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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어버이주일] 노 수인(老囚人) 바울의 전도 (몬 1: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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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레몬서는 바울이 사랑하는 동역자인 빌레몬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2절에 “자매 압비아”라는 이름이 나오는데 압비아는 빌레몬의 부인입니다.
또 “우리와 함께 병사된 아킵보”라는 이름이 나오는데 아킵보는 빌레몬의 아들입니다.
바울은 이와 같이 빌레몬의 가족들의 이름을 들면서 3절을 보세요.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빌레몬의 가정에 강한 축복을 하고 있습니다.
가정의 달인 5월 둘째 주일에 저도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이 축복이 목양교회에 속한 성도들의 가정 모두에 그대로, 골고루 임하기를 축원합니다!

오늘은 어버이주일입니다. 어버이들에게 특별히 은혜와 평강이 넘치기를 축원합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이 들어있는 빌레몬서가 어떻게 해서 기록되었는지 잘 압니다.
빌레몬의 집에 있는 오네시모라는 노예가 주인에게 많은 손해를 끼치고 도망을 쳤습니다. 이 오네시모는 이리저리 피해 다니다가 더 이상 갈 곳이 없게 되자 로마 감옥에 갇혀 있는 바울에게 찾아와서 도움을 청했습니다.
바울은 오네시모가 같이 있도록 했습니다.
그 때 바울은 갇혀서 재판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조금은 자유로운 처지였습니다.
셋집을 얻어 감시하는 군사와 함께 기거했습니다.
오네시모는 바울과 같이 지내는 동안에 새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10절을 보면 바울은 오네시모를 “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 오네시모를 주인인 빌레몬에게 돌려보내면서 잘 맞아줄 것을 당부한 편지가 빌레몬서입니다. 

이런 배경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빌레몬서의 주제를 ‘바울의 실천적 사랑’ 이렇게 말합니다.
오늘 우리는 가정과 전도를 주제로 한 예배를 드리면서 빌레몬서를 전도의 관점에서 새롭게 볼 필요가 있습니다.
바울의 실천적인 사랑을 통해 오네시모가 복음을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오네시모에게 그와 같은 사랑을 베푼 이유도 그에게 복음을 전해 그를 구원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사랑의 동기, 사랑의 결과, 사랑의 결론, 모두 전도입니다.

빌레몬서를 통해 배우게 되는 바울의 전도는 어떤 전도입니까?

첫째, 한 사람, 다시 말해 한 영혼을 사랑하는 전도였습니다.

지금 바울은 갇혀 있습니다. 많은 사람을 만날 수 없습니다.
전처럼 회당을 찾아다니며 전도할 수가 없고, 사람이 많이 모인 곳을 찾아다나며 설교할 수 있는 형편이 아닙니다.
지금 직접적으로, 그리고 계속해서 대할 수 있는 사람은 오네시모 하나입니다.
그 하나를 대상으로 해서 바울은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바울이 빌레몬에게 이와 같이 간곡한 편지, 빌레몬서를 쓴 것도 전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빌레몬이여, 우리 힘을 합해 오네시모, 이 한 영혼 구해봅시다!’ 빌레몬서에는 이런 마음이 깔려 있습니다.
‘빌레몬이여, 이 한 영혼 구하기 위해 이 사람이 당신에게 끼친 손해는 따지지 맙시다. 그것은 내가 갚아주겠습니다!’ 바울은 18절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또 ‘빌레몬이여, 이 한 영혼, 내가 애써 전해서 예수 믿게 했습니다. 이제 그의 믿음이 자라도록 하는 일, 양육은 그대가 당신이 맡기 바랍니다!’ 하는 마음도 깔려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이와 같이 한 영혼, 한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야합니다.

