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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가정의달] 가정의 위기와 건전한 가정 (시 12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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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로운 눈

어떤 부부가 있었는데 하루는 부인이 남편에게 투덜댑니다."당신은 결혼 전이나 결혼 후에나, 나를 위해 꽃 한 송이를 사올 줄 모르는군요." 무뚝뚝하기로 소문난 남편이었지만, 아내의 서운한 마음을 헤아리며 퍽 고심하다가 며칠 후 남편은 큰마음을 먹고 퇴근길에 꽃가게에 들러서 빨간 장미꽃 백 송이를 샀지만 그것을 들고 집에까지 갈 것을 생각하니, 도무지 엄두가 나질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장미꽃 백 송이를 들고 가는 모습을 보는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쑥스럽고 낯간지럽다는 생각이 들어서 주인에게 신문지로 꽃이 보이지 않도록 포장해 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두툼한 신문지로 가려진 꽃다발의 모양새가, 마치 신문방망이 같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집에 가지고 와서는, "이거 받아요" 하며 무심한 듯 아내에게 건네주었습니다.

그것을 받은 부인은 어떻게 반응했을까요? 그 반응을 두 가지로 나눠봅니다.

첫째는 장미꽃 백송이 보다도, 그걸 포장한 신문지를 보는 것입니다. 그래 맛있는 음식을 개밥그릇에 담은 것처럼 느끼면서 장미꽃 백 송이를 받고도 기분이 나빠지는 것입니다. 둘째는 포장한 신문지를 보기보다는, 내용물인 장미꽃 백 송이를 보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튀는 것을 쑥스러워 하는 남편의 투박한 성격을 헤아리며 씽긋 웃으면서 그 장미꽃 선물에 대해 아주 기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느 쪽에 더 가까운가요? 비록 포장은 거칠지만, 그 안에 담겨있는 내용물을 보시나요? 아니면 포장을 거칠게 할 수밖에 없는 남편의 성격을 이해하며, 다만 그 안에 담겨있는 정성만을 보시나요? 아니면 포장의 거친 것이 먼저 눈에 들어오며, 기분이 나빠지는지요. 다시 말해서 상대방의 속마음을 보십니까? 아니면 겉에 드러나는 모습을 보십니까? 남편이 신문지로 포장을 한 것은, 그의 속마음이 아니라 그의 성격입니다. 사람들에게 튀는 것을 쑥스러워하는 성격, 투박한 성격입니다. 여성에 비해 남성들에게, 상대적으로 그런 면이 있지 않습니까?

물론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고, 포장도 예쁘면 더 나을 것입니다. 그러나 남편에게 그 일은 대단히 어려운 일입니다. 중요한 것은 남편이 큰마음을 먹고 장미꽃 백 송이를 샀다는 사실입니다. 사실은 그 일조차도 남편에겐 쉽지 않은 일입니다. 아내에 대해 사랑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그런데 아내가 서운해하는 마음을 헤아리며, 큰마음 먹고 자신의 애정을 표시한 것입니다. 남편이 애정을 표시하는 그 마음, 그것이 중요합니다. 그 마음을 만나는 일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거친 포장을 물고 늘어져서, 잔소리를 하고 바가지를 긁는다면, 그것은 부인 자신에게도 좋지 않은 일이고 부부관계를 위해서도 좋지 않은 일입니다. 지혜로운 부인은 결코 그렇게 반응하지 않을 것입니다. 지혜로운 부인은 남편의 거친 겉모양 속에 담겨있는, 자신에 대한 사랑의 마음을 만나려 하면서 부인은 행복해질 것이고, 부부관계도 한층 나아질 것입니다.

이는 부부관계뿐만 아니라, 모든 대인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상대를 겉모습으로 만나지 않고, 그의 속마음으로 만나는 것입니다. 대화할 때도, 상대가 표현한 말보다 그 속에 담겨있는 마음을 잘 헤아려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 이 문제를 인생 전반의 차원으로 확대할 필요가 있습니다. 무엇을 보는가? 어떻게 보는가? 하는 이것이 인생의 질을 결정하는 것입니다.

