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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어버이주일] 이것이 옳으니라 (엡 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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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에 미국 어디에서 아주 희한한 재판이 하나 벌어졌습니다.
  그것은 열 한두 살 되는 소년이 자기 생모와의 모자관계를 법적으로 끊어달라고 하는 '절연(divorce) 요청' 재판이었습니다.
  그 소년은 어떤 사연에서였는지 자기 생모 곁을 떠나 어떤 양아버지 밑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그 양아버지 되는 사람은 변호사로서 부유했을 뿐 아니라 또 그 소년을 무척 사랑해 주었기 때문에, 그 소년은 점점 더 이 양아버지가 좋아졌습니다.
  자기 아들을 그처럼 양부모에게 보내어야 했던 그 친어머니는 나중에 상황이 어떻게 바뀌어졌는지는 모르겠지만, 자기 아들을 찾아오고 싶어 하게 되고 더 자주 만나려고 시도했었습니다.
  하지만 그때 이미 이 소년은 자기 집으로 돌아가는 것은 물론이고 자기 친어머니를 만나는 것조차 아주 싫어졌습니다.
  그래서 그 소년은 자기 양아버지와 의논을 했고 결국 그 양아버지의 후원 아래 그와 같은 전대미문의 '생모와의 법적 절연 요청' 재판을 벌이게 되었던 것입니다.
  저는 그 재판 장면을 잠시 텔레비전 뉴스로 보게 되었었는데 그 중에 있었던 장면, 어떻게 보면 별 것 아닌 것도 같지만 다른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등골이 섬뜩했던 한 장면을 지금도 기억합니다.
  지금 자기 생모와 아주 절연하겠다고 재판이 벌어지고 있는 중인데, 그 소년은 자기 앉은 자리에서 비스듬히 앉아서 자기 양아버지가 무슨 이야기인지 나누면서 계속 웃고 있었습니다.
  그 장면을 중계하고 있던 어느 여자 해설자가 그때 이런 코멘트를 했습니다.
  "제가 저 소년의 변호사라면 저기서 저렇게 웃지 않도록 주의를 주겠어요. 지금 저 자리는 정말이지 심각한(serious) 일을 두고 재판이 벌어지고 있는 곳이잖아요?"라고 그녀는 실로 안쓰러운 어조로 말했습니다.
  지금 그 생모는 자기 친아들로부터 절연 소송을 당하고 눈뜨고 멀쩡히 아들 잃게 될 꼴을 당하려는 판인데, 정작 그 아들인 소년은 그 자리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은 마치 안중에도 없는 듯 자기 양아버지와 뭐가 그리 재미있는 이야기인지 낄낄대고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그 재판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모릅니다.
  그리고 사정이 어찌되었든지 간에 그런 지경에 이르기까지는 그 생모 되는 여자 쪽에 무언가 잘못해도 크게 잘못한 것이 있었을 것이라는 사실도 간과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그처럼 어처구니없는 일이 재판으로 벌어졌다는 사실과 그런 자리에서도 웃을 수 있는 한 소년을 볼 때, 한 가지 사실은 제게 분명해졌습니다.

  그것은 미국이라는 나라에서는 전통적인 부모와 자식의 관계라는 것이 도전을 받고 이미 깨어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부모와 자식은 더 이상 혈연으로 정의되는 절대적인 관계가 아니라, 이제는 서로 얼마만큼 사랑하고 돌보아 줄 수 있는가 하는 조건에 의해서 상대적으로 성립되는 관계로 바뀌어가고 있습니다.
  자기가 부모로서 사랑하고 싶은 마음이 없으면, 부모로서 자기에게 제공해 줄 수 있는 능력이 모자라면, 자식 편에서는 그런 부모는 자기 부모가 아니라고 얼마든지 부인할 수 있는, 아니 법적으로 아예 내 부모가 아니라고 관계를 완전히 끊을 수 있는, 실로 기가 막히는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세상 사회의 조류와 분위기에 비해 본다면, 너무나도 고리타분하게만 들리는 한 명령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로 "내 부모를 공경하라 이것이 옳으니라"는 말씀입니다.
  자식은 부모를 순종하고 공경해야 한다고 명령하면서, 무조건 '이것은 옳은 일이다'라고, 무슨 이의나 반론을 제기할 여지도 없도록 강조했습니다.
  자식으로서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이것저것 따질 것도 없이 지극히 당연한 일일 뿐이라고 성경 말씀은 아예 못을 박고 있는 것입니다.

