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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어버이주일] 인생 역전 (마 20: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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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버이날의 유래를 아십니까?
백 년 전쯤에 미국 버지니아주 웹스터 마을에 ‘안나 자이비스’란 소녀가 살았습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안나는 산소 주위에 어머니가 좋아하셨던 카네이션 꽃을 심었습니다.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마음으로 가슴에 흰 카네이션을 달고 필라델피아 교회 교인들에게 카네이션을 하나씩 나누어주었습니다. 안나는 어머니를 잘 모시자는 운동을 벌였고, 그 결과 1904년에 시애틀에서 어머니날 행사가 처음으로 개최되었습니다. 1913년에 5월 둘째 일요일을 어머니 날로 정했는데, 점차 세계적인 관습이 되었습니다. 우리나라는 1956년에 5월 8일을 어머니날로 정했고, 1974년에 어버이날로 명칭을 바꾸었습니다. 오늘은 어버이 주일을 맞이해서 오후 5시에 포도원에 들어온 사람에 대한 비유 말씀을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이 비유는 천국이 가진 성격의 한 단면을 보여줍니다. 한 주인이 포도원 품꾼을 구하기 위해 아침 일찍 인력시장에 나가 품꾼들과 한 데나리온의 품삯을 계약했습니다. 주인은 삼시에도 장터에 나가 품꾼을 구했습니다. 삼시는 오늘날 오전 9시를 말합니다. 주인은 육시(정오)와 구시(오후 3시)에도 품꾼을 포도원에 들여보냈습니다. 그들과는 구체적인 약속 없이 단지 “너희에게 상당하게 주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십일 시 곧, 오후 5시에도 여전히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장터에 놀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아마 그들은 몸이 허약해서 일꾼으로 불려가지 못했던 사람 같습니다. 자비로운 주인은 그들도 포도원으로 들여보냈습니다.

날이 저물자 주인은 청지기에게 품삯을 주게 했습니다. 오후 다섯 시에 와서 한 시간 일한 사람은 놀랍게도 하루 품삯에 해당하는 품삯을 받았습니다. 그러자 아침 일찍 온 사람은 10배 이상은 일한 자기는 훨씬 많이 받을 줄로 기대했지만 그 역시 한 데나리온을 받았습니다. 그러자 그는 집 주인을 원망하기 시작했습니다. “나중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만 일하였거늘 저희를 종일 수고와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12) 주인이 대답했습니다.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느냐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13-15)

이 비유를 읽는 많은 분들이 마음의 불편함을 느낍니다. 품꾼의 불평은 충분히 공감하면서 참 괴팍한 주인이라는 인상을 가집니다. 법적으로 따지자면 한 데나리온을 약속했으니 할 말이 없지만, 심정적으로는 ‘너무 했다’는 생각을 지우기 어렵습니다. 더구나 비유 끝에 덧붙인 예수님의 말씀은 한층 더 마음을 불편하게 만듭니다.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 우리는 이 불편한 사건을 덮어두고 지나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천국의 한 성격으로 비유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 비유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나라는 처음부터 끝까지 ‘은혜’로 시작해서 ‘은혜’로 끝난다는 것입니다. 현대인들은 ‘계산’하는 일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일한 시간과 그에 비례해서 ‘대가’를 계산합니다. 그것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그런 삶에 익숙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의 방식대로 계산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대가가 아니라 은혜’로 역사하십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도 은혜로 하시고, 하나님 나라에 일하는 것도 은혜로 하시며, 마지막에 주시는 상급도 은혜입니다. 이 모든 것들이 인간이 가진 어떤 것이나 인간 노력의 대가가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는 일찍 들어오고 늦게 들어옴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은혜를 아는 마음으로 일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비유에 나오는 사람들은 주인의 ‘은혜’를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당시는 유대인들이 로마의 식민통치하에서 어렵고 힘들게 살던 때였습니다. 하루 한 끼 먹기 힘든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일자리를 구하기도 쉽지 않고, 정당한 보수를 받는다는 것도 어려웠습니다. 그런 시절에 아침 일찍부터 일자리를 구했다는 것은 그 자체가 ‘은혜’였습니다. 좋은 주인을 만나서 약속한 한 데나리온을 어김없이 받을 수 있다는 것도 ‘은혜’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멋지게 시작했던 하루를 불평으로 마감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주인의 ‘은혜’를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자기 몸이 튼튼해서 뽑혔고, 자기가 열심히 일해서 그 ‘대가’를 받는 줄로만 생각했지, 그 자체가 은혜라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은혜를 몰랐던 그는 먼저 왔으나 나중 되고 말았습니다.

