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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가정의달] 행복한 가정을 위한 조건 (잠 1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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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서 가정처럼 좋은 곳은 없습니다. 그 이유는, 가정은 우리의 안식처요 보금자리이기 때문입니다. 가정은 집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거주하는 집이 크건 작건, 호화롭건 초라하건 그런 것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가정을 가정답게 만드는 것은 건물이나 경제적인 조건이 아니라 가족에 대한 신뢰와 사랑입니다. 가정에서 가족 사이에 존재하는 신뢰와 사랑이 가정을 가정답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가정은 이 사회를 이루는 가장 기본적인 공동체이므로 건실한 가정이 많아져야 그 사회가 건강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반대로, 상처입고 병든 가정이 많은 사회는 건강하지 못합니다.

행복한 가정은 모든 사람이 바라는 바지만, 현실은 행복과 거리가 먼 가정이 적지 않습니다. 가족 사이에 신뢰 대신에 의심이, 사랑 대신에 미움이, 화목 대신에 불화가 판을 친다면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면 작은 천국과 같아야 할 가정이 지옥이 되고 말 것입니다.

우리가 한 가지 알아둘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행복한 가정은 저절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저절로 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행복한 가정을 위해서도 필요한 조건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 조건을 알고 실천할 때 우리 가정은 행복의 보금자리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첫 번째로, 남편과 아내가 사랑으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가정은 꽃과 같아서 심고 가꾸는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땅에 씨만 뿌려놓는다고 싹이 나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괭이나 삽으로 땅을 파서 돌이나 나무뿌리와 같은 것들을 없앤 후에 부엽토와 같은 영양분이 있는 흙을 섞어서 보드랍고 기름진 토양을 만든 다음, 정성껏 씨앗을 심고, 매일 같이 물을 주어야 합니다. 싹이 나서 자라는 과정에도 해충을 잡아주고 병에 걸리지 않도록 보살펴야 합니다.

마치 어린아이를 돌보듯이 하지 않으면 말라 죽고 맙니다. 가정 역시 살아있는 식물과 같아서 사랑을 갖고 정성껏 보살피지 않으면 금방 피폐해지고 맙니다.

가정이 상처 입고 병든 데 대한 책임은 가족 모두에게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일차적인 책임은 가정의 핵심 구성원인 부부에게 있습니다. 행복한 가정은 부부가 사랑으로 하나 될 때만 가능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인류의 조상인 아담을 창조하시되 하나님의 모양과 형상대로 지으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보시기에 어딘가 부족한 듯이 보였습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그 이유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아셨습니다. 창세기 2장 18절에 보니,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아무리 잘난 사람이라도 혼자서는 완전하지 못함을 알아야 합니다. 남자는 여자가 돕는 배필로서 함께 할 때 비로소 온전해 질 수 있습니다. 간혹 보면, 자기를  내세우고 아내를 무시하는 남편들이 있지만, 그것은 큰 착각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같이, 남편은 아내가 있으므로 완전해 진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하와를 창조하시되 그냥 흙을 빚어서 만들지 않으시고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신 후 그의 갈빗대 하나를 취하셔서 그것으로 여자를 만드셨습니다. 머리뼈나 다리뼈가 아닌 가슴에서 갈비뼈를 취하여 여자를 만드신 데는 깊은 뜻이 있습니다. 머리는 생각하는 지체이고, 다리는 몸을 지탱하는 지체지만, 심장이 박동하는 가슴은 사랑을 나누는 지체입니다.

우리는 사랑이나 마음을 나타낼 때 심장을 본 딴 하트 모양을 그립니다. 따라서 아담의 갈비뼈로 하와를 지으셨다는 것은, 남편과 아내란 사랑을 주고받는 관계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와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아담이 단번에 알아보고 말하기를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칭하리라”고 했습니다.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했으니, 남편과 아내란 서로 떼려야 뗄 수 없는 친밀한 관계임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창세기 2장 24절에 보니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인류 최초의 가정은 하나님의 주도적인 역할에 의해서 탄생했습니다. 이는 가정의 창시자가 하나님이시라는 뜻입니다. 또한 이 말씀은 우리에게 배필을 짝지어 주신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한번은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무엇이든 이유가 있으면 그 아내를 내어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라고 물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저희를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 말씀하시기를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하신 것을 읽지 못하였느냐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마 19:4-6)고 하셨습니다.

