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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어버이주일] 메시야 족보에 오른 여인 (룻 1:15~18, 4:1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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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날 어느 마을에 부모님을 일찍 여의고 단 둘이 사는 젊은 부부가 있었답니다. 그 부부는 평생 부모님을 모시고 사는 게 소원이었습니다. 어느 날 남편이 장에 갔다가 희한한 소문을 들었습니다. 어느 집에서 아버지를 돈 천 냥에 판다는 겁니다. 방까지 붙어 있었습니다. 그 남편이 집으로 돌아와서 아내에게 그 이야기를 해 줍니다. 아내는 어이없어 하더니 잠시 후 말을 꺼냅니다. “여보, 우리가 그 아버지를 사서 모십시다.” 하지만 그들은 단돈 열 냥도 없는 가난뱅이였습니다. 그래서 고민하다 빚을 얻기로 작정했습니다. 천신만고 끝에 천 냥 빚을 얻은 부부는 물어물어 그 집을 찾아갑니다. 집안에서 점잖은 노인이 나옵니다. 아버지를 판다고 해서 왔다고 말하니까 노인이 묻습니다. “그래, 아무 쓸데없는 늙은이를 사서 뭐하려고?” 부부는 담담히 말합니다. “우리는 조실부모하고 외롭게 살고 있습니다. 부모님 모시고 사는 게 소원입니다. 가난하지만 정성을 다해 모시겠습니다.” 그랬더니 그 노인이 무릎을 탁 치면서 말합니다. “이제야 소원을 풀었네. 이제야 진짜 자식을 얻었어.” 그러면서 사연을 이야기합니다. “내가 바로 팔려 갈 아버지라네. 나는 자식이 없어. 내 늘그막에 산에 갔다가 산삼 세 뿌리를 발견해서 큰 돈을 벌었지. 그 돈으로 양아들을 얻어 함께 살고 싶었어. 하지만 사실대로 말하면 돈을 탐내는 사람들이 몰려올 게 아냐? 그래서 헛소문을 낸 거야. 이제 바라던 자식을 얻었으니 소원을 풀었네.” 이렇게 해서 그 부부는 노인을 모시고 행복하게 잘 살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이 이야기를 들으시면서 어떤 생각을 하십니까? 정말 문자 그대로 ‘옛날이야기’죠? 옛날에 왜 이런 이야기가 있었겠습니까? 옛날에도 효도하는 게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요즘은 더 심해졌지만 충효를 몹시 강조하던 그 시대에도 효도하는 게 결코 쉽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런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들려주면서 일깨우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말이 있지 않습니까? “내리사랑은 있어도 치사랑은 없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은 크지만, 자식이 부모를 사랑하기는 좀처럼 어렵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악한 본성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이런 본성을 잘 아시고, 부모를 공경하는 것을 강조하고 또 강조하십니다. 마치 보너스를 주듯이 특별한 축복을 약속하면서 장려하셨습니다. 부모 공경은 십계명 중 제5계명인데, 다른 계명과 달리 ‘축복의 약속’이 붙어 있습니다. 부모 공경은 당연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강조하시고 장려하시느라 축복의 약속을 덧붙여주신 겁니다. 신5:16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명한 대로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가 생명이 길고 복을 누리리라” 신약성경에 보면 사도 바울이 구약 성경을 그대로 인용하며 강조하고 있습니다. 엡6:2~3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이는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여기서 ‘약속 있는 첫 계명’이라는 말은 축복의 약속이 붙어있는 중요한 계명이란 뜻입니다. 또 이런 뜻도 있습니다. 십계명이 두 부분으로 되어 있죠. 제1~제4계명은 하나님을 향한 대신계명(對神誡命), 그리고 제5~제10계명은 인간을 향한 대인계명(對人誡命)입니다. 부모 공경은 대인계명 중에서 제일 먼저 강조되는 첫번째 계명이란 겁니다.

  오늘은 어버이주일입니다. 부모 공경의 계명이 그렇게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소홀히 하기에 이런 날을 정해 놓은 줄 압니다. 이 날에 나 자신이 얼마나 불효자인가 깨닫기만 해도 소망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좀더 부모님을 공경하는 더 나은 모습으로 변화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것이 당연한 도리일 뿐 아니라 축복의 비결임을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더욱 강조하시고자 실제 그런 축복을 받은 성경인물들을 통해 증거까지 제시해 주십니다. “아무개를 봐라!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인이었고 효도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내가 이렇게 복을 주었다!” 이런 의미로 실례를 든 겁니다.

