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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어린이주일] 내가 그를 물에서 건져내었다 (출 2: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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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을 알지 못하는 애굽의 바로의 등장과 함께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의 고난의 삶이 시작되었습니다.
이 시점에 레위 족속 중 한 사람이 가서 레위 여자에게 장가를 들었습니다. 이것은 고대 근동의 남성 우위의 가부장적 일부다처의 결혼 풍습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미 레위 남자는 이미 결혼한 상태였음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들 사이에서 곧 태어날 아이에게는 훨씬 나이가 많은 누이 미리암과 세 살 정도의 연상인 아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침내 레위 사람들 사이에서 난 아이는 사내 아이였고 그 아이는 준수했다고 했습니다. '준수'라는 말은 아름답다는 히브리어 토브( )에 해당하는 말입니다. 특히 준수하다는 말은 외적 아름다움과 내적인 순결함도 함께 보였다는 말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이 아이는 그 외모와 표정에서 보통 아이보다 상대적으로 탁월했다는 말입니다.

Ⅰ. 하나님의 선물로 받은 준수한 자식의 공개적 양육이 허락되지 못했습니다.

본문 2장 2-3절에 {그 여자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아 그 준수함을 보고 그를 석달을 숨겼더니 더 숨길 수 없이 되매…}라고 했습니다. 핍박치고는 악랄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수적 증가를 막기 위한 바로왕의 가혹한 노동착취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계속 번창해 갔습니다. 바로왕은 중노동을 통한 출산억제 정책이 실패하자 다른 특단의 조치를 강구하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바로는 산파를 통한 이스라엘 신생 남아의 살해 정책을 명하게 되었습니다. 애굽 전역에 공개적이고도 무자비한 남아 살육정책이 감행되었습니다.
사도행전 7장 18-19절에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임금이 애굽 왕위에 오르매 그가 우리 족속에게 궤계를 써서 조상들을 괴롭게 하여 그 어린 아이들을 내어버려 살지 못하게 하려 할새}라고 했습니다.
석 달 동안 숨겼다는 것은 이미 죽기를 각오한 어머니의 모성애입니다.
히브리서 11장 23절에도 {믿음으로 모세가 났을 때에 그 부모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고 석 달 동안 숨겨 임금의 명령을 무서워 아니하였으며}라고 했습니다.
더 이상 숨길 수 없다는 성경의 표현은 그 당시 상황을 다 이해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통탄할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아이가 처음부터 태어나지 않았다면 이러한 아픔이 없었을 것이 아닙니까. 더 키울 수가 없었다는 것은 부모의 양육이 한계에 도달했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공포 속에, 정치 속에 아이가 생겼는데 어쩌란 말입니까. 자식이 태어나는 것을 인간의 힘으로 조정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 세상 과학이 아무리 발달한다고 해도 인간의 출생문제에 대한 신비는 정복할 수 없습니다. 이 세상은 예나 지금이나 자녀를 낳으면 낳는 순간부터 온갖 위험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질병의 위험, 성장의 위험, 교육의 위험, 음식의 위험, 장래의 위험이 우리의 자녀들을 노리고 있습니다. 이러한 육체적 위험 외에 정신적 위험이 있는가 하면 영적 위험은 그 위험 수위를 넘긴지가 오래입니다.

지난해 2005년 5월 아동 정책 추진 상황 및 향후 계획을 위한 대통령 주재 국무회의가 있었습니다. 여기서 자녀를 학대하는 부모는 강제로 교육을 받게 하고 양육의사가 없을 때는 친권을 박탈하는 내용의 입법을 추진했습니다. 작가 박완서는 병원 신생아실에 가면 눈물이 난다고 했습니다. 그는 생명에 대한 경외 때문만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들을 맞이하는 이 세상의 거짓 화려함과 잡스러움을 반성하며 어쩔 수 없이 사로잡히는 연민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아동학대는 사회 문제가 된지 오래입니다. 아이가 태어날 때부터 병원 간호조무사들의 장난감 다루 듯 하는 엽기적행동에 비난여론이 들끓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물로 받은 우리 아이들이 활동하는 시간적 위험과 공간적 위험은 이미 공포를 넘어서 가히 살인적입니다.

Ⅱ. 방주에 담아 물에 띄워 버리는 것으로 부모의 한계를 극복해 보고자 했습니다.

본문 2장 3-4절에 {더 숨길 수 없이 되매 그를 위하여 갈 상자를 가져다가 역청과 나무 진을 칠하고 아이를 거기 담아 하숫가 갈대 사이에 두고 그 누이가 어떻게 되는 것을 알려고 멀리 섰더니}라고 했습니다.
여기 {갈 상자}는 갈대로 만든 작은 방주를 말하고 있습니다. 종이 재료였던 갈대 줄기를 단단히 묶기 위해서 사해의 아스팔트인 역청과 물이 새어들어 오지 않도록 나무진을 칠했습니다. 그리고 하숫가 갈대 사이에 이 작은 갈 상자를 띄웠습니다. 이 갈대로 만든 작은 갈 상자에 역청으로 나무진을 칠한 것은 사망의 물이 스며들지 않게 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생명을 원수의 손에 내줄 수 없다는 적극적인 태도입니다.

