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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어린이주일] 네 아들, 내 아들 (창 2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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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귀한 것을 얻기 위하여 오래 기다린다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기는 하지만 대신 그것을 얻게 될 때의 기쁨은 몇 갑절이 됩니다.
  홈팀의 야구팀이 매 이닝마다 점수를 내면서 경기 시종일관 압도적인 차이로 눌러 이겨나가는 것도 물론 즐거운 일이지만, 훨씬 더 통쾌한 쾌감은 역시 내내 지고 있다가 9회 말에 만루홈런을 치면서 대역전승을 거두는 것입니다.
  부친이 부자여서 큰 유산 물려받는 것도 물론 기본 좋겠지만, 작은 사업체를 하나 붙들고 각고의 노력과 인내 끝에 '대박'이 터지는 축복을 받을 때의 기쁨과는 전혀 상대도 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물며 그것이 자식인 경우에는 어떠하겠습니까?
  결혼하자마자 곧 아들, 딸들이 '전통에 가득한 화살'들처럼 주렁주렁 태어나도 기쁨이 넘치는 법인데, 오랫동안 자식을 얻지 못하고 기다리고 기다리다가 겨우 하나 얻게 되었을 때 그 부모의 심정이란 것은 실로 겪어 보지 않고서는 표현조차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바로 그런 기쁨을 직접 겪어 본 여러 부부들이 있는데, 바로 사무엘을 얻은 한나라든지, 세례 요한을 낳았던 사가랴와 엘리사벳 부부 등입니다.
  하지만 그 같은 경우로 성경에 가장 먼저 나타나는 것이 바로 아브라함이 이삭을 얻은 사건이었습니다.
  오랜 기다림과 갖은 우여곡절 끝에 그 귀한 아들 하나를 하나님께로부터 받게 되었을 때, 아브라함과 사라는 얼마나 기뻤던지 아예 그 아들의 이름을 "이삭"이라고 즉 '웃음'이라고 짓게 될 정도였습니다.
  늦둥이 독자에게 그런 이름을 지어주면서 사라는 말하기를 "하나님이 나로 웃게 하시니 듣는 자가 다 나와 함께 웃으리로다"라고 했습니다.
  할머니가 되어서야 생전 처음으로 진짜 엄마가 되어 본, 참으로 달리 표현할 길이 없는 지극한 기쁨이 그 '이삭'이라는 이름 속에 다 담겨 있었던 것입니다.

  자식이란 부모가 언제 어떻게 보아도 절로 미소를 머금게 해주는 무한한 기쁨의 원천인 것은 비단 아브라함과 사라 뿐 아니라 모든 부모에게 꼭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진짜 훌륭한 부모는 자기 자식을 그처럼 자기 눈에만 사랑스럽고 자기 마음에만 귀여운 자식으로 키우지 아니합니다.
  아브라함도 그러했습니다.
  그처럼 큰 기쁨의 원천인 '자기 아들' 이삭을 낳았지만, 그는 그 외아들을 누구보다도 먼저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하나님의 아들'로 키워나갔던 아버지였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은 이 어린이 주일을 맞이하면서 우리의 소중한 자녀들을 진정 하나님께서 사랑스러워하실 아들딸로 성장시키기 위하여 부모들이 꼭 기억해야 할 세 가지 원칙을 이 아브라함과 이삭의 부자지간을 통하여 살펴보고자 합니다.

  1. 부모는 먼저 자기 자식을 하나님 앞에서 택함 받은 자로 키워야만 합니다.

  우리는 이런 교훈을 이어지는 21장 8절부터 13절의 말씀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아이가 자라매 젖을 떼고 이삭의 젖을 떼는 날에 아브라함이 대연을 배설하였더라 / 사라가 본즉 아브라함의 아들 애굽 여인 하갈의 소생이 이삭을 희롱하는지라 / 그가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이 여종과 그 아들을 내어쫓으라 이 종의 아들은 내 아들 이삭과 함께 기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매 / 아브라함이 그 아들을 위하여 그 일이 깊이 근심이 되었더니 /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이나 네 여종을 위하여 근심치 말고 사라가 네게 이른 말을 다 들으라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 네 씨라 칭할 것임이니라 / 그러나 여종의 아들도 네 씨니 내가 그로 한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하신지라"고 기록했습니다.