바로 이와 같은 이유로 인해서 기독교는 결혼의 신성함을 주장합니다. 어떤 사연으로 만났던지 간에, 결국은 하나님께서 짝지어 주신 것이므로 우리는 각자 자기 아내와 남편을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어떻습니까? 사랑이 없는 부부가 적지 않습니다. 그렇게 된 데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겠지만, 정답은 결혼이 신성한 이유를 알지 못하고 사랑을 가꾸는데 무관심한 결과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아무리 아름다운 정원이라도 가꾸지 않고 방치하면 얼마 못 가서 잡초가 무성한 황무지가 되고 말듯이, 가정도 부부가 서로 사랑으로 가꾸지 않으면 오래잖아 황폐해 지고 맙니다.

젊음의 아름다움만 보고 사랑하면 나이가 들면 사랑이 식어집니다. 남편이 유능하기 때문에 사랑하면 실직하고 사업에 실패하면 사랑도 사라집니다. 그것은 사랑의 조건을 잘못 알고 있는 것입니다. 내 남편이고 내 아내이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와가 아담의 돕는 배필이었듯이, 아내는 남편의 부족함을 돕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아내만 남편을 위한 돕는 배필이냐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남편도 아내에게 돕는 배필이 되어야 합니다. 만약에 우리 모두가 완전무결한 사람이라면 그저 혼자 살아도 부족함이 없을 것이므로 배필이 필요치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에 완전한 사람이란 없습니다.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누구나 부족한 부분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내 된 사람은 남편의 부족한 점을 보거든 실망할 것이 아니라 저 부족함을 내가 보충해 주어야겠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이는 남편 된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내의 부족한 점을 보거든 내가 저 부족함을 보충해 주어야겠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렇게 부부가 서로 돕는 배필 노릇을 해 나갈 때 둘 사이에 사랑이 자라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온 가족이 하나님을 경외해야 합니다.

“가정의 행복과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반문할 사람이 있을지 모르지만, 사실상 아주 밀접한 상관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가정의 창시자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하와를 돕는 배필로 주셔서 가정을 이루게 하신 데는 목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부부가 서로 협력해서 하나님을 섬기라는 것입니다.

“백짓장도 맞들면 낫다”는 격언이 있습니다 마는, 신앙생활도 혼자서 하는 것보다는 부부가 서로 힘을 합해서 하는 편이 훨씬 유리합니다. 그것은 남편의 믿음이 약해지면 아내가 붙들어주고, 아내가 시험에 들면 남편이 붙들어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인즉 “나는 배우자의 도움이 필요 없어!” 라고 큰소리 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전도서 4장 9절로 12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9)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저희가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라 10)혹시 저희가 넘어지면 하나가 그 동무를 붙들어 일으키려니와 홀로 있어 넘어지고 붙들어 일으킬 자가 없는 자에게는 화가 있으리라 11)두 사람이 함께 누우면 따뜻하거니와 한 사람이면 어찌 따뜻하랴 12)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능히 당하나니 삼겹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

그렇다고 믿지 않는 배우자를 두신 성도님들께서는 낙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경에 이르기를 “아내 된 자여 네가 남편을 구원할는지 어찌 알 수 있으며 남편 된 자여 네가 네 아내를 구원할는지 어찌 알 수 있으리요”(고전 7:16)고 말씀했습니다. 불신 남편이나 아내가 있는 성도님들께서는 가족 구원을 소망하면서 기도하시고 전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할 때 성도님들로 인해서 불신 아내와 남편이 구원을 받는 복 된 결과를 얻게 될 것입니다.

시편 128편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정의 복됨을 노래한 것입니다.