창세기 6장 14절에 {너는 잣나무로 너를 위하여 방주를 짓되 그 안에 간들을 막고 역청으로 그 안팎에 칠하라}고 했습니다.
바로 노아를 살리기 위하여 하나님이 명하셨던 그 방주입니다. 당대의 의인 노아는 그 방주 명령을 믿음으로 받고 방주를 예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습니다.
그 부모는 이렇게 믿음으로 아이를 받고 믿음으로 석 달 동안 자기 집에서 숨겨 키웠습니다. 아이에 대한 자신들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하여 갈 상자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아이를 갈 상자 안에 담았습니다.
홍수 심판 가운데서도 노아와 그 가족을 구원하기 위해 예비 된 방주는 그 기원과 기능에 있어서 신약 시대의 교회의 예표입니다.
그렇다면 갈 상자에 역청과 나무진을 칠하고 아이를 담아 하숫가에 띄운 그 갈 상자는 노아의 방주에 비유됩니다. 다시 그 갈 상자는 신약 시대의 교회에 비유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이것은 가상치도 않은 말을 억지로 끌어다 붙여 조건이나 이치(理致)에 맞도록 하는 견강부회(牽强附會)가 아닙니다.
아이를 갈 상자에 담아 하숫가에 띄운 것은 준수한 아이를 하나님의 손에 믿음으로 완전히 맡기는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양육 방법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부모는 자기의 딸 미리암을 내어보내어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을 보게 하였습니다. 그 어린아이의 누이는 갈대 숲 속에서 자기 동생을 담은 갈 상자가 사망의 물 위에 떠내려가고 있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그 때 하나님은 사망의 홍수위에 움직이는 상자를 애굽 바로 왕의 공주와 그 시녀들이 목욕하는 곳으로 보냈습니다. 그리고 여자들로 하여금 이 준수한 아이를 보는 순간 측은지심(惻隱之心)이 일어나도록 섭리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갈대 상자 속의 뚜껑이 열릴 때 그 아이가 울도록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아이를 보는 순간 불쌍히 여겨 히브리 아이인 줄 알게 했습니다. 그 아이의 누이는 바로 왕의 공주에게 접근하여 이르기를 {내가 히브리 여인 중에 유모를 불러다가 이 아이를 위해 젖을 먹이게 하리이까}라고 하였습니다. 그 때 바로 왕의 딸은 {가라}고 하였습니다.
본문 2장 9절에 {바로의 딸이 그에게 이르되 이 아이를 데려다가 나를 위하여 젖을 먹이라 내가 그 삯을 주리라 여인이 아이를 데려다가 젖을 먹이더니}라고 했습니다.
그 아이가 자라나서 다시 바로의 딸에게 데려가서 그의 아들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아이의 이름을 모세(물에서 건져냄)라고 지었습니다. 모세에 대하여 그녀가 말하기를 이는 내가 물에서 건져 내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Ⅲ. 모세는 죽지 않고 살아났습니다.

본문 2장 9절에 {바로의 딸이 그에게 이르되 이 아이를 데려다가 나를 위하여 젖을 먹이라 내가 그 삯을 주리라 여인이 아이를 데려다가 젖을 먹이더니}라고 했습니다.
모세의 생모 요게벳이 자기 아들을 기르는 대가로 삯을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강제 노동에 시달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현실적으로 자녀를 양육하기도 힘드는데 양육비까지 받아가면서 자기 아이를 길렀다고 했습니다. 참으로 기이한 일입니다.

출애굽기 2장 11절에 {모세가 장성한 후에…}라고 했습니다.
모세는 사도행전 7장 23절에 의하면 그 때의 모세의 나이는 40세였습니다. 모세는 당시 세계를 호령하던 애굽의 바로 왕의 궁궐에서 40년 동안 왕자로 성장했습니다. 그는 궁중에서 당대의 학문은 물론 궁중의 최고의 고등한 문화생활에 익숙하게 되었습니다. 자기 부모 밑에서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환경에서 성장하고 당대의 대가(大家)들에 의해 궁중교육을 받았습니다. 모세는 일약 왕족의 일원으로서 예우를 받으며 자라나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부모들에게 자식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자식을 부모의 육적 성향을 닮도록 하셨습니다. 여기서 그치지 아니하고 그 부모에게 자식에 대한 부성애와 모성애를 주셨습니다. 부모에게 있는 자식에 대한 부성애와 모성애는 하나님이 주신 위대한 기능입니다. 하나님은 그 기능을 극대화 시켜서 모든 것을 투자함으로 자식은 성공하게 됩니다. 부모는 그 자식의 성공적 삶을 통하여 자식을 상급으로 받았다는 사실이 현실화되는 것입니다. 모세를 담았던 갈상자는 노아의 방주를 연상케 합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이 세상은 우리의 어린 자식들의 성장을 가로 막는 죽음의 요소들로 넘치고 있습니다. 따라서 자식을 더 이상 키울 수가 없다는 고백이 이 시대의 아픔입니다.