  '웃음의 아들' 이삭을 낳고 매일 웃음 가운데서만 그를 키워가고 있던 아브라함에게 자식 교육에 관한 첫 관문이 찾아왔습니다.
  그 문제는 사실 아브라함이 이미 저질러 놓았던 과거의 사건이 언젠가는 가져올 수밖에 없었던 인과응보의 결과이기도 했습니다.
  아직 사라가 아들을 낳지 못하고 있던 때 그 사라의 여종 하갈을 첩으로 맞아들여서 이 서자 이스마엘을 낳아놓았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적자로 태어난 이삭이 "젖 떼는 날" 즉 생후 2, 3년 쯤 되어서 이를 위하여 큰 잔치를 베풀던 날이 되었습니다.
  그날에 이스마엘, 즉 그때 이미 16세가량의 소년으로 장성해 있었던 이삭의 배다른 형이 이삭을 "희롱"했습니다.
  갈라디아서에 보면 그 같은 이스마엘의 행동을 "핍박"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당연히 사라는 화가 났고 이를 인하여 아브라함에게 이스마엘과 그 모친인 하갈을 쫓아내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때 아브라함은 매우 큰 고민에 빠졌습니다.
  11절에 보면 "아브라함이 그 아들을 위하여 그 일이 깊이 근심이 되었더니"라고 했읍니다.
  여기의 "그 아들"이란 이삭을 가리킨 것이 아니라 이스마엘을 두고 한 말입니다.
  분명히 이삭이 자기의 적자임은 틀림없지만, 이스마엘도 어쨌든 자기의 아들은 아들이었기 때문에 그를 집에서 쫓아낸다는 것은 아브라함에게 인간적으로는 분명히 큰 고통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바로 그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셔서 하셨던 말씀이 무엇이었습니까?
  "네 아이나 네 여종을 위하여 근심치 말고," 즉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사라의 말대로 그들을 내어보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내어보낸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그 이스마엘도 역시 "한 민족을 이루게" 하실 것이라고, 즉 일은 아브라함이 저질러 놓았지만 그것까지도 하나님께서 알아서 당신의 뜻을 이루는 데에 적절히 사용하실 것이라고 일러주셨던 것입니다.

  언뜻 보기에는 아브라함의 생각은 참 정이 풍부한 것 같고, 사라나 하나님의 말씀은 무정한 것처럼 여겨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거기에는 매우 중요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같이 명령 내리시는 이유를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 네 씨라 칭할 것임이니라"고 밝히셨습니다.
  그것은 곧 이삭이야말로, 아니 이삭만이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택한 백성의 후손임을 재삼 강조하신 말씀입니다.
  인간적으로만 생각한다면 이스마엘이나 이삭이나 둘 다 아버지 아브라함에게는 깨물면 아프지 않을 수 없는 손가락들처럼 여겨졌겠지만 하나님 편에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선택하신 생명 가운데 들어가지 못한 자식은 진정한 의미에서 자식이라고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자기가 낳아놓기만 하면 다 자기 자식인 줄로만 압니다.
  내 성(姓)을 이어받고 내가 지어 준 이름으로 호적에 올려 있으니 당연히 내 자식이라고 생각합니다.
  내 가문을 이어갈 내 핏줄이 바로 이 아이 속에 흐르고 있으니 의례히 내 자식이요 평생 내 자식이라고 확신하는 것입니다.

