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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어린이주일] 오직 교양과 훈계로 (엡 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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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지’라는 소설을 쓴 [펄벅] 여사를 우리는 잘 압니다.
그녀는 ‘어머니의 초상’이라는 작품을 써서 노벨 문학상을 받았습니다.
그 작품 속에서 그녀는 자기의 어머니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22세에 결혼한 그녀의 어머니는 선교사인 남편을 따라서 전혀 알지 못하는 중국대륙으로 갑니다.
미지의 세계에서 두려움과 굶주림 속에서 선교하며 일곱 자녀를 낳았지만, 네 아이는 병들어 어머니의 품에서 죽습니다.
그러나 그 고통 속에서도 그녀의 어머니는 믿음으로 세 아이를 정성껏 키웁니다.
아이들에게 소망을 주기 위해 그는 절대 고통스러운 빛을 띠지 않고, 아이들을 기쁘게 하기 위해 쾌활하고 즐거운 노래를 부르고 가르치고, 잡지나 책에서 재미있는 그림들을 오려다가 아이들의 방에 부쳐주고....
오직 아이들과 함께 즐거운 이야기, 즐거운 노래를 부르며 시간을 보냅니다.
그리고 하나님 말씀을 들려줍니다.
혹 아이들이 잘못했노라면 엄격하게 훈계하고 매를 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감정을 품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그것이 사랑의 매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러한 어머니의 밝은 얼굴 때문에 한 번도 어머니가 고생하고 괴로워 한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아이들은 어머니의 얼굴과 마음을 보면서 밝은 얼굴과 밝은 마음으로 자랐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지금 자녀를 어떻게 양육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자녀들, 우리에게 맡겨진 어린 영혼들을 교육하기 위해 많은 것을 준비하고 내어놓습니다.
좋은 학용품, 원하는 옷과 신, 이런 저런 과외공부들.....
내 아이, 내게 맡겨준 아이를 사랑하고 잘 키워야 한다는 생각에 하고 있는 일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과연 내가 성경적인 바른 양육을 하고 있는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자녀로 세워가고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방법은 오히려 아이들을 힘들고 지치게 만드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아이들을 분노케 하고 반항하게 하는 그러나 어쩔 수 없는 자기의 처지에서 억지로 공부하고 억지로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여기서 진정한 양육이 이루어질 지 의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 시대를 향하여 주님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자녀들, 우리에게 맡겨진 어린 영혼들을 어떻게 양육해야 할 것인지를 가르쳐 주십니다.

1. ‘노엽게 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
노엽게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노엽게 한다는 것은 아이들을 격노케 하거나 분개하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
아이들로 분노하고 격노케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먼저 자녀들을 양육하는데 있어서, 아이들을 가르치는데 있어서 해야 할 일은 아이들을 분노하게 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 본문을 쓰고 있는 당시의 배경은 이렇습니다.
당시의 어른의 권위는 절대적입니다.
로마 시대에는 ‘파트리아 포테스타’라는 절대 부권이 있었습니다.
이 부권은 가족들에게 절대 권력을 가지고 있어서, 아버지 마음대로 할 수 있었습니다.
가족들을 노예로 팔기도 하고, 쇠사슬에 묶어 일을 시키기도 하고, 심지어는 죽일 수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갓 태어난 자녀를 버릴 수도 있었습니다.
자녀가 태어나면 아버지 발밑에 놓였습니다.
아버지가 아이를 보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내다 버렸습니다.
이것은 공공연히 저질러진 일입니다.
이 부권은 아버지가 살아있는 동안 지속되었습니다.
아무리 장성한 자식이라 하더라도 아버지가 살아있는 한 아버지의 권위 속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백커]라는 사람은 “이 법은 로마의 최대의 과오”라고 했습니다.

그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오늘 사도 바울은 교회를 향하여 자녀 양육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
자녀에 대한 이 배려의 말씀은 매우 다른 차원의 말씀이요 충격적인 말씀이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당연한 교훈이요 방법으로 받아들이지만, 당시의 시대적 배경으로 이것은 정말 세상과 전혀 다른 법이요, 진리였습니다.
그래서 기독교가 힘이 있었습니다.