갈보리의 부모들은 이 무서운 사망의 홍수에서 우리의 자녀들을 살아남도록 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갈대상자운동 곧 방주운동입니다. 그것은 바로 참된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 운동입니다.
참된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 운동 안으로 자녀들을 데려와야 합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로 사망의 홍수를 막는 능력이 있습니다. 사망의 홍수위에서 침몰하지 않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이 지상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야말로 위대한 생명의 방주입니다.

우리의 자녀들을 신령한 젖으로 양육시켜야만 합니다. 베드로전서 2장 1-3절에 {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궤휼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갓난 아이들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고 했습니다.
오늘은 어린이주일입니다. 83년 전 소파 방정환이 부르짖었던 대로 어린이는 미래의 희망입니다. 더욱이 우리 사회는 출생률 1.19%로 부부가 한명의 자녀를 키우는 집이 늘고 있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편협한 이기주의에 함몰된 나약한 아이들이 많습니다. 결혼을 해도 부모에게 더부살이 하는 이른바 캥거루 족이 늘고 있습니다.

자식이 원한다면 엄동설한에도 산에 가서 산딸기를 따주겠다는 부모들의 무분별한 희생자세는 21세기가 요구하는 강인한 자녀를 키울 수가 없습니다. 부모는 자식에게 해줄 수 있는 것과 해줄 수 없는 것이 있어야 하고 되는 것과 안 되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끝없이 베풀기만 하는 것이 부모의 미덕이던 시대는 끝이 났습니다. 옛날에는 어린이들이 때에 따라서는 무시되기 일쑤였습니다. 그러나 요즈음 어린이들은 과잉보호 되어서 문제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바로 서지 아니하면 정직하게 행동할 수 없습니다. 우리 자녀들을 복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뿐입니다.
여호수아 24장 31절에 {이스라엘이 여호수아의 사는 날 동안과 여호수아 뒤에 생존한 장로들 곧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모든 일을 아는 자의 사는 날 동안 여호와를 섬겼더라}고 했습니다.

요즈음 어린이들이 처해있는 교육환경은 실로 심각합니다. 많은 유해 환경으로 인하여 독극물을 마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성경을 많이 아는데 그치게 하는 교육은 유희(遊戱)입니다. 성경을 자기의 것이 되도록 하여 지켜 행하도록 해야 합니다. 부모가 먼저 훌륭하게 되지 아니하면 자녀를 훌륭하게 기를 수 없습니다. 혹시 부모에게 연약한 부분이 있다면 자녀들의 교육을 위해서 숨기시고 때로는 억지로라도 분발할 때가 있어야 합니다.
'내무현부형 외무엄사우 이능유성자선의'(內無賢父兄 外無嚴師友 而能有成者鮮矣)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집 안에 현명하신 부모님이나 형이 없고 밖으로 엄격한 스승과 벗이 없으면 능히 성공할 수 있는 자가 드물다."는 말입니다.
'남자실교 장필왕우 여자실교 장필추소'(男子失敎 長必頑愚 女子失敎 長必序疎)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남자가 교육을 받지 못하면 자라서 반드시 완악하고 어리석어지며 여자가 교육을 받지 못하면 반드시 거칠고 소홀해진다."는 말입니다. 자녀들을 나의 자녀가 되게 가르치지 말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이것이 어린이날을 맞이하는 진정한 우리의 자세가 되어야 합니다.

어린아이를 인격적으로 존중한다는 것은 어린아이를 부모의 소유로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어린아이는 부모의 소유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선물입니다. 어린아이는 부모의 사유재산이 아닙니다. 따라서 어린아이는 하나의 당당한 인격체인 것을 인정하는 것과 동시에 인격자로 대해야 될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부모들은 아이들에게 철저히 시청각 교육의 충실한 자료입니다. 따라서 부모가 자식에게 본(本)을 보일 수 없다면 부모의 권위는 떨어지고 말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 앞에서는 부모도 아이들과 함께 학생이 되어야 합니다.
아이들의 학교교육에 관심을 가지는 것을 누가 탓하겠습니까.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신성한 교육현장에 상업적 바이러스가 침투해서 신성한 배움의 전당에 시장의 법칙이 활개를 치고 있는 실정입니다.

우리나라 교육은 지식과 기능면에서 많은 업적을 남겼습니다. 그러나 전인교육에는 실패하고 있습니다. 전인교육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으로만이 가능한 것입니다. 먼저 우리의 아이들을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아이들이 실수투성이의 부모의 보호보다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보호를 받게 될 것입니다. 얼마 되지 않는 부를 물려주는 부모의 유산보다는 부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게 해야 합니다. 이 일을 위하여 부권과 모권이 엄격히 적용되어야 합니다.
준수한 우리 아이들을 방주(교회)에 담아 띄우십시오. 그러면 사망의 물에서 건져 냄을 받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아이는 왕자가 될 것입니다. -아 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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