  물론 육신적으로만 생각한다면 이 논리에 아무런 하자가 있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섬기는 부모라면 결코 그렇게 끝나서는 아니 됩니다.
  부모와 자식이 둘 다 함께 하나님께서 인정해 주시는 선택된 생명이 되지 못한다면 그 둘 사이의 관계에는 결정적인 약점이, 아니 치명적인 결함이 있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아무리 아빠의 골격을 가지고 아무리 엄마의 성격을 그대로 이어받고 있어도, 그 아이에게 부모가 가지고 있는 신앙이 들어있지 않으면 이미 그는 자기 자식 아닌 것입니다.
  아무리 내 생각에는 내 품에 안겨있는 내 자식 같아도 그 자녀를 진정 하나님의 택하신 아들딸로 키우지 못하면 이미 사단에게 빼앗겨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육신적인 정에만 만족하다가 그렇게 자녀를 영영히 잃어버리는 부모가 되어서야 하겠습니까?
  내 아들딸이 하나님께 구원받은 백성에 속했는지 아니면 만에 하나라도 아닌지를 염려할 줄 아는 부모, 그래서 자식을 먼저 하나님께 확실히 속한 생명으로 키우기 위하여 가정과 교회를 통하여 더욱 말씀과 기도로 양육하기를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않는 부모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2. 부모는 자식의 생이 하나님께 바쳐지는 제물이 되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이것은 창세기 22장에 기록된 유명한 사건에서 나타납니다.
  거기 1절부터 8절에 기록하기를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사환과 그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의 자기에게 지시하시는 곳으로 가더니 / 제 삼일에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그곳을 멀리 바라본지라 / 이에 아브라함이 사환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경배하고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하고 / 아브라함이 이에 번제 나무를 취하여 그 아들 이삭에게 지우고 자기는 불과 칼을 손에 들고 두 사람이 동행하더니 / 이삭이 그 아비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가로되 내 아버지여 하니 그가 가로되 내 아들아 내가 여기 있노라 이삭이 가로되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 아브라함이 가로되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하고 두 사람이 함께 나아가서"라고 기록했습니다.

  이 사건은 결국에 가서는 해피엔딩이 되었지만, 그때까지의 과정이란 아버지로서는 참으로 말할 수 없는 큰 고통이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니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순간부터 척 알아서 마음을 꽉 다지고 조금도 흔들림 없이 일사불란하게 순종만 했으려니 싶겠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이 명령을 내리시는 첫 마디에서부터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이라고 마치 일부러 정곡을 콕콕 아프게 찌르듯이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처럼 재삼 상기시켜 주시지 않아도 이삭이 아브라함에게 과연 어떤 존재인지는 두말할 필요조차 없는 것이었습니다.
  더욱이 아브라함으로서는 그 명령에 거절할만한 분명한 이유도 만약 하려고 했으면 내세울 수도 있었습니다.
  즉 이삭은 하나님께서 그를 통하여 큰 민족을 이루어주시겠다고 약속한 자식인데 이제 그를 제물로 바치라고 한다면 하나님 약속을 스스로 깨어버리는 결과이므로, 아브라함은 그같이 따질 명분도 있었던 것입니다.
  게다가 그에게는 그 마음의 고문이 계속되는 긴 시간까지 주어졌습니다.
  모리아산에 이르기까지 그는 사흘 동안 낮에 여행할 때나 밤에 잠자리에서나 끊임없이 괴로웠을 것임에 분명합니다.

