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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어버이주일]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우리 어머니! (갈 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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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우리 어머니! (갈라디아서 4:26)

  오늘 말씀의 본문은 어머니를 신앙의 세계에 유비해서 "성도된 우리의 어머니는 예루살렘 즉 교회"라고 말씀합니다. 갈라디아서 4장의 내용은 사도바울이 율법과 복음, 아브라함의 두 아들을 예로 들면서 하나님의 약속의 자녀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말미암아 거듭나서, 율법과 죄로부터 자유함을 받은 우리들을 향하여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로서 우리의 어머니"라고 말씀하는데,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요한계시록 21장 2절의 표현대로 하면, 우리가 살 영원한 새 예루살렘 즉 천국의 상징이요, 교회는 지상에 존재하는 천국의 모형이기 때문에 교회야말로 오직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들의 어머니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위에 있는 예루살렘이 죄와 율법에서 자유하듯이, 지상에 존재하는 모든 기관들 중에 오직 교회만이 죄와 율법에서 자유한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의 복음을 선포하는 곳입니다.

  오늘 어버이 주일을 맞이해서 왜 교회가 성도들의 어머니인가 그 의미를 생각하면서 우리의 육신의 부모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또한 우리 온 성도의 영적 어머니인 교회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주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교회가 우리 성도의 어머니가 되는 첫 번째 이유는 신앙의 잉태됨과 영혼의 중생이 성도의 어머니인 교회로부터 태어나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한 생명이 어머니 뱃속에서 잉태되어 태어나기까지 온갖 수고를 다하게 됩니다. 입덧도 하고, 몸매도 망가지고, 스타일도 구겨집니다. 또 아기가 태어나는 순간에는 어머니는 까빡 죽는 경험까지 한다고 합니다. 우리가 예수 믿고 신앙이 잉태되고 새롭게 중생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분들은 말하기를 교회가 사랑이 넘쳐야 한다고 말합니다. 교회가 일치단결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교회가 평화와 질서가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교회가 관용이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교회가 덕이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다 옳은 말입니다. 그런데, 부정적으로 들릴지 모르겠지만, 사실 그런 것 외에도 교회는 시끄럽고 괴로운 곳이 교회의 본질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위대한 진리의 신생아가 태어나기 위해서 교회는 괴로운 것입니다. 아플 때가 있습니다. 입덧이 심할 때도 있습니다. 구역질 날 때도 있습니다. 아이가 태어날 때는 시끄럽습니다. 모두가 분주하게 움직입니다. 병원비와 육아비로 경제적 부담도 있습니다. 해산의 고통과 수고가 있어야 한 생명이 탄생되듯이 성도의 어머니인 교회도 한 영혼, 한 영혼을 새롭게 하나님의 형상으로 거듭나게 하는데 몸살을 앓게 됩니다.

  우리가 어떻게 구원받고, 어떻게 이 복된 자리에 앉아 있게 되었는가 돌이켜보면, 거기에는 마치 어머니의 희생과 같은 위대한 사랑의 희생이 있었습니다. 누군가 날 위해서 드린 눈물의 기도가 있었습니다. 휘청거리고 쓰러질 때 붙잡아 주고 일으켜 세워준 손길이 있었습니다. 갈 바를 알지 못하고 캄캄한 인생길을 방황할 때 진리의 빛되신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해 준 사랑의 수고가 있었습니다. 이러한 사랑의 정성이 이어지고 쌓이고 쌓여서 우리가 세상의 죄악으로부터 자유자가 되어 예루살렘 복된 집, 이 영생의 자리에 있게 되었습니다.

