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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어린이주일] 너희 자녀를 양육하라 (시 127:1-5, 엡 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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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어린이

  어떤 집에 대학 입시에 떨어지고 재수, 삼수를 거쳐 장수에 들어간 아들이 하나 있었습니다. 아이가 집에 와서 공부를 한다 그러면 온 집안 식구들이 긴장을 합니다. 말 한마디 하는 것도 조심스럽습니다. 미끄러진다. 떨어진다는 말은 입에도 담지 않습니다. 밥을 먹는데 젓가락이 뚝 떨어지니까 “아이고, 젓가락이 땅에 붙었네” 길을 걸어가다 할머니가 눈 길에 쭉 미끄러지니까 “아이고, 궁뎅이가 땅에 붙네” 그러더랍니다.

  가정에 자녀를 양육하다보면 짐스럽지 않은 가정이 누가 있겠으며 걱정과 염려가 없는 가정이 어디 있겠습니까? 오늘은 어린이 주일. 하나님께서 각 가정에 주신 어린이들을 지혜로 어떻게 양육할 것인지, 각 셀에 맡겨주신 어린 영혼들을 어떻게 잘 섬겨서 하나님의 장성한 사역자로 세워갈 것인지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는 시간입니다.

  “어린이”하면 제 머릿속에 떠오르는 그림 하나가 있습니다. 88 서울올림픽 개막식 때 굴렁쇠를 돌리던 아이, 지구촌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그 광경을 바라볼 때 가슴 찡한 감동을 받은 그림이지요.

  왜 이 아이가 올림픽 때 굴렁쇠를 굴리며 나왔을까? 제 나름대로 짐작을 해 봅니다. 세계는 하나라는 뜻이었겠지요. 선수들이 경기를 하고 있지만 사실은 지구촌을 굴리고 있는 것이다. 저 아이가 내일의 주인공인데 저 아이들이 이 지구촌을 멋있게 잘 굴릴 수 있도록 평화로운 세계로 만들어 가야 되지 않겠느냐?  어린이는 내일의 희망인데 그들이 보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굴렁쇠를 굴리는 이 아이의 그림을 올림픽 정신을 가장 잘 표현한 그림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과연 지구촌은 자라는 세대에게 희망이 되고 있습니까?
  오늘 우리 사회, 우리 가정은 모두 우리의 자녀들에게 행복한 꿈을 주고 있습니까?

1. 미국의 통계입니다만 우리도 금방 영향을 받고 조금 있으면 우리 통계가 되더라구요.
  8초마다 1명 청소년들이 자퇴를 합니다.
  26초마다 1명 청소년들이 가출을 합니다.
  47초마다 1명 유아들이 버려집니다.
  7분마다 1명 마약문제로 청소년들이 체포됩니다.
  36분마다 1명 총기사고로 청소년들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2. 우리의 자녀들이 태어나서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텔레비전 T.V 하나에서 받는 나쁜 영향이
  얼마나 되는가?
  35만번이상 유해한 T.V. 광고를 보게 되고,
  5만번이상 사기사건 소식을 듣고 보게 되고,
  3만번이상 강간사건 소식을 듣고 보게 되고,
  2만번이상 살인사건 소식을 듣고 보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텔레비전 영향이 얼마나 큰지 아이들에게 영어알파벳 T자 다음에 뭐지? 물으면 V!

  오늘은 어린이 주일입니다. 100년 전만 하더라도 “어린이”라는 아름다운 말이 없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어린 것, 소아 이런 정도였지요. 심지어 애새끼가 일반적인 통칭이었습니다. 1921년 일본 유학생 소파 방정환 선생이 “어리신 분” 어리신이란 이름을 줄여서 “어린이”라고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1922년 어린이 날을 재정할 것을 선언했습니다. 23년도에는 어린이 잡지 “어린이”를 창간함으로써 어린이를 새롭게 발견하는 운동을 펼치게 됩니다.

  방정환 선생이 90년전 일본 제국주의 시대에 이런 운동을 했듯이 2000년전 사도 바울은 로마 제국의 시대에 어린이를 향한 놀라운 선언을 하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6:4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

  이 말을 하게 된 사회적 배경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로마시대에 주어진 말씀입니다. 로마시대엔 “빠드라아 뽀데스따스(Patria potestas)”라는 법률이 있었습니다. 아버지의 법이란 것입니다. 로마 시민권자는 자기 자녀에게 절대적인 소유권이 있었습니다. 자녀를 버릴 수도 있었고 심지어 노예로 팔 수도 있었습니다. 자녀 교육이라는 명분아래 채찍질까지 할 수 있었습니다.