  본문에 보면 그런 인물이 등장합니다. ‘룻’(Ruth)입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강조하고 호소하는 심정을 헤아려 보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아무쪼록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으로 부모님을 공경하고 하나님이 약속하신 축복을 받아 누리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1] 룻의 본래 모습 : 영원히 멸망할 이방 족속

  본래 룻은 어떤 여인이었습니까? 이스라엘의 유대인이 아닙니다. 모압 족속 이방인입니다. 하나님을 모르고, 자기 민족이 섬기는 이방신을 숭배하다 멸망할 운명의 여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한 가문에 시집오게 됨으로 하나님을 만나게 된 겁니다.

  룻1:1~3에 그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사시대(여호수아 사후~왕정이 시작된 사울왕 직전까지)에 베들레헴에 살던 한 가정이 살고 있었습니다. 엘리멜렉, 나오미 부부와 두 아들 말론, 기룐의 가정입니다. 그런데 베들레헴에 흉년이 들어 이방 땅인 모압으로 이주하게 됩니다. 안타깝게도 그 땅에 거주하는 동안 남편 엘리멜렉이 죽습니다. 그 후 나오미는 혼자 두 아들을 키었고, 장성하자 모압 여인과 결혼시킵니다. 그 여인들의 이름이 오르바와 룻입니다.

  이렇게 해서 룻의 인생에 큰 변화가 생겼습니다. 생전 처음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듣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영원히 하나님을 모른 채 멸망할 수밖에 없었던 룻이 구원의 길로 들어서는 계기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불행한 일이 터집니다. 나오미의 두 아들, 다시 말해서 두 여인의 남편들이 차례차례 죽고 말았습니다. 결국 나오미와 오르바, 룻 이렇게 과부 세 사람만 남게 되었습니다. 

[2] 룻의 신앙과 결단 : 시어머니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이런 상황에서 나오미는 조국 이스라엘, 고향 베들레헴으로 돌아가리라 결단합니다. 그리고 두 며느리에게 친정으로 돌아갈 것을 권면합니다. 이스라엘 땅으로 가면 두 며느리의 삶이 너무 고달파질 게 뻔했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의 결혼 관습은 이랬습니다. 계대결혼(繼代結婚)이란 게 있었습니다. 만일 어떤 여인의 남편이 자식을 남기지 않고 죽으면 그 동생이 형수와 결혼하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자식을 얻으면 형의 호적에 올라갑니다. 그런데 나오미의 두 며느리의 경우는 계대결혼도 불가능합니다. 나오미의 두 아들이 이미 죽었고 다른 자식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오미가 두 며느리에게 뭐라고 말합니까? 룻1:11절~13절. “ ... 내 딸들아 돌아가라 너희가 어찌 나와 함께 가려느냐 나의 태중에 너희 남편 될 아들들이 오히려 있느냐 내 딸들아 돌이켜 너희 길로 가라 나는 늙었으니 남편을 두지 못할지라 가령 내가 소망이 있다고 말한다든지 오늘 밤에 남편을 두어서 아들들을 생산한다 하자 너희가 어찌 그것을 인하여 그들의 자라기를 기다리겠느냐 어찌 그것을 인하여 남편 두기를 멈추겠느냐 내 딸들아 그렇지 아니하니라 여호와의 손이 나를 치셨으므로 나는 너희로 인하여 더욱 마음이 아프도다”