“1)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도에 행하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2)네가 네 손이 수고한대로 먹을 것이라 네가 복되고 형통하리로다 3)네 집 내실에 있는 네 아내는 결실한 포도나무 같으며 네 상에 둘린 자식은 어린 감람나무 같으리로다 4)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이같이 복을 얻으리로다 5)여호와께서 시온에서 네게 복을 주실지어다 너는 평생에 예루살렘의 복을 보며 6)네 자식의 자식을 볼지어다 이스라엘에게 평강이 있을지로다”

그리고 우리는 자녀들을 신앙으로 양육하는 데도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믿는 부모는 자녀들의 신앙생활을 도와 줄 책임이 있습니다. 어려서부터 교회 안에서 자란 아이들은 어른이 되어서도 변함없이 신앙을 지켜나갑니다. 그만큼 어렸을 적에 받은 감화는 영향력이 큽니다. 할 수 있는 대로, 온 가족이 모여서 가정예배를 드리시기 바랍니다. 가정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법을 배우게 되고, 기도하고 성경을 읽는 좋은 습관을 가질 수 있습니다.

언젠가 어느 성도님이 유치원에 다니는 자녀를 교회에 데리고 오지 않는 것을 보고 제가 물어보았습니다. “오늘 아무개가 보이지 않는데 어디 아픈가요?” 그러자 그 성도님이 대답하기를 “얘가 교회에 오는 것을 싫어해서요”라고 했습니다. “그래도 교회에 데리고 와서 신앙으로 키워야지요” 그러나 그 성도님은 대답하기를 “신앙은 각자 자유니까 나중에 생각이 바뀌면 자발적으로 나오겠지요”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헌법에 신앙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다고 해서 어린 자녀에게 알아서 신앙생활을 하든지 말든지 하라면 그것은 부모의 신성한 책임을 포기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그야말로 자녀의 영혼을 마귀에게 내어주는 불신앙적인 행동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부모의 역할은 자녀들을 먹이고 입히고 학교 보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신앙으로 양육해서 신실한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는 것이 포함되어 있음을 아시기 바랍니다. 성경에 보면, 부모의 신앙적인 감화 아래서 양육 받은 인물들이 여럿 나옵니다. 그 가운데서도 사무엘은 어머니 한나가 수태하지 못하다가 하나님께 기도해서 얻은 아들입니다.

그러나 한나는 사무엘을 자기 품에서 키우려 하지 않고 젖을 떼자마자 엘리 제사장에게 맡겨서 성소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돕게 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어린 사무엘을 귀히 여기시고 이스라엘의 사사로서 선지자로서 큰일을 감당하게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동역자인 디모데에게 편지하기를 “3)나의 밤낮 간구하는 가운데 쉬지 않고 너를 생각하여 청결한 양심으로 조상 적부터 섬겨 오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4)네 눈물을 생각하여 너 보기를 원함은 내 기쁨이 가득하게 하려 함이니 5)이는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을 생각함이라 이 믿음은 먼저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더니 네 속에도 있는 줄을 확신하노라”(딤후 1:)고 했습니다.

이는 디모데가 진실한 복음 전파자가 된 것은 조상 적부터 섬겨 오는 하나님의 은혜요, 외할머니와 어머니가 믿음을 물려준 결과라는 뜻입니다. 부모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모본을 보여줄 때 자녀들이 보고 하나님 섬기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그리고 이렇게 온 가족이 하나님을 경외할 때 행복한 가정이 이루어집니다.

세 번째로, 온 가족이 가정의 화목을 이루는데 힘써야 합니다.

잠언 17장 1절에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하는 것이 육선이 집에 가득하고 다투는 것보다 나으니라”고 했습니다. 살다보면 가족 간에 다투는 일이 없을 수 없지만, 그것은 극히 예외적인 경우에 한정되어야 하고 평소에는 화목한 분위기가 유지되어야 마땅합니다. 또한 화를 내고 다투었더라도 곧바로 화해하고 원래의 분위기로 돌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성경에 “26)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27)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엡 4:)고 했습니다.

