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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어린이주일] 초달을 해서라도 (잠 1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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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달을 해서라도(잠언 13:24절).

"초달을 차마 못하는 자는 그 자식을 미워함이라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징계하느니라."

이번 주간은 어린이 날이 포함된 주간입니다. 자식은 그 부모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가장 위대하고, 귀한 생명의 선물입니다.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그렇다고 해서 그 자식을 부모의 소유물로 주신 것은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가정에 위임하여 잘 양육하라고, 맡겨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모된 사람들은 오늘 어린이 주간을 맞이하여 하나님께서 맡겨 주신 귀한 생명을 잘 양육하고 있는가를 잘 살펴보고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어린이 날과 주간(주일)은 하나님 앞에서, 부모된 우리 성도들이 내게 주어진 자녀들을 얼마나 잘 양육하며, 하나님의 뜻대로 잘 보살피고 있는가를 스스로 돌아보고 점검해 보는 날입니다.

창세기 22:2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고 명령합니다. 이 때 성도 여러분 같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의 상황은 자식을 너무 애지중지하는 나머지 하나님을 뒷전으로 해 버리는 경우가 많지 않습니까? 사실 100세에 낳은 이삭 때문에 잠시 눈이 어두워져서 아브라함의 가정처럼 하나님보다 자식에게 모든 마음을 순간적으로 빼앗겨 버린 상황이 연출되는 경우가 많은 것이 사실입니다. 예배는 뒷전이 되고, 입시 공부가 우선이 되어 버린 가정들이 심심찮게 거론이 되고 있지 않습니까?

아브라함은 100세에 나은 자식이었으니 얼마나 애지 중지하며, 키웠겠습니까? 제가 나이가 들다보니까 우리집 막내둥이를 입양했는데 잘 아시지만 '지니'입니다. 우리집 무남독녀 외동 딸은 밥을 안 먹어도 걱정이 되지 않는 것이 이제 성인이 되었으니 자기의 일은 알아서 잘 처리하겠지라는 믿어지는 마음이 드는데 '지니'는 반드시 챙기게 됩디다. 그래서 소자, 손녀를 둔 할머니, 할아버지가 그렇게 사랑하는 구나 이해가 됩디다. 아마 아브라함은 잠시 동안이지만 모든 마음과 정신을 아들 이삭에게 모두 빼앗겨 버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자식을 사랑해도 무엇이 더 귀중한지, 진정 귀하고 값진 것을 알고 있었고, 구별하는 신앙생활을 회복한 사건이 바로 자신의 독자 이삭을 모리아산의 번제로 드리고자 했던 사건이었습니다.

그렇게 아브라함이 사랑하던 독자 이삭이지만 '하나님께서 그 중심을 보시기 위해 이삭을 모리아 산에 번제로 바치라. 죽여 제물로 바치라.'고 명령하였을 때 그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자식을 사랑하는 사랑보다 더 크므로 그 아들을 모리아산에 번제로 드리려고 3일길을 걸어서 갔고, 번제단에 제물을 드리려고 불을 태울 나무 위에 아들을 결박하여 올려 놓고, 칼을 빼어 아들을 죽이려고 했던 순간 하나님의 음성의 다급하게 들려옵니다. "아브라함아! 그 아들에게 손대지 말라. 이제야 네가 나를 경외하는 줄 알았다."고 말씀하시며, 여호와 이레의 복을 받았는데 이는 아브라함의 실천하는 신앙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경우 막무가내로 자식을 사랑하며, 내 인생의 전부를 거는 일방적인 자식 사랑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뜻 안에서 자식을 사랑하였던 그 고귀한 사랑, 분별하여 지혜롭게 처신한 신앙을 성도여러분들께서 배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에는 이런 올바른 처신으로 자녀를 양육해야 된다는 교훈을 하는 구절이 있습니다. 부모의 자식 사랑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었습니다. 그러나 성경 본문에서 "차마 초달을 하지 못하는 부모는 자녀를 불행하게 만들기에 회초리로 교육하라고 멸령합니다." 지혜의 왕인 솔로몬의 가정 불행은 바로 이 부분이 잘못되어 국가가 분열하는 불행까지 이어 졌습니다.

