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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가정의달] 가정의 의미 (창 2: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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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께 용서를 비는 이야기

10 남매의 장남으로 태어난 아버지. 열 명의 식구들을 위해 동분서주했지만, 그는 말단 공무원이었습니다. 생전 처음으로 새 옷을 사 입는데, 교복이었습니다. 그것 외에 청바지 하나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공부를 잘하면 사 주겠다는 약속을 받았습니다. 밤을 새워 공부했습니다. 드디어 아버지와 청바지를 사러 가는 날. 만원인줄 알았는데, 가게에 걸린 그 바지는 12,000원이었습니다. 기분 좋게 입고 돌아서는데, 아버지 얼굴이 난감했습니다. 눈길을 어디다 둘지 몰라 눈만 껌뻑거리며 손등을 부비는 모습이었습니다. 순간, “나 이 바지가 너무 커요.” 거짓말을 했습니다. 아버지의 얼굴에는 안도의 표정과 미안한 표정이 겹쳐 지나갔습니다. 이제 그 아버지의 나이가 된 필자는 아버지께 용서를 빕니다. “아버지, 철 없던 저를 용서해 주세요.”

가정은 하나님의 창조물입니다. 그냥 우연히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진화한 것도 아닙니다.

목적도 없이 뜻도 없이 그냥 그렇게 진화되었다고 믿기에는 가정은 너무 소중합니다.

‘하나님의 목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는 가정이 되어야 옳습니다. 힘써 가정을 지켜야 합니다. 다른 일에 수고하는 것보다 더 큰 수고를 여기 기울여야 합니다. 무엇보다 ‘기도’해야 합니다. “주여, 우리 가정을 지켜 주시옵소서. 파숫군보다 주님의 천사로 지켜주시기를 비옵나이다.”

시편 기자는 창조의 아름다움을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주 우리 하나님,
      주님의 이름이 온 땅에서
      어찌 그리 위엄이 넘치는지요?
      저 하늘 높이까지
      주님의 위엄 가득합니다.

      어린이와 젖먹이들까지도 그 입술로
      주님의 위엄을 찬양합니다.
      주님께서는
      원수와 복수하는 무리를 꺾으시고
      주님께 맞서는 자들을 막아 낼
      튼튼한 요새를 세우셨습니다.

      주님께서 손수 만드신 저 큰 하늘과
      주님께서 친히 달아 놓으신
      저 달과 별들을 내가 봅니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님께서 이렇게까지
      생각하여 주시며,
      사람의 아들이 무엇이기에
      주님께서 이렇게까지
      돌보아 주십니까?

      주님께서는 그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그에게 존귀하고 영화로운 왕관을
      씌워 주셨습니다.
      주님께서 손수 지으신 만물을
      다스리게 하시고,
      모든 것을
      그의 발 아래에 두셨습니다.

      크고 작은
      온갖 집짐승과 들짐승까지도
      하늘을 나는 새들과
      바다에서 놀고 있는 물고기와
      물길 따라 움직이는 모든 것을,
      사람이 다스리게 하셨습니다.

      주 우리의 하나님,
      주님의 이름이 온 땅에서
      어찌 그리 위엄이 넘치는지요?
          시편 8:1-9

한 치의 빈틈도 없이 하나님께서 세상을 지으셨습니다. 가정을 지으신 것도 그렇습니다.

‘잘못된 만남’은 없습니다. 생명을 주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제대로 만나게 해 주셨습니다. 가정을 지키기 위해 우리는 노력하고 또 노력해야 합니다. 기도하고 또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시험에 듭니다. 기도해야 옳습니다.

가정에서 받는 평가에 대해 주목합시다.