  아브라함의 고통은 거기에서도 끝나지 아니하고 마지막 순간에 그의 아들 이삭의 한 마디 때문에 최고조에 달했습니다.
  함께 산으로 올라갈 때 이삭이 "아버지, 불과 나무는 여기 있는데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에 있읍니까?"라고 물어왔던 것입니다.
  이것은 이삭이 평소에 아버지 아브라함과 함께 하나님께 제사드리는 일에 익숙했음을 반영해 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바른 제사를 드리기 위해 필요한 준비물이 모자란다고 하는 그 순전한 아들의 말은 결단을 앞둔 아버지에게는 마지막 또 다른 시련이 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내 아브라함은 그 테스트에 합격하고 말았습니다.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는 하나님의 합격 선언을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 자기의 그 어떤 귀한 것이라도 제물로 드릴 자세가 되어 있는 사람이라면 그 무엇보다도 귀한 자기 자녀부터 이처럼 하나님께 제물로 바칠 줄 알아야 합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옛날 이삭의 경우처럼 오늘날의 우리 자식들을 결박하여 제단에 올리라고 하지는 않으십니다.
  하지만 부모는 자기 자식이 부모를 기쁘게 해 주기 위하여 있는 존재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을 섬기기 위하여 있는 태어난 존재인 것을 자각할 줄 알아야 합니다.

  자녀로 하여금 어릴 때부터 예배생활에 익숙해지도록 키우려하지 아니하고, 중고등학생 자녀가 주일에 SFC 성경공부에 참석하는 것을 공부시간 없앤다고 아까워하는 부모나 대학교에 들어간 자녀가 그 황금 시절을 교회중심으로 여러 가지 봉사에 바치면서 사는 것을 못마땅해 하는 부모는 이미 시험(test)이 미혹(temptation)이 되어버린 부모입니다.
  성공한 자식이 열심히 일하여 벌어온 돈이 주님께 바쳐지는 것을 아까워하는 부모는 그 자식을 평생 자기 자식으로 묶어놓을 수 있을지는 몰라도 결단코 하나님의 자녀로는 만들 수 없는 것을 깨달아야만 합니다.
  자식 열심히 키운답시고 그저 자기 노후나 잘 돌보아 주는 자식으로 만들려고 하는 부모야말로 지극히 이기적이고 악한 부모인 것입니다.

  아무리 자식이 사랑스럽고 또 훌륭하다 하더라도 그 자식의 정성과 힘과 시간과 재물이 하나님께 제물로 드려지는 것을 아까워하게 되면 그 부모는 결코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자가 아니라 이미 자식을 우상으로 섬기는 자가 아니겠습니까?
  자기의 사랑하는 자식의 생애가 오로지 하나님께 먼저 그리고 온전히 바쳐지는 것을 진심으로 기뻐하며 어릴 때부터 그같이 가르치고 연습시킬 줄 아는 부모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3. 부모는 자식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소망을 목표로 살아가도록 지도해야 합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이 이삭에게 부모로서 해준 마지막 교육이었습니다.
  창세기 24장 1절 이하 9절에 "아브라함이 나이 많아 늙었고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복을 주셨더라 / 아브라함이 자기 집 모든 소유를 맡은 늙은 종에게 이르되 청컨대 네 손을 내 환도뼈 밑에 넣으라 / 내가 너로 하늘의 하나님, 땅의 하나님이신 여호와를 가리켜 맹세하게 하노니 너는 나의 거하는 이 지방 가나안 족속의 딸 중에서 내 아들을 위하여 아내를 택하지 말고 / 내 고향 내 족속에게로 가서 내 아들 이삭을 위하여 아내를 택하라 / 종이 가로되 여자가 나를 좇아 이 땅으로 오고자 아니하거든 내가 주인의 아들을 주인의 나오신 땅으로 인도하여 돌아가리이까 / 아브라함이 그에게 이르되 삼가 내 아들을 그리로 데리고 돌아가지 말라 /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나를 내 아버지의 집과 내 본토에서 떠나게 하시고 내게 말씀하시며 내게 맹세하여 이르시기를 이 땅을 네 씨에게 주리라 하셨으니 그가 그 사자를 네 앞서 보내실지라 네가 거기서 내 아들을 위하여 아내를 택할지니라 / 만일 여자가 너를 좇아 오고자 아니하면 나의 이 맹세가 너와 상관이 없나니 오직 내 아들을 데리고 그리로 가지 말지니라 / 종이 이에 주인 아브라함의 환도뼈 아래 손을 넣고 이 일에 대하여 그에게 맹세하였더라"고 기록했습니다.

