스크에 갈 형편이 되지 않는 여행 중이거나 직장에서 일을 하는 경우는 코란을 30분씩 읽고 땅에 엎드려 기도합니다.

저는 그 모습을 보고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기도생활을 한번 생각해 보았습니다. 여러분은 기독교인으로서 하루에 몇 번 기도하십니까? 누가 보든지 말든지 혼자면 혼자, 둘이면 둘, 열이면 열이 모여서 메카가 있는 곳을 향하여 그들의 경전인 코란을 읽으면서 기도하는 무슬림들의 모습 앞에 부끄럽게 느껴본 적은 있습니까?

이집트는 성경의 ‘애굽’입니다. 마가복음을 기록한 마가는 사도바울을 따라다니면서 ‘애굽’에까지 가서 전도했습니다. 이집트사람들은 부활을 믿은 사람입니다. 영생을 믿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이 아는 대로 이집트의 ‘피라밋’은 죽은 왕이 언젠가는 다시 살아날 것을 믿고, 그 시체를 보관했던 것입니다. 마가는 이런 부활을 믿는 이집트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아 들인 예수가 죽었다가 다시 부활했다고 증거 했습니다. 이집트는 수천 년의 역사 가운데 그 엄청난 ‘피라밋’을 만드는 일을 하면서 왕의 부활을 기다렸던 민족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부활한 왕을 보지 못한 이집트 사람들은 <하나님의 아들이 죽었다 살아났다.>는 이야기를 듣고 복음을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이집트 백성들이 부활한 예수를 믿고 기독교인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몇 백 년 후에 무슬림이 들어 왔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기독교인들이 다 무슬림으로 바뀌어갔고, 지금은 기독교인들을 별로 찾아볼 수 없는 무슬림국가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렇다면 이 때 당시 이집트에 있던 교회들은 무엇을 한 것입니까? 이 사람들은 모여서 기도하는 대신 교리 논쟁을 했습니다. ‘예수님이 신성이냐?, 인성이냐?, 신성과 인성을 함께 가진 분이시냐?’ 하는 것으로 논쟁하고, 교리 싸움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기도생활을 잊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결국 하루에 다섯 번 기도하는 무슬림에게 정복당하고 말았습니다.

기도하지 않은 종교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유럽을 여행하다 보면 텅텅 비어있는 교회를 보게 됩니다. 왜 서구교회가 그렇게 되었을까요? 신학이 모자라서, 예배당을 제대로 짓지 못해서 일까요? 성직자들이 신통치 못한 것이었을까요? 서구 기독교가 쇠락 한 이유는 한가지입니다. 기도하지 않은 것입니다. 기도하지 않은 교회는 망하게 되어있습니다.

성도들에게 가장 기본 적인 것 가운데 "기도"를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성경 여러 곳에서 기도의 중요성을 강조 하고 있으며, 예수님께서도 친히 기도 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시기도 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주의 기도문’, 우리가 예배를 마칠 때 함께 외우는 ‘주기도문’ 이 그것 입니다.

가장 기본적인 "기도"에 대하여 빌립보서 4장 2절에서는 4가지를 강조 하고 있습니다.

1) 기도는 "항상" 해야 합니다.

우리는 살아있는 동안에 항상 숨을 쉬듯이 성도 들은 기도 생활을 항상 해야 하는 것 입니다. 사무엘 선지자는 기도 하는 성도 들이 기도 하기를 쉬면..바로 죄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기도하기를 쉬는 죄가 있습니다. 무시로 기도하며, 항상 쉬지 말고 기도를 해야 하며, 호흡이 있는 한 절망하지 말고 끝까지 기도해야 합니다.

2 ) "힘써"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힘써서 기도해야 합니다. 마귀와 사탄은 어떻게 역사 하든 지 성도들이 기도 하는 것을 방해 합니다. 즉 모든 일이 잘 되어서, 형통하여.. 기도를 등한히 하게하고, 또 너무 힘들어서 기도를 포기 하게 만드는 것 입니다.

우리는 힘들고 어려워도 기도하고, 즐거운 일이 많아도 기도 하는 일에 힘을 써야 하는 것 입니다. 힘써 기도 하지 않으면 시험에 들게 되고, 나도 모르는 사이에 기도 하는 일에 게으르게 되는 것 입니다.

3) "감사" 함으로 기도 해야 합니다.