“집안에서 새는 바가지, 밖에서도 샌다.”
이 속담은 여러 가지를 함축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 주제와 관련해서 말하자면, “집안에서 받는 평가대로 나가서도 받는다,”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집안의 평가가 다는 아닙니다. 가정에서 누가 평가를 내립니다. 아버지입니까, 어머니입니까? 형제들 간의 평가입니까? 참고할 수 있지만, 절대적일 수 없습니다.,

사실, 가정의 평가가 대단히 중요한 것이 사실입니다. 자존심(self-esteem)의 근간은 가정의 평가입니다. 집 안에서 좋은 평가를 받는 사람은 사회에 나가서 어려움을 극복할 가능성이 대단히 높습니다. 사람들이 바른 평가를 내려 주지 않아도, “언젠가는 내 진면목을 보게 될 것이다!” 이런 자존심을 버리지 않습니다. 가정에서 인정받는 사람이 대체로 그렇습니다.

그렇지만, 가정도 완전하지 않습니다. 부모가 반대하는 음악을 해서 대성한 사람도 있습니다. 반대로 부모가 하라는 대로 하다가 지쳐 쓰러진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가정의 평가도 온전하지 않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평가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시는 것이 옳습니다.

집에서 새는 바가지라도 나가서 안 샐 수도 있다. ‘집’이라는 다이나믹스 내에 어떻게 반응하는가, 이것은 획일적으로 말할 수 없습니다. 인정받지 못하니까, 뻗대느라고 그렇게 하는 수가 있습니다. 집에서 인정해 준다면 훨씬 더 좋겠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다고 해도 기죽을 필요가 없습니다.

부모는 자녀를 버릴 수가 있습니다. 유기한다는 뜻이지만, 그 소중한 가치를 몰라준다는 말도 됩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오늘 설교는 “가정의 평가”에 초점을 둡니다. 여기까지 가기 위해서 나는 1. 학교의 평가와 2. 교회의 평가를 먼저 전하겠습니다. 그리고 가정으로 되돌아오겠습니다.

그 전에 ‘평가’라는 것의 본질을 잠깐 살펴보겠습니다. ‘평가’란 가치를 매기는 것입니다.

우리 이 시간 하나 인정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의 평가는 피상적이다.”
우리는 ‘첫 인상’에 대단히 크게 좌우됩니다.

이것저것 고르다가, 끝내 맨 처음 본 물건으로 되돌아갑니다. 진열대의 앞쪽에 둔 것이 잘 팔리는 이유입니다. 집을 살 때도 처음 본 것으로 되돌아갑니다. 미국 올 때 누가 공항에 ride 나왔는가가 그 사람의 미국 생활이 결정된다는 것도 그런 뜻입니다. 

그제 미국 방송 듣다가 어떤 20대 중반의 여성이 이성교제에 대한 상담을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 여자는 맥도날드 종업원으로 일하다가 남자를 만났습니다. 대단히 매력적인 남자였다고 했습니다. 상담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겉모습에 속는다고 지적했습니다. 10여명을 연쇄 살인한 남자도 대단히 매력적으로 생겼다고 했습니다. 첫인상이나 겉모습에 속지 말아야 합니다.

1. 학교의 평가

학교의 평가도 있습니다.
성적이란 학교의 평가 아닙니까?
졸업장도 그렇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이 다는 아닙니다. “학교에서 새는 바가지” 격입니다.

좋은 학생이라고 평가를 내렸는데 사회에 나가서 그렇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반대로 좋지 못한 평가를 받았지만, 사회에서 좋은 평가를 얻을 수도 있습니다.

다음 주에 오는 Jack M. Johnson 노회장은 하와이에서 고등학교까지 나왔습니다. 대학 가기 위해 뭍으로 올라온 경우입니다. 고등학교 때 화학 교사와 대화한 한 장면을 소개합니다.

하마      너는 커서 뭐가 될래?
잭      화학자가 되겠습니다.
하마      너는 그럴 자질이 없어. 다른 걸 해 보지 그러나? 역사 같은.
잭      아닙니다. 저는 꼭 화학자가 되고 싶습니다.
하마      아니야.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너는 아니야.

그런 그가 UC Berkeley에서 학부와 대학원을 나와 Ph.D.까지 받았습니다. 대단하지요? 친구 결혼식 때문에 하와이를 방문했습니다. 출신 고등학교를 찾아가 하마 선생을 만났습니다.