  바로 이때 성경은 혁명적 선언을 하고 있습니다.

  “아비들아, 너희 자녀로 노엽게 하지 마라. 로마의 법률이 아니라 주님의 교훈으로 양육해라. 네 법이나 전통이 아니라 주님의 훈계로 양육해라!”



II. 아비들아

  오늘 본문 에베소서 6:4절 첫마디 “아비들아”라고 시작하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자녀양육은 어머니들의 몫으로 생각했습니다. 집안에 무슨 문제라도 생기면 “당신은 집안에서 애 하나 제대로 가르치지 못하고 뭐야?” 아빠들이 소리를 지르면 엄마들은 기가 죽습니다. 어머니들이 자녀들과 더 많은 시간을 함께 하고 더 깊은 관심을 가질 수 있는 환경인 것은 사실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자녀문제를 말씀하고 있을 때에, 구약이든 신약이든 “애미들아” 그런 말씀이 없습니다. 모든 성경이 아비들아! 그렇게 부르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되고 아버지라 불리워진다는 것 이것은 참 복된 일이요 신비한 일입니다.

  보십시요.

  하나님은 자신이 “아버지”라 불리워지길 기뻐하십니다. 우리가 어른들을 부를 때 존칭문제는 대단히 중요합니다. 선생님, 어르신, 각하, 폐하. 그런데 하나님은 “아빠, 아버지”라 불리워지고 싶어하십니다. 이 호칭은 예수님이 가르쳐준 이름입니다. 성령님이 우리 가운데 오시면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를 수 있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가 아버지라 불리워진다? 나는 지금 하나님이나 갖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 내 자녀들이 나를 아빠 아버지라 부를 때 하나님 아버지를 기억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나로부터 하나님의 냄새를 맡을 수 있어야 된다는 것이지요. 아버지의 향기를 그들이 누릴 수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정신이 번쩍 드는 얘기입니까?

  그래서 오늘 설교의 제목이 「네 자녀를 양육하라」입니다. 이 얼마나 당연한 얘기입니까? 자녀를 양육하지 않는 부모가 누가 있겠으며, 양육하되 잘 양육하고 싶지 않은 부모가 누가 있겠습니까? 아침이 되면 일어나라. 배가 고프면 밥을 먹어라. 이것보다 더 싱거운 말이 이 말이예요. 그런데 왜 성경은 우리에게 “네 자녀를 양육하라”고 말하고 있는 것일까요? 자녀를 양육할 어버이들이 자녀들을 무너뜨리고 있기 때문에. 세워주어야 할 어버이들이 자녀들을 아프게 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인카운터에 참석하는 아버지들이, 어머니들이 가장 많이 가슴아파하고 고통스러운 눈물을 흘리는 시간이 있습니다. 둘째날 아침 아버지 마음이란 강의시간입니다.

  참석한 모든 사람들이 자신이 평생 해결하지 못하고 가슴의 무거운 짐으로 지고 걸어온 상처들이 바로 아버지로부터 받은 상처가 대부분이라는 것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 아버지 상처를 어떻게 치유하고 극복해야 하는지 방법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내가 받은 상처로 인해 자식들에게 또 다른 상처를 주었고, 내 가슴에 저주를 품고 살기 때문에 내 가족, 내 아내, 자녀들에게 험한 말과 행동으로 상처를 대물림하고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 이 아픔을 어떻게 극복하고 해결할 것인가? 눈물을 쏟는 시간입니다.

  용기 있는 어버이들은 집에 돌아와서 자식에게 무릎을 꿇습니다. 아빠가 너희들을 너무너무 사랑하는데 사랑하는 방법을 몰라서 우리 아버지가 내게 준 그 사랑의 방법대로 너희들에게 폭언을 일삼았고, 매질을 했고, 바른 가치관을 가르치지 못했고, 아빠가 잘못 살아왔던 것 용서해 주겠니? 흐느껴 우는 아빠를 보며 몹시 당황해 하다가 아버지의 진심을 깨닫고 “아빠 저희들이 잘못했어요. 우리도 아빠를 미워했지요.” 아이들도 함께 운다는 것입니다. 그러고 나면 가정에 행복이 달라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자식 낳았다고 다 아버지가 되고 어머니가 되는 것 아닙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아버지 마음, 어머니 마음을 받아야 합니다. 오늘 아침 “아비들아!” 부르시는 하나님 앞에 겸손히 고개를 숙여서 아버지 마음을 달라고 기도하는 복된 아침이 되시기 바랍니다.