  더욱이 우리 주님의 갈보리 십자가의 고통이 없었던들, 우리는 영원히 죽게 되어버릴 진노의 자리에 있게 되었을 것입니다.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산모가 아이를 낳을 때 진통하는 말로 표현하면 "아이고 나죽네!"입니다. 마치 산모가 양수가 터져 아이가 탄생하듯, 우리 주님은 십자가에서 물과 피를 다 쏟으시고, 그 십자가에 모든 해산의 진통을 다 겪으시고 죽으셔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탄생시켰습니다.
  사복음서 중 마가복음이 가장 먼저 씌여졌음에도 불구하고 왜 복음의 시작이 마태복음으로 시작합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 때문입니다. 우리를 복음의 족보, 영생의 족보인 천국의 생명책에 올리고 복음이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 족보에 내 이름이, 우리 모두의 이름이 올라가야 합니다. 아이가 태어나면 그 집 가문의 족보에 올리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로 태어난 우리들은 예수님의 족보에 올라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마태복음 1장 복음의 시작입니다.

  여러분 신약성경 마태복음 1장17절을 보십시오. "그런즉 모든 대수가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열네 대요, 다윗부터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갈 때 까지 열네 대요,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간 후부터 그리스도까지 열네 대더라" 그런데 실제로 대수를 세어보면,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간 후부터 그리스도까지 사이에 한대가 빠져 있습니다. 성경이 잘못기록하고 있는 걸까요? 아닙니다.
  바로 우리의 이름을 예수님의 족보에 올리도록 해놓은 하나님의 특별하신 사랑의 배려입니다. 마태복음 1장 16절 다음에다 이렇게 기록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물과 피를 다 쏟으시고 죽으심으로 나 아무게를 낳으니라"

  이러한 엄청난 천국족보에 올리는 은총을 받은 우리들은 또한 예수님의 뒤를 이어 영적 자녀를 잉태하고 출산하는 영적 산모들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 갈라디아서 4장 19절의 사도 바울의 외침을 들어보십시오.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의 수고를 하노니"
  하나 낳고 끝나는게 아닙니다. "다시" 거듭해서 해산의 수고를 한다고 말씀합니다.

  우리나라가 OECD국가 중에서 출산율이 최하위라고 걱정을 합니다. 이젠 국가가 나서서 출산과 양육에 따른 비용과 시설을 적극적으로 감당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우리나라 젊은 여성들이 아이를 낳기 싫어서 낳지 않는 것이 아니라, 낳지 않는 가장 큰 이유가 출산과 육아에 따른 비용과 시설이 부족하여 아이를 낳으면, 곧 바로 직장을 잃게 되고, 지금까지의 재능과 경험을 사장시킬 수밖에 없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나라가 나서서 해산의 수고를 감당해야 하듯이 교회도 영적 신생아를 만들고 키우는데 교회가 전적으로 나서서 도와야 합니다.

  첫 아이를 낳을 때 겪는 아픔과 해산의 수고가 둘째 아이 셋째 아이 낳을 때는 반절로 줄어들고, 삼분의 일로 줄어드는 것이 아닙니다. 똑같이 배부르고 똑같이 아프고 똑같이 희생하는 해산의 수고가 있는 것처럼, 사도바울을 그런 어머니의 심정으로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의 수고를 한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첫 아이 출산할 때 합심해서 정성을 쏟아 도와주는 것과 같이 둘째, 셋째, 넷째로 이어지는 영적 신생아를 위해서도 꼭같은 관심과 정성을 쏟아야 합니다. 전도와 선교에 처음에는 열심을 낼 수 있지만 갈수록 시들해지는 교회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세월이 갈수록 더욱 열심히 많은 영혼들을 탄생시켜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 천국의 생명의 족보에 많이 올려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어버이 되신 주님의 마지막 남기신 유언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주님의 몸된 교회는 "지상에 있는 새 예루살렘(천국), 우리의 어머니"입니다.