  왜 이것이 그처럼 옳은 일이겠습니까?
  왜 부모 공경이 사람으로 태어난 사람이라면 이유를 물을 것도 없이 무조건 지켜야만 할 절대명령이 되는 것입니까?
  우리는 오늘 어버이주일을 지키면서, 이 질문에 대한 두 가지 대답을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상고해보고자 합니다.

  1. 부모 공경은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신자다운 신자되기 위한 필수적인 과정입니다.

  본문 1절 말씀을 보면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고 했습니다.

  여기 "순종"이라고 번역된 말은 오히려 '복종'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원문의 뉘앙스에 가까우며, 특히 '어떤 말씀을 따를 자세가 되어 있음'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이런 순종은 다시 말하자면 '아랫사람이 어떤 권위 있는 윗사람을 대하는 자세'를 가리킵니다.
  자식이 부모를 대하는 관계란 것은 무슨 상호이해나 주고받는 사랑 같은 평등의 관계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상하의 관계에서 출발하는 것임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또한 이어지는 2절에는 부모를 "공경하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부모를 대하는 가장 기본적인 마음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강조하는 말씀으로서, 부모에 대한 순종이라는 것이 그처럼 자식보다 높은 권위에 눌려서 억지로 행하는 것이 되어서는 아니되고 오직 진심으로 존경하면서 높이 받들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와 같은 부모 공경에 있어서 한 가지 중대한 수식어가 덧붙여져 있는데 그것이 바로 "주 안에서"(in the Lord)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너희들이 주 안에 있으니' 혹은 '주께 속한 자답게'라는 뜻입니다.
  즉 부모 공경은 가장 기본적이고도 보편적인 인륜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도 먼저 이것은 '하나님께 속한 신자로서' 당연히 지켜야 할 의무라는 말씀입니다.
  바꾸어 말하자면 사람이 육신의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신앙의 자세를 지키는 것과 직결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 원리를 곳곳에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레위기 19장 32절 말씀에 보면 "너는 센 머리 앞에 일어서고 노인의 얼굴을 공경하며 네 하나님을 경외하라 나는 여호와니라"고 했습니다.
  사람이 어른을 공경할 줄 아는 것이 곧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과 직결되어 있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조금만 생각해 보아도 지극히 당연한 말씀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어떤 눈에 보이지 않는 높은 대상을 받들어 섬기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기 위에 더 '높은 존재'가 있음을 인식하고 그 높은 존재 앞에서 자신을 낮추는 것입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은 본성적으로 이것을 싫어합니다.
  자기에게 명령을 내리고 자기를 제한하고 자기를 주장할 수 있는 어떤 권위 있는 높은 존재가 자기 위에 있는 것은 그 어떤 사람이라 할지라도 다 싫어하게 되어 있은 것입니다. 그래서 인류 역사상 사람은 부단히 높은 사람과 낮은 사람의 격차를 어떻게 해서든지 줄여보려고, 높은 사람이 가진 권력을 분산시켜 보려고, 혁명이다 민주투쟁이다 하고 싸워온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그 결과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다'는 슬로건을 제창하게 되었고, 오늘날 자유민주사회에서는 '비록 대통령이라 해도 기본적으로는 한 국민에 지나지 않는다.'라는 말을 원칙적으로는 당연히 맞는 소리라고 누구나 다 인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평등과 민주란 좋은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이 다른 사람을 대할 때 모든 경우에서 평등만을 추구하게 되면 '상하 관계'라는 것을 전제로 하는 복종과 공경이라는 개념은 자연히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이 인간사회에는 질서라는 것이 유지될 수 없고 결국 자멸을 길을 갈 수밖에 없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사람이 윗사람에 대한 공경이라는 것을 아주 모르게 되면 그 어떤 사람이나 존재보다 훨씬 높이 계신 저 절대주권자와 아무 관계도 맺지 못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로 가지기 위해서는 '사람 편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 상하관계 인식이 필연적이기 때문입니다.