  시어머니의 거듭되는 만류로 오르바는 결국 모압 족속 친정으로 돌아갑니다. 하지만 룻은 끝까지 따라나섭니다. 룻1:14 “그들이 소리를 높여 다시 울더니 오르바는 그 시모에게 입맞추되 룻은 그를 붙좇았더라” 여기서 ‘붙좇다’는 말은 꼭 붙잡고 따라갔다는 뜻입니다. 결코 시어머니를 놓치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러자 본문 1:15절에서 보는 대로, 나오미가 다시 한번 강력하게 만류합니다. “ ... 보라 네 동서는 그 백성과 그 신에게로 돌아가나니 너도 동서를 따라 돌아가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룻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1:16절~17절에 보니까, 룻이 뭐라고 고백합니까? “나로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유숙하시는 곳에서 나도 유숙하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장사될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와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이것은 단순히 룻이 인간적으로 시어머니를 모시겠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제 하나님을 믿는 성도로서, 이스라엘 백성으로서 신앙을 포기할 수 없다는 겁니다. 만일 모압 친정으로 돌아가면 신앙을 잃게 될 게 뻔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신앙인으로 당연히 시어머니를 모시겠다는 겁니다. 즉 이것은 인간적인 도리 이전에 신앙적 결단입니다. 특히 1:17절(하)에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와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라는 표현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장 강력하게 맹세할 때 사용하는 표현법입니다. 그의 신앙이 얼마나 확실하며, 그 결단이 얼마나 단호한지 보여주는 표현입니다. 결국 나오미도 더 이상 만류하지 못하고 동행하게 됩니다. 1:18절. “나오미가 룻의 자기와 함께 가기로 굳게 결심함을 보고 그에게 말하기를 그치니라”

  여러분, 룻의 신앙 결단은 정말 엄청난 것입니다. 왜냐하면 신앙을 위해 다른 모든 것을 포기했기 때문입니다. 조국, 친정, 결혼, 행복한 삶 .. 모든 것을 던졌습니다. 그 만큼 여호와 하나님이 귀하고, 구원과 영생이 귀한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런 아름다운  신앙이 있었기에 효도 역시 가능했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신앙과 효도가 별개의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을 갖고 있는 성도라면 당연히 부모를 공경하는 삶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사랑은 이웃 사랑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십계명이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수직적 사랑, 인간을 사랑하는 수평적 사랑이 조화를 이루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가 조화를 이루지 않는다면 그 신앙의 진정성을 의심해봐야 합니다. 그래서 ‘사랑의 사도’라 불리는 요한은 뭐라고 말씀합니까? 요일4:20~21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 사도 바울은 또 뭐라고 말씀합니까? 딤전5:8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 자기 친족을 돌아보는 게 신앙의 기본이요 사랑의 기본이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가장 가까운 친족, 가장 가까운 이웃이 누구입니까? 부모님이죠. 그러니까 부모 공경을 실천하지 않으면 신앙을 배반한 자가 되는 겁니다.

  룻이 시어머니에게 그런 사랑을 실천할 수 있었던 것은 질실한 신앙의 소유자였기 때문  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사실을 하나 깨닫게 됩니다. 나오미가 룻에게 효도를 강조하  거나 요구한 적이 없습니다. 단지 신앙을 권유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진실한 신앙이 생기니  까 친정으로 돌아가라고 만류해도 오히려 정색을 하며 나오미를 따라나선 겁니다.

  여러분, 우리가 부모의 입장에서 자녀들에게 효도 받기를 원하십니까? 자녀들에게 대우받고 존경받는 게 솔직히 인지상정 아닙니까? 하지만 그게 어디 쉬운가요? 자녀들에게 요구하고 호통 친다고 되나요? 아니죠. 다만 우리가 신앙을 바로 가르치기만 하면 됩니다. 효도해라 마라 하기 전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이 생기면 스스로 깨닫게 됩니다. 성경에서 보고 배웁니다. 더 나아가 우리가 효도 받기 이전에 우리 자녀들이 그런 신앙을 가져야 하나님께 복을 받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효도할 정도의 참 신앙을 심어줘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자녀의 입장입니까? 하나님을 믿노라 하면서 부모님을 사랑하고 공경하지 않으면 그 신앙이 진짜인지 의심해 봐야 합니다. 그것이 성경의 메시지입니다. 