두 물동이의 비교

서로 친한 물동이 두 개가 우물가에서 만났습니다. 그런데 한 물동이는 시무룩한 표정이었고, 다른 물동이는 무척 밝은 표정이었습니다. 밝은 표정을 가진 물동이가 친구 물동이에게 묻습니다."잘 지냈니? 그런데 무슨 일이 있는 거야? 얼굴이 왜 그렇게 어두운 거지?" 그러자 우울한 표정을 짓고 있던 물동이가 한숨을 내쉬면서 말합니다."어휴! 나는 이제 이 우물에 끌려오는 것에 질렸어. 어째서 매일 여기서 물을 채워가도, 돌아올 때는 꼭 비어서 오는 거지?" 그 말을 들은 밝은 물동이가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그건 말이지, 생각하기 나름이야. 나는 언제나 빈 통으로 이 우물에 왔다가, 돌아갈 때는 가득 채워서 간다고 생각을 하니까, 늘 기분이 좋아."

자, 이 두 물동이가 처한 조건이 똑같은데 우울한 물동이는 집에서 우물가로 오는 과정에 초점을 맞춰 문제를 보면서 늘 비어있는 상태, 곧 헛수고로 지각하는 겁니다. 그런데 밝은 물동이는 우물가에서 집으로 가는 과정에 초점을 맞춰서 문제를 보니까 늘 가득 찬 상태, 곧 성취감으로 지각하는 것입니다. 정확히 똑같은 조건에서 한 물동이는 헛수고로 지각하여 우울하고, 다른 물동이는 성취감으로 지각하여 밝은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인생에서 풀어야 할 중요한 화두입니다. 이 화두를 잘 풀어 인생을 살면, 대체로 넉넉하고 밝은 마음으로 삶을 누릴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 화두를 잘 풀어낼 수 있을까요? 바울이 한 방법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우리는 보이는 것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봅니다" 바울이 이 말을 한 원래 취지를 확대하면, 인생의 모든 문제에 적용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육안으로 볼 수 있는 것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육안으로 볼 수 없는 것도 함께 보는 것입니다. 

처음 이야기에서 육안에 보이는 것은 신문지로 포장한 장미꽃입니다. 한 사람은 신문지를 보고, 다른 한 사람은 그 속에 있는 장미꽃을 본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실은 그런 단순한 문제가 아닙니다. 육안에 보이는 것 중에서 어느 한 쪽을 의지적으로 선택하여 보는 문제가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장미꽃을 보는 사람은 단순히 장미꽃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장미꽃을 사는 남편의 마음을 보는 겁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남편의 마음, 그것을 보는 겁니다. 먼저 눈에 보이지 않는 그것을 볼 수 있을 때, 이제 눈에 보이는 것 중에서 장미꽃을 보는 일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남편의 마음을 볼 수 없으면, 신문지를 보게 되는 것이 자연스런 일인 것입니다.

물동이 이야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눈에 보이는 것은 빈 상태입니다. 우물가를 중심으로 하여 보면 그렇습니다. 그러나 밝은 물동이는, 지금 눈에 보이지 않는 가득 채워진 상태를 미리 보는 겁니다. 그러므로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는 능력이 중요합니다. 그것은 과연 능력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특별한 초능력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열린 마음으로 인생을 대하는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가능한 능력인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보이는 것은 잠깐이지만,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하다"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 영혼의 성장을 위해,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는 능력을 키워나가는 일이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총이란 눈에 보이지 않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그분의 은총을 확실하게 신뢰하는 것, 이것은 바로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을 때 가능한 일입니다. 따라서 그분의 은총을 믿는 것을 넘어서서, 그것을 아는 것으로 발전해야 합니다. 믿는다는 것은 아직 보지는 못하는 것인데 그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을 때, 그것은 아는 것입니다. 믿음보다 아는 것이 더 높은 수준인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믿음에서 아는 것으로까지 성장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는 사람은 날마다 이렇게 외칩니다."난 알아요! 그분의 은총을!"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사람, 그는 속사람이 나날이 새로워지고 영혼이 나날이 성장합니다. 그리하여 신문지로 투박하게 포장한 장미꽃을 받고, 기뻐하고 감사하며, 매번 빈 상태로 우물가로 오지만, 그러나 늘 밝은 표정을 지으며 그 분의 은총을 감사하며 날마다 외칩니다. 그러므로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눈을 구비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눈, 그것은 신비로운 눈입니다. 그 신비로운 눈은 행복합니다. 그 신비로운 눈을 위해 기도하시며 날마다 이렇게 외치시기 바랍니다. “난 알고 있습니다. 당신이 그 신비로운 눈을 열어주실 것을!"