하마      오랜만이야, 잭. 그런데 자네 뭘 하고 지내나?
잭      UC Berkeley에서 화학을 공부하고 지금 연구실에 있습니다.
하마      그럴 리가! 뭔가 잘못됐어.

학교의 평가가 다는 아닙니다. 학교는 창조주 하나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만드신 하나님만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십니다.

그런데 Jack은 대단히 예외적인 사람입니다. 대개 학교가 평가를 내리면 정말 그런 줄로 알고 지냅니다. 이런 의미에서 미운 오리새끼로 그냥 일평생을 지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학교에서 피해를 입은 경우라고 하겠습니다. 

여러분 중 교육에 종사하는 분은 평가를 유보해야 합니다.
학생이거나 자녀가 학생인 분은 교사의 평가에 좌우되지 말아야 합니다. 교사의 평가는 참고하라는 뜻입니다. 물론 GPA도 교사의 평가의 일부분입니다.

2. 교회의 평가

교회는 하나님을 섬기는 공동체입니다. 여기서는 서로에 대한 올바른 평가를 내려야 합니다. 올바른 평가란, 하나님의 입장에서 내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꺼져가는 심지도 끄지 않으십니다. 상한 갈대도 꺾지 않으십니다. 다른 사람이 다 포기했어도 주님께서는 버리지 않으십니다.

하고자 하는 열망을 심어주어야 합니다.
진정으로 낫고자 하느냐?
무엇을 바라느냐?

사람은 지식이나 자질보다 열정이 더 중요합니다. 비전이 더 중요합니다.

축복 받은 가정은 건강합니다. 축복 받은 자녀는 복 받습니다. 주님의 축복을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교회에서 축복 받는 자리가 있습니다. 앞자리입니다.
일찍 오기 바랍니다. 거리가 멀수록 일찍 오고 가까이 살수록 늦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교회 가까이 살게 하신 것은 남들보다 일찍 교회 나와서 봉사하라는 명령이라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설마 하나님께서 “교회 늦게 나오라고” 교회 근처에 집을 주셨겠습니까?


3. 가정의 평가

아담과 하와 둘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서로 숨길 것이 없었다는 말입니다.

부부간에는 “투명성”이 보장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선악과를 따먹고 죄가 들어온 이후 그들은 서로 숨길 것이 생겼습니다. “옷”을 해서 입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서로 책임을 미뤘습니다.

많은 가정에서 자녀들이 좌절합니다. “너는 안돼!” 이런 평가 때문입니다.
많은 부부들이 실망합니다. 남과 비교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대로 살아!” “당신이 뭘!” 그런 건 정말 듣지 말아야 할 소리입니다.

가정 안에서의 평가는 ‘축복’이어야 합니다.
너는 잘 될 거다.
하나님의 복을 받고 자랐으니 잘 될 것이다.

이런 축복이 넘쳐야 하겠습니다.

아침에 축복해서 보내야 합니다.
저녁, 잠들기 전에 축복기도 해서 잠자리에 들게 해야 합니다. 분노를 품고 잠들게 해서는 안 됩니다. 하루 일과를 정리하고, 버릴 것은 버리게 해 주어야 합니다. 용서하고 잠들게 해야 합니다.
식사 때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할 수 있게 도와주어야 합니다.

노아는 세 명의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는 셈과 야벳에게 축복했습니다. 그러나 함에게는 저주를 내렸습니다.

함은 ‘가나안’ 족속의 조상입니다. 아버지의 저주를 따라 그는 영원한 벌을 받고 말았습니다.

아브라함은 축복의 조상입니다. 그는 이삭을 축복했습니다.

이삭은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에서와 야곱입니다. 에서는 축복을 경솔하게 여겼습니다. 야곱은 축복을 위해 목숨을 내걸었습니다. 장자의 명분을 팥죽 한 그릇에 팔아 넘긴 것입니다.

어머니의 도움을 받아 야곱은 장자로서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는 그 축복대로 이스라엘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에서도 소리쳐 울면서 축복을 구했습니다. 그러나 때가 이미 늦어버렸습니다. 결국 그가 받은 축복은 오히려 ‘저주’에 가까웠습니다.