한편 오후 다섯 시에 포도원에 들어온 사람은 주인의 ‘은혜’를 알았습니다. 몸이 약하고 쓸모없는 자신, 더 이상 일할 소망이 없는 자신을 불러서 한 시간이라도 일하게 해주신 것 자체를 감사하게 생각했습니다. 일하고 싶어도 일이 없어 빈둥거려본 사람들은 일자리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행복인가를 압니다. 오늘만큼은 빈손으로 퇴근하지 않고 자식들에게 줄 붕어빵이라도 사들고 들어갈 수 있게 된 것이 기뻤습니다. 그가 한 데나리온을 받았을 때 얼마나 놀랐을 것이며, 주인의 넓은 마음에 얼마나 감사했을까를 우리는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은혜를 아는 그는 나중 왔으나 먼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은혜의 왕국입니다. 그분의 왕국 안에서 살면서도 여전히 세상에서 하던 방식대로 ‘계산과 대가’만 알고 은혜를 모르는 사람은 원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새벽 품꾼처럼 하나님께서 약속을 성실하게 지키셨을지라도 공연히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서 손해의식에 빠지고 하나님께 따지게 됩니다. 이사야 55:8-9절을 보면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고 했습니다. 은혜를 아는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잘 깨달을 수 있습니다. 은혜를 아는 사람은 하나님의 마음을 잘 헤아릴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풍성한 은혜 베푸시는 것을 보면서도 함께 즐거워할 수 있습니다. 시기하고 불평하지 않고 주님의 인자하심과 자비로우심을 찬양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지금 내가 무엇을 하고 있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일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비록 힘들고 고달파도 하나님 백성으로 사는 삶 자체가 은혜의 삶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그 순간의 감격과 기쁨을 떠올려 보십시오. 평생 주님을 위해 허드렛일만 하다가 죽어도 감사한 일이라며 기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은혜를 잊어버리면 기쁨은 사라지고 원망이 찾아옵니다. ‘은혜’를 망각하면 열심히 땀 흘렸던 지난 시간의 모든 것이 헛수고 같이 여겨질 수 있습니다. 비교 의식에 시달리며 억울하게 손해 본 사람마냥 ‘나는 뭔가’ 한탄하며 일할 의욕을 상실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사는 우리는 하나님 나라가 항상 ‘은혜’로 다스리는 나라라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때때로 ‘나이’라는 것이 사람의 발목을 잡을 때가 있습니다. ‘이 나이에 무엇을 시작하겠는가?’하며 체념하거나 허송세월로 보냈던 지난날들을 후회하기도 하고, 이미 먹을 만큼 먹어버린 나이를 생각하며 불안과 침울함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는 오후 다섯 시에 더욱 강렬하게 베풀어지기도 합니다.

폴란드 출생으로 26살(1906년)에 미국에 건너와 여러 가지 제조업에 종사하며 자수성가한 유태계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70세 후반에 은퇴해서 뉴욕에 있는 노인 클럽(Golden Age club)에서 인생 오후반의 무료한 삶을 달래곤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체스 상대자가 나타나지 않아서 그림교실에 등록했다가 그림에 빠져들었습니다. 겨우 10주를 배웠을 뿐이었지만 구약성서와 히브리 문학 등을 주제로 그린 그의 그림들은 많은 미술가들과 평론가들에게 천재성을 가진 것으로 인정을 받았습니다. “원시적 눈을 가진 미국의 샤갈”이라는 극찬을 받기도 했던 그의 작품들은 시애틀 미술관과 마이애미 대학 미술관 등 여러 미술관에 보관되어 있고 저명한 수집가들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는 101살의 나이에 22번째 전시회를 가졌고 1983년 103살의 나이에 죽었습니다. 81살에 미술을 시작했던 해리 리버만(Harry Lieberman, 1880-1983)의 이야기입니다. 리버만의 이야기는  ‘늦다고 생각할 그 때가 가장 빠르다’는 말을 떠올리게 합니다.

우리는 어릴 때부터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된 사람들을 보면 참 복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새벽에 포도원으로 부름을 받은 품꾼과 같습니다. 가정 핍박을 받으면서 어렵게 신앙을 지켜온 사람들은 믿는 가정에서 자라는 것이 얼마나 복된 은혜인가를 잘 압니다. 그런데 나이 만아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된 사람이 더 많은 은혜를 받을 수도 있습니다. 어린아이의 도시락을 사용하여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신 하나님께서 노인의 도시락인들 사용하지 못하시겠습니까?

성경에도 늦게 시작하였지만 주님의 나라에서 귀하게 쓰임 받은 사람이 많습니다. 모세는 40세에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해서 무언가 위대한 일을 하려고 시도했으나 실패했습니다. 그 실패로 모세는 모든 것을 잃어버렸습니다. 강대국의 왕자로 남부러울 것 없이 살던 그가 처갓집에 40년을 얹혀서 살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80세에 다시 부름을 받아 출애굽의 지도자로 쓰임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오후 다섯 시에 베풀어진 놀라운 은혜였습니다. 바울은 다른 제자들이 다 목격한 부활의 주님을 ‘맨 나중에’ 목격한 사도였습니다. 다른 제자들이 예수님과 공동생활하며 착실하게 성장해서 사도로 활약하고 있는 동안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는 일을 하다가 오후 다섯 시에 부름 받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꼴찌로 출발한 그도 ‘이방인의 사도’로 귀하게 쓰셨습니다.

은혜로 통치되는 하나님 나라에서는 신앙의 연수나 나이가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얼마나 빨리 일을 시작했느냐?’ 혹은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느냐?’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얼마나 은혜를 아는 마음으로 일했느냐?’입니다. 은혜를 아느냐에 따라 인생이 역전됩니다.

사도 요한의 제자였던 폴리캅은 예수만 부인하면 살려주겠다는 했을 때 “내가 86년 동안 그 분을 섬겨왔지만, 그분은 한 번도 나를 부당하게 대우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내가 어찌 이제까지 섬겨 온 나의 왕 그리스도를 모독할 수 있겠습니까?”하고 말했습니다. 그는 화형을 당하면서도 순교의 반열에 동참케 하신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렸습니다. 폴리캅은 은혜를 알았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죽음을 통해 지금까지도 많은 성도들에게 깊은 은혜를 주고 있습니다. 죽음에 직면한 마지막 순간에도 하나님은 그에게 은혜를 주셨고 그를 쓰셨던 것입니다.

어버이날은 어버이의 은혜를 기억하는 날입니다. 우리는 이 날에 육신의 부모뿐만 아니라 참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은혜를 잘 기억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습니다. 때때로 이 땅에서 힘겹게 살아갈지라도 마지막순간까지 ‘은혜를 아는 마음’ 만큼은 잃어버리지 않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지킬 수 있는 힘을 주시고, 나이와 상관없이 풍성한 은혜로 역사하여 주시기를 간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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