기도에는 감사가 필수 조건입니다. 그러나 우리 인생은 너무나 힘들고 어려울 때가 많아 기도 할 때 감사 보다는 불평과 원망으로 기도 할 때가 있습니다. 기도에 감사가 따르지 않으면 마귀에게 틈탈 기회를 주는 것 입니다. 먼저 감사 한 일들을 열거 하며, 기도를 드려야 여러분의 기도의 문이 활짝 열리는 것 입니다. 기도에는 감사가 뒤를 따라야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 입니다.

4) "깨어"기도 해야 합니다

많은 성도 들이 기도를 많이 하기를 희망 합니다. 철야기도도 드리고 싶고, 금식기도, 특별기도 등등 어떤 분은 교회에 와서 철야기도 하러 왔다가 잠만 자고 가는 분도 계십니다. 우리는 단 5분이라도 깨어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의 양의 많고 적음을 떠나서 ‘깨어 있지 아니 하면 지혜로운 성도의 반열’에 들어 갈 수가 없는 것 입니다.

부활의 복된 절기에 항상 기도 하며, 기도에 힘쓰고, 감사함으로 기도하며, 깨어 있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소원 합니다. 골 4:2절에 "기도를 항상 힘쓰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Colossians 4: 2- Continue in prayer, and watch in the same with thanksgiving.)"고 말씀합니다.

특별히 우리 교회의 모든 성도들의 금년 목표가 일주일에 한 번 만이라도 새벽기도를 드리자는 것입니다. 무슬림처럼 하루에 다섯 번은 기도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기도 하는 일에 열심을 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율법을 행하고, 성경을 사랑했습니다.

두 번째로 우리도 성경을 사랑하고, 실천해야 합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행하는데 열심이었습니다. 단지 행함으로 얻는 "의(구원) "를 잘못 가르쳤기에 책망을 받았을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과 서기관을 책망하였다고 아주 못된 사람들은 아닙니다. 존경을 받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의 주장은 '행함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가르침이 잘못되었을 뿐입니다.

그들은 인간의 타락과 무능을 몰랐습니다. 인간의 노력으로 율법의 최종적인 경지에 이르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그 이상의 '의'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았고, 메시야를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그들의 ‘의’는 성경을 손에 들고서 ‘인간의 의’를 추구했습니다.

그러나 제가 이야기 하고 싶은 것은 서기관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생명처럼 여겼고, 그 책을 기록으로 남기는 일을 생명처럼 귀하게 여겼습니다. 또한 '무슬림'은 그들의 경전인 '코란'을 읽고 주문을 외우듯이 외우고 있었습니다. 하루 종일 말씀을 배우고 외우는 일에 열심을 다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유대인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유대인들은 그들의 경전인 구약성경 특별히 모세오경을 어린아이들에게 열심히 가르치고 읽히고 외우게 했습니다.

지금도 신명기의 6장 7절의 말씀대로 따르고 있습니다.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이 말씀은 지금으로부터 3,500년 전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말씀입니다. 3500년이 지난 지금도 유대인들은 아이들에게 이 말씀대로 성경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지금도 성지에 가면 길가 곳곳에서 성경을 펴놓고 열심히 성경을 읽는 유대인들을 볼 수 있습니다.

유대인은 나이가 들었다고 무조건 성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신명기 6장과 11장>을 외워야 '성인'으로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신명기 6장과 11장을 외우는 것이 유대인이 되기 위한 시험입니다. 이 시험을 통과해야 진정한 유대인이 되는 것입니다.