  두 번째 교회가 왜 우리의 어머니입니까? 그것은 영양분을 먹여주는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어머니는 아기를 안고 젖을 먹여줍니다. 시시때때로 좋은 음식을 갖다가 때를 따라 잘 먹여줍니다. 어린 아이 때는 젖을 먹이고, 조금 크면 이유식을 먹이고, 조금 더 크면 딱딱한 음식을 먹여서 점점점점 살과 뼈가 자라서 튼튼해지고 훌륭하게 장성한 몸을 갖도록 해주는 것이 어머니의 역할인 것처럼, 마찬가지로 교회는 성도들에게 신령한 젖과 신령한 양식을 먹여주고 자라도록 하는 곳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우리 성도의 어머니입니다. 
  그런데 성도들의 영적 성숙을 위해서 교회는 부드러운 우유나 음식만을 먹이지 않고 때때로 딱딱한 음식을 공급할 때가 있습니다. 먹어서는 안 될 것을 먹지 못하도록 할 때도 있습니다.

  신사임당을 여러분 잘 아실 겁니다. 이율곡 선생의 어머니입니다. 이 어머니가 대단한 어머니입니다. 신사임당에 대한 한 가지 예를 들면, 그 시대에는 양반이 본부인 외에 첩을 얻어서 살아도 괜챦은 때인데 자기 남편에게 그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이보세요 영감, 내가 죽더라도 재혼하지 마세요. 혹시 내가 병이 나서 당신보다 일찍 죽는 경우가 온다해도 절대 작은 부인 얻지 마세요. 이것은 내가 질투가 나서 그런 것이 아니라, 당신의 이 칠남매 자식들이 잘못될까봐 그러니 절대로 재혼하지 말고 혼자서 자식들을 키우고 사세요" 여러분! 바로 이 분이 신사임당입니다. 이 어머니에게서 율곡 선생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용감해야 합니다. 이것이 어머니의 엄격성입니다. 사랑이 있지만 잘못된 길로 갈 때는 바로 잡아줄 수 있는 엄격성이 어머니에게 있어야 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로 성도들이 잘못가고 있으면 바로 가르쳐 줘야하고, 해로운 음식을 먹으려고 하면 엄격하게 막고 살찐 꼴을 먹여야 교회는 성도의 어머니가 되는 것입니다.

  끝으로, 교회가 우리의 어머니가 되는 것는 교회는 사랑의 품이 되어야하기 때문입니다. 용서와 위로가 있고, 자녀된 신분이 보장이 되어야 교회를 성도의 어머니라 부를 수 있습니다. 항상 잘못된 것만 지적하고, 실수하면 때리고 꾸짖기만 한다면 거기에는 참된 어머니의 품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세상에서 고달파 지쳤을 때 우리는 어머니의 이름을 부릅니다. 성공해보겠다고 몸부림치다가 실패의 쓴잔을 마셨을 때에도 우리는 어머니의 이름을 부릅니다. 때때로 힘든 세상에서 낙심될 때, 객지에서 오고 갈곳 없을 때, 배가 고파 지쳐 쓰러졌을 때, 병들어 병상에 누워 있을 그때에 우리가 부르는 이름이 있습니다. "어머니! 어머니!" 우리가 "어머니!"하고 부르는 것은 어머니는 구원의 이름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아는 나이 많아 연로하신 장로님께서 병상에 누워 끙끙 앓으시는데, 고통의 신음소리와 함께 터져 나오는 이름이 있었습니다. "아이고 어머니! 아이고 어머니!"
그 나이 많으신 장로님도 어머니의 이름을 부르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어렸을 때나 늙었을 때나, 기쁠 대나 슬플 때나, 언제나 변함없이 부르는 그 영원한 이름이 바로 어머니입니다. "어머니!"하고 부르면 아픈 것이 좀 없어지는 것 같아요, "어머니!"하고 부르면 지친 심령이 위로가 됩니다.
  우리가 어머니를 부르는 것은 어머니가 우리의 고향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고달파 지치고 쓰러졌을 때에도, 죽음이 목전에 있는 위험을 당할 때에도 우리가 찾을 수밖에 없는 마지막 고향과 같은 어머니의 품이 있습니다. 바로 교회입니다. 우리는 어머니 품인 교회에 와서 고달파 지친 세상에 모든 짐들을 십자가 앞에 내려 놓습니다.
  교회에 들어오면 어머니 품속에 들어 온 것처럼 잘못을 저지르고 와도 자신이 있고, 억울한 일을 당해도 받아 안아 주시고, 범죄한 심령이 와도 용서가 되고, 자녀로서의 신분이 보장되고 자녀로서 대우받으며, 모두가 하나 되는 어머니 품인 천국과 같은 새 예루살렘! 그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우리의 어머니입니다. 어머니 품 안에서는 모든 것이 은혜인 것처럼 교회는 모든 것이 은혜이어야 합니다. 특별히 한국교회의 어머니 교회인 우리 새문안 교회가 어머니 품이 되어야 합니다. 은혜가 차고 넘치는 교회가 더욱 되어야 합니다.