가정의 화목을 위해서는 가장의 권위를 인정해야 합니다. 아내는 자녀들 앞에서 남편의 권위를 높여주어서 남편이 긍지를 갖고 가장 노릇을 할 수 있도록 협조해야 합니다. 그런가하면 남편은 아내의 권위를 높여 주어서 자녀들이 무시하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그러나 가장의 권위는 가정의 평화로운 질서를 위해서 선용해야지 가족의 복종을 요구하는 강압적인 권위가 되면 안 됩니다.

요즘 우리는 ‘가족폭력’이라는 말을 심심찮게 듣습니다. 이는 다 가족 내에서 일어나는 폭력을 말하는데, 그 종류로는 아동 학대, 배우자 학대, 노인 학대가 있습니다. 서로 사랑하고 보살펴 주어야 할 가족을 학대의 대상으로 삼다니 여간 안타까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통계조사에 의하면 유감스럽게도 가족 폭력이 줄어들지 않고 있다고 합니다.

가족폭력은 육체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힘이 센 사람이 상대적으로 힘이 약한 가족에게 행사하는 것입니다. 아동학대는 부모에 의한 경우가 대부분이고, 배우자 학대는 주로 남편에 의한 것이나 더러는 아내에 의한 경우도 있습니다. 부모 학대는 주로 아들이나 며느리에 의한 것입니다. 오늘날과 같이 핵가족화하고, 경제일변도의 경쟁사회에서는 가족 구성원이 저마다 바쁘게 살다보니 온 가족이 함께 모여서 밥을 먹기도 어렵습니다. 그러다보니 가족 간에 대화가 없이 지내기 쉽습니다.

그리고 대화의 단절은 가족의 유대감을 잃게 만들어서 가정 분위기가 삭막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바쁜 가운데서도 가족이 한 자리에 만나서 대화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드는데 힘써야 합니다. 특히, 사춘기의 자녀를 둔 부모는 자녀들과 대화할 시간을 의도적으로라도 자주 만들어서 저들의 생각을 듣고 상담해 주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부모와의 대화가 단절되면 그 답답함을 좋지 않은 방법으로 해소하려는 유혹에 빠지게 됩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성경의 가르침을 실천해야 합니다. 에베소서 5장에 보면, 부부 간에 행할 바를 이 같이 명했습니다. “22)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 25)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그리고 자녀를 둔 부모에게는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엡 6:4)고 하였고, 자녀들에게는 “1)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2)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3)이는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고 했습니다.(엡 6:)

이러한 성경 말씀과 같이, 가족 구성원이 자기의 위치를 알고 서로에 대하여 행할 바를 지킨다면 가정에서 불화와 다툼이 생길 리가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가정의 화목을 위해서라면 자기의 정당한 주장이라도 포기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족 간의 언사에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는 가족이니까 말을 함부로 해도 된다는 생각을 하기 쉽습니다. 그것은 매우 잘못된 생각입니다. 우리 주위에는 남편이 무심코 던진 말 한마디 때문에 오랜 세월을 마음으로 남편과 등진 채 살아온 아내들이 있는가 하면, 부모가 한 말에 상처를 입고 부정적인 인생을 살아가는 자녀들도 있습니다. 우리는 가족이기 때문에 오히려 말을 조심해야 합니다.

월간목회 5월호에서 읽은 내용을 소개합니다.

〈아버지에게 만날 욕을 먹고 매를 맞는 아이가 있었다고 합니다. 아이는 아버지만 보면 주눅이 들고 무서웠습니다. 아버지가 보이지 않을 때만 집에 들어가고 아버지가 없을 때만 안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선생님이 어려운 숙제를 내주었습니다. 아버지를 사랑하는 20가지 이유를 적어 오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생각을 해도 한 구 가지를 찾기도 힘든데 어떻게 20가지나 찾을 것인지 고민이었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은 단호하게 우리를 낳아 주시고 길러 주시고 먹여주시고 입혀 주시고, 우리를 지금까지 있게 하신 것은 아버지의 사랑이라고 하면서 꼭 숙제를 해 와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 아이는 아버지를 사랑하는 이유 20가지를 찾는 데 일주일이나 걸렸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더 어려운 숙제가 주어졌습니다. 그것을 가지고 아버지와 일대일로 만나서 읽어 드리라는 것입니다. 큰일이 났습니다. 아버지는 보기만 하면 큰소리, 야단, 그리고 빌미를 잡아서 때리기 일쑤인데 어떻게 아버지와 일대일 자리를 만들어서 이것을 읽어 준단 말인가 큰 고민이었습니다.