건전한 가정의 형성

성경에서 가르치는 건전한 가정은 동양의 가정의 개념과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 가정의 중심이 하나님께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도 가부장제를 말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는 자로서, 또 그 약속을 이어가는 자로서의 가부장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유교적 전통의 가부장제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본문 시편 128편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정의 행복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1절에 보면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도에 행하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라고 하였고, 또 3~4절에서 "네 집 내실에 있는 네 아내는 결실한 포도나무 같으며 네 상에 둘린 자식은 어린 감람나무 같으리로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이같이 복을 얻으리로다" 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정이 행복한 가정이며, 아들 딸 손자 손녀를 보면서 오래 살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신약성경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도 바울은 가족 간의 관계를 모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재정립할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는 주안에서 부모를 공경하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는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와 같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공경하듯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씀이고 부부간의 관계도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관계로 표현하면서 아내는 주님께 순종하듯 남편에게 순종하라고 하였고, 남편은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셔서 자기를 내주신 것같이 아내를 사랑하라고 하였습니다. 성경은 가부장제를 말하지만, 이것은 권위와 힘으로 가정을 지배하는 자로서의 가부장이 아니라 오히려 섬김과 희생을 바탕으로 한 책임적인 가부장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유교의 사상은 결국은 권위주의적인 데 반해서 기독교의 사상은 높고자 하는 자는 먼저 섬기며 희생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평등주의 사상입니다.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가 되신 것은 순전히 그의 성육신과 십자가의 희생에 의해서 된 것이기에 거기에는 권위주의란 있을 수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남편이 아내의 머리가 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철저한 봉사와 희생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질서입니다. 또한 부모가 자녀를 대함에 있어서도 주님의 훈련과 훈계로 하라고 하였습니다. 철저하게 하나님 중심의 교육이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모든 세계가 다시금 가정의 중요성을 생각하며 그 가정을 올바로 세우려고 노력하고 있는데 우리도 더 늦기 전에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가정을 올바로 세워 가야 하겠습니다. 바른 신앙에서 바른 가정이 이루어지고, 바른 가정들이 모일 때 그 교회가 하나님의 나라를 올바로 이루어 갈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모신 가정, 그의 말씀을 중심으로 생활하는 가정, 개인 위주의 삶에서 가족 공동체적인 삶으로 변화되는 가정이 되도록 노력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부부관계는 게임이 아니다

결혼은 두개의 서로 다른 인격이 합쳐서 하나의 삶을 도모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생들은 결혼을 통해 많은 것을 얻게 되는 기쁨도 있지만 동시에 많은 것을 포기하는 뼈아픔도 각오해야 하는데 인간은 자기의 것을 포기하기 싫어하는 본성이 있습니다. 그 본성이 부부들의 성공적인 결혼을 향한 영롱한 꿈을 방해하고 있습니다.

유대인의 교훈집 탈무드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있습니다. "행복에서 불행으로 가는 것은 한 순간이지만 불행에서 행복으로 가는 것은 영원한 시간이 필요한 경우도 있다." 어떤 부부가 지금 이 순간, 행복에 젖어 있다고 하여, 그리고 서로의 장단점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고 하여 서로에 대한 존경심과 관심을 가지는 일에 태만히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한 순간 안에 불행이 찾아 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결혼을 해서 인생이라는 차를 출발시켰다면 인생의 마지막 목적지에 도달할 때까지 한시도 핸들을 놓아서도 안 되고, 바깥의 경치가 좋다고 해서 한눈을 팔아서도 안 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습니다. "우주와 전 세계를 소홀히 할지언정 서로에 대해서는 소홀하지 말라."