  얼마 전 한국에 다녀간 ‘하인즈 워드’라는 젊은이를 아시죠? 정말 신실한 크리스천입니다. 저도 개인적으로 좋아해서 그에 관한 신문 기사를 유심히 살펴보았습니다. 그는 미국인뿐 아니라 세계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미식축구 결승 슈퍼볼에서 MVP로 뽑혔습니다. 정말 자랑스러운 일입니다. 그런데 그 자체보다 더 훌륭한 것은 그의 신앙과 인격입니다.  그는 어린 시절 어머니를 싫어했다고 합니다. 얼굴색도 다르고 영어도 못하고 볼품없는 여자, 자기를 혼혈아라고 놀림 받게 만든 여자이기에 너무 싫었습니다. 그러나 그 어머니의 신실한 신앙과 뜨거운 사랑에 감동을 받았습니다. 눈물의 기도는 그의 마음을 녹였습니다. 그 후부터 그는 어머니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섬겼습니다. 공부도 열심히 했고 성공했습니다. 그는 말끝마다 고백합니다. “어머니는 나의 진짜 MVP이십니다. 어머니는 나의 전부입니다.” 그 바쁜 사람이 어머니를 모시고 한국으로 효도 여행을 왔습니다. 인터뷰 할 때마다 어머니 이야기가 빠지지 않았습니다. 정말 신기할 정도입니다. 요즘 한국에 그런 젊은이를 얼마나 찾을 수 있으려나 ... ? 그런 생각이 듭니다. 여러분, 그가 왜 그렇게 특별한 효자입니까? 한국인의 피가 흘러서 그런가요? 아니죠. 어머니의 사랑에 감화되었고, 그의 마음속에 참 신앙이 심겨지니까 그렇게 된 겁니다. 우리 한국이 과거 ‘효의 나라’라고 일컬어졌지만 요즘 우리의 모습은 부끄러울 정도입니다. 우히려 우리가 신앙인으로 배워야 합니다.

[3] 룻이 받은 축복 : 메시야 족보에 오른 여인

  나오미를 따라 베들레헴에 온 룻의 삶은 고단함 그 자체였습니다. 그 시대에는 여자가 어디 취직할 데도 없었습니다. 드러내놓고 활동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고대 이스라엘에 나름대로 복지제도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율법으로 정해놓으신 것인데,  밭에서 추수할 때 이삭을 남겨둡니다. 그러면 가난한 사람들이 와서 주워갑니다. 룻도 보리밭에 나가 이삭을 주워옵니다. 일꾼들 잔심부름을 해주면서 주어오는 보리로 어머니를 봉양합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 밭의 주인이 누구였습니까? 보아스인데, 그는 나오미 가정의 친척입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요 축복이었습니다.

  구약 이스라엘에는 ‘고엘’(Goel)이라는 독특한 제도가 있었습니다. ‘기업을 무를 자’(룻4:14)가 바로 ‘고엘’입니다. ‘고엘’은 ‘구원하다’ ‘친족의 일을 떠맡다’라는 뜻의 동사의 명사형으로 ‘친족 구원자’를 가리킵니다. 이것은 일종의 사회보장제도였는데, 어떤 사람이 어려움을 당했을 때 가까운 친족으로 하여금 도움을 주도록 규정한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재산을 다 잃고 먹을 게 없으면 도와줘야 합니다. 빚도 갚아주고, 종살이에서 풀어줘야 합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계대결혼도 해줘야 합니다.

  나오미는 보아스가 가까운 친척이라는 사실을 알려주면서 룻에게 청혼하도록 코치합니다. 평소에 밭에서 일하던 룻을 눈여겨보았던 보아스는 흔쾌히 받아들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보아스보다 더 가까운 친족이 한명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 사람이 고엘의 의무(혹은 권리)를 포기해야 보아스 차례가 됩니다. 그래서 보아스는 그 사람을 찾아갔고 그가 포기함으로 마침내 룻과 결혼하게 됩니다. 4:13절 “이에 보아스가 룻을 취하여 아내를 삼고 그와 동침하였더니 여호와께서 그로 잉태케 하시므로 그가 아들을 낳은지라” 보아스와 룻 사이에 태어난 아들이 ‘오벳’입니다.(4:17절) 그 족보가 4:18절~22절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는데, 마태복음 1장에 다시 나옵니다. 마1:5~6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 왕을 낳으니라” 이것은 메시야 족보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세상에 오실 때 이 가문을 통해 오셨습니다. 마1:1 보면 “아브라함과 다윗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족보)라”고 명시하고 있습니다.