12절을 보세요. 바울은 “그는 내 심복이라”고 합니다.
여기 “심복”이라는 말은 ‘심장’과 같은 뜻입니다.
우리는 전도대상자를 내 심장과 같이 사랑해야합니다.
심장은 생명과 직결됩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사망원인, 특히 돌연사의 원인 1, 2위는 항상 심장 질환 때문이라고 발표됩니다.
우리는 내 심장도 물론 중요하게 여겨야하지만  동시에 다른 사람의 심장도, 그의 생명도, 그의 영적인 생명도 중요하게 여겨야합니다.
두 주일 전 화요일에 고령교회 이전예배에서 설교를 했습니다.
고령교회는 우리 교회 총남선교회가 15년 전, 목양교회 창립 30주년의 해에 경북 고령, 대구 바로 옆에 개척 설립한 교회인데 그 때나 지금이나 고령군 안의 유일한 감리교회입니다.
그 날 남선교회 총회장님과 회원 한 분, 그리고 파라찬양선교단이 같이 갔는데 ‘바울의 목회를 이 곳에’라는 제목으로 설교했습니다. 
목회는 베드로 형의 목회와 바울 형의 목회로 분류되기도 합니다.
베드로 형의 목회는 예루살렘교회, 요즘 말로 하면 중앙에 있는 교회를 담임해서 한 번 설교에 삼천 명, 오천 명을 믿게 하는 대형목회입니다.
바울의 목회는 이 곳 저 곳을 찾아다니면서 소수의 사람들, 때로는 한 사람을 붙들고 그를 심층적으로 변화시키는 목회입니다.
고령 교회가 있는 곳은 지역적으로 베드로형의 목회를 하기는 어려운 곳이기 때문에 그런 제목으로 말씀을 드렸습니다.
베드로형의 목회만을 성공한 목회로 여기는 것은 대단히 천박할 뿐만 아니라 위험한 생각입니다.
고령교회에서는 에베소교회에서의 목회를 예로 들었는데, 로마 감옥에서 오네시모 한 사람을 대상으로 한 바울의 전도, 바울의 목회는 바울형 목회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한 영혼, 한 영혼을 귀하게 여기며 전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더 많은 영혼을 맡기십니다.
더 많은 사람에게 전도하게 하십니다.

요즘 제가 이들을 치료하기 위해 치과에 다니고 있습니다.
이 하나를 뽑지 않고 살리기 위해서 의사 선생님과 간호사들이 얼마나 정성을 기울이는지 모릅니다.
그 치료를 받을 때 ‘이 분들은 이 하나를 살리기 위해서 이렇게 애쓰는데 나는 한 영혼을 살리기 위해 얼마나 힘쓰고 있는가?’ 반성하게 됩니다.
여러분, 이가 더 귀합니까? 영혼이 더 귀합니까?
지난 목요일에는 두어 시간, 갈고, 쑤시고, 여러 가지 치료를 받았습니다.
그 다음날 치과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어제 혼나셨지요? 혹시 몸살 나지는 않으셨습니까?’ 그 전화를 받고나서 ‘나는 나에게 맡겨진 영혼들에게 이런 정도의 관심을 가지고 있는가?’ 다시 한 번 반성했습니다. 

한 영혼에게 관심과 사랑을 갖고 정성을 다하는 여러분이 되고 제가 되기 바랍니다!

빌레몬서에서 배울 수 있는 바울의 전도는 둘째, 생활전도입니다.

오네시모가 찾아와서 같이 있게 해 달라고 했을 때 .바울은 ‘오, 너 갈 곳이 없어서 나에게까지 왔구나. 같이 있게 해 주마. 대신 너 예수 믿어야 한다.’ 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같이 있게 했습니다.
그리고 같이 생활했습니다.
빌레몬서에는 바울이 오네시모와 함께 생활하면서 오네시모에게 ‘너 예수 믿어야 한다.’ ‘성경 읽어야 한다.’ ‘기도해야 한다.’ 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그러나 오네시모는 갈 곳이 없는 자기를 조건 없이 받아준 바울의 사랑에 감동했을 것입니다.
같은 공간에서 지내면서 바울의 생활을 남김없이, 숨김없이 대합니다.
그 인격이 너무 고매합니다.
그 생활이 너무나 경건합니다.
그 감동이 더욱 커졌을 것입니다.

15절을 보세요. “아마 그가 잠시 떠나게 된 것은” 오네시모가 빌레몬에게 손해를 끼치고 도망친 것을 두고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가 너에게 손해를 끼치고 도망쳐서 나에게 까지 온 것은’ 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언어생활에 큰 교훈을 주면서 바울의 인격을 단면적으로 보여주는 일 가운데 하나입니다.