  학교에서 선생님 존경하는 법도 못 배운 학생이 사회에 나가서 직장 상사의 지시를 따르면서 자기 업무를 잘 수행할 수 있겠습니까?
  집에서 금이야 옥이야 하면서 귀여움만 받고 버릇없지 자란 청년이 군에 입대했을 때 그 계급사회에서 적응하기란 얼마나 어렵겠습니까?
  그렇다면 만약 인간사회에서 그 어떤 상하관계도 제대로 배우지 못한 사람이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어떠하겠습니까?
  그것은 아주 어려운 일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불가능한 일이 됩니다.
  왜냐하면 눈에 보이는 사람 중에서도 존경과 복종의 대상이 되는 윗사람을 인정도 경험도 해 보지 못한 사람이,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받들어 섬긴다는 것은 어림도 없는 일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여기에 부모 공경이 지극히 '옳은 일'이 되는 하나의 이유가 있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으로 하여금 눈에 보이는 자기 부모를 윗사람으로 모시고 순종하고 공경하는 법을 배우게 함으로써,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 또한 자연스럽게 배울 수 있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모공경을 배우지 못하는 자식은 결코 하나님을 제대로 믿을 수 없습니다.
  혹 본인은 믿는다고 주장하더라도 그것은 자신의 부모를 만만하게 대하는 것과 꼭 같이 하나님까지 만만히 대하는 아주 건방진 수준에서 한 걸음도 더 이상 나아갈 수 없을 것이 확실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믿음이란 것은 기껏해야, 부모가 자기에게 무엇을 먹여 주고 입혀 주고 사 줄 때 그저 감사할 줄 아는 정도에서만 끝나는 것처럼, 자기에게 무언가 좋게 해 주신다는 하나님을 그저 즐기고 기껏해야 감사기도하는 정도에서 결코 더 올라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 어떤 경우에도 부모는 자식에게 공경을 받아야 할 윗사람이고 자식은 부모의 말씀을 순종해야 할 아랫사람이라는, 하나님께서 창조해 놓으신 이 순서는 절대로 변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부모는 점점 더 치매가 생기고 자식은 더 똑똑해져도, 아무리 부모가 자식에게 의탁해서 살게 되고 자식이 돈 벌어 오는 사람이 되어도, 아무리 부모는 백발이 되고 자식은 창창한 인생 황금기에 살고 있어도, 이 위아래는 절대로 바뀔 수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런 위계질서를 제정해 놓으셨고, 그 하나님께서 자식은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를 높이 받들어 모셔야 마땅하다고 엄명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부모 앞에 순종하고 공경할 줄 아는 자식이 되어야만 비로소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바로 모실 수 있으며, 여기에는 결코 예외가 없습니다.
  부모 공경은 사람이 신자다운 신자, 정말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섬길 줄 아는 진짜 신자가 되기 위하여 이처럼 필연적인 과정임을 깨닫고, '이것은 옳은 일이다'라고 단호히 선포하시는 계명대로, 눈에 보이는 아버지와 어머니께 순종함으로써 저 가장 높은 곳에 계신 하늘의 아버지 역시 더욱 경외할 줄 아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2. 부모 공경은 사람이 세상 사회에서 사람다운 사람이 되기 위한 필수적인 요건입니다.

  이어지는 2절과 3절의 말씀에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계명이니 / 이는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고 기록했습니다.

  부모 공경을 가리켜 "약속 있는 첫계명"이라고 했습니다.
  아시다시피 부모 공경은 십계명 중에서 다섯 번째의 계명이지만, 계명 순종에 대하여 어떤 약속이 첨부되어 있는 계명으로서는 처음이자 마지막 계명인 까닭에 '약속 있는 첫 계명'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약속'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설명하기를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고, 역시 십계명에서 나오는 그대로 인용하고 있습니다.

  물질적인 부요, 건강장수 등 '땅에서'의 축복이 바로 이 부모 공경의 계명에 약속되어 있는 것입니다.
  건전하고 안정된 사회는 건강한 가정으로 말미암아 성립되는 것이며 그 건강한 가정은 부모공경이 밑뿌리가 됩니다.
  그러므로 부모에게 순종하고 공경하는 개인이 모인 집단과 민족은 결과적으로 더욱 힘 있고 부요한 사회를 영위하게 되는 것입니다.

  옛날 우리나라 사회에서는 충과 효가 한 사람을 평가하는 최고의 양대 기준이었지만, 이제 점점 더 개인주의적으로 흘러가는 현대사회가 될수록 이 '부모 공경'은 그 기준의 목록에서 사라지고 있습니다.
  그 사람이 얼마나 부모를 잘 받드는 자식인가 하는 질문은, 그 사람이 어느 학교를 졸업했고, 어떤 직장에 들어갔고, 어떤 배우자를 만났고, 어떤 차를 몰고 다니고, 얼마나 큰 아파트에 살고 있고 하는 질문들에 완전히 가리어집니다.
  자기 자식을 얼마나 잘 키우고 있는가 하는 것은 여전히 평가 기준들 중에 상위를 차지하고 있는 반면에, 그 사람이 자기 부모를 얼마나 잘 모시는가 하는 것은 한 개인을 평가하는 질문으로서는 앞으로 가면 갈수록 점점 더 찾기 어려워질 것임에 틀림없스니다.