오늘 이 시대도 마찬가지입니다.
로마시대와 오늘의 이 시대는 분명히 다릅니다.
인권이 다르고 차원도 다릅니다.
자녀교육에 대한 수많은 이론과 방법들이 이미 나와 있는 시대입니다.

그러나 이 시대에 사는 우리는 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적용해야 합니다.
왜요?
방법과 내용은 다르지만 여전히 어른인 우리는 아이들을 분노케 하기 때문입니다.
이 시대의 상황이 그리고 어른의 권위와 편견, 무지, 욕심이 아이들을 분노케 하기 때문입니다.

교육전문가들에 의하면 아이들은 이런 경우를 분노하고 노여워하게 된다고 합니다.

1). 업신여김을 받을 때, 무시당할 때, 분노하게 된다고 합니다.
한 어머니가 삼남매를 기르고 있었습니다.
아이들이 얼마나 시끄럽고 북적거리겠어요.
야단쳐도 잘 듣지 않습니다.
매를 들어도 잠시 뿐, 시간이 지나면 또 난리를 칩니다.
한 아이가 ‘엄마!’하고 소리칩니다.
조금 있다가 다른 아이가 ‘엄마!’하고 또 소리칩니다.
결국 안 되겠는지, 어머니가 아이들을 몰아 세워놓고 이렇게 말합니다.
“야! 이 녀석들아, 너희들 같은 애들 처음 본다. 꼴도 보기 싫으니 내 앞에서 없어져. 나를 엄마라고 부르지 마, 이제부터 나는 너희들 엄마 아냐”하고 한바탕 한 후에 내 보냈습니다.
조금 있다가 한 아이가 이렇게 부르더랍니다.
“아줌마! 밥 주세요”

무시당할 때, 상처받고 분노하며, 반항하게 되는 아이들에 대한 풍자입니다.

2). 너무 피곤할 때도 분노하게 된답니다.
요즘 아이들은 정말 피곤합니다.
아이들을 가만히 관찰해보니 학교 수업 후 몇 가지 과외를 하는지 모릅니다.
이것이 아이를 분노케 합니다.

3). 이해해 주지 않을 때도 분노하게 됩니다.
한 조사기관에서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설문을 해보았는데, 어린이날 받고 싶은 선물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어떤 대답들이 나온 줄 아십니까?
책, 학용품...... 뭐 이런 것을 생각하고 있는 어른들과 선생님들이 있다면 이미 어린이들하고 커뮤니케이션의 단절이 온 것입니다.
부모들은 아이들에게 책과 학용품 등을 주고 싶다고 대답한 반면 아이들의 대답에는 순위 안에 끼지도 못했습니다..
뭔 줄 아세요?
1위가 핸드폰입니다.
그리고 인라인 스케이트, 컴퓨터, 작동해서 움직이는 완구, 브랜드 상품....
아이들의 생각과 관심이 이렇습니다.

그런데 어른들은 자기의 기준, 자기 좋은 것으로 자기 가치관으로 아이들에게 요구하려고 합니다.
그러니 이런 아이들의 사고와 관심,..... 이것을 어른들이 따라가지를 못합니다.
그러다 보니 이해하지 못합니다.
이해하지 못하니 자연히 아이들을 노엽게 합니다.
‘쪼그만 게 핸드폰이 왜 필요해?’ 하구 윽박지르지 말고, 핸드폰의 용도와 가치를 설명해 주고, ‘그러니 좀 더 크면 핸드폰을 사줄게’하는 것이 어떨까요? 