우리나라에 신석구(申錫九)라는 순교자가 계셨는데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나 보니 집에 도적이 들어와서 여러 가지를 훔쳐 갔습니다.
가족들이 도둑놈이 다녀갔다고 하자 신 목사님은 ‘도둑놈이 뭐냐? 그도 귀한 사람인데 도둑놈라고 하지 말고 밤손님이라고 해라.’ 했다고 합니다.
바울의 인격을 닮은 목사님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결과 오네시모는 바울이 믿는 복음을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바울이 따르는 예수님을 따르게 되었습니다.
11절을 보세요. 전에는 무익한 사람이었는데 이제는 모두에게 유익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변화되었습니다.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생활전도의 승리입니다.

외부에서의 전도가 원칙적으로 금지되어 있는 사회주의권이나 철저하게 금지되어 있는 회교권에서는 생활전도를 활용해야 합니다.

5월은 가정의 달인데 저희 교회에서는 5월을 그냥 ‘가정의 달’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무엇이라고 하였는지 아십니까?
좀 더 강하고 구체적으로 ‘가정복음화의 달’로 했습니다.
올해 저의 교회 월별 표어들은 모두 이렇게 구체적으로, 강한 표현으로 되어 있습니다.

오늘은 예배 중에 ‘119 새 생명 큰 잔치’ 선포 순서가 있습니다.
설교 뒤에 선교 1부장님이 자세하게 설명해 주시겠지만 ‘119’는 주보 14면에 있는 것과 같이 ‘한(1) 사람이 한(1) 가정을 구(9)원하자’는 것을 줄인 말입니다.
전에는 ‘한 성도가 1년에 최소한 한 사람에게 전도하자’고 해서 111전도운동을 했었지요.
이제는 전도의 대상을 가정으로 했습니다. 

‘119 새 생명 큰 잔치,’ 여기 ‘119’라는 말에는 또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서 구원 받게 하는 것은 119 구조대원이 사람의 생명을 구하는 것만큼이나 중요하고 급한 일이다.’라는 뜻도 있습니다.
주일마다, 토요일마다, 전도대원들이 여러 곳으로 전도하러 나가는데, 그리고 성도들이 기회가 닿는 대로 전도하기에 힘쓰고 있는데 그런 분들, ‘나는 영혼의 119 구조대원이다.’라는 마음을 가지고 나가시기 바랍니다.
‘당신은 어떤 직종의 사람을 존경합니까?’ 물으면 거의 매번 ‘119 구조대원을 존경합니다.’라고 대답하는 분들이 제일 많다고 발표됩니다.
교회에서는 전도하는 사람이 존경을 제일 많이 받습니다.

그 가정에서 한 사람이 복음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그 가정 복음화의 씨앗이 심겨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러분 ‘2020 비전운동’이라는 말을 들은 일이 있을 것입니다.
2020비전운동은 군선교를 하고 있는 분들을 중심으로 진행되고 있는 전도운동입니다.
장병들에게 힘써 전도해서 장병들 하나, 하나가 예수를 믿게 합니다.
그 장병이 군복무를 하는 동안에도 잘 보살피고, 제대한 다음에는 그가 살고 있는 지역사회의 교회와 연결해서 그 교회에서 그를 맡아 잘 양육하도록 합니다.
그가 결혼해서 가정을 이루면 최소한 부인과 자녀들도 가장을 따라서 예수를 믿게 될 것입니다.
이와 같이하면 2020년에는 전체 국민 가운데 4분의 3이 신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이 비전2020 운동의 기본논리입니다.

여러분, 5월에 가정복음화를 위해 더욱 열심히 기도하며 힘쓰시기 바랍니다.
가정복음화를 위해 꾸준히 기도하는 분들이 많은데 5월에는 그 기도를 더욱 ‘쎄게’ 하시기 바랍니다.

가정은 생활의 기본단위입니다.
그러므로 가정복음화는 생활을 통해서 이뤄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2절에는 “네 집에 있는 교회”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 말은 정확하게는 ‘네 집에서 모이는 교회’라는 뜻입니다.
「공동번역 성서」는 이 말을 “그 대의 집에 모이는 교회”라고 번역했습니다.
이 교회는 구체적으로 아까 말씀드린 골로새교회를 말합니다.
빌레몬은 골로새교회의 지도자였습니다.
초대교회는 교회는 대부분 이와 같이 성도의  가정에서 출발하였습니다.
로마교회는 마가의 집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빌립보교회는 자색 옷감 장사 루디아의 집에서 시작했습니다.
에베소교회는 야손이라는 사람의 집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네 집에 있는 교회” “그 대의 집에 모이는 교회” 교회가 그 가정에 모이기 위해서는 그 가정이 화목해야 하고 말씀대로 사는 모습을 보여야 합니다.
그렇지 못한 가운데서 모여 예배를 드리면 그 예배가 은혜로울 수가 없습니다..

