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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어두움을 깨뜨리는 우리의 찬양 (시 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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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참으로 의미있는 토요일이었다. 새벽에는 삼세대가 함께 참여하는 새벽예배를 드렸다. 하나님께서 주신 새로운 언어인 복음을 가지고 함께 일어나는 시간이었다. 그리고 1000명이상이 참여하여 하나님의 Kingdom을 꿈꾸는 선교의 자리가 있었다. 이중에 700여명은 우리 교회 교인들이었고 나머지 300여명은 외부에서 참석한 성도들이었다. 하나님의 calling을 자각하고 거룩하게 일어나는 귀한 시간이었다. 하나님의 복음의 집회와 지상명령이 함께 충만했던 거룩한 날이었다. 여마회의 어른들을 비롯해서 1세, 1.5세, 그리고 2세가 한마음으로 일어나는 역동적이고 감동적인 하루였다.

오늘도 이 예배를 통해서 우리가 함께 일어나는 기쁨이 있었으면 좋겠다. 멍들고 상처입은 우리 이민자들이 하나님의 복음을 들고 일어나면서 오히려 기쁨이 충만하기를 바란다. 이를 위한 또 하나의 방법이 바로 찬양이다. 찬양은 하나님이 주신 거룩한 선물이다. 세상의 노래는 상황과 분위기에 따라서 부르는 노래이지만 하나님의 찬양은 어두움을 깨뜨리며 모든 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거룩한 노래이다. 역동적인 예배는 기도와 말씀과 그리고 찬양으로 드릴 수 있다.

성경에는 많은 찬양의 역사가 나오고 있다. 특히 역대하20장을 보면 찬양의 승리가 나오고 있다. 모압 자손과 암몬 자손이 몇 마온 사람과 함께 여호사밧을 치려고 나아온다. 그리고 이에 맞선 여호사밧은 여호와께 순종하여 ‘노래하는 자를 택하여 거룩한 예복을 입히고 군대 앞에서 행하며 여호와를 찬양(대하20장21절)’하게 한다. 찬양의 역사가 연합한 적군에게 임하고 그들이 서로 살륙하여 패망하게 된다. 이같이 찬양이 앞서니 여호와의 승리가 임하는 것이다. 사도행전16장에는 바울과 실라의 찬양이 나오고 있다. 그들은 심하게 맞고 옷이 찢기우고 몸은 엉망이 되었지만 오히려 그들은 기도하고 주를 찬미하였다. 그때에 땅이 진동하고 감옥 문이 열리고 매인 것이 다 풀려졌다. 그리고 간수와 그들의 가족이 세례를 받음고 결국 온 구라파에 복음이 전파되는 복음의 역사가 이루어졌다. 또한 계시록에는 초대 교회에서 핍박을 받는 교인들이 나오는데 하나님은 그들에게 천국을 보여주신다. 이때에 셀 수 없는 민족들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모습이 함께 보여진다. 그들은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라고 찬양한다. 주님은 어렵고 괴로운 핍박 속에서도 천국의 찬양으로 승리할 것을 우리에게 요구하신다. 하나님의 찬양에는 이런 능력과 하늘의 영광이 있다. 찬양에는 우리의 어려움을 극복하게 하는 능력이 있다. 제자도를 가진 우리 제자들은 늘 주의 이름을 찬양하며 전진하는 비전이 있어야 한다. 시편13장은 정말로 죽음 가운데에서 쓰여진 노래이다. 1절에서 다윗은 하나님이 잊으심을 한탄하고 있다. 2절은 종일토록 마음으로 근심하는 모습이고, 3절에서는 사망의 잠을 잘 것 같아 두려워하고 있다. 그리고 4절에서는 대적들이 기뻐하는 모습과 비웃는 모습을 인하여 근심하고 있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다윗이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정도의 어두운 상황 속에서 승리의 찬양을 부를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이다. 5, 6절에서는 절망 속에서 하나님의 자녀들이 어떻게 찬양을 해야 하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오늘 허락된 말씀의 비결이 무엇인지를 살펴보자. 다시 말해서, 어두운 상황을 극복하고 하나님의 군사로 다시 일어날 수 있는 배경을 살펴보자.