  성경에 아브라함이 죽기 전에 마지막 유언이나 축복을 이삭에게 어떻게 했는지는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지금 읽은 이 말씀을 통해 우리는 아브라함이 이삭에게 끝까지 당부해주었을 사실이 무엇인지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곧 이삭과 그의 자손은 하나님께서 그 가나안 땅에서 그들에게 내리실 미래의 축복만을 소망하며 살아야 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아들 이삭이 결혼하게 되었을 때 바로 이 점을 철두철미하게 염두에 두고 일을 처리했습니다.
  그는 우선 가나안 땅의 처녀를 이삭의 아내로 삼기를 원치 아니했습니다.
  두말할 것 없이 그것은 그들이 우상숭배자들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무리 얼굴로 예쁘고 성품도 곱고 학력이 높다 하더라도 아브라함에게는 점수가 되지 않았습니다.
  아들 이삭 역시 가나안 땅에서 '우거하는 객,' 즉 오늘날의 영주권자와 같은 신분으로 살고 있는 처지이니 그래도 본토 처녀와 결혼하면 현지생활에는 훨씬 더 유리하겠지만 그것 역시 아브라함은 전혀 개의치 않았습니다.
  세상없어도 일단 자기 고향의 집안, 즉 믿는 가정 출신이어야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의 원칙은 그 정도로만 끝난 것도 아니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며느리를 구해오기 위해 떠나려던 그 종이 "만일 좋은 신자 신부감을 발견해도 그 처녀가 가나안 땅으로 오기 싫어하면 어떻게 할까요? 그러면 주인의 아들 이삭을 그리로 이사시켜서 살도록 할까요?"라고 아주 현실적인 질문을 했습니다.
  그때 아브라함은 그것도 안 된다고 했던 것입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7, 8절에 있는 대로 "여호와께서 내게 맹세하여 말씀하시기를 이 땅을 네 후손에게 주겠다고 하셨으니 이 일이 꼭 제대로 되도록 인도하실 것이다. 만일 그렇지 않고 여자가 오려 하지 않으면 너는 아무 책임이 없다."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의 며느리가 단지 신자인 정도뿐 아니라, 더 나아가서 자기 아들과 함께 '하나님의 약속' 곧 가나안 땅에서 큰 민족을 이루리라는 약속을 함께 바라보고 목표로 삼고 살아갈 수 있는 동반자가 되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만약 그런 소망을 함께 나눌 수 없는 여자라면 적어도 이삭의 아내로 삼을 수는 없다는 것이 아브라함의 절대 양보할 수 없는 철칙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자식 내외가 그저 둘이서만 행복하게 잘 먹고 잘 살고 잘 사랑하고 사는 정도에서 끝나기를 바라지 않았습니다.
  그 소중한 외아들과 며느리로 하여금 자기가 평생토록 하나님의 약속 안에서 바라고 추구해 왔던 소망을 꼭 같이 나누게 함으로써 진정 최고 유업의 상속자들이 되도록 했던 것이었습니다.

  우리의 자녀들에게도 이런 차원 높은 소망을 안겨 줄 수 있는 부모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얘야, 지금 공부 열심히 하거라. 그래서 좋은 대학교에 가고 졸업해서 의사가 되거라. 변호사가 되거라. 그래서 어쨌든 돈만 잘 벌면 네 인생은 잘 되는 것이다." - 부모가 아들에게 주는 인생의 소망치고는 얼마나 쩨쩨한 것입니까?
  "여자는 어찌하든지 남편 잘 만나야 인생 제대로 풀리는 거란다. 너도 얼굴 성형수술만 조금하면 남자들이 줄줄이 따라올 테니까 꼭 예수 믿는 사람이어야 된다는 그 고집부터 제발 좀 버려라." - 부모가 딸의 장래 인생을 위해 줄 수 있는 조언치고는 너무 저질이지 않습니까?