저희가 이스라엘을 여행하는 중에 예루살렘 통곡의 벽을 가게 되었습니다. 통곡의 벽은 다 허물어진 예루살렘 성전의 서쪽 벽입니다. 거기에서 유대인들이 성벽을 어루만지면서 눈물을 흘리며,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이상한 모습을 보았습니다. 유대인들은 기도를 하기 전에 손에다 무엇을 매고 이마에 무엇을 붙이고 있었습니다. 나중에 물어보니까 신명기 6장 8절 에 말씀을 그대로 지키는 것이라고 합니다.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라는 말씀을 실천하고 있었습니다. 호텔 로비에서도 성경을 펴놓고 읽는 수많은 유대인을 쉽게 볼 수 있었습니다.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러분은 얼마나 성경을 읽고 계십니까? 주일에 교회에 올 때 선반에 올려놓은 성경의 먼지를 툭툭 털고 가져오지는 않습니까? 여러분 중에 주일 말고 하루에 한 장이라도 성경말씀을 읽는 분이 계십니까? 더군다나 요즈음 교회에서 영상으로 성경말씀을 비쳐주니까 성경말씀을 찾아볼 생각을 안 합니다. 다행히 우리 교회는 매일 새벽기도회에 의도적으로 성경 전권을 매일 읽어 나가며 강해를 합니다. ‘구약성경’, ‘서신서’를 강해하고, 지금은 ‘복음서 중 마태복음’을 읽고 강해합니다. 교회에서 구약성경을 읽지 않으면 구약성경을 언제 읽을 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서 어떻게 우리가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영혼의 양식입니다. 음식을 먹지 않은 사람은 건강을 유지할 수 없습니다. 영혼의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을 읽지 않고 어떻게 우리의 신앙을 유지할 수 있겠습니까? 유대인이나 무슬림이 말씀을 가까이 하는 것을 보면서 부끄러움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말씀에 의지하지 않은 신앙은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것과도 같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읽고 배우고 외우는 일에 힘써야겠습니다. 말씀 속에서 능력이 나오고, 말씀 속에서 우리의 삶이 변화될 수 있습니다. 말씀 속에 기쁨이 있고 감사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지키는 자들이 받을 복들을 약속합니다.

1) 구원의 보장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연고요."(마7:24-25)라고 말씀합니다. 예수그리스도가 구원의 반석이 됨을 믿을 때 반드시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2)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마21:43)

3) 상급의 복을 받습니다.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대로 갚아 주리라."(계22:12) 충성된 자에게 주시는 상급은 충성된 청지기가 받을 상급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그 모든 소유를 저에게 맡기리라."(마24:47)고 하셨고, 더 많은 것을 맡겨 주십니다. 할렐루야!

* 희락의 상급을 주십니다.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찌어다 하고,"(마25:21)

* 영광의 상급을 주십니다.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다. 착한 종이여 네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였으니 열 고을 권세를 차지하라 하고,"(눅 19:17)

"만국이 그 빛 가운데로 다니고, 땅의 왕들이 자기 영광을 가지고 그리로 들어오리라."(계 21:24)

* 존귀의 상급을 주십니다.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딤후4:8)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볼 찌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계2:10)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약1:12)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면류관을 얻으리라."(벧전 5:4)

4) 범사에 축복해 주신다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미치리니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네 몸의 소생과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우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네 광주리와 떡 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신28:1-5)라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말씀을 지키는 자 들에게 여러 가지의 복을 약속 하셨습니다. 꼭 복을 받기 위하여 말씀에 순종 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러한 복이 뒤 따르는 것을 잊지 않으시고, 말씀을 지키는 성도들이 되어 형통한 복으로 주님께 영광 돌리시기 바랍니다. 복을 받은 후에는 주님의 사업에 쓰임 받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복 빌어 드립니다.

유대인은 말씀을 가까이 하는 신앙을 지켰기 때문에 2000년 동안 나라를 잃고 떠돌았지만 다시 나라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시간만 있으면 기회만 있으면 코란을 열심히 읽고 기도하는 무슬림은 온 세계를 무섭게 정복하고 있습니다. 이 모습을 보면서 우리도 말씀을 내 삶의 양식으로 간직하는 신앙을 본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세 번째 사두개인과 바리새인은 구제 사업을 열심히 하였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의 잘못된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율법을 이용하기까지 했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고르반”이었습니다. “고르반”이라는 말은 '하나님께 드린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특히 바리새인들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 중 자기 부모를 돕지 않는 이유로서 이 율법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부모님이 어려움에 처하게 되었을 때 자식에게 도움을 청합니다. 그때 그들은 말하기를 "아버지, 어머니 정말 죄송합니다, 부모님께 드리려고 준비했던 돈을 마침 제가 하나님께 다 헌금했습니다. 하나님께 다 드렸으니 아버지 어머니께서 너그러운 마음으로 이해해 주세요."라고 둘러대곤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섬긴 ‘자선’은 외식이었기에 주님께로 책망을 받았을 뿐이지 그들의 ‘구제 행위’가 잘못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다른 사람을 돕는 일은 무슬림도 열심히 합니다. 무슬림은 한 달간을 라마단으로 지킵니다. 라마단은 해가 뜰 때부터 시작해서 해가 질 때까지 아무것도 먹지 않고 금식하는 종교의식입니다. 이 라마단 기간 동안 금식하여 얻은 돈으로 가난한 사람을 돕는 것입니다. 이들은 무엇인가를 가지고 있는 것 자체가 '죄'라고 생각합니다.