III. 노엽게 하지 마라

  어떻게 자녀를 양육할까요?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
  아주 간단하지요. 아주 분명하지요. 주동사는 양육하라는 것입니다.

  양육의 원칙 세 가지가 나옵니다.
첫째, 자식을 노엽게 하지말고 잘 양육하라.
둘째, 오직 주의 교훈으로 양육하라.
셋째, 오직 주의 훈계로 양육하라는 것입니다.

  그 중 첫 번째는 노엽게 하지 않으면서 잘 양육하는 것입니다. 한 가정 사역 연구소가 자녀를 노엽게 하는 아버지 유형을 잘못된 운전에 비유하여 설명한 적이 있습니다.

1) 과속형 - 자식에 대해 지나친 요구를 하는 부모님들 밑에서 자식들은 상처를 받고 살아가게 됩니다. 자식들이 자기 연령에 맞게 생각하고 기뻐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손님 왔다가고 나면 아이들이 매맞는 것입니다. 어린들은 아이들에게 점쟎으라고 강요합니다. 점쟎다는 말은 젊지 않다는 말입니다. 빨리 늙으라는 얘기이지요. 부모의 기대치가 너무 높을 때 자식의 모든 것이 못마땅하게 보입니다. 이런 부모들 때문에 자식들이 노여움속에 빠져 살게 되는 것입니다.

2) 음주운전형 - 부모의 기분과 감정에 따라 자식을 양육하는 부모들 이런 부모들 밑에서 자식은 상처를 받게 됩니다. 자식들에게 꾸중을 하고 훈계를 하다가 감정이 폭발해 버리는 부모입니다. 자식과 대화 하다가 감정을 조절할 수 없으면 대화와 꾸중을 뒤로 미루는 것이 좋습니다.

3) 끼어들기형 - 자녀들이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기다려 주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급한 부모들 때문에 자식들은 상처에 빠져 살게 됩니다. 특별히 우리 세대의 사람들 가운데 가난하게 살다가 밥술이나 먹고 살아가면 자녀를 낳아 과보호하게 됩니다. 과보형 부모들, 끼어들기형 부모들입니다. 정상적인 인생운전을 하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4) 뺑소니형  - 방임형 부모들. 자식이 사고를 치는지 음란싸이트에 접속이 되었는지, 신앙생활을 잘 하는지 무관심한 부모들. 때로는 도와주고 격려하고 칭찬해 주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책임을 지려하지 않는 부모들 때문에 자식들은 노여움을 안고 살게 됩니다.

5) 초보운전자 - 자녀들의 능력부족을 문제삼아 노엽게 하면 안됩니다. 운동경기에서 아이가 최선을 다해 뛰었는데 꼴찌했다. 이 아이는 꾸중들을 아이가 아니고 칭찬받아 마땅한 아이입니다. 자식이 가진 능력껏 최선을 다해서 공부했는데 성적이 그 모양이다. 이 아이는 격려 받아야 될 아이지 꾸중들어야 될 아이가 아닙니다.

6) 도로에서 경쟁하는 아슬아슬한 운전자처럼 자식을 남과 비교하다가 아이들을 망가뜨리는 부모들이 있습니다. 이런 부모들 아래서 자식들은 노여움을 안고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한 교육학자가 공부를 잘 못하는 아이들을 모아 조사하고 공부를 가르쳐 보았어요.

  어떤 아이들은 왜 공부를 해야 되는지, 공부를 잘해야 되겠다, 열심히 해야 되겠다는 것은 다 알아요. 실제로 열심히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적이 오르질 않아요. 건강상의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공부를 시키지 않고, 운동을 먼저 시켰어요. 그리고 보약을 먹였어요. 의사에게 진찰을 맡겨서 이 아이의 문제점을 보강시켜 주었어요. 그랬더니 성적이 갑자기 향상되더라는 것이지요.

