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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어버이주일] 가정생활 시리즈(2) : 자녀들아! (골 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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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에게 순종하라

오늘 본문을 살펴보기에 앞서 같은 내용을 다루고 있는 에베소서 6:1~3 말씀을 찾아 읽어봅시다.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이는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골로새서에 비해 에베소서는 같은 사도 바울이 쓴 내용이지만 조금 다릅니다. 에베소서는 골로새서보다 깁니다. 십계명의 제5계명을 근거로 해서 부모를 공경할 때 주어지는 약속까지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약속은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에 비해 골로새서는 너무 단순하고 짧습니다.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기쁘게 하는 것이니라.” 그런데 이 짧은 명령 속에서 대단히 중요한 교훈들을 들어있습니다. 헬라어에서 ‘순종한다’는 말은 ‘휘파쿠오’인데 ‘듣는다,’ ‘문을 연다,’ ‘복종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세 가지 요소 속에 우리가 부모를 진정으로 공경하는 것이 무엇인지 다 나와 있습니다.

첫째, ‘순종’은 말을 들어준다는 뜻이라고 했는데, 부모공경은 부모님의 말을 잘 들어주는 것이라는 뜻이 됩니다. 며칠 전 어버이날에 양가 부모님에게 전화를 드렸습니다. 전에는 아내가 전화하면 제가 따로 안 하곤 했는데 아내도 통화했지만 저도 통화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 것을 보면 저도 이제 철이 좀 든 모양입니다. 그런데 장인어른과 전화를 하면서 한참동안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니 아내가 옆에서 “무슨 말을 그렇게 한참 했냐?”며 신기해합니다. 무슨 말을 한참 했을까요? 별 내용 아니었습니다. 그냥 교회얘기 집안얘기 등 이런저런 이야기를 저 아닌 장인어른이 주로 이야기 하고 저는 잘 들었습니다.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이제 연세가 드시니 외로우신 모양이다. 내가 잘 들어드리는 것도 효도로구나.” 부모님들은 연세가 드실수록 외로워집니다. 말상대가 점점 없어지고 나이 늙었다고 별로 상대해 주는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니 거창한 효도 말고 그저 어른들 말씀 잘 듣는 것만도 큰 효도입니다.