현지 가이드의 말에 따르면 절대로 무슬림 앞에서는 지갑의 돈을 보여주면 안 된다고 합니다. 지갑의 돈을 보게 되면 저 사람이 죄를 짓고 있다고 생각하고 저 사람이 죄를 짓지 않게 하기 위해서 지갑의 돈을 가져간다고 합니다. 아무런 죄의식이 없을 뿐 아니라 그 사람을 위한 '선행'이라고 생각 한다고 합니다.

기독교인들이 교회를 잘 지어놓고 좋은 옷을 입고 교리논쟁을 하고 있을 때 무슬림은 일 년에 한 달씩 굶은 것으로 가난한 사람을 도왔습니다. 그러니 많은 사람들이 무슬림으로 개종을 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부끄럽게 생각해야 할 일입니다. 우리 기독교는 사랑을 가장 강조하고 종교입니다. ‘네 몸처럼 네 이웃을 사랑하라.’고 주님께서 가르쳐주셨건만 우리의 이웃사랑이 무슬림의 ‘이웃사랑의 실천’에 미치지 못한다면 참으로 부끄러운 일입니다. 이것도 우리가 배워야할 모습입니다.

우리 조상들의 아름다운 이야기, 가슴 뭉클한 이야기를 제가 아는 대로 몇 가지만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우리 선조들은 우리보다 물질적으로는 훨씬 가난하게 살았지만 그들의 삶은 훨씬 더 행복하고 인정이 넘치는 삶이었습니다.

옛날 할머니들은 커다란 곳간 열쇠주머니를 차고 다녔습니다. 조석으로 끼니때마다 곳간 문을 열고 식구 수대로 양식을 퍼서 밥을 짓도록 하였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조금 잘 사는 집에서는 의례히 자기 집 식구수보다 세 사람의 몫을 더 퍼주었다고 합니다. 이것을 가리켜 옛사람들은 세 몫을 더한다고 ‘세덧’이라 하기도 하고, 세 사람에게 덕 을 세운다는 의미로 ‘세덕’이라고도 했습니다.

옛날 어른들은 다 아는 말이지만 요즈음은 없어진 우리 조 상들의 아름다운 말입니다. 그런데 자기 집 식구들이 먹을 양식만을 내주는 안주인은 덕이 없는 사람으로 집안에서 뿐만 아니라 동네에서 지탄을 받았다고 합니다.

당시는 보릿고개가 있던 시절이었습니다. 끼니를 때우지 못해 굶기를 밥 먹듯 하던 많은 가난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가난한 집에는 식구도 많습니다. 끼니때가 되어 철없는 아이들은 밥을 달라고 칭얼대는데 먹을 것이 없습니다. 그러면 어머니들은 부잣집으로 가서 어슬렁거립니다. 괜히 부엌에 가서 밥하는 것을 거들어 주고, 설거지도하고, 불도 땝니다. 그리곤 밥을 얻어서 부리나케 집으로 돌아와서 밥을 달라고 칭얼대는 아이들에게 먹였습니다. 그래 서 잘 사는 집에서는 세 사람 몫의 밥을 더 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보릿고개를 넘긴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들도 굶어죽지 않고 함께 살아온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가슴 뭉클한 이야기입니까? 가난하지만 정이 있고 사랑이 있던 삶이었습니다. 고달픈 세상이지만 살만한 세상이었습니다.

그리고 좀 잘 사는 집에 아이가 태어나면 의례히 그 아이의 이름으로 쌀 몇 가마니를 동네에 내어놓았다 고 합니다. 그래서 쌀을 필요한 사람에게 빌려주고 이자를 받았습니다. 쌀을 빌려주고 쌀로 이자를 받은 것입니다. 그것을 이곡(利穀)이라고 했습니다. 그 이곡으로 동네의 가난한 사람들, 과부들, 행려병자들 과 그 동네에 떠도는 나그네들을 먹이고 보살피는 일에 사용했다고 합니다. 이곡이 점점 늘어나서 적어 도 그 동네에 들어와서 사는 사람들은 굶어죽는 사람들이 없게 했다고 합니다.