4. 또한 편애할 때, 자기의 다른 형제들보다, 다른 사람들보다 자신이 무관심 당하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면 격노케 된다고 합니다.
이러한 예는 성경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야곱]과 [에서] 중 [리브가]의 편애를 받은 사람은 [야곱]입니다.
[야곱]은 어머니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대신, [에서]는 아버지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남자답고 사냥을 잘하기에 [이삭]은 [에서]를 좋아했습니다.
이 두 사람이 편애를 받다보니 형제간에 큰 불화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야곱]의 아들들도 그렇습니다.
[야곱]은 특별히 [라헬]의 핏줄인 [요셉]을 사랑했습니다.
특별히 [요셉]에게만 채색 옷을 입히고, 좋은 음식을 먹이고.... 그러다 보니 다른 형제들이 질투하고 분노합니다.
그러한 모습이 성경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5. 또 하나는 불화입니다.
가정불화, 인간관계의 불화, 이것은 아이들에게 불안감을 주면서 심리적으로 부모를 두려워하고 분노하게 합니다.
부부간에 관계가 원만치 못한 가정의 자녀들은 사회성이나 대인관계가 잘 되지 않습니다.
공동체에 잘 적응하지 못하고 장차 온전한 가적을 이루기 힘듭니다.

동성애자들의 경우 성 염색채의 문제로 동성애자가 되는 경우들이지만, 지나치게 엄격한 집안의 아이, 가정불화로 인한 환경에서 자란 사람들이 동성애자가 되는 경우들이 많다고 합니다.

6. 이외에도 외로움, 주장, 불의 등 많은 원인들이 있습니다.
아이들에게 이러한 감정이 계속되고, 그것이 골이 깊을 때, 그 위에 아무리 좋은 것을 주려해도 그 인격은 바로 자랄 수 없습니다.
마치 사상누각과 같습니다.
모래 위에 지은 집과 같다는 말입니다.
모래 위에 아무리 집을 잘 지은들 소용없습니다.
여러분의 자녀들, 여러분이 양육하고 함께 하는 아이들을 격노케 하지 마세요.
그 인격과 감정을 짓밟는 일을 하지 마세요.

‘시카코 대학’의 교수 [벤자민 볼룸]이 학자들, 예술가들, 운동선수들, 흔히 말해 성공했다고 하는 존경받는 사람들 120명을 조사해 보았다고 합니다.
그 결과 이러한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첫째로 아이들을 가르칠 때 많이 칭찬하라.
둘째로 가르치기는 하되 지나치게 나무라지 말라. 곳 아이로 격노하게 하지 말라.

아이들을 나무라면 오히려 정신 차리고 똑똑해지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 대해 부정적이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오히려 열등해집니다.
비록 실수를 하고 잘못을 해도 분노하지 않게 가르치는 방법을 택해야 합니다.
그것을 하나님께서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아비들아 네 자녀를 노엽게 말라...”

2. ‘주의 교양과 훈계로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제는 적극적인 차원에서 이렇게 양육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주의 교양과 훈계로써 하라”
노여워하지 말게 하라는 것은 소극적인 면에서입니다.
적극적인 면에서의 교육과 양육은 교양과 훈계로 하는 것입니다.

먼저 교양으로 하는 것입니다.
‘교양’이라는 말은, ‘아이’라는 말과, ‘교육’, ‘훈련’, ‘징계’라는 말이 합성된 것인데, 곧 ‘책벌(責罰)을 통한 훈련’을 의미합니다.
곧 의와 사랑을 통해서 교육하라는 것입니다.
아이들을 양육할 때는 노엽게 하는 징계, 책벌이 아니라 올바른 징계를 통해서 자녀가 잘한 것을 깨닫고 뉘우치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훈련 방법은 당근과 채찍입니다.
잘했을 때는 축복 하시고 잘못했을 때는 엄격하게 징계하십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을 바로 섬길 때는 엄청난 복을 주십니다.
그러나 저들이 하나님을 저버리고 멀리할 때는 징계하십니다.

자녀들을 향한 부모의 훈련도 마찬가지입니다.
자녀들의 잘못에 대해 징계를 할 수 있어야 합니다.
히 12장에 보면 징계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 하심이니라 하였으니”(히 12:5-6)

사랑의 차원에서 징계하라는 것입니다.