'초달을 차마 못하는 부모들 때문에 가정이 점점 핵 가족화 되어가고 있습니다.' 한 자녀 잘 키워 열 아들 부럽지 않게하자는 슬로건'이래 우리나라는 전 세계에서 출산률이 가장 낮은 나라로 바뀌어 졌습니다. 이런 시대적 사조의 흐름 속에 자식을 애지중지한 나머지 초달을 못하는 부모들이 늘어만 가고 있습니다.

어릴 때부터 왕자로, 공주로 저마다 최고의 사랑 속에 자라 온 아이들이 결국 내 집에서 왕자이고, 공주이지 남에게 까지 왕자가, 공주가 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저마다의 왕자병, 공주병에 걸려 자신의 위치를 착각하여 사회생활과 가정생활과 직장생활을 하기 때문에 심지어 군입대를 하기에 불행이 발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내 사랑스런 자식이 동리 아이에게, 이웃 어른에게 꾸지람을 듣거나, 선생님에게 행여 사랑의 매까지 맞으면 내 자식의 잘 잘못은 나중 문제이고, 불타는 자식 사랑이 이성을 잃게 하고 맙니다. "내 자식 내가 손 한 번 안되고, 키우는데 당신이 왠 참견이냐고 말합니다. 심지어 식당에서 기물을 부수면 내가 그 값을 물어주면 될것 아니냐고 핏대를 올립니다." 참으로 웃지 못할 촌극이요, 윤리와 도덕이 무너져 내리는 소리를 아무 꺼리낌 없이 내어 뱉습니다.

우리가 사는 시대에 잘못을 벌주는 선생을 폭행하는 일이 교실에서 벌어지고 있고, 사랑하는 자식을 체벌한 교사를 폭행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고, 그런 스승을 경찰에 신고하는 때에 살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오늘 본문을 통해 하나님께서 "초달을 차마 못하는 자는 그 자식을 미워함이라.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징계하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사랑하는 미스바교회 성도 여러분! 저는 이시간 『초달을 차마 못하는 자』라는 주제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중심으로, 하나님이 맡겨 주신 귀한 생명이요, 내 사랑하는 자식을 어떻게 잘 양육할 것인가를 본문을 통해 살펴 보고 참된 지혜를 얻고자 합니다.


1. 초달을 해야 '자식을 사랑하는 것'이 됩니다.

본문에 "초달을 차마 못하는 자는 그 자식을 미워함이라.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징계하느니라." 고 하였습니다.

본문에서 말씀하는 '초달'(* , 쉬브토)은 '어린 가지'란 문자적 의미에서 파생된 '(처벌이나 징계를 위한) 매, 막대기'를 가리킵니다. 이 막대기의 용도는 처벌하기 위해, 싸움을 위해, 측량하기 위해, 글을 쓰기 위해 사용되었다. 이를 정리하면.... 채찍, 화살, 매, 지팡이 등이 됩니다.

초달의 우리말 뜻은 "달초"라는 말로 '어버이나 스승이 잘못을 훈계하기 위하여 볼기나 종아리를 회초리로 때리는 것'을 말한다. 우리 귀에 익숙지 않은 말입니다. 성경 다른 곳에서는 '채찍'으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본 구절은 단지 자신의 자녀가 귀하고 사랑스럽다는 이유로 그 자녀의 죄된 행실을 묵과하고 징벌하지 않는 것은 그 자녀에게 있어 죄에 대한 양심의 마비를 초래케 하며, 궁극적으로는 인격적 파탄과 파멸을 가져오게 하는 바, 그것은 진정한 자녀 사랑의 방법이 아님을 역설적으로 보여 줍니다(3:12;23:13, 14:29:15).

초달로 아이를 훈계하는 것은 세계 여러 나라에 공통적으로 전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애굽, 그리이스, 로마, 중국, 우리 한국 등이 그 대표적인 예가 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여러 곳에서 자식을 초달로 훈계하고, 징계하라고 했습니다. 그 말씀을 한마디로 정의한다면 <어릴 때부터 잘 잘못을 분명하게 가르치라.>는 말씀입니다.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 이것이 분명하게 가르쳐야 합니다. 더구나 신앙인들은 하나님을 신앙하는 자녀로 길러야 하기에 되고, 안 되는 것을 분명히 지도해야 합니다. 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분명히 교육하고, 가르치며, 지키게 해야 그래야 신앙인 답게, 사람답게 존경과 인정을 받으며 살 수 있게 됩니다.