  하지만 옛날 나오미의 고향 베들레헴이란 동네에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생판 알지 못하던 한 이방 모압 출신의 룻이란 여자가 어느 날 갑자기 베들레헴에 왔습니다.
  남편과 사별한 후 자기 시모 나오미를 따라 시댁의 고향으로 왔던 것입니다.
  그때 그 베들레헴 사람들이 룻이란 이 생면부지의 여자를 두고 어떻게 판단했습니까?

  그들은 이 룻이 지극히 효성 깊은 여인임을 보았습니다.
  도대체 어떤 여자인지 전혀 알 길 없지만, 학벌이 얼마나 좋은지, 죽은 남편과의 관계가 어떠했는지, 이스라엘 사람에 대하여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 외국인인지, 다른 것들은 도무지 알 길이 없었지만, 단 한 가지, 그 룻이란 여인이 자기 시모 나오미를 지극히 정성스럽게 모시는 효부인 것을 보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룻이 보아스를 만나게 될 즈음에는 이미 온 동네에 그 소문이 쫙 퍼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보아스는 룻을 만나자마자 "네 남편이 죽은 후로 네가 시모에게 행한 모든 것이 내게 분명히 들렸다"라고, 또 "네가 현숙한 여자인줄 나의 성읍 백성이 다 아느니라"고 칭찬했던 것입니다.
  보아스와 베들레헴 사람들은 룻의 효성만을 보고서도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를 충분히 판단했고 또한 정확한 평가를 내릴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룻은 아무 아는 사람 하나 없는 그 외국 객지의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을 때, 단 한 가지, 부모 공경하는 그 자세 하나 때문에 자기의 새 이웃과 베들레헴 사회에서 인정받고 칭찬받고 영접받으면서 정착할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소위 '고려장'이란 것을 우리는 어려서부터 들어왔습니다.
  부모가 늙어서 노쇠하게 되면 광 속에 옮기고 죽게 내버려 둔다든지 혹은 깊은 산중에 내다버리는 관습이 우리나라의 과거 역사에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오늘날에 와서는 그런 고려장의 실제에 대한 의문이 사학자들 중에서 제기되고 있습니다.
  '고려장'이라는 단어와 개념은 분명히 있었지만 그것이 그처럼 부모를 산 채로 내버리는 관습은 아니었는데 설화나 일제의 날조에 의하여 와전되었다는 학설이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저도 개인적으로 생각해 볼 때, 우리나라처럼 충과 효를 강조한 사회에서 과연 그런 일이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듭니다.

  '과거의 고려장'이 어떠했고 정말 있었는지는 확실히 모르겠지만 '현대판 고려장'은 분명히 벌어지고 있습니다.
  여행시켜 준다면서 부모를 제주도로 데려갔다가 공항에 버려두고 돌아와서 자기네들끼리 이사를 해 버린다든지, 건강한 자기 부모를 치매가 걸렸다고 속여서 국내의 복지원 같은 데다 맡겨놓고 자기네들끼리 이민을 가버린다는 것입니다.
  평생 부모님에게 서울 근교 구경도 안 시켜주던 자식이 갑자기 "아버지, 어머니, 오랜만에 제주도 여행 같이 갑시다."라고 하면, 일단 의심부터 해 보아야 할 시대가 되었습니다.
  평소부터 부모님 모시기 귀찮아하던 자식이 갑자기 "아버지, 어머니, 이제부터 좋은 양로원에 모시겠습니다."라고 하면, 그게 자식과 영원한 작별이 될 것이 아닌지 걱정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실로 이것이 우리 사회의 망조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런 말들이 농담 같은 진담으로 떠돌고 있다는 것 그 자체가 이미 오늘날의 자식들이 얼마나 '악하고 패역한 세대'가 되어가고 있는지를 고스란히 반영해 주는 것 아니겠습니까?

  사람다운 사람인가 아닌가는 부모 공경할 줄 아는가 모르는가 하는 이것만 보면 충분한 것입니다.
  부모 순종할 줄 모르는 천재들, 부모에게 효도할 줄 모르는 부자들, 부모를 받들어 공경할 줄 모르는 미남미녀들 - 이런 사람들만 모여서 사는 사회를 한번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아무리 저희들끼리 사는 재미를 만끽하며 살아도 바로 소돔과 고모라요 아무리 저희들끼리 수준 높은 문명을 자랑해도 오직 장망성 바벨론이 될 뿐일 것입니다.
  그곳은 사람 같지 않은 사람, 사람 이하의 사람들만이 사는, 실로 저질 인간들만 모인 곳이 될 것이기 틀림없기 때문입니다.