  오늘 어버이 주일을 맞이해서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부모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사랑한다고 고백합시다. "아버지! 사랑합니다. 어머니! 사랑합니다. 아빠! 사랑해요. 엄마! 사랑해요" 부모님이 이 땅에 계시지 않고 먼저 앞서 하늘나라에 가신 분들은 하늘을 향해서 어머니 아버지의 이름을 부르며 사랑한다고 외쳐보시기 바랍니다.

"아버지 날 낳으시고 어머니 날 기르시니,
두 분 곧 아니시면 이 몸이 살았을까?   
하늘같은 은덕을 어디다 갚사오리.
어버이 살아실제 섬길일일랑 다하여라.
지나고 나면 애달프다 어이하리.
천하에 고쳐못할일이 이뿐인가 하노라"

정철의 송강가사의 전번부의 내용처럼 우리의 정서로 하면, 오늘 말씀의 제목을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우리의 어버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또한, 송강가사의 후반부의 내용과 "세월은 사람을 기다려 주지 않는다"는 속담처럼, 효도할 만하여 효도하고 싶을 때가 되면, 이미 부모님은 기다려 주시지 않으시고 우리 곁을 떠나가십니다. 세월이 야속하고 가슴이 아파옵니다.

  그러나 여러분! 설령 우리가 효도를 다하지 못했다 해도 너무 슬퍼하지 맙시다.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효도의 길을 제시해 주시면서, 위에 있는 새 예루살렘, 천국에 이미 앞서가신 사랑하는 분들과 이 지상에 있는 우리 어머니의 품속, 새 예루살렘인 교회에서 서로 교감할 수 있다고 가르쳐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 효도가 바로 우리가 지금 드리고 있는 이 예배입니다. 우리는 예배를 통해서 효도를 다할 수 있습니다. 영원한 천국의 성도들과 이 땅의 성도들을 잇대는 영생의 축제, 기쁨의 산제사가 바로 예배이기에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 땅의 새 예루살렘, 천국의 상징인 우리 어버이인 교회에서 예배를 통하여 위에 있는 새 예루살렘, 영원한 천국에 우리보다 앞서 가신 어머니, 아버지, 사랑하는 분들과 영적 교감의 환희를 나누며, 영생을 맛볼 수 있습니다.
 
  이 시간 다시 한 번, 우리의 육신의 부모님과 우리의 영적 어머니인 교회를 주신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오늘 주시는 말씀을 깊이 마음 판에 새기시기 바랍니다.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갈4:26)" 아멘 

기도하겠습니다.

사랑의 하나님! 저희들에게 사랑의 힘을 주셔서 부모님께 효도하게 하시고, 하나님께 효도하는 효자, 효녀들이 되게 하옵소서. 저희 교회가 어머니 교회로서 새 생명을 탄생시키고, 생명의 꼴을 늘 풍성하게 먹이며, 어머니 품속같이 너그럽고 따뜻하고 영원한 고향으로서의 사명을 계속해서 감당할 수 있도록 늘 함께 하여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이청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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