절대자 하나님을 섬기며, 영광돌리며, 그 명령을 준행하도록 양육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신앙은 죽고 사는 문제임을 분명히 인식하게 해야 합니다. 천국과 지옥이 있는데 어찌 내 사랑하는 자녀를 죽음의 길을 걸어가게 할 수 있습니까? 세상에 부귀영화가 죽은 후에도 계속됩니까? 천국을 잃어버린 자녀의 미래를 생각해 보셨습니까?

남들과 비교하는 상대적 개념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어찌 보면 너무나 독선인 것 같지만 그 길이 바로 살 길이기에 하나님을 철저하게 섬기며, 그 뜻대로 살도록 양육해야 하고, 그렇지 못하다면 초달해서라도 '멸망'과 '침륜의 길'에 빠지지 않게 해야 하며, 사탄에게서 건져내고, 지옥에서 건져내야 합니다.

창세기 3:2-3절에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실과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고 하자 하와의 범죄는 먹어도 되는 것과 안 되는 것을 분명히 구별하는 지혜를 가지지 못한데서 일어난 불행인 것입니다.

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분명히 하지 못한데서 미혹되어 범죄하여 자신도 망하고, 상대방도 망하게 하고, 후손들을 불행하게 만든것 아닙니까? 그러므로 신앙을 통해 영적 분별력을 바로 세우도록 부모의 책임이 큰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예"와 "아니오." 를 분명하게 하지 못한다면 죄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미스바교회 성도 여러분!

『초달을 차마 못하는 부모는』 결국 자식에게 <반드시 행해야 되고, 반드시 해서는 안 되는 것을 분명하게 깨우치지 못하게 됩니다.> 지금 가슴 아픈 것이 유익하지 않겠습니까? 사실 요즈음은 자식 사랑이 오히려 우상이 되어 버렸고, 부모들이 오히려 더 자식을 불해의 늪으로 빠지는데 설치는 세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자식 사랑으로 말하자면 아브라함을 따라갈 사람이 있겠습니까? 100세에 얻은 아들입니다. 하나 밖에 없는 아들입니다. 축복의 약속에 담겨진 아들입니다. 그러나, "번제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 앞에 순종하였던 아브라함을 본 받아야 할 줄 믿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순종하는 신앙 생활을 본 받아 순종하였던 이삭의 경우를 보면 무엇이 우선 순위인지를 아는 아버지와 아들 이었습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시대에서는 생각도 할 수 없는 일 아니니까?. 어느 부모가 자기 자식을 죽이는 제물로 하나님께 바칠 수 있겠습니까? 어느 자식이 그 부모의 말씀에 순종을 하겠습니까? 그러나 부자의 신앙은 분별해서 하나님께 인정받아 복의 근원이 되고, '여호와 이레'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초달을 차마 못하는 자는....』 그 부모가 이미 해야 되고, 안되는 것을 분별하고, 결단해야 하는 것을 바르게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그 자식에게도 무엇이 진정 귀한 것인지를 깨우치지 못하고 마는 것입니다. 그 결과 자기 발등을 스스로 찍게 됩니다. 그래서 부모를 순종하는 자식들이 점점 줄어가는 세상이 되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초달을 왜 해야 합니까?


2. 초달을 못하면 자식을 미워함이 됩니다.

본문에 분명히 "초달을 차마 못하는 자는 그 자식을 미워함이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 초달을 해야 하는 줄은 아는데 "차마 못한다"는 것은 부모로서의 책임감을 스스로 포기하는 행위입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막연히 '자식을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그 부모는 착각하고 있지만 사실은 불행하게 만드는 입니다. 자식을 아끼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애처롭고 불쌍히 여기기 때문이라고 착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본문을 통해 분명히 선언하고 계십니다. 따라해 봅시다! "자식을 미워하는 행위다."라고 선언하십니다.