  어떤 아이는 집중력이 떨어집니다. 정서적인 안정감이 없습니다. 15분 앉아 있질 못합니다. 저 혼자 공부를 안하는 것이 아니라 옆에 있는 아이까지 공부 못하게 만듭니다. 이 아이들은 공부를 시키지 않고 마음의 안정감을 주도록 집중력을 키워주었습니다. 성적이 갑자기 향상되더라는 것이지요.

  어떤 아이는 열심히 아무리 해도 깨닫지 못하고 성적이 오르지 않습니다. 봤더니 기초가 잘못되었습니다. 공부하는 방법을 모릅니다. 특별히 국어가 안되는 것입니다. 초등학교 1학년 2학년 3학년을 실패하고 나니까 중학생이 되고 고등학생이 되어도 소용이 없습니다. 수학문제를 푸는데 문제는 잘 푸는데 앞에 있는 지문을 읽을 줄 모릅니다. 무엇을 요구하는지 모릅니다. 영어 해석 해 놓고 무슨 뜻인지 모릅니다. 이 아이는 초등학생이 읽는 동화책부터 읽도록 했습니다. 많은 책을 읽히고 대화하고 독서력을 향상시켜주었더니 성적이 급 향상되더라는 것이지요.



IV. 주의 교훈으로 양육하라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마라는 한 가지 부정문 다음에 두 가지 긍정문장으로 말씀하십니다. 주의 교훈으로 양육하라. 예방적 양육입니다. 주의 훈계로 양육하라. 치료적 양육입니다.

  주의 교훈 “The training” 주님의 훈련이란 뜻입니다. 잠언 22:6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고 했을 때 “가르치라”는 말씀도 “train” “훈련”이란 뜻입니다.

  왜 우리의 철학이나 보상심리, 야망 그리고 우리의 방법이 아니라 주의 교훈, 주님의 훈련 방법을 따라야 할까요? 자녀는 우리의 자녀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방법만이 가장 완전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만이 이 아이가 왜 이 땅에 태어난 것임을 알고 계십니다. 지금 이 아이의 문제점이 무엇인지, 장점이 무엇인지 하나님은 알고 계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아이가 앞으로 어떤 인물이 될 것인지 하나님은 다 알고 계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원리를 따라서 하나님의 방법을 따라서 양육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주의 교훈 “하나님이 주신 지침을 따라 훈련한다”라는 뜻입니다.

① 자녀를 주님께로 인도하라는 뜻입니다. 내가 온 지구를 다니며 복음을 전한다 할찌라도 우리 가정에 맡겨주신 내 자녀들을 주님 앞으로 인도하지 못했다고 하다면 나는 내 생애에 가장 소중한 것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가장 값진 것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가장 위대한 책임을 망각한 것입니다.

② 주의 교훈 - 개혁성경에 주의 교양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본을 보임으로 가르치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 받는 자가 되라(고전11:11) 우리가 우리 집에 있는 자녀를 모아 놓고 “얘들아, 아빠가 그리스도를 본 받는 자 된 것같이 너희들은 아빠를 본 받는 자 되거라” 그렇게 얘기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어요. 그렇게 얘기할 수 있는 부모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분명한 것은 “얘들아, 아빠가 예수님을 닮으려고 애쓰는 것처럼 너희들도 예수 그리스도를 닮으려고 노력했으면 좋겠다”라고 얘기는 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주의 교훈”이 무엇인가? 묵상하던 한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없이 자라는 아들을 바라볼 때 마다 어떻게 내가 저 아이를 주님의 뜻대로 주님의 비전과 목적에 맞게끔 양육할 것인가? 기도하던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그 아들의 이름은 록 펠러입니다. 10가지 주의 교훈 지침을 만들어서 이 아이에게 양육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록 펠러 미국이 낳은 최고의 갑부. 가장 멋있는 부자 중의 한 사람. 왜 돈을 벌어야 하는지 알았던 사람. 벌었던 돈을 어디에 어떻게 써야 하는지 알았던 사람. 미국 백인사회에서 그 어머니의 양육의 지침을 따라서 그 자녀들을 양육하기를 기뻐하는 지침 10가지가 있습니다.