우리가 꼭 한 가지 전제할 사실이 있는데 그것은 “부부관계에 철학이란 없고 또한 철학을 요구하지도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부부관계의 성패는 노력에 있으며 그 노력으로 부부의 강한 연대가 이루어지게 됩니다. 대개 성공적인 결혼 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은 철학도 없이, 이유를 따지지도 않고 그저 상대방을 사랑했습니다. 이유와 원인을 중시하는 현대 인생들의 사고 체계로 말미암아 현대 부부들의 틈이 점점 벌어지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이러한 현대 사고방식 속에서도 아름다운 부부관계를 지속시켜 흐린 날 한 뼘의 푸른 하늘을 발견하는 기쁨을 선물하는 아름다운 부부들이 주위에 많이 있습니다. 그들의 아름다움은 어디에서 연유한 것일까요?

무승부의 원리란 생명의 원리이다

무승부의 원리란 나도 살고 너도 사는 생명의 원리입니다. 부부란 타이틀 매치를 벌이기 위해 링에 올라가서 상대방을 어떻게 해서든지 이겨야 하는 권투 선수는 아닙니다. 사랑으로 이루어진 관계에서는 승자와 패자의 우열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이렇게 노래한 적이 있습니다. “그대의 결혼이라는 사랑의 컵에서 사랑이 넘치게 하려면 그대가 잘못했을 때 시인하고 그대가 잘했을 때 침묵하라”

우리 인생들은 사회생활에서 항상 나는 옳고 너는 그르다는 주장을 하며 삶의 승리자가 되려는 본능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잘못한 것은 합리화시키고 잘한 것은 드러내려고 하지만 사랑으로 맺어진 부부들에게는 잘못한 것을 시인하는 용기와 잘한 것에 침묵하는 겸손만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사랑에는 높고 낮음이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너의 높은 산이 깎이고 나의 낮은 골짜기가 메워져 평탄한 대로를 함께 걸어가는 것이 부부입니다.

위자료는 바로 당신 

한 부부가 부부싸움을 하다 남편이 몹시 화가 났습니다. 화가 난 남편은 아내에게 소리를 질렀습니다."나가 버려!" 아내도 화가 나서 벌떡 일어서서 외치기를 "나가라고 하면 못 나갈 줄 알아요!" 하고는 집을 나갔는데 아내는 다시 자존심을 내려놓고 집으로 들어갔습니다. 아직도 화가 풀리지 않은 남편은 왜 다시 들어오느냐고 소리를 지르니까 부인이 말하기를 “가장 소중한 것을 두고 갔어요!”“그게 뭔데?”“바로 당신이에요!”남편은 그만 피식 웃고 말았습니다. 그 후 남편은 부부싸움을 하다가도 "우리가 부부싸움을 하면 뭐해? 이혼을 해도 당신이 위자료로 나를 청구할 텐데…" 라며 여유 있게 웃고 맙니다.

'결혼과 가정"은 너무나 아름답고 신비한 것입니다. 인간에게만 주어진 놀라운 선물이요 축복인데 우리의 죄성과 이기심 때문에 문제와 고통 그리고 상처투성이가 되어 버렸습니다. 이 세상에 완벽한 가정, 완벽한 남편, 완벽한 아내는 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죄성을 지닌 인간으로 ‘쫓겨나서 사는 삶’을 살고 있기에…. 그러나 화목제물이 되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용서와 화해가 가능하고 우리에게 약속하신‘풍성한 삶’을 맛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 가족관계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소풍을 나온 인생으로 살자

가족관계란 잘잘못을 따지는 관계가 아니라 근본적으로 은혜와 사랑의 관계이기 때문에 서로를 있는 그대로 수용하고 서로의 존재 자체를 소중히 여길 때, 우리 마음에는 천국이 이루어지고 우리의 가정과 교회에도 천국의 기쁨이 가득해서 영원한 가정 천국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순례자의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이 세상에 소풍을 나온 셈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이 세상에서의 모든 경험은 영원한 가정, 천국에 가면 모두가 추억이 될 것입니다. 아름답고 즐거운 경험뿐만 아니라 고통스럽고 아프고 슬픈 경험들까지도…. (서정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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