  부모 봉양을 피할 수만 있으면 저희들끼리 더 돈 많이 모을 수 있고, 부모를 모시지 않으면 저희들끼리 재미있게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자식들은 그 불효가 자기 자신을 향한 화살로 되돌아오는 날을 반드시 맞게 됩니다.
  왜냐하면 자기 할아버지, 할머니를 그렇게 대하는 것을 본 그들의 자녀들이 나중에 그 부모에게 그와 꼭 같은, 아니 그보다 더 불효한 자식들이 될 것이 틀림없기 때문입니다. 문자 그대로 '인과응보'요 '자기가 스스로 파놓은 고려장'에 빠지는 것입니다.

  사람다운 사람들이 모여 잘되고 장수하는 복된 사회를 부모공경이라는 윤리를 지키지 않고 이룩할 수 있는 길은 결코 없습니다.
  왜냐하면 오직 부모공경만이 사람이 '땅에서' 잘되고 장수하며 살 수 있는 인간사회의 유일한 기본질서가 되도록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확정해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런 까닭에 이것은 모든 자식들이 반드시 지켜야 할 '지극히 옳은 일'이라고 선포하시는 말씀을 따라서, 자기를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고 효도함으로써 '사람다운 사람'이 되며 '약속된 축복'을 꼭 누리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님 여러분, 분명 이 시대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이 말씀이 점점 더 고어가 되어 가고 있는 때입니다.
  부모의 말씀에 순종하고 부모를 존경하고 부모의 권위에 복종하라는 말씀은, 지극히 일방적인 권위주의자의 말이라고 속단해버리는 시대입니다.
  부모가 내게 해 준만큼만 감사하고, 부모가 날 이해해 준만큼만 이해해 주려고 노력하고, 부모가 날 존중해주는 만큼만 존중해 주는 것이 오늘날의 자식들에게는 지극히 당연한 논리가 되어 가고 있습니다.
  근본적으로 부자관계란 세상의 다른 친구들과의 관계와 조금도 다름없게 되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실제로 자기 부모가 자기의 최고 친구라는 식으로 말하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사람들을 미국사회에서는 흔히 볼 수 있습니다.
  물론 부모가 부분적으로 자식의 좋은 친구처럼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부모는 친구가 될 수 있기 이전에 어디까지나 먼저 부모인 것을 오늘날의 세대들은 잊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니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씀은 고어가 되어버리고, 그 대신 '부모를 이해하려 노력하라'라든지 '부모와 친근한 관계를 유지하라'는 따위의 카운슬링이 제5계명의 자리를 대신 차지해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히 비극이며 시대의 망조입니다.
  왜냐하면 자식이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성경이 가르치는바 절대적으로 '옳은 일'이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어찌되었든지, 사회가 어떻게 바뀌든지,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든지 간에 자식이 부모를 공경해야 함은 사람 사는 곳에서 결코 변할 수 없는 절대적인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이 '옳은 일'을 준행하지 않는 개인은 결국 비인간화될 것입니다.
  부모 공경할 줄 모르는 개인들이 이룩하는 사회는 점점 더 덕과 정이 사라지고 욕심과 냉정함이 판을 치게 될 것입니다.
  이 옳은 일을 지키지 않는 개인은 반드시 비신자화될 것입니다.
  부모 공경할 줄 모르는 세대는 필연적으로 하나님을 무시하게 되고 '모든 일에 자기 소견대로 행하는' 악이 관영하는 사회로 치닫게 될 것입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부모 공경할 줄 모르는 개인과 사회는 하나님 앞에서 반드시 망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 말씀은 사람이 "부모를 거역"하는 것이 바로 말세의 징조라고(딤후 3:1) 단호히 경고합니다.
  그리고 자식이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고 마땅한 일이라고, 사람으로 태어난 이상 결코 예외가 없이 지켜야 할 계명이라고, 이것은 '옳은 일'이라고 명백하고도 엄히 선언하는 것입니다.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 이 오래 전 옛날 말씀이야말로 우리를 사람답게, 신자답게 살도록 이끌어 주는 계명인 줄을 다시금 깨닫고, 이 계명을 끝까지 지킴으로써 부모를 기쁘게 하며 자신은 약속된 복을 누리는 자녀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석기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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