그래도 이것은 꼭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숙제이므로 아버지를 만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아이는 안방에서 티비를 보고 있는 아버지에게 찾아갔습니다. “아버지, 학교 숙제를 좀 도와주세요” 그러자 아버지는 “학교 숙제는 네가 해야지, 나를 방해하지 말아” 하고 호통을 쳤습니다.

그래도 아이는 용기를 내어 아버지 앞에 가서 “이 숙제는 아버지가 도와주지 않으면 안 되는 숙제입니다” 그렇게 말하고, 아버지가 보고 있는 티비를 껐습니다. 재미있게 보고 있던 프로를 아들이 꺼버리자 아버지는 화가 나서 손을 들고 아들을 때리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아이는 아버지에게 맞을 각오를 하고 꼭 숙제를 해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손을 들고 때리려는 데도 아버지를 사랑하는 20가지 이유를 꺼내서 아버지 앞에 펼쳐 놓았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때리려고 하다가 “아버지를 사랑하는 20가지 이유”라고 쓴 것을 보더니 갑자기 손을 멈추고 눈이 휘둥그레졌습니다. 만날 욕이나 먹고 얻어터지는 녀석이 아빠를 사랑하는 20가지 이유라니!  아버지는 들었던 손으로 아들을 감싸고 아들이 20가지 이유를 읽는 내내 울먹였다고 합니다.〉아마도 그 날 이후로 이 아이와 아버지는 불화를 청산하고 화목한 관계를 이루었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화목한 가정을 원하면서도 그 방법을 몰라서 포기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알고 보면 어렵지 않습니다. 자기를 희생할 각오를 하면 됩니다. 화를 내야 할 때에 참는 훈련을 하면 됩니다. 자기 말만 하려 들지 말고 상대방의 이야기도 들어 주면 됩니다. 상대방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면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상대방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면 됩니다. ‘나 때문에 마음고생이 크구나’ 그렇게 측은하게 여기는 마음을 가지면 저절로 화목한 분위기가 이루어집니다.

존 하워드 페인이라는 미국의 시인이 지은 “Home, sweet home”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즐거운 곳에서는 날 오라 하여도 내 쉴 곳은 집 내 집 뿐이리” 우리말로 집이라고 번역한 말은 영어로는 home입니다. home은 단순한 건물로서의 집을 의미하지 않으며 포근한 가정 분위기를 연상시키는 단어입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는 따뜻한 사랑의 보금자리인 home이 아니라 단지 건물을 의미하는 house로 전락한 가정이 늘어가고 있습니다.

한 해 동안 발생한 전체 이혼건수를 해당 연도의 인구수로 나눠 천분율(%)로 표시하는 것을 조이혼율이라고 하는데, 2002년도 조사에 의하면 우리나라 조이혼율은 3.0으로 미국(4.0)보다 낮지만 덴마크(2.8) 등 유럽 국가와 일본(2.3)보다는 높게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2004년 1월 말 우리나라의 이혼율은 9.3%로 11쌍 가운데 1쌍 꼴로 이혼한 셈이 된다고 합니다. 이 같은 수치는 과거에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일입니다. 심각한 것은 사람들이 이러한 현실에 무감각해져 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때일수록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가정을 건실하게 지켜나감으로써 이 어두운 사회에 빛을 발해야 할 것입니다. 행복한 가정을 이루기 위한 조건은 첫째로, 남편과 아내가 사랑으로 하나가 되는 것이요, 둘째로 온 가족이 하나님을 경외해야 하는 것이며, 셋째로 온 가족이 가정의 화목을 이루는데 힘쓰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 조건을 힘써 준행함으로써 성도님들의 가정마다 화목이 넘치는 사랑의 보금자리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김양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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