두 번째로 ‘순종’은 문을 여는 것이라고 했는데, 부모공경은 내 마음의 문을 여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저도 나이가 한 살 씩 더 먹으면서 고집도 세지고 자기주장도 강해집니다. 그러다보니 종종 부모님과 의견이 달라 충돌을 일으킬 때가 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부모님이 잘못 생각하신 것 같아 제 주장을 펴봅니다. 그런데 부모님도 이제 내일모레 팔순을 바라보시는 연세다보니 그 생각이 고쳐지기가 쉽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이제 어머니는 귀도 어두우셔서 제 말을 잘 못 듣고 고집을 부리실 때가 많습니다. 그러다보니 제 마음에 “부모님 생각 고치기 어렵다, 설득하기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어 아예 마음의 문을 닫을 때가 있습니다. “내가 아무리 이야기해봐야 소용없다” 싶어 아예 부모님과 대화하기를 포기하고 내 마음의 문을 닫아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어버이날이면 그저 돈 얼마 지로로 부쳐드리고 어버이날 선물 좀 하고 내 할 일 다 했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집에 모시면서 그저 아침저녁 문안드리고, 맛있는 것 잘 해드리고, 용돈 좀 풍성히 드리면 할 일 다했다고 생각하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효도를 합니다. 겉으로는 부모님을 공경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내 마음의 문을 닫고 사는 것입니다. 나는 내 생활이 있고 부모님은 부모님 생활이 있으니 더 이상 방해 받고 싶지 않은, 내 영역을 침해 받고 싶지 않은 마음도 생깁니다. 이것이 부모에게 마음의 문을 닫은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부모님에게 마음의 문을 열고 대하라고 권고한 것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로 ‘순종’은 복종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오늘은 이 순종과 복종의 문제를 중점적으로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부모에게 진정으로 순종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끊임없이 자녀들에게 부모에게 순종할 것을 가르칩니다. 레위기 19:3은 “너희 각 사람은 부모를 경외하고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고 말씀하면서 부모를 공경하는 것이 하나님의 안식일을 지키는 것만큼이나 중요함을 강조합니다. 잠 23:22은 “너 낳은 아비에게 청종하고 네 늙은 어미를 경히 여기지 말지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오늘 골로새서 3:20은 부모에게 그냥 순종하지 말고 ‘모든 일에’ 순종하라고 말씀합니다. 이렇게 말하면 기억력 좋은 어떤 분은 “아니, 지난주에 분명히 자녀들을 화나게 하지 말라고 설교하면서 부모가 자녀에게 무조건 복종하라고 강요하면 안 된다고, 그러면 자녀들이 화가 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하는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기억력 좋은 분들이 많으면 설교하기 참 힘듭니다. 어떤 분은 10년 전에 설교한 것도 기억하고 똑같은 말 또 한다고 말씀하는 분도 있습니다. 하지만 부모가 자녀에게 무조건 순종하라고 강요하는 것은 틀림없이 잘못된 일입니다. 그러면 왜 20절은 자녀들에게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라고 했는가? 여기서 ‘모든 일’이 무슨 뜻인지 잘 알아야 합니다. ‘모든 일에’ 순종하가고 하니까 무조건 순종하라는 말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모든 일에’ 순종하라는 말은 절대 무조건이 아닙니다. 이 말은 부모가 명하는 것들 중에 악한 것이나 틀린 것까지도 다 순종하라는 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음주에 나눌 말씀입니다만 앞의 18절을 보면 “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여기서 ‘복종’과 오늘 본문인 20절의 ‘순종’은 우리말로는 비슷해 보이지만 전혀 다른 의미입니다. 앞의 18절에 나오는 ‘복종하라’는 헬라어로 ‘휘포탓소’로 누군가의 아래에 서는 것을 뜻합니다. 즉 누군가의 아래에 들어가서 스스로 자기를 낮추고 복종하는 것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러나 21절에 나오는 ‘순종하라’는 헬라어로 ‘휘파쿠오’로 마음과 귀를 열고 누군가의 말을 잘 듣는 것을 뜻한다고 했습니다. 즉 성경이 부모에게 순종하라고 명령한 것은 부모의 말씀을 귀 기울여 잘 듣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귀 기울여 잘 듣고 난 뒤 그 말씀이 지당하면, 혹은 특별히 거역할 이유가 없는 말씀이라면 당연히 따라야 합니다. 그러나 그 말씀이 누군가에게 해를 끼친다거나 죄를 짓는 일이라면 따라서는 안 됩니다. 물론 여기에는 기술이 필요합니다. 무조건 불순종하면 부모의 노여움을 살 것이므로 부드러운 말과 설득력을 가지고 부모님을 잘 설득해서 뜻을 돌이키도록 해야 하지요. 그러므로 부모 입장에서 성경이 자녀들에게 무조건 순종하라고 했다고 자기주장과 고집만 무조건 앞세워도 안 될 것이요, 자녀 입장에서는 부모님 말씀이라고 무조건 따라서도 안 됩니다. 오히려 그 무조건적인 순종이 더 큰 불행과 고통을 부모에게 안겨주는 불효가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이렇게 말씀한 것입니다. “자녀들아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기쁘게 하는 것이니라.” 이렇게만 보면 이 순종이 도대체 누구를 기쁘게 하는 것인지 애매합니다. 그래서 표준새번역성경은 좀 더 정확하게 이렇게 번역합니다. “자녀가 되신 여러분, 모든 일에 부모에게 복종하십시오. 이것이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은 누구를 기쁘게 하는 일인가? 바로 주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일이라는 말입니다. 분명 성경은 부모에게 순종하면 부모를 기쁘게 해드리는 것이라고 말씀하지 않고 주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지난주 설교내용을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지난주 설교에서 자녀를 키울 때 부모의 기준이나 뜻에 따라 키워서도 안 되지만 자녀의 뜻에 따라 키워서도 안 된다고 했습니다. 누구의 뜻입니까? 하나님의 뜻에 따라 자녀를 키워야 한다고 했지요. 부모에 대한 공경도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부모를 공경하고 순종하면 부모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것입니다. 하지만 무조건 부모를 기쁘게 해드린다면서 잘못된 일도 순종하고 죄 짓는 일도 순종하게 되면 그것이 부모공경이 아니라 오히려 큰 불효가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부모님을 공경하고 순종하되 항상 주님의 관점에서, 하나님의 뜻 안에서 순종해야 합니다.