즉, "자식을 미워해서 초달을 하는 것으로 착각하지 말아라. 오히려 초달을 하지 않으면 결과적으로 자녀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미워하는 결과가 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징계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근실히'(*, 쉬헤로)는 원어상 '(착실해서) 일찍 어떤 일을 하다', '때를 맞추다'란 뜻을 가지는 바, 본 구절은 진심으로 그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는 어릴 때부터 시기에 적절하게 자녀의 죄악을 징계하고, 견책하면서 자녀의 아픔을 함께 느끼는 자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2장 6~9절 말씀에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 하였으니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또 우리 육체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든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여 살려 하지 않겠느냐?"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내 자식을 사랑한다고 초달을 금했는데 그것이 사랑이 아니라 도리어 미워함이 될 줄은 모르고 살아가는 부모들이 많은 것이 현실입니다. 이것이 바로 자녀가 장래에 불행해 진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인간의 어리석음과 한계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자식이란 생명을 맡겨 주시고 "네 마음대로 해라." 내버려두시는 분이 아닙니다. 잘 양육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을 알려 주시는 것입니다.그 중에 하나가 바로 초달을 하는 행위 즉, 징계를 통해 자녀를 올 바르게 잡아주는 방법인 것입니다.

그래서 잠언 22:15절을 보면 "아이의 마음에는 미련한 것이 얽혔으나 징계하는 채찍이 이를 멀리 쫓아내리라."고 알려 줍니다.

'아이의 마음에는 미련한 것이 얽혔다.'는 것은 '타락한 인간상을 보여주시는 말씀'입니다. 타락한 인간은 짐승과 같이 본능적으로 살아가려 합니다. 도덕과 윤리가 불완전한 상태가 됩니다. 이런 상태를 '미련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미련한 아이의 마음과 그 얽힌 미련을 풀어헤쳐 줄 수 있는 것이 징계의 채찍인데 곧 본문에서 알려준 "초달"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 번의 초달로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얽혀진 것과 그 미련이 다 풀어지기까지 계속하라는 것입니다. 바로 "멀리 쫓아내기 까지"하라고 했습니다.

잠언 23:13절 '아이를 훈계하지 아니치 말라. 채찍으로 그를 때릴지라도 죽지 아니하리라."고 했습니다. "채찍으로 때릴지라도 죽지 아니하리라."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죽도록 때리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초달에 사용되는 채찍은 '몽둥이'가 아니라 '회초리'입니다. 회초리로 맞아서는 죽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그 어린 것, 어디 손댈 데가 있다고 이것이 요즈음 부모들이 초달을 못하는 자식 사랑을 향해 회초리로 볼기나 종아리를 쳐서는 아이가 죽지 않는다. 아니 그 아이를 살릴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최근에 "채찍으로 때릴지라도 죽지 아니하리라." 이 말씀과는 달리, 때로는 부모에게 매맞아 죽는 아이도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성경에서 말씀하는 '초달이 아닙니다.' 다시 말하면 회초리로 볼기나 종아리를 치는 것도 아니요. 훈계를 위하여 치는 채찍도 아닙니다. 이성을 잃은 자기 감정의 폭발이 가져다주는 결과인데 '초달은 그런 것이 아니다.'라는 말씀임을 분명히 기억하시고 구별해서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초달을 할 대 부모의 감정이 들어가 있다면 회초리를 놓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미스바교회 성도 여러분!

"초달을 차마 못하는 자"는 초달을 해야 하는 줄은 알지마는 잘못된 자식 사랑에 차마 회초리를 들지 못하고, 바르게 훈계하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그 잘못된 자식 사랑이 자식을 미워하는 결과가 되리라고는 생각지 못하는 어리석은 어른들입니다. 자식을 망치는 일이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을 못하는 어리석은 부모들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전해 내려고 있습니다. 사람을 죽이고, 큰 금은방을 턴 강도가 사형 집행을 앞두고, 마지막 소원이니 자기 어머니와 한 번 입맞추게 해 달라고 했습니다. 그 사형수의 마지막 소원을 들어주었는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어머니와의 입맞춤에서 자기 어머니의 혀를 잘라 버렸습니다.

그 이유를 알아보니 "잘 했다. 잘 했다."하던 그 어머니의 칭찬 때문에 지금 사형수 자리에 까지 왔노라고 울부짖는 아들의 모습 때문에 오히려 더욱 큰 충격을 주었다고 합니다.

잠언 19:18절 "네가 네 아들에게 소망이 있은즉 그를 징계하고."라고 하였습니다. "네 아들에게 소망이 있은즉" 저와 여러분이 자식에게 소망을 두고 있다면 그를 징계하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초달하라."고 명령 했습니다. 잘못을 덮어 주는 것이 사랑이 아닙니다. 잘못을 고쳐 주는 것이 사랑입니다.

