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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르에서 떠나 (창 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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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의 달이다. 귀한 가정을 이루고, 모든 문제들이 하나님의 말씀과 예배 가운데서 해결되고 회복되기를 바란다. 세상의 역사가들은 나름대로 역사를 바라다 보는 눈이 있다. 정치적, 경제적, 주요 Politics, International Politics등 수많은 견해들이 있지만 하나님이 세상을 어떻게 보시는지가 중요하다. 알파이며 오메가이신 하나님께서 세상을 어떻게 보시는지가 우리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인간의 역사를 당신의 Kingdom의 역사로 보신다. 창세기의 역사에서 하나님은 온 인류에게 당신의 꿈과 비전을 주시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을 볼 수 있다. 그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으며, 그 나라가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어떻게 펼쳐지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그리고 계시록을 통해서 온 나라와 온 우주가 어떻게 운행될 것이라는 것도 알 수 있다. 이것이 바로 Kingdom of God이고 이것이 하나님의 시각이며 그 분의 촛점인 것이다. 하나님의 Kingdom을 이루어 드리는 것은 우리의 몫이다. 하나님은 우리들이 보기에 작고 약한 존재를 사용하신다. 세상이 작다고 하는 이스라엘을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나라를 소개하시고 이루어 가셨고, 신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을 통해서 구원을 이루셨다. 이와 같이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Kingdom Worker는 작고 약한 자들이다. 하나님은 이들에게 highlight을 집중시키고 계신 것이다. 그들 중에 아브라함 만큼 큰 인물도 없었다. 하나님은 그를 통해서 그의 후손들을 세우셨고 그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셨다. 아브라함은 정말로 중요한 인물이다. 창세기 11장까지는 역사의 흐름이 정말로 빠르게 진행되었다. 하지만 12장에 와서는 그 흐름이 천천히 흐르고 있다. 그리고 그에게 촛점을 맞추어서 많은 분량의 역사가 소개되고 있다. 우리 모두는 그의 영적인 자녀들이기 때문에 그를 보고 깨닫고 배워야 한다. 그의 결단, 회복, 그리고 그에게 주어진 언약을 보고 오늘을 사는 우리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나라를 펼쳐 나아가야 할 것인지를 배워야 한다. ‘빠삐용’이라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기억한다. 빠삐용은 그곳을 탈출하기 직전에 그의 친구에게 ‘나에게 가장 큰 비극은 인생의 낭비이다.’라고 말한다. 그 말은 정말로 공감이 가는 말이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우리들에게 있어서 우리 인생의 낭비는 큰 비극이 아닐 수 없다. 주의 나라에서는 섬기는 자가 큰 자라고 했다. 우리가 바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큰 일을 해야 할 성도들이다. 하나님은 우리들이 아브라함의 자손들로서 역사의 획을 그으라고 요구하신다. 신약의 처음인 마태복음도 아브라함으로 시작하고 있다. 오늘부터 당분간 그가 어떻게 하나님의 역사를 시작하고 진행해 왔는지를 이야기 할 것이다. 그러면서 우리 모두의 영적인 위치와 역할을 조명해 볼 것이다. 오늘 말씀에서 한가지 먼저 강조할 것은 그가 우르를 떠났다는 사실이다. 떠남으로 인해서 그에게 복을 주셨다는 사실에 집중하자. 1절에는 ‘떠나서 지시할 땅으로 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있고, 2,3절에는 하나님이 축복하시겠다는 언약이 나오고, 4,5절에는 명령을 좇아 행하는 아브라함의 모습이 나온다. 이같이 아브라함의 Story는 우르를 떠남으로부터 시작된다. 그 뜻이 무엇인지를 살펴보자.

(1)죄악에서 떠남을 의미한다.