제가 책임지고 있는 선교단체의 목사님 한 분이 40년 목회를 마치고 은퇴를 했습니다.
지난 화요일에 그 선교단체에 속한 목사님들과 함께 그 댁에 가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 목사님은 이제 자녀들도 다 가정을 이루고 내외분만 계신데 은퇴했다고 예배를 멈추거나 게을리 할 수 없어서 매일 저녁 여덟 시에 목사님과 사모님 두 분이 마주 앉아서 예배를 드린답니다.
하루는 목사님이 성경 읽고 사모님이 기도하고, 그 다음 날은 사모님이 성경 읽고 목사님이 기도하고 그러신답니다.
교회와 같은 가정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자리에 모인 목사님들이 대개 연세가 많은 분들인데 거기에서 들은 이야기입니다.
요즘 연세가 많은 분들 사이에서 ‘9988234’라는 말이 유행한다고 합니다.
‘9988234’ 무슨 뜻인가 했더니 ‘99, 아흔아홉 살까지, 88, 팔팔하게 살다가, 23, 이틀이나 사흘만 아프고, 4(死), 죽자!’랍니다.
저는 그 말 듣고 웃다가 ‘좋은데 이것은 끝이 틀린 말입니다!’ 했습니다.
‘9988230’이라고 해야 맞습니다.
9988230, 아흔아홉 살까지 팔팔하게 살다가 이틀이나 사흘 아프고, 영(永)영생에 드는 것입니다.
여기 연세 많은 성도들, 모두 9988230 하시기 바랍니다.

지금은 신년축복심방을 할 때 각 가정에 필요한 말씀을 헤아리면서 심방설교를 준비하고 있는데 몇 해 전까지는 그 해, 하나의 주제를 정해 가지고 심방을 하면서 말씀을 전했습니다.
퍽 여러 해 전의 일인데 빌레몬서 1장 2절의 “네 집에 있는 교회” 이 것을 본문으로 해서고 ‘교회와 같은 가정이 되십시오.’라는 말씀을 드리며 신년축복심방을 한 일이 있습니다.
지금 ‘가정 같은 교회, 교회 같은 가정’ 이라는 말이 많이 퍼져 있지요.
어느 가정 사역기관에서는 ‘가정을 교회처럼, 교회를 가정처럼’ 이 말을 그 기관의 캐치프레이즈로 내세우고 있습니다.
교회와 같은 가정이 되기 위해서는 복음의 가르침이 생활 가운데 녹아 있어야합니다.

나가서 말을 통해서도 열심히 전도하고, 또 평소에 생활을 통해서도 전도가 이뤄지도록 하는 여러분이 되고 제가 되기 바랍니다.

빌레몬서를 통해서 배우는 바울의 전도는 셋째, 어려운 처지에서도 힘써 하는 전도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자기의 처지를 두 가지로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나이가 많다는 것입니다.
9절을 보세요. “나이가 많은 나 바울은”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때 바울은 60세 조금 못되었을 것입니다.
“나이가 많은” 이것은 ‘프레스뷔데스’ 라는 말을 번역한 것인데 ‘프레스뷔데스’는 60이 조금 못된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평균 수명이 지금보다 훨씬 짧았던 그 당시로는 많은 나이였습니다.

또 하나는 갇혔다는 것입니다.
갇혔다는 말이 9절에도 나오고 10절, 13절에도 나옵니다.

이 둘을 합해서 저는 ‘노 수인(老囚人)’이라고 했습니다.
노 죄수(老罪囚)라고 하면 이해하기 편하겠지만 바울은 죄가 있어서 갇힌 것이 아니기 때문에 죄수라는 말을 쓰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죄가 없었습니다.
사도행전 26장30절에서 32절까지를 보면 아그립바 왕, 베스도 총독, 아그립바 왕의 부인 버니게, 그밖의 여러 사람이 바울을 심문한 다음에 “이 사람은 사형이나 결박을 당할 만한  행위가 없다”고 결론을 내린 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울은 황제 앞에 서기 위해, 황제 재판을 청구한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로마까지 호송되어 와서 갇혀 있는 것입니다.
황제 앞에 서려고 한 것은 황제에게 전도하는 기회를 얻기 위해서입니다.