얼마 전 이 사회가 한 바탕 술렁인 적이 있었습니다. 서울 용문동에서 한 초등학생이 심부름을 나갔다가 실종된 후 경기도 포천에서 불에 타 숨진 채로 발견된 것입니다. 범임을 검거해 보니 53살 난 남자가 이 아이를 성추행한 뒤 죽인 것입니다. 그런데 더욱 충격적인 것은 그 남자의 26살 난 아들이 아버지를 도와 시체를 불태우고 유기한 것입니다. 저는 이 사건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자세한 내막은 알 수 없으나 틀림없이 우발적으로 아이를 죽인 아버지가 아들에게 다급하게 도움을 요청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들은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해 함께 시체를 불태우고 숨긴 것이지요. 너무 극단적인 예지만 이것이 과연 효도며 순종입니까? 아니지요. 이건 아닙니다.

이렇게 생각해 봅시다. 일반적으로는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고 그 뜻을 따르는 것이 맞습니다. 이것이 효도입니다. 그러나 두 가지 경우는 예외가 됩니다. 첫째, 죄 짓는 일입니다. 위의 사건에서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한 결과가 무엇입니까? 아버지는 살인자가 되고 아들도 죄인이 되어 인생에 파탄을 맞게 됩니다. 부모를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죄 짓는 일이나 악한 일에서는 순종해서는 안 됩니다. 또 한 가지 영적인 문제는 예외가 됩니다. 부모가 신앙생활을 반대한다고 해서 내 신앙을 포기하거나 부모에게 전도하기를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물론 신앙을 지키겠다고 부모와 정면으로 충돌하는 것은 현명한 방법이 아닙니다. 지혜롭게 처신해서 부모와 정면충돌을 피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나 무슨 일이 있어도 내 신앙이나 부모 전도하기를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이 효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효도나 순종이라는 미명 하에 내 신앙을 포기하거나 부모 전도하기를 포기하면 이는 지극히 큰 불효입니다. 왜? 나도 지옥불에 떨어지고 부모도 지옥불에 떨어지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종종 이런 분들을 봅니다. “저희 어머님이 워낙 심하게 반대해서 어머니 돌아가시면 교회 가겠습니다.” 죄송한 말씀이지만 이 말은 이런 뜻입니다. “저희 어머니 지옥 보내드리고 난 뒤에 저는 교회 나오고 천국 가겠습니다.” 아니지요. 시간을 걸리겠지만 힘은 들겠지만 누구보다 먼저 부모를 전도하고 천국 보내드려야 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순종이요 효도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도 ‘이것이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이렇게 성도들은 자식을 기르는 일이나 부모를 섬기는 일에서도 세상의 안목, 사람의 안목에 맞추려 하지 말고 반드시 주님의 안목, 하나님의 뜻을 먼저 묻고 거기에 맞춰야 합니다. 그래야 진정 가정이 평안하고 행복해 집니다.




가시고기 사랑, 우렁이 사랑

마지막으로 이 어버이주일에 부모님의 크신 사랑에 대해 다시 한 번 돌아봅니다.