  부모가 자식에게 가르쳐 주고 이어주는 소망이란 것이 그처럼 '부모가 못 다 이룬 인생 소원' 안에서만 맴돌고 있습니다.
  부모 자신은 주님 재림을 기다리며 산다고 하면서 자기 자식을 향해서는 그 소망의 길이가 갑자기 아주 짧아져버리고 그 폭이 그토록 좁아져버린다는 것은 뭐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더 큰 소망, 더 긴 소망을 자식의 심령에 항상 새겨 주고 영원한 진짜 소망에 자식의 인생 목적이 설정될 수 있도록 이끄는 부모가 되어야 합니다.
  자식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위대하신 구속사의 바탕 위에 금세의 인생의 설계도를 그리고서 그 언약을 따라 사는 성도에게 베풀어 주실 기업을 소망하면서 살도록 만드는 부모,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땅에 그 소망의 끝을 두지 않고 저 영원하신 하나님의 나라에 궁극적인 생명의 소망을 두고 살 수 있도록 이끌어갈 줄 아는 부모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님 여러분, 우리에게는 참으로 귀하고도 사랑스러운 자녀들이 있습니다.
  아침에 보아도 저녁에 또 보아도 절로 내 마음이 기뻐지는, 실로 웃음꽃의 보따리와도 같은 아들딸들입니다.
  실로 '쥐면 꺼질세라 불면 날아갈세라' 싶은 소중한 생명들입니다.

  하지만 그저 귀여워하고 사랑스러워하는 것만으로 부모가 다 되는 것은 아닙니다.
  자식을 부모에게만 기쁨을 주는 아이로 키우면 결국 그 아이는 결국 부모의 소원과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는 '작은 인생'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부모에게만 사랑스러운 아이가 되면 다른 어른 앞에는 버릇없고 다른 친구들과는 원만한 관계를 맺지 못하는 유아독존적인 인간이 되기 십상인 것입니다.
  부모가 귀여워하고 돌보아주는 데에만 익숙해져서 자라는 아이는 결국 사회에 나가서는 아무 힘을 못 쓰는 연약한 사람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부모에게뿐 아니라 학교 선생님에게 칭찬을 받는 아이가 되어야 훌륭한 인물이 될 것이고 주위 이웃들에게 평판이 좋은 아이가 되어야 정말 '큰 사람'으로 자라게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집안에서뿐 아니라 친구들 사이에서 인기가 있고 교회의 성도들 사이에서 흠모를 받는 아이가 되어야 정말 자랑스러운 아들딸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더욱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하나님께서 인정하시고 사랑하시는 아이가 될 때에는 두말할 필요조차 없을 것입니다.

  내 몸에서 태어났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영원한 내 자식이 되는 것은 아님을 기억하면서, 무엇보다도 내 자식이 하나님의 택함을 입은 자녀의 반열에서 떨어지지 아니하도록 신앙으로 양육하는 부모가 되어야 합니다.
  내 자식이 제 부모만 겨우 봉양하고 사는 옹졸한 사람으로 끝나지 않도록, 그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높이 섬기는, 모든 것을 먼저 하나님께 바치는 생을 살 수 있도록 바로 가르치시는 부모가 되어야 합니다.
  자녀들의 생의 목표를 곧 썩어지고 말 것에 갖다 붙이는 미련한 부모가 되지 말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견고하고도 영원한 소망을 자식에게 상속해 줄 줄 아는 부모가 되어야만, 우리는 진정 부모 노릇을 제대로 하는 부모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네 아들 이삭"을 "내 아들로 내게 바치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처럼 자기 자식을 먼저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사람으로 키움으로써, 실로 그 자랑스럽고 멋진 아들딸들을 인하여 평생 웃음을 짓고 영원한 기쁨을 누리는 성도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석기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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