나이 많고 갇혀 있는 노 수인 바울, 참 어려운 처지입니다.
바울은 가족이 없었으므로 면회 오는 사람도 없었을 것입니다.

오늘 청년들이 성도들의 가슴에 카네이션을 달아드렸습니다.
성도들의 가슴에 달린 카네이션을 보면서 다시 후회되는 일이 있습니다.
지난 화요일 저녁, 늘 하는 대로 평화교회에 가서 새터민, 옛날 이름 탈북자들과 함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 날이 어버이날 다음날이어서 어버이날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되는 설교를 준비해서 갔습니다.
평화교회에 도착해서 ‘아차!’했습니다.
‘카네이션, 북한말로는 향패랭이꽃을 마련해서 청년들과 함께 가서 새터민들의 가슴에 달아드렸으면 좋았을 것을!’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북한에는 어버이날이 없습니다.
그리고 북한에서는 ‘어버이’라고 하면 우리와 달리 정치적인 뜻으로 많이 쓰이고 있습니다.
‘그런 가운데에서 생활하다가 이제 막 남한에 온 새터민들에게 카네이션을 달아드렸다면 그분들에게 위로도 되고 잊지 못할 체험이 되었을 것을!’ 하는 아쉬움이 지금도 있습니다.
우리는 어버이날에 카네이션을 달 수 있는 형편이 못되는 분들이 많은 것들을 기억하면서 그들에게 대한 관심을 새롭게 하여야 할 것입니다.
바울 당시에는 어버이날도 없었고 카네이션을 달아주는 풍습은 더구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제도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바울에게 카네이션을 달알줄 사람은 없었습니다.

이런 노 수인의 처지였으나 바울은 오네시모가 찾아오자, 전도할 대상이 생기자, 전도할 기회가 만들어지자 열심히 전도했습니다.

사도행전 끝부분을 보면 바울은 이태를 셋집에 갇혀 있으면서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게 거침없이 가르쳤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행28: 30~31).
그리고 갇혀 있으면서 여러 통의 편지를 기록했습니다.
빌레몬서도 갇혀 있으면서 쓴 편지들, 옥중서신 가운데 하나입니다.

여러분, 자기의 형편을 내세워서 전도를 기피하지 맙시다.
나는 바빠서, 나는 믿음이 약해서, 나는 대인공포증이 있어서, 나는 혀가 뻣뻣해서, 나는 전도보다 다른 것으로 교회에 봉사하는 것이 더 유익하다고 생각되어서, 다른 급한 문제가 있어서, 전도는 내 은사가 아니라고 생각되어서…, 그밖에 뭐 더 없습니까?
하나님은 그 어느 것도 인정하지 않으십니다!

요즘 교적부를 열심히 만들고 있습니다.
교적부에 ‘출석 경위’라는 란이 있습니다.
그 분이 어떻게 해서 이 교회에 출석하게 되었는지를 적는 란입니다.
원래 어느 교회에 다녔는데 이 지역으로 이사 와서,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제일 많은 것은 ‘누구의 전도로’입니다.
‘누구의 전도로’ 거기 ‘누구’ 참 귀한 이름입니다.
그 가운데는 이미 세상을 떠난 분들의 이름도 여럿 있습니다.
그 분들 하늘나라에서 하나님께 많은 상급을 받고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의 이름이 거기에 많이 오르게 되기 바랍니다.

이제 말씀을 정리하며 마칩니다.
여러분의 가정이 복 받기 바랍니다.
가정이 복음화 되기 바랍니다.
교회와 같은 가정이 되기 바랍니다.
한 영혼, 한 영혼을 소중하게 여기시기 바랍니다. 생활전도에 힘쓰시기 바랍니다.
처지와 형편을 가리지 않고 전도에 힘쓰기 바랍니다.

그와 같이 해서 나를 통해 구원 받는 새 생명이 많아지기를, 많은 상급을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김양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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