1. 하나님을 친아버지로 섬겨라. 그 아버지가 복을 주신다.
2. 평생 목사님과 좋은 관계 안에서 살아라.
3. 주일 예배는 항상 본 교회에서 드려라.
4. 평생 십일조 주머니를 준비하고 먼저 그 곳을 채워라.
5. 아무도 원수를 만들지 마라.
6. 아침에 네가 세운 목표와 비전을 위해 기도해라.
7. 잠자리에 들기 전 반드시 반성하고 기도해라.
8. 아침밥 먹기 전에 꼭 하나님 말씀을 읽어라.
9. 남을 도울 수 있으면 기쁨으로 도와라.
10. 예배시간엔 꼭 앞자리에 앉아라.



V. 주의 훈계로 양육하라

  에베소서 6:4 자녀 양육의 마지막 원리가 나옵니다. “주의 훈계로 양육하라”

여기 “훈계”란 신속한 치료를 말합니다. 잘못된 것을 바르게 고쳐주는 치료, 이것을 훈계라 얘기했습니다. 자녀를 양육하다보면 부모가 상처를 줄 때도 있고 자식이 삐뚫어질 때도 있지요. 이때 지체하지 말고 신속하게 치료하라는 뜻입니다.

  치료약이 무엇입니까?
  잔소리로 치료가 될까요? 꾸중으로 치료가 될까요?

  주의 훈계로 치료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신앙적 가치로 치료해라. 감정으로 훈계하지 말아라. 욕심으로 훈계하지 말아라. 보상심리로 아이를 키우려하지 말아라. 자신의 가치관, 세상적인 가치관으로 훈계하려하지 말아라. 주의 훈계로 양육하라는 것입니다.

  자식이 상처에 시달릴 때, 내 자식들이 방황하고 있을 때, 내 아이들이 위기에 부딪힐 때, 어떻게 그 아이를 바른길로 인도할 수 있을까요? 주의 훈계로 양육하라.

  얼마전 리더스 다이제스트에 실린 해리 빌라롱가의 얘기가 있습니다.

  빌라롱가의 아버지는 필리핀 검역국에 배치되어 근무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세부시 항구 부근에 있는 작은 카위트섬. 그 섬은 별로 사는 사람이 없어 빌라롱가에게는 낯설고 친구들이 없었습니다. 바닷가에 파도가 밀려올 때마다 쓰레기들, 가끔 재미있는 장난감들 이것들이 빌라롱가의 친구였습니다. 어느날 하얗고 조그마한 장난감 배 하나가 파도에 밀려왔습니다. 이 배는 빌라롱가의 유일한 친구로 바닷가에서 배를 띄워놓고 물장구 치고 노는 것이 빌라롱가의 하루에 일과였습니다. 아빠는 빌라롱가에게 “얘야, 아빠가 없을 때 바다에 들어가면 안된다. 너는 아직 수영할 줄 모르거든.” “네, 아빠.” 장난감 배와 함께 같이 놀다 아빠가 사무실에 갖다 오는 사이에 파도가 출렁하고 오더니 빌라롱가의 배를 휘청 쓸어갔습니다. 친구 배, 장난감을 잃지 않기 위해서 한 걸음 두 걸음 다가가면 갈수록 점점 배는 멀어져만 갔습니다. 자신이 수영을 할 줄 모른다는 사실도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한참 걸어 들어갔을 때 발이 땅에 닿지 않았습니다. 비명을 지르고 허우적거리며 물속에 빠져들어갔지요. 사무실에서 나온 아빠는 깜짝 놀라서 바닷가로 뛰어들어가 아이를 간신히 데리고 나와서 모래사장에 눕혀놓고 아이가 정신이 들 때를 기다렸지요. 이 아이가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떴을 때 아빠가 흐느껴 울고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아, 내가 너를 잃어버릴 뻔 했구나. 너를 잃었으면 아빠는 어쩌라고. 아빠 어찌 살라고.” 울고 있는 아빠를 보며 아이는 ‘물이 무서운 것이 아니라 아빠를 다시는 울게 하지 말아야 된다’는 생각 때문에 물가에 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빌라롱가의 아빠는 ‘이 아이가 평생 물을 무서워하는 아이로 살아가게 될 것’이 걱정되어 아이와 함께 물가에 가서 손등에다 바닷물을 적셔주면서 “물은 네 친구란다. 물은 너의 좋은 친구란다.” 그리고 물이 무릎까지 오르도록 놀아주고 배꼽까지 물이 오도록 놀아줍니다. 물과 친근감을 가진 다음에 아빠는 물에서 뛰어 놀아줍니다. 수영을 가르칩니다. 손을 잡아 주었습니다. 배를 받쳐주었습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했던 말이 있습니다. “빌라롱가 넌 할 수 있을 거야. 넌 반드시 할 수 있을 거야. 잘 할 수 있을 거야.” 어른이 된 다음에 인생을 뒤돌아보니 인생의 위기가 있을 때마다 그는 아빠가 해 준 말이 생각났습니다. “빌라롱가 넌 할 수 있을 거야. 넌 용감한 아이니까 잘 할 수 있을 거야.” 어떤 위기에 있다 할지라도 어떤 문제에 부딪힌다 할지라도 아빠가 내게 주었던 격려가 있기 때문에 칭찬의 말, 용기의 말이 있었기 때문에 나는 인생을 승리하며 헤쳐나갈 수 있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VII. 맺으며