쌀을 내어놓을 형편이 안 되는 집에서는 돼지 새끼 한 마리라도 내어놓았다고 합니다. 돼지새끼 한 마리를 사서 잘 기르면 금방 새 끼를 낳습니다. 그러면 그 돼지새끼들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한 마리씩 나눠주고 한 가지 약속을 합니다. 그 돼지새끼가 잘 커서 또 새끼를 낳으면 한 마리는 꼭 되돌려주는 것입니다. 본전은 되돌려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몇 개월이 지나면 돼지가 새끼를 낳아서 한 마리만 갚으면 되니까 그 집안의 형편이 펴고 넉넉해질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돼지를 복돼지라고 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 복 돼지가 십 년이 지 나 아이가 열 살이 되었을 때면 백 마리가 되었다고 합니다. 이 아이가 스무 살 장가갈 때쯤 되면 이천 마리가 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었다고 합니다. 우리의 어른들은 자식이 잘되기 위해서는 두 가지 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는 하늘이 이 아이를 돌보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늘이 아이를 돌보기 위해서는 사람들에게 덕을 쌓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사람들의 입에서 그 아이 덕분 에 살게 되었다는 말이 나오도록 사람들의 입에서 그 아이의 이름이 고마운 사람으로 불리게 되어야 하늘에서도 그 아이에게 복을 내려준다고 생각했습니다. 옛날 우리 조상들은 자식은 하늘이 길러야 하 고 많은 사람들이 덕으로 길러야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전해 내려오는 '최 부잣집'은 <12대를 거쳐서 300년 동안 만석꾼의 부를 이어온 집>입니다. 우리나라 옛말에 삼대부자가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세계적으로도 삼대를 넘기는 부자가 많지 않다고 합니다. 그런데 최 부자는 어떻게 12대를 거쳐 그 부를 이어온 것일까요? 그 비결이 무엇인지, 어떻게 가계를 경영 해 왔는지 우리나라에서 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이것에 대해 연구를 하고 논문을 써서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도 있다고 합니다.

최 부자가 12대의 부를 이어올 수 있었던 비결 중의 하나는 만석을 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만석쯤 되면 더 땅을 살 수 있는 여유가 있습니다. 얼마든지 땅을 사서 재산을 늘릴 수 있지만 더 이상 늘리지 않는 것입니다. 돈은 벌 수 있다고 끝까지 벌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일 년 동안 얻은 만석의 삼분의 일 삼천 석은 빈민을 구제하는 일에 사용했습니다.

최 부잣집을 중심으로 해서 사방 백리가 되는 지역 안에 굶는 사람이 없도록 했다고 합니다. 백리 안에 사는 사람들을 최 부자가 다 책임을 진 것입니다. 두 번째 삼분의 일은 손님 접대하는 일에 사 용했습니다. 오는 사람들을 다 극진히 대접을 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너무 많이 와서 방이 없어 손님 을 받을 수 없을 때에라도 손님을 돌려보내지 않았다고 합니다. 동네에 비어있는 집에 보내어 손님을 대 접했다고 합니다. 동네 사람들이 최 부잣집 덕분에 하숙을 쳐서 먹고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 라 손님들이 떠날 때는 사흘 치의 양식을 주어서 보냈다고 합니다. 그리고 만석의 나머지 삼분지은 자기 가정을 위해서 썼다고 합니다.

참 놀라운 사실은 조선 중기부터 시작해서 300년 동안 살아오는 동안에 나라의 정변이 여러 번 있었습니다. 그중의 하나가 <동학혁명>이었습니다. 동학혁명은 가난하게 살던 소작농들이 중심이 되어 일으켰던 혁명으로 그때 부자들이 많은 곤욕을 치렀습니다. 이때도 최 부잣집이 안전하게 견딜 수 있었던 것은 그 지역의 이웃사람들이 최 부잣집을 지켜주었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이웃들이 우리가 대대로 최 부잣집 때문에 먹고 살았다고 절대로 건드리지 못하게 하여 안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돈은 하늘이 지켜주어야 합니다. 아무리 사람의 힘으로 지키려고 해도 지킬 수 없습니다. 옛날 격언에 ‘사람이 돈을 따라서는 안 되고, 돈이 사람을 따라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돈은 내가 지키는 것이 아니라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지켜주어야 합니다.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내 재산을 지켜줄 때 내 재산이 안전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내 사업이 잘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들이 내 사업을 위해 염려해주어야 합니다. ‘저 사람이 잘되어야 하는데 저 사람의 사업이 잘못되면 내가 어려워지는데...’ 이렇게 다른 사람들이 염려해 주어야 합니다. 현대인들은 이러한 지혜를 모르고 자기 힘으로 지킬 수 있는 것으로 아는 것입니다.