그가 자란 곳(우르)는 우상이 많은 곳이었고 특히 달의 신(Moon’s god)의 중심지였다. 그의 아버지는 ‘데라’였는데 그 이름에도 그 신의 이름을 높이는 의미가 담겨있다. 하나님은 그 곳을 떠나야 하나님의 계획과 꿈을 보여주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과 동행할지라도 우리의 주위가 우르 같은 곳이라면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영성과 꿈을 놓칠 수밖에 없다. 물론 우리는 세상에 들어가서 그들과 더불어서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러나 세상에 들어갈 때에 죄악을 완전히 끊는 결단이 있어야 한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자신과 세상이 원하는 모든 것을 끊어야 한다. 언젠가 롯을 묵상한 적이 있다. 그는 별 볼일이 없어 보였다. 그는 기름진 땅, 소돔과 고모라를 선택했었다. 하지만 그는 그 땅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 것처럼 보였다. 그는 한사람도 구원시킬 수 없었다. 오히려 그의 가족마저도 실패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그곳에 물들어 살았고 믿는 자로서 그곳에 아무런 흔적도 남길 수 없었다. 그러나 베드로후서2장7절에는 그가 의로운 자라고 하였고 그가 그 주위로 인해서 고통했다고 하였다. 그는 죄악 속에 있었던 소돔과 고모라의 문제를 보고 애통했고 나름대로 무척 노력했다. 그의 문제는 무엇인가? 그의 문제는 그 곳을 떠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사람이었고 의로운 자이었지만 오히려 하나님이 주신 날개를 펴보지도 못한 자이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주위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사람처럼 안타까운 사람도 없을 것이다. 지난 주에 나눈 말씀중 디모데전서6장11절을 기억해보자.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좇으며’라고 하였다. 먼저 피하는 것이다. 그런 후에 우리가 좇을 것이 있다는 뜻이다. 그곳을 도망치라는 것이다. 어둡고 부패한 곳에 앉아서 주기도문과 사고신경을 외운다면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겉옷을 벗어버리고 그곳에서 도망친 요셉처럼 우선 그곳을 피해야 한다. 주기도문에는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시고’라는 말이 나온다. 그러나 원문을 보면 시험의 자리에 아예 들어가지도 말게 해달라는 뜻이다. 회개의 의미는 마음과 심장의 방향을 완전히 바꾸라는 뜻이다. 우르에서 떠나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우리들이 떠나야 하는 우르는 과연 무엇인가? 성령이 주시는 conviction은 무엇인가? 반드시 그렇게 해야한다. 동의하는 것으로 끝나서는 아무 의미가 없다.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면 교역자나 영적인 Leader를 찾아가서 도움을 청하는 것이 좋다. 우르에서 떠나려면 먼저 결단이 필요하다. 생각으로 동의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삶으로 행동으로 결단하고 이를 실천하자.

(2)편안한 자리에서 떠나라
1절에서 하나님은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나라고 요구하신다. 나의 편안한 자리를 떠나라는 뜻이다. 이곳에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고 그 분의 비전도 볼 수가 없다. ‘편안’과 ‘평안’은 완전히 다른 말이다. 하나님이 주시고 싶은 것은 평안이지 편안이 아니다. ‘편안’은 우리의 영성에 큰 적이 될 수 있다. C.S. Lewis가 쓴 책 중에 마귀들에 관한 재미있는 책이 있다. 풋내나는 조카마귀가 교회를 공격하여 좌절시키려고 시험을 주는데 잘 되지 않았다. 그래서 하루는 삼촌마귀에게 편지를 써서 도움을 청하였다. 그리고 다시 교회를 향해서 더 심한 시험을 주니까 성도들이 더 열심히 기도하여 그 어려움을 극복하였다. 핍박과 박해를 주었더니 이제는 아예 순교하는 자가 나오고 날이 가면 갈수록 교회는 더 강건해졌다. 조카마귀는 다시 삼촌마귀에게 편지를 써서 방법을 알려달라고 청하니 삼촌마귀가 한가지 묘책을 주었다. 그것은 ‘가만히 놔두라’는 것이었다. 교회는 편안히 가만히 놓아두면 힘을 잃는다. 그것이 사실이다. 편안히 있으면 죽는 것이 우리 성도들이고 우리의 영성이다. 미국에서 가장 부유한 동네 중에 Marine County라는 곳이 있다. 그곳은 샌프란시스코 위에 위치해 있고 정말로 기막히게 아름다운 동네이다. 하지만 이곳은 영적으로 가장 타락한 곳이기도 하다. 교회가 부흥되지 않는 곳이고 이혼과 자살이 가장 많은 곳이기도 하다. 이곳이 바로 ‘편안’한 곳이다. 