  사랑하는 여러분,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고 말씀하실 때에 여러분은 무엇이 생각나십니까?

  죤 록크 심리학자는 “타부라 라자 - 심의 백지설”이란 주장을 했습니다. 어린 아이의 마음은 백지장과 같다는 것입니다. 어떤 물감을 가지고 어떤 그림을 그리느냐 여하에 따라서 아이의 인생이 달라진다는 것이지요. 깨끗한 종이에 시커먼 도둑 그림을 그리면 아이는 도둑으로 살아가는 겁니다. 예쁘고 하얀 종이에 꽃 그림을 그리면 꽃같이 살아가는 겁니다. 선하고 맑은 마음을 나누어 주면 선하고 맑은 세상을 살아가게 되어 있다는 것이지요.

  여러분들 중에 꽤 많은 사람들이 읽어보았을 법한 책이 있습니다. 「오체불만족」이란 책입니다. 우리나라 초등학교 4학년 교과서에 실려있는 실화입니다. 일본인인 오토다케 히로타다의 이야기입니다. 이 아이는 태어날 때에 두 팔과 두 다리가 없이 태어났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맑고 명랑하게 참으로 행복하게 만족하게 살아가는 삶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도전을 주고 있었습니다.

  한 집안에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두 팔이 없습니다. 두 다리가 없습니다. 아이를 받아든 간호사가 깜짝 놀랐습니다. 의사도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엄마가 이 아이를 보았을 때 어떤 반응을 보일까? 아이를 다른 방으로 옮깁니다. “아이가 황달이 심해서요.” 엄마에게 아이를 한달동안 보여주지 않았습니다. 오랫동안 의논하고 연구한 끝에 엄마에게 이 아이를 보여주기로 합니다. “아이가 조금 장애를 가지고 태어났어요. 남들이 있는 게 조금 없어서요.” 조심스레 이 엄마를 아이에게 데리고 갑니다. 아이를 보는 순간 엄마가 쓰러질지도 모르겠다. 모든 것을 준비하고 병실까지 완벽하게 준비해 두었습니다. 엄마가 이 아이를 보는 순간 엄마의 얼굴이 해처럼 환하게 감격스럽게 아이를 바라보더니 “어머나, 귀여운 내 아이...” 이 아이를 키우면서 “얘야, 너는 남과 다르게 생겼단다. 남들이 가진 것 조금 없을 뿐이야. 너는 개성 있게 생겼어.” 키우는 사이에 10cm정도 두 팔이 자라납니다. 10cm 정도되는 두 팔을 가지고 야구도 하고, 축구도 하고, 수영도 하고, 컴퓨터도 하고, 붓글씨도 쓰고, 밝고 명랑하게 심지어 골목대장으로 자라납니다. 이제는 어엿한 대학생으로 자라나 명문 와세다 대학 정경학부에 입학합니다.

그러면서 글을 씁니다. “장애란 특별한 개성일 뿐이다. 나는 남들이 가진 걸 가지지 못했지만 나는 더 많은 것을 가졌다. 나는 유리한 것이 너무나 많다. 장애인이기 때문에 친구가 더 많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자녀들을 어떻게 잘 양육하고 있습니까?

  양육해야 될 자녀들에게 상처를 주고, 그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무너뜨리지는 않습니까? 인간의 방법이 아니라 나의 보상 심리가 아니라 내 기분이 아니라 주의 훈계로 주의 교훈으로 양육하라. 하나님의 명령입니다.(류영모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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