(1)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의지하는 것이다.
‘그러나(But)’의 자세를 갖자. 그렇지만 오직 주님의 인자하심을 의뢰하고 의지한다는 것이다(5절). 아무리 힘이 들고 어려워도 그 상황과 상관없이 그 분의 인자하심을 의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인자하심’이란 ‘언약에 충실한 사랑’을 의미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사랑은 감정적인 사랑이 아니다. 그 분의 사랑은 언약에 충실한 사랑이다. 하나님께서 언약을 세우실 때는 항상 피로 세우셨다. 구약에서 보듯이 피없이 세우는 언약은 없었다.하나님의 경우에 충실한 언약은 항상 피로 세워셨고 그것이 약속있는 사랑이 되었다. 피로 인해서 증명된 언약을 깨닫는 순간에 다윗은 언약을 믿고 새롭게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
예레미야애가3장에서 선지자는 성실하신 하나님으로 인해서 극적인 반전을 이루고 있다. ‘내 심령이 그것을 기억하고 낙심이 되오나 중심에 회상한즉 오히려 소망이 있사옴은 여호와의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이것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크도소이다. 내 심령에 이르기를 여호와는 나의 기업이시니 그러므로 내가 저를 바라리라 하도다.(20절-24절)’ 선지자는 성전과 나라와 언어와 정체성과 신앙까지도 잃어버린 가운데서 여호와의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심을 깨닫고 있는 것이다. 그는 주저 앉아서 그저 울 수 밖에 없는 상황 속에서 “Wait a minute!”이라고 소리치며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신실한 언약을 가지고 우리의 모든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이루어 그 나라를 다시금 펼치실 것이기 때문이다. 성도들에게 가장 많이 사용되는 기도문 3개가 있다. 주기도문, 사도신경, 그리고 축도이다. 이 기도문들에는 모두 하나님의 신실함이 표현되어 있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때문이다. 그 역사대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사건 때문이다. 그 분은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것이다. 이렇게 피로 하신 언약을 완성하심으로 인해서 모든 구속이 가능해졌다. 우리의 신앙고백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해서 가능하게 되었다. 축도의 의미는 무엇인가? 그것은 성령의 교통하심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을 뜻한다. 이같이 세차례 넘치도록 부어주시는 그 사랑으로 인해서 어려움 속에서도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의지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이같이 충실한 사랑에 나를 던져서 하늘의 멜로디 안에 살 수 있게 된다.

(2)주님의 구원을 기뻐하는 것이다.
5절 하반부에서 내 마음이 주의 구원을 기뻐하여 모든 어려움을 극복한다고 하였다. 이것은 바로 하나님이 이루신 구원이다. 내가 한 것이 아니며 내 부모가 한 것도 아니다. 사람이 이룬 구원이라면 모든 어려울 때에 기뻐할 수 있는가? 하나님을 영접한 우리에게 그 분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고 했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권세를 받은 자들이다. 그것은 누구도 앗아갈 수 없다는 뜻이 된다. 이 땅에서 법관의 signature가 있는 서류를 가지고 우리는 많은 특권을 누릴 수 있다. 그렇다면 만군의 여호와가 자녀라고 인정하고 확인한 권세라며 육은 물론 영의 세계에서도 우리는 엄청난 특권과 권세를 가진 자들이다. 누구도 우리를 망하게 할 수 없다. 주님은 구원을 이야기할 때에 ‘과거형’의 시제를 사용하셨다. 이것은 그만큼 확실한 것이라는 의미가 된다. 요한일서5장13절을 보면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쓴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 하였다. 우리에게 너무나 확실한 구원이 주어진 것을 알려주려고 하는 말씀이다. 이제 비로소 하나님과 성도간에, 그리고 성도와 성도간에 fellowship이 가능해졌다. 빌리 그래함 목사가 뉴욕에서 집회를 인도하고 있을 때였다. 말씀이 끝나고 영접하는 시간이 되었을 때에 회중 가운데 가장 먼저 일어난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거의 전신마비를 가지고 있는 형제였다. Calling을 받고 몸을 비틀며 일어나서는 어렵게 어렵게 목사님 앞으로 나아가는 그 형제의 모습에서 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다. 그것은 분명히 영광스런 하나님의 아들의 모습이었다. 하나님의 영광 속에서 영원히 살기 위한 그 전진을 보면서 너무나 큰 감격을 느꼈다. 나의 가족에게도 이같은 감격이 있었다. 나는 나의 아버지의 구원을 위해서 8년 동안 기도해오고 있었다. 8년 만에 하나님을 영접하신 아버지의 소식을 접하던 날, 나와 어머니는 너무나 감격하여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그리고 우리는 감격의 눈물 속에서 감사의 찬양을 올려드렸다. ‘나 가난 복지 귀한 성에 들어 가려고 내 모든 짐을 벗어 버렸네…길이 살겠네 나 길이 살겠네…’ 하나님은 돌같은 우리의 마음을 녹이신다. 한번에 주어진 구원으로 영원한 구원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감사하자. 하나님의 군사로 일어날 수 있는 세번째 이유는 무엇인가?