여호수아 시대는 가장 영적으로 흠이 없었던 때였다. 그러나 그들은 신앙의 계승에 실패하였고 그들의 다음 시대가 바로 사사기로 이어졌으며 역사상 가장 어두운 암흑의 시대를 맞게 되었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그곳에서 일어나서 떠나라고 하신다. 유럽교회들은 부흥기를 거친 후 교회마다 어려움을 겪고 부흥의 역사가 중단되는 시대를 맞았다. 한국교회도 다르지 않다. 한국교회는 경제적인 부흥이 있은 후 삶이 편안해지니 교회의 부흥도 중단되는 것 같다. 우리에게는 무엇이 필요한가? 하나님의 지상명령(Great Commission)이다. 이것이 중단되면 부흥이 중단되며 우리의 영성이 죽는다. 초대교회가 그렇지 않았는가? 그들이 하나님의 지상명령과 사명을 잃었을 때에 편안해지고 그들이 예루살렘에 안주하게 되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을 흐트러 버리셨다. 러시아는 한때 가장 많은 성도들과 가장 많은 교회를 가지고 있었다. 볼세비키혁명은 그들이 지상명령을 잃고 안주하게 되었을 때에 일어났다. 그들은 주위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하게 되었다. 그곳의 종교지도자들은 비본질적인 것들에 집중하고 있었다. 예를 들어, 축도할 때에 손을 얼만큼 들어야 하는지, 어떤 색깔의 옷을 입어야 하는지, 성수에 파리가 빠지면 성수가 더러워지는 것인가 아니면 파리가 성스럽게 되는 것인가… 이렇게 우스꽝스런 일에 정신을 팔게 되었다. 이민교회로서 우리는 무엇을 바라보고 무엇을 계승해야 하는가? 우리는 2세와 3세들에게 Great Commission을 계승해야 한다. 선교와 전도와 제자훈련을 이어주면서 열방을 향한 비전을 계승해야 한다. 그렇지 못한다면 우리 모두는 안주하게 된다. ‘Comfort Zone’을 지나서 ‘Great Commission’으로 나아가야 한다. 우르를 떠난다는 것을 이런 의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향해서 나아가야 하는가?

(3)우리는 약속의 자리를 향해서 나아가야 한다.
하나님의 약속이 있는 그 자리로 담대히 나아가야 한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약속의 청사진을 주셨다. 그는 하나님의 약속 안에 그의 인생과 운명과 그 가족까지 던졌다. 로마서4장20-21절을 보라.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라고 하셨다. 그 약속을 믿고 그것을 이루실 하나님을 믿고 나아가자. 아브라함의 믿음은 약속을 붙잡는 것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주시고 믿는 누구든지 구원하시겠다는 약속을 믿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그 무엇도 끊을 수 없다는 언약을 믿고, 힘들고 어려워도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약속을 믿고, 교회를 통해서 음부의 권세를 이길 것이라는 언약도 믿고 나아가는 것이 믿음이다. 우리가 경제, 신분, 건강의 문제를 많이 안고 있다하여도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이루어 드리는 것이 약속을 믿는 성도의 자세이다. 믿음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것이다. 마지막 때가 되어서 3세대에게 하나님의 영을 부어 주시고 하나님의 비전을 볼 수 있게 될 것이라는 약속을 믿는 것이다. 마지막 때에 반드시 온 천하에 하나님의 복음이 펼쳐질 것이라는 약속을 믿고 따르는 것이 믿음이다. 이민생활의 어려움과 고통과 아픔 속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피상적이고 일시적인 치유는 큰 의미가 없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도 먼저 주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할 줄 아는 것, 그것이 근원적이고 진정한 치료법이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모습을 본 받아야 하며 오늘도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 영국을 방문했을 때에 수많은 영웅들이 묻혀있는 한 장소를 가보았다. 영웅들은 그곳에 묻히기를 원했을 것이다. ‘묻히기를 원하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는가? 우리의 목적과 소망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꿈과 비전을 갖고 사는 것이다. 그래서 우르를 떠나야 한다. 죄에서 떠나고 편안한 자리에서 떠나서 약속의 자리를 향하여 나아가는 모든 성도가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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