자녀가 귀하면, 축복을 내리시기 바랍니다.

아이들 머리에 손을 얹고 축복해 주시기 바랍니다.
부모의 손이 머리에 올라가서 기도 받은 자녀는 달라도 많이 다릅니다.
이런 아이는 버림받지 않습니다. 어떻게 자기가 축복한 자녀를 버립니까? 그런 부모가 세상에 어디 있습니까?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

성경을 보면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을 두 종류로 분류가 가능합니다. 1. 팔짱을 끼고 서서 비판하는 사람들. 이들은 주님을 직접 뵙는 놀라운 축복을 받았으면서도 주님의 은혜를 경험하지 못했습니다. 구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2. 주님의 은혜를 간절히 사모한 사람들. 이들은 병이 나았습니다. 이들은 죽음에서 해방되었습니다.

주님께서 돌보아 주시기를 간절히 바란 사람들은 소리를 질렀습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님이시여!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어떤 여자는 12년 동안이나 혈루병으로 고생했습니다. 주님의 옷자락이라도 만지면 낫겠다는 믿음을 품었습니다. 사람들의 멸시와 박대에도 불구하고 주님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거기서 고침을 받았습니다.

38년 동안 누워 지내던 병자가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그를 만나시자마자 물으셨습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그 병자의 의지를 보시고 그를 고쳐 주셨습니다.

우리 생각에, “병자가 병이 낫는 소원 말고 또 다른 소원이 있으랴?” 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많은 병자들의 소원은 그 상태로 그냥 있으면서 사람들의 동정을 구하는 것입니다. 동정어린 눈빛을 그리워하는 것입니다. 변화를 두려워합니다. 병 고치고 사회에 나아가 경쟁하면서 살아가야 하는 것을 겁냅니다. 섬김을 받다가 이제는 섬겨야 하는 일에 부담을 느낍니다. 그러나 믿음 있는 사람은 그 모든 것을 해냅니다. 주님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입니다.

가정

하나님께서 세우신 가정은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자존심을 세워주고, 이해하고 용서합니다. 밖에서 일하고 돌아온 남편을 생각해서 정성껏 차린 음식으로 피로를 풀게 해 줍니다. 깨끗하게 정리된 집안으로 남편이 들어올 때 기분 좋게 해 줍니다. 또, 하루 종일 아이와 씨름한 아내를 위해 맛있는 케익을 사가지고 들어갑니다.

죄가 가정에 틈타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혹시라도 죄가 생기면 ‘나눠야’ 합니다. 죄는 투명성 앞에 우선 한풀 꺾입니다. 소금을 친 것과 비슷합니다. 그 다음에 할 일은 주님 앞에 회개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가족이 가족 된 것은 서로를 위해 ‘기도해 주기’ 위해서입니다. 영적인 충만함을 서로 도와주기 위해서입니다. 부모-자식 간에, 부부간에 참된 바라는 소망은 ‘영적인 것’이어야 합니다. 육신적인 것을 서로 기대한다면 그것은 ‘비지니스’입니다.

축복의 언어생활을 해야 하겠습니다. 만나는 누구라도 우리는 축복해야 합니다. 그중에 가장 가까운 사람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그들이 우리를 만나서 복 받아야 합니다.

가정에서 인정받는 사람이 나가서 힘있게 사역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가정에서 인정받아야 합니다.

물론 가정의 인정 없어도, 하나님께서 그를 돌보실 것입니다.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이다.” (시편 27:10).

그러나 그런 비극은 오지 않기를 바랍니다. 부모도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하고, 하나님께서도 기쁘신 가운데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그런 아름다움이 넘치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오늘 벽에 걸린 표어 한번 읽어봅시다.
표어: 따뜻한 금문교회, 행복한 금문가족.

기도
은혜로우신 하나님. 가정생활에 복이 있게 하옵소서. 가정에 축복하고 축복받는 아름다움이 그치지 않게 하옵소서. 이 가정의 주일에 주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조은석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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