조창인의 소설 <가시고기>를 읽어보신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남편 아내는 물론 자녀들도) 꼭 읽어보면 좋겠습니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가시고기는 지구상에서 가장 부성애가 강한 생물입니다. 가시고기는 바다에서 살다가 해마다 이른 봄 산란을 위해 강물로 올라오는데 이 산란준비는 온전히 수컷의 몫입니다. 수컷은 새끼를 키울 둥지를 짓고 암컷은 거기 알을 낳고 난 뒤 미련 없이 둥지를 떠나 버립니다. 이때부터 수컷의 알 지키기가 시작되는데 알을 먹기 위해 모여드는 수많은 침입자들을 물리치고 알들이 잘 자라게 하기 위해 앞 지느러미를 이용해 부채질하며 끊임없이 둥지 안에 새 물을 넣어줍니다. 잠시도 쉬지 않고 아무 것도 먹지 않으며, 오로지 둥지 안의 알을 지키고 키우는 데만 전념합니다. 마침내 알이 부화해 새끼들이 탄생하지만 수컷은 둥지를 떠나지 않습니다. 갓 부화한 새끼들이 둥지 밖으로 나오면 새끼들을 물어다 안으로 집어넣습니다. 아직 나올 때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부화한지 5일 정도가 지나면 새끼들은 제법 자라 둥지를 떠나기 시작합니다. 마지막 한 마리까지 새끼들을 모두 안전하게 떠나보낸 수컷은 마침내 그 자리에서 삶의 최후를 맞이합니다. 둥지 짓기부터 새끼들을 모두 떠나보내기까지 약 15일간 아무 것도 먹지 않고 오직 새끼를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한 수컷의 몸은 만신창이가 되어 결국 죽고 마는 것입니다. 가시고기는 가족을 위해 수고하다 조용히 한 세상을 마감하는 아버지들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또 우렁이는 알을 제 몸에다 낳고 새끼들은 부화한 후 어미의 살을 파먹으며 성장한다고 합니다. 한 점의 살도 남김없이 새끼들에게 먹이로 주고 빈껍데기가 되어 조용히 물에 떠내려갑니다. 자식을 위해 제 살을 파주고 자신은 지치고 병든 우리 어머니의 모습입니다. 이렇게 가시고기처럼 가족을 보호하고 울타리가 되는 아버지의 희생과 우렁이처럼 살을 깎아 먹이는 어머니의 희생 때문에 성경은 분명히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했지만 오늘날 나이 들고 병든 부모는 자식들에게 짐이 되는 존재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누구 때문에 나이 들고 병들었습니까? 자녀에게 내 살 깎아 먹이느라고 지치고 병든 부모 아닙니까? 그런데 귀찮다고 하다니요. 자녀들이 제 아무리 효도를 다한다 해도 이렇게 큰 부모의 사랑을 어찌 다 갚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오늘 우리는 어떤 자세로 부모님의 그 큰 사랑을 갚고 있습니까? 물론 아무리 갚고 갚아도 다 갚을 수 없지만, 또 갚고 싶어도 이미 세상에 안 계심으로 어버이날마다 안타까운 분들도 많지만 우리는 오늘도 그 크고 놀라운 부모님의 사랑을 생각하며 진정한 효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내 모든 것을 아낌없이 주는 부모의 사랑, 내 살을 파주어서라도 자식 잘 되기를 바라는 사랑, 이러한 가시고기 사랑, 우렁이 사랑이 바로 부모의 사랑입니다. 또한 이 사랑이 우리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부모의 사랑은 이 땅 위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는 거울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부모님의 그 큰 사랑 속에서 하나님의 놀라운 희생적이고 무조건적인 사랑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 한 없는 부모의 사랑, 하나님의 사랑을 혹 다 갚을 수 없다 해도 오늘 우리의 자녀와 자녀손들을 믿음으로 바로 키우고 희생적인 사랑으로 키움으로 그 큰 사랑을 조금이나마 갚을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소설 ‘가시고기’에 나온 한 구절을 읽어드리면서 설교를 마칩니다. “가시고기는 이상한 물고기입니다. 엄마 가시고기는 알들을 낳은 후에 어디론가 달아나 버려요. 알들이야 어찌되든 상관없다는 듯이요. 그럼 아빠 가시고기가 혼자 남아서 알들을 먹으려고 달려드는 다른 물고기들과 목숨을 걸고 싸운답니다. 먹지도 자지도 않으면서 열심히 알들을 보호하는 거예요, 알에서 깨어나 무럭무럭 자라난 새끼들은 어느 날 엄마처럼 제 갈 길로 떠나버리죠. 그리고 홀로 남은 아빠 가시고기는 돌 틈에 머리를 처박고 지쳐 죽어버린답니다. 가시고기는 언제나 아빠를 생각나게 만들고, 내 마음 속에는 슬픔이 뭉게구름처럼 피어오릅니다. 아, 가시고기 우리 아빠! 우렁이 우리 엄마!”
(이하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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