굽은 가지를 바르게 하는 데는 고통이 따르게 됩니다. 그 고통이 애처로워 그대로 두면 그 가지는 굽은 가지로 남게 될 뿐입니다. 다 자라고 나면, 부러질지언정 곧게 펴지지는 가지가 될 수는 없습니다. 미워하지 않는다면 초달을 두려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3. 그러므로 자식을 진정으로 사랑하려면 징계해야 합니다.

본문에 "초달을 차마 못하는 자는 그 자식을 미워함이라.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징계하느니라."고 말씀 하였습니다.

곧 '초달을 차마 못하는 자는 자식을 사랑함이 아니다.' 그러므로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징계하느니라."는 말씀입니다. 초달을 해야 하는 줄은 알면서도 차마 못하는 것은 잘못된 사랑입니다. 그것은 자식 사랑이 아니라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징계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내 자식이 무엇입니까? 기준이 분명치 않은 분들이 많습니다. 내가 낳은 나의 분신입니까? 아니면 또 다른 내 생명입니까? 앞으로 더 나아가 복제 인간까지 등장을 하고 나면 점점 자식에 대한 개념이 더 복잡하게 되어지라고 생각됩니다. 시편 127:3절에 "자식은 여호와의 주신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고 말씀합니다.??즉, 우리의 자녀들은

①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신 선물이요.
② 우리의 축복된 기업이요.
③ 우리의 상급이요.
④ 태의 열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자녀들은 내가 낳았지만 나의 소유물이 아니요, 나의 분신도 아니요. 또 다른 나의 생명도 아니요. 더욱이 유리관에서 상품처럼 제조된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우리 부부와 가정을 사랑하셔서 허락해 주신 선물입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신 생명의 선물입니다. 내게 맡겨 주신 생명의 선물입니다.

이 살아 있는 생명의 선물은 "생명 역사"를 통하여 그 생명이 유지되고, 자라 갑니다. 그 "생명 역사"는 고통을 수반하게 됩니다. 그래서 생명의 잉태가 고통이요, 그 생명의 출산이 고통이요, 그 생명의 자라남이 또한 고통입니다. 즉, 자녀를 올바르게 키우는데 부모로써 수고해야 할 책임이 주어여 있습니다. 청지기적 사명을 가지고, 맡겨주신 자녀를 바르게 양육해야 될 책임이 주어져 있는 것입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는 고통 속에서 새 생명의 역사가 이루어집니다. 아름다운 생명의 열매는 고통 없이 거둘 수 없는 것입니다. 이 고통을 외면하려는 노력이 끝내는 복제 인간이란 이름으로 생명의 열매를 대신하려고 합니다만 복제 된다고 내가 복제된 인간과 꼭 같아 지겠습니까? 결코 그럴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자식을 바르게 양육할 책임을 지닌 부모로서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징계하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이런 징계할 줄 아는 부모는 초달을 차마 하지 못하는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사람들입니다. 자식에 대한 애처로움이 없고, 자식에 대한 애정이 없는 사람이 아닙니다. 오히려 더 큰 자식 사랑이 있기에 "생명 운동"의 고통을 스스로 감수하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성경에는 심지어 적극적으로 자녀를 사랑한다면 오히려 잠언 29:17절 "네 자식을 징계하라. 그리하면 그가 너를 평안하게 하겠고, 또 네 마음에 기쁨을 주리라."고 하셨습니다.

<자식을 징계하여 사망의 길, 멸망의 길, 후회하는 인생이 되지 않도록 이끌어 주는 부모의 책임을 다해내는 것이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생명을 창조하신 분이기에 생명에 대해서 너무도 잘 아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이 주신 말씀에 "네 자식을 징계하라"고 하셨습니다.

차마 하기 힘든 초달이지만 그 징계의 채찍을 통하여 평안이 찾아온다고 했습니다. 마음에 기쁨이 넘쳐 나리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미스바교회 성도 여러분! 저는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초달을 차마 못하는 자는....』 자식을 사랑함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자식을 미워함이 된다고 했습니다. 자식을 망치고, 죽이는 일이 된다고 했습니다(잠19:18).

잠언 29:15절에도 "채찍과 꾸지람이 지혜를 주거늘 임의로 하게 버려두면 그 자식은 어미를 욕되게 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초달을 차마 못하는 자들의 잘못된 사랑의 결과를' 성경은 이렇게 밝히고 있습니다.