  본래 이스라엘의 족보에는 여자가 올라가지 않습니다. 그런데 메시야 족보에는 몇 명의 여인들의 이름이 올려져 있습니다. 그들은 믿음의 여인들이요 하나님 앞에 큰 영광을 얻은 자들입니다. 그 중에 룻의 이름이 당당히 올라가 있습니다. 룻은 다윗 왕의 증조할머니가 된 것입니다. 
  룻은 하나님을 따르기 위해, 시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해 모든 것을 포기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에게 베들레헴 유지의 사모님이 되게 해 주셨습니다. 육신적으로 유복한 삶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더 나아가 영적으로 메시야의 조상이 되는 영광을 안게 된 겁니다. 우리가 장차 천국에 들어가면 룻의 영광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 깨닫게 될 것입니다.

[4] 성도들이 실천할 효 : 주 안에서 부모 공경

  성도 여러분! 룻의 이야기를 통해 살펴본 대로 부모 공경은 신앙의 시금석입니다. 그리고 인륜의 근본이며 축복의 비결입니다. 부모 공경은 하나님 공경의 연장선에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신앙이 진실한 것이라면, 성숙한 것이라면 당연히 부모 공경을 실천해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부모님을 존경하고, 순종해야 합니다. 그리고 육신적으로나 심리적으로 평안하게 해드려야 합니다.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내리 사랑이라지만 우리가 자식들에게 하는 것에 비해 부모님께 하는 게 얼마나 소홀한가! 만일 우리가 자식에게 하는 것의 10분지 1만 해도 효자 중의 효자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또 한 가지 중요한 게 있습니다. 신앙의 문제입니다. 부모님이 예수 믿고 천국에 가실 수 있도록 도와드려야 합니다. 싫어하신다고 방치하는 것은 효도가 아닙니다. 가장 큰 불효입니다. 우리가 정말 천국과 지옥의 실존을 믿으면서도 부모님에게 신앙을 강권하지 않는 것은 결국 나만 천국에 가고 부모님의 영혼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말이 됩니다. 그래서는 안 되겠죠. 다행히 신앙이 좋은 부모님이라면 더욱 공경하고 귀히 여기시되, 혹시 신앙이 없는 부모님이 계시다면 예수님께 꼭 인도하시기 바랍니다. 시간이 없습니다. 부모님은 오래 기다려주시지 않습니다. 

  우리 교회 어느 집사님 가정의 이야기입니다. 시어머님이 노환으로 오래 누워계셨습니다. 그동안도 복음을 전했지만 아무래도 구원의 확신이 분명하지 않은 것 같아 마음에 부담이 되었나 봅니다. 하루는 목사에게 심방을 요청했습니다. 와서 복음을 제시하고 결신시켜달라는 겁니다. 그런데 들어가자마자 마주친 어르신의 표정은 아주 완고한 모습이었습니다. 어떻게 접근할까 궁리하는데 겨우 인사만 받으신 그분이 눈을 감아버리더니 이내 잠이 든 겁니다. 난감했습니다. 하루 종일 스케줄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우리끼리 예배드리고 가자니, 혹시 다음번에 다시 심방오기 전에 혹시라도 세상을 떠나시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고민하다 복도로 나가 전화로 일을 보면서 기다렸습니다. 한참 시간이 흐른 후 깨어나셨다는 말을 듣고 들어가 예배를 드리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때 성령께서 역사하셨습니다. 그 어르신이 예수님을 영접하고 결신기도까지 따라 하는 겁니다. 그러더니 얼굴이 환해지시는 겁니다. 얼마나 감사한지! 그 집사님은 시어머니 뺨에다 뽀뽀를 하면서 “아이고, 우리 어머니 예쁘셔라!” 하며 좋아하셨습니다. 젊은 날에 힘들게 했던 시어머니! 그러나 예수 믿고 나서 그 시어머니를 진심으로 사랑하며 섬기는 모습을 보면서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리고 며칠 후 시어머님이 천국에 가셨다는 사실입니다. 얼마나 아슬아슬했는지! 그 집사님은 최고의 효도를 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부모님에게 이런 효도를 해야 됩니다. 쉽지 않지만 눈물로 기도하면서, 호소하면서 우리 위해 평생 고생하신 부모님을 천국으로 꼭 인도하시기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진정한 그리스도인입니까? 그러면 부모를 공경하는 모습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당연한 일인데, 하나님이 이 땅에서 장수하고 형통하는 축복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물론이고 우리 자녀들도 그렇게 되기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 자녀들에게 참 신앙을 심어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의 가정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부모를 공경함으로 작은 천국 이루고, 하나님이 약속하신 큰 복을 받아 누리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홍문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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