잠언 13:24절에서 말씀하십니다.
“초달을 차마 못하는 자는 그 자식을 미워함이라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징계하느니라.”(잠 13:24)
적절한 징계를 통한 양육은 자녀에게 지혜를 줍니다.

두 번째는 훈계로 하는 것입니다.

‘훈계’라는 말은, ‘정신, 마음, 이성’을 의미하는 말과 ‘배치하다, 놓다’는 말이 어우러져 쓰여 진 말로 ‘충고’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곧 말로서 교육하고 훈련하는 것입니다.
잔소리가 아닌 진지함을 가진 말을 통해 양육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교양은 행위적인 것입니다.
구체적인 행위를 통하여 양육하라는 것이라면 훈계는 진실 된, 진실한 말로서 양육하라는 것입니다.
자녀들이 잘했을 때는 분명하게 인정해 주고, 칭찬해주고, 잘못했을 때는 분명한 어조로 진지하게 책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옳은 것은 옳다, 그른 것은 잘못되었음을 분명히 가르치는 것입니다.
잠언 22:6절에서 말씀합니다.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잠 22:6)

[엘리] 제사장의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제사장임에도 불구하고 모든 사람들에게 비난받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성전에 드려진 예물을 자기 것으로 삼았고, 성전에서 봉사하는 여인들을 탐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 [엘리] 제사장은 자식들을 바로 훈계하지 못합니다.
결국, 두 아들을 하나님께서 죽이기로 작정하십니다.
그리고 그들은 전쟁터에서 죽고 맙니다.

여러분, 훈계하십시오.
잘못된 것에 대해서는 넘어가지 말고 엄격히 훈계할 때 바른 길을 찾게 되고 평생에 그 길을 가게 될 것입니다.

3. ‘주의 것’으로 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분명히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신뢰받지 못하는 체벌과 훈계는 분노로 가게 됩니다.
우리는 아이들 앞에서 믿음과 사랑을 통하여 훈계하고 양육해야 합니다.
신뢰받지 못하는 교육은 교육이 될 수 없습니다.
신뢰를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에 ‘주의 것’으로 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나의 기준, 나의 마음이 아닙니다.
“주의 교양과 훈계”로 하라고 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가르침, 주님의 말씀, 주님의 마음으로 하라는 것입니다.

그리할 때 올바른 양육이 이루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신뢰받는 양육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린아이들을 대하실 때 성스러움을 가지고 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어린아이들을 대하실 때 경외심을 가지셨을 뿐 아니라 자신과 동일시하시기까지 하셨습니다.
어린아이들을 전심으로 사랑하시는 마음에서 아이들을 존중하며 그 아이들을 축복하셨습니다.
아이들을 존중하며 사랑하는 마음, 진심으로 사랑하는 마음, 그 마음이 필요합니다.
주님의 마음으로 , 주님의 그 사랑으로 양육할 때 어떠한 조건이라 할지라도 바른 양육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저는 지금까지 목회를 하면서 크게 깨달은 것이 하나 있습니다.
모든 양육은 사랑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프로그램, 아무리 좋은 강사, 아무리 좋은 교재 등이 있다 할지라도 사랑 없는 양육은 폼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목자가 양을 돌보듯이 한 사람 한 사람을 기도하고 돌 보면서 양육해 나갈 때 비로소 열매가 바로 맺힌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주님의 마음으로, 주님의 사랑으로 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교회 여러분!
여러분의 자녀를, 여러분에게 맡겨진 어린 영혼들을, 주의 것으로 하시기를 바랍니다.
주의 사랑으로 하십시오.
주의 마음으로 양육하십시오.
주의 사랑으로 징계하고 주의 사랑으로 교훈하며 주의 사랑으로 칭찬하고 용기를 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의 아이들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아들들로 바로 양육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 쓰임 받는 아이들이 될 줄로 믿습니다. -아멘-
(박영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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