(3)주님의 후대하심을 기억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후대하신다. ‘후대’라는 말은 대단히 큰 의미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 표현을 참으로 좋아한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이새의 막내 아들인 다윗. 아무것도 아닌 그들 세우시고 기름을 부으시는 하나님. 그 분은 다윗을 사자 같은 짐승으로부터 구원하시고 골리앗으로부터도 지켜주셨다. 또한 사울왕의 계획 속에서도 하나님은 그를 품에 안아 주셨고 다윗이 왕이 된 후에도 숱한 쿠테타와 위험 속에서도 구원하셨다. 하나님은 이같이 한결같으신 분이다. 변하는 것은 늘 우리쪽이었고 하나님은 결코 변하지 않으시는 분이다. God never moves. God never changes. 늘 내가 보지 못했고, 항상 내가 몰랐던 것이고, 늘 내가 변했던 것이다.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이나 항상 변치 않는 분이다. 이제 요동치 않으시는 하나님을 의지하여 일어나자. 우리를 쏘는 사망과 절망이 이제는 더 이상 우리를 쏘지 못할 것이다. 어느 미국 목사님의 간증을 소개하고 싶다. 미국에는 나병환자들을 격리하는 섬이 있었다. 이 목사님은 그 중에 한 섬으로 단기 선교를 떠나셨다. 일정한 기간동안 열심히 선교를 하고 마지막 날이 되어 이제 마지막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목사님은 회중에게 부르고 싶은 찬양이 있으면 함께 찬양하자고 제안을 하였다. 그들 중에 어느 한 자매가 몸을 돌려서 목사님께로 향하며 말했다. 그 자매는 자신의 흉찍한 얼굴때문에 목사님의 비위가 상할 것이 두려워 항상 등을 돌려 앉았다. 그 자매는 코도 없어지고 얼굴이 너무나 많이 상해 있어서 사람의 얼굴이라고 볼 수 없을 정도였다. 그 자매가 선택한 찬양은 이것이었다. ‘세상 모든 풍파 너를 흔들어 약한 마음 낙심하게 될 때에 내려주신 주의 복을 세어라 주의 크신 복을 네가 알리라 받은 복을 세어 보아라 크신 복을 네가 알리라 받은 복을 세어 보아라 주의 크신 목을 네가 알리라’

이 자리에 계신 부모님들은 대개 6.25전쟁을 경험하신 분들이다. 그리고 그 와중에 가난과 혼란을 체험하신 분들이다. 또한 이민 생활 중의 어려움을 몸소 겪으신 분들이다. 그 많은 역경 속에서 하나님은 은혜와 축복으로 인도하셨다. 나름대로 이제 안정되고 자녀들도 많은 축복을 받았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믿는 성도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후대하심이다.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이 은혜와 축복을 잊지 않고 살 때에 어두움을 깨뜨리는 찬양을 드릴 수 있는 것이고 우리가 다시 일어날 수 있게 된다. 우리에게는 이미 이런 찬양이 주어졌다. 이것은 하나님의 멜로디이며 천국의 멜로디이다. 이것은 성도들만이 부를 수 있는 찬양이다. 우리는 어두운 세상 속에서 이 찬양을 가지고 담대히 일어나야 한다. 바울과 실라의 역사처럼 우리도 그렇게 하여 우리 주위의 사람들에게 살아계신 하나님을 보여 줄 수 있어야 하며 하나님의 나라가 펼쳐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주의 인자하심과 변함없으심을 의지하고 그 분이 주신 구원과 후대하심을 붙잡으며 하나님을 찬양하자.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역동적인 찬양이 끝나지 않게 하고 아무리 어려운 상황이라고 할지라도 오히려 더욱 그렇게 하며 살기를 기원한다. (김승욱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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