이제까지 우리 조상들의 지혜로운 삶에 대해 말씀드렸지만 성경에는 이보다 더 가슴 뭉클하고 인간미가 넘치는 이야기가 많이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가르쳐주신 지혜입니다. 출애굽기 22장 26- 27절 말씀입니다.

"네가 만일 이웃의 옷을 전당 잡거든 해가 지기 전에 그에게 돌려보내라 그것이 유일한 옷이라 그것 이 그의 알몸을 가릴 옷인즉 그가 무엇을 입고 자겠느냐?"

이스라엘은 낮은 아주 덥고 저녁에는 춥습니다. 일교차가 심한 사막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집을 짓고 사는 것이 아니라 천막을 치고 들에서 살던 사람들입니다. 낮에는 망토 같은 것을 걸치고 다니다가 저녁에는 그것을 덮고 집니다. 겉옷이 없으면 저녁에 추워서 잠을 잘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겉옷을 담보잡지 말고, 만약 담보를 잡거든 해가 지기 전에 돌려주라는 것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읽을 때마다 눈물이 납니다. 하나님께서는 가난한 사람들의 이부자리를 걱정하시는 분이십니다. 레위기 19장 10절의 말씀입니다.

"네 포도원의 열매를 다 따지 말며 네 포도원에 떨어진 열매도 줍지 말고 가난한 사람과 거류민을 위하여 버려두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이렇게 살면 가난한 사람이 무슨 걱정이 있겠습니까? 굶어죽는 사람이 생기겠습니까? 나그네가 무슨 걱정이 있겠습니까? 사람들이 포도원의 포도를 다 따기 때문에 가난한 사람들이 먹을 것이 없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기 것을 다 챙기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다 따지 말고 떨어진 것도 줍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그것을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 남겨두라는 것입니다. 물론 수고하고 애써서 얻은 것이지만 남겨두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의 몫이라는 것입니다. 레위기 23장 22절 말씀입니다.

"너희 땅의 곡물을 벨 때에 밭모퉁이 까지 다 베지 말며, 떨어진 것을 줍지 말고, 그것을 가난한 자와 거류민을 위하여 남겨두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신명기 23장 24절 말씀을 보면

"네 이웃의 포도원에 들어갈 때에는 마음대로 그 포도를 배불리 먹어도 되느니라. 그러나 그릇에 담지는 말 것이요."라고 하였습니다.

신명기 23장 25절 말씀에는 "네 이웃의 곡식밭에 들어갈 때에는 네가 손으로 그 이삭을 따도 되느니라. 그러나 네 이웃의 곡식밭 에 낫을 대지는 말지니라."고 명령합니다.

그리고 신명기 24장 19-21절 말씀에도 "네가 밭에서 곡식을 벨 때에 그 한 뭇을 밭에 잊어버렸거든 다시 가서 가져오지 말고,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남겨두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내리시리라. 네가 네 감람나무를 떤 후에 그 가지를 다시 살피지 말고, 그 남은 것은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남겨 두며, 네가 네 포도원의 포도를 딴 후에 그 남은 것을 다시 따지 말고,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남겨두라."고 말씀합니다.

'감람나무'는 '올리브나무'입니다. 감람나무의 열매나 포도원의 포도를 딴 후에 그 가지를 다시 살펴보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감이나 밤을 털 때도 다 털었다고 생각하지만 항상 남아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 때 다시 가서 털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나그네와 고아와 불쌍한 과부를 위해서 남겨두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 남겨두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할 때 하나님 여호와께 서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 복을 내려주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박복하다고 생각하시는 분은 이 말씀을 한 번 믿어보시기 바랍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여러분들이 이러한 삶을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축복하여 주실 것입니다. 이런 귀한 은혜가 미스바교회 성도 여러분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복 빌어 드립니다.