"임의로 하게 버려두면 그 자식은 어미를 욕되게 한다."고 말ㄹ씀합니다. 엘리 대제사장의 두 아들을 초달을 하지 않음으로 하나님의 성직을 더럽히고, 성전을 더럽히다가 '홉니'와' 비느하스'가 전쟁터에 나갔다가 결국 적의 화살에 맞아 죽는 심판을 당하고, 그 비보를 듣고 그들의 아버지 엘리 제사장은 의자에서 넘어져 목이 부러져 급사하고 말았습니다. 성경에 나타난 대표적인 "해야 되고 해서는 안 되는 일"을 분별하도록 초달을 교육받지 못하고, 신앙의 올바른 지도가 없었던 자식들이었기에 마침내 엘리 대제사장의 가문까지 망해 버린 것입니다.

아론의 두 아들 '나납'과 '아비후'가 다른 불로 분향을 하다가 여호와 앞에서 불에 삼켜져 죽었습니다(레10:1-2). 사무엘의 두 아들 '요엘'과 '아비야도'(삼상8:1-3), 다윗의 아들 '압살롬'도 결국 파멸을 길을 걸었습니다.

사랑하는 미스바교회 성도 여러분!

초달을 차마 못하는 자식은 결국 사랑하는 일이 아닙니다. "매는 악을 없이 하고, 사람의 속에 깊이 들어간다."(잠20:30) 고 했습니다그렇다고 초달이 최상의 방법이라는 말씀은 아닙니다. 어리석고 미련한 자식은 초달을 해서라도 가슴 속 깊이 "해야 되고, 해서는 안 되는 판단력"을 반드시 새겨 주어야 인생을 복 되게 살 수 있게 하는 유산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도서 12:11절 말씀에 "지혜자의 말씀은 찌르는 채찍 같고, 회중의 스승의 말씀은 잘 박힌 못 같으니 다 한 목자의 주신 바니라."고 말씀합니다. '잘 박힌 못'이란 바로 '확고부동함'인데 자녀들에게 이런 삶의 원칙이 세워져 있습니까? 물론 그 잘 박힌 못은 '초달로만', '회초리로만', '매로만 박혀지는 게 아닙니다.'

한 마디 지혜자의 말씀은 매 백개로 때리는 것보다 더 깊이 박힌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자녀를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고 했습니다(엡6:4).

따라합시다. <주의 교양과 훈계로 그 못이 박히지 않을 때 초달을 해서라도라 그 못을 잘 박으라.>는 것입니다.

신 6:6-7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 할 것이며”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속담에도 이를 반증해 주는 말이 어렷을 때 버릇은 늦어서도 고치기 힘들다는 뜻으로「세살적 버릇 여든 살까지 간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3살 때 탁아소에 맡기면 450개의 언어를 터득하지만, 가정에서 가르치면 850개의 언어를 터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교육'과 '가정 교육'을 통해초달을 해서라도 바른 길로 이끌도록 최선을 다하는 주일학교 교사들과 부모의 사명을 감당해 내시기를 복 빌어 드립니다

그러므로 어린이 주일 당하여 부모된 성도 여러분들은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뜻에 맞도록 말씀의 기준을 통해 해야 되고 해선은 안 되는" 기준을 분명하게 가슴에 분명히 심어 주어야 합니다.

자녀들을 위한 고운 옷도 잠시 뿐이며, 인생을 살아가는데 한 순간으로 헛되고, 맛있는 음식도 그 때 뿐입니다. 그러나 어려서부터 성경을 가르치고, 기도로 신앙의 본을 터득시키시기 바랍니다. 신앙의 좋은 모범을 보이시기 바랍니다. 마치 '거룩한 맹자의 어머니'와 같은 본을 보이시는 부모가 되시기를 부탁합니다.

거듭 말씀드립니다. 초달을 차마 못하는 자는 자식을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식을 미워하는 일이 되고, 자식을 망치는 일이 되고 맙니다. 저 엘리 대제사장 가문의 패망처럼 초달을 차마 못하는 잘못된 자식 사랑으로 인하여 자식이 망하고, 나도 망하고, 가문도 망해 버리는 이런 비극의 주인공이 되지 않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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