기독교인들이 교회를 잘 지어놓고 좋은 옷을 입고 교리논쟁을 하고 있을 때 무슬림은 일 년에 한 달씩 굶은 것으로 가난한 사람을 도왔습니다. 그러니 많은 사람들이 무슬림으로 개종을 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부끄럽게 생각해야 할 일입니다. 우리 기독교는 사랑을 가장 강조하고 종교입니다. 네 몸처럼 네 이웃을 사랑하라고 주님께서 가르쳐주셨건만 우리의 이웃사랑이 무슬림의 이웃사랑의 실천에 미치지 못한다면 참으로 부끄러운 일입니다. 이것도 우리가 배워야할 모습입니다.


넷째로 유대인들의 종교지도자들의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본받아야 합니다.

팔레스타인지역은 사막지대입니다. 정말 가서 보니까 물 한 방울 없는 끝없는 돌과 모래 언덕뿐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찌하여 그런 땅을 가리 켜서 '젓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말씀하셨던 것일까요? 도저히 믿을 수가 없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나 참으로 놀라운 것은 유대인은 하나님의 이 말씀을 철석같이 믿었습니다. 그 끝없는 모래밭을 보면서, 물 한 방울 나지 않는 그 황량한 사막의 돌 짝밭을 보면서 ‘젓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믿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을 그대로 믿은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나라를 세운 것이 1948년입니다. 그러니까 지난 50여 년 동안 이스라엘 사람들은 젓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농사를 짓기 시작했습니다. 이스라엘의 농지 면적이 우리나라의 배가 된다고 합니다. 그 농지가 정말로 젓과 꿀이 흐르는 땅이 되었습니다. 옥토가 되었습니다. 비옥한 땅이 되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많은 농산물을 수출하는 일등 가는 농업국가가 되었습니다. 풀 한포기 나지 않던 땅이 정말로 젓과 꿀이 흐르는 땅이 되었습니다. 갈릴릴 바다 주변과 ‘삭개오’가 뽕나무에 올라간 여리고 지역은 물이 많은 지역이지만 ‘므깃도’ 지역은 늪지대를 물을 빼어 농장을 만들었고, 물이 없는 지역은 땅속이나 먼 곳에서 물을 길어와 농사를 짓고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아브라함이 나이가 백 살이 다 되었을 때 천사가 와서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도저히 가능성이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그 말씀을 믿었을 때 그대로 되었습니다.

밤새 고기를 잡던 베드로는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지만 예수님의 말씀대로 오른쪽으로 그물을 던졌을 때 많을 고기를 잡을 수 있었습니다. 성경을 통해서 우리는 예수님을 믿었던 많은 사람들이 병 고침을 받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는 믿음을 본받아야겠습니다.

우리는 성경말씀은 3,500년 전의 일이니까 지금은 있을 수 없는 일라고 생각합니다. 의심을 합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우리의 사정을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믿으면 믿음대로 역사가 일어나고,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실 줄 믿습니다. 저는 이스라엘에 ‘벳사이다’지역 발굴 작업을 하러 갔다가 ‘믿는 대로 된다.’는 그들의 삶의 모습과 신앙을 통해 이룩한 기적의 현장을 두 눈으로 볼 수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말씀 마태복음 5장 20절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는 이 말씀은 행함으로 구원받는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지만 진정으로 구원받은 사람이라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보다 의로운 삶을 사는 사람들이라는 말입니다. 즉 '우리들의 의로운 생활이 곧 구원받은 증거가 되어야 한다'말씀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 중에 종종 "오늘날 우리는 은혜 아래 있는 자들이며 율법아래 있는 자들이 아니다"라고 말하면서 율법을 무시하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가 율법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아래 있다."는 것은 ‘율법이 우리에게 필요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즉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더 이상 ‘행함이 필요 없다.’는 말은 아닙니다.

바리새인들보다 우리 '의'가 낫지 못하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우리의 기도생활이 유대인 종교지도자들이나 무슬림보다 못하고, 성경말씀을 사랑함이 서기관이나 유대인보다 못하고, 구제하고 봉사함이 그들보다 못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이 귀한 깨달음을 통해 '신앙생활에 열심'을 내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복 빌어 드립니다. (황영복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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