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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어버이주일] 어버이 (눅 15: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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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장개석 총통을 30년간이나 모시고 있던 시종무관 오문기장군이 쓴 글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번은 장개석 총통의 생일을 맞아 좋은 음식을 차려 대접하려 했습니다. 그때 장총통은 내 생일은 어머니의 고난 날이다. 어머님이 나를 낳기 위해서 얼마나 고생한 날인데 내가  뭘 먹고 마시겠느냐 고 하면서 냉수 한 모금 마시지 않고  어머님을 생각하며, 자기의 생일을 보냈다고 합니다. 홀 어머님을 모시고  있던  장총통의 지극한 효성을 엿볼 수 있습니다.
옛날 효성이 지극했던 백유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종종 종아리를 때리며, 교훈을 하셨는데, 하루는 종아리를 맞는데도 아프지가 않았습니다. 아버님의 기력이 쇠해졌던 것입니다 백유는 아버지의 기력이 쇠하여진 것을 서러워하며, 그 매를 들고서 하루 종일 서러워 울었다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백유읍장이란 말이라 합니다.

중앙청 뒤쪽에 효자동(효자동)이 있습니다. 효자동이라고 불리워진 유래가 있습니다. 어느 집에 시아버지의 실수로 이불 밑에 어린애가 깔려 죽었다고 합니다. 그런 사실을 시아버지가 아시면 속상할까봐 얼른 죽은 아이를 업고 남편한테로 달려갔더니  남편은 죽은 아들을 보고 불효자식, 할아버지의 마음을 아프게 한 자식이라고 냅다 뺨을 한대 쳤더니 그 뺨을 맞고 죽었던 아이가  살아났다고 합니다. 이 소문이 퍼져서 그 동네를 효자동이라고 부릅니다.(예화뱅크-효도)
어버이 주일 효도와 함께 어버이의 자세도 함께 생각하게 됩니다.

오늘 말씀에 아버지 한 사람을 예수님이 비유로 소개하고 계십니다. 이 유명한 비유를 설교하시게 된 동기가 1절, 2절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유대인 사회는 세리를 죄인으로 취급을 했습니다. 그들의 그 율법 개념으로 죄인이라고 구별해 놓은 사람하고는 자리도 함께 하지 아니하는 흑백 논리의 사회 규범과 문화를 가지고 살았습니다. 그런 신앙의 의식화가 가장 철저하게 정리된 사람들이 서기관들이요 바리새인들이라고 하는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죄인이라고 규정해 놓은 그런 사람들하고 말씀을 하시기를 즐겨하시고 그런 사람들과 함께 식사를 하십니다. 그래서 그런 광경을 보고 원망하여 가로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그런 사람은 상대도 하지 말고 밥도 같이 먹지 말아야 되는데 선지자라고 하는 사람이 날마다 저런 사람들만 데리고 다닌다…” 하며 비난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 비난을 들으시고 나서 예수님이 비유를 하시게 되었는데 잃은 양의 비유 잃은 드라크마 비유 집나간 아들의 비유로 집나간 아들의 비유를  탕자 비유라 하기도 합니다.  이 비유 속에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과 그리고 우리 육신 어버이의 마음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주시는 어버이

    분깃을 주시는 어버이
  그 둘째가 아버지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합니다.
이러한 요구는 둘째 아들이 신 21:17에 나오는 재산 상속의 율법을 잘 알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신 21:17에는 재산 상속시 장자에게 전 재산의 2/3를, 차자에게 1/3을 나누어 줄 것을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둘째 아들의 이 같은 요구는 사실상 관례에 어긋난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재산의 상속은 아버지의 임종(臨終)이 임박할 때 행해지는 것이 일반적 관습이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자식에게 정식으로 재산을 상속해 주기 전까지는 적당한 재산을 선물로 주곤 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아들에게 그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습니다.
하나님아버지께서도 천국의 기업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자유를 주시는 어버이 
작은 아들은 재산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갑니다.
그가 먼 나라로 떠난 것은 그가 얼마나 부모의 품으로부터 벗어나 자기 나름대로의 삶을 살고 싶어 했는지를 또한 그 계획이 한 순간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오래전부터 계획된 것임을 잘 나타내 줍니다. 뿐만 아니라 그 재산을 모두 허랑 방탕한 생활에 소비해 버린 것은 그가 게획한 모든 생각들이 육적인 쾌락을 향해 있었음을 증명해 줍니다.

  아들이 자기 분깃을 요구하며 가출하겠다는 것은 아버지 없는 자유를 누리고 싶은 것입니다. 나의 자유를 가장 많이 방해하고 있는 사람은 아버지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이렇게 성인이 된 나를 지금도 아버지가 일찍 일어나라, 늦게 다니지 마라, 돈 함부로 쓰지 말라... 이게 될 말인가? 이제 나는 넉넉히 내 인생에 대해서 내가 책임질 수가 있습니다. 간섭 좀 그만하고 이제 나를 놓아주쇼. 그리고 당연한 의무적 책임이 있는 아버지의 분깃을, 내 몫을 나에게 주십시오.” 그렇게 요청을 한 것입니다. 이러한 아들의 요청에 주시는 아버지입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이 죄 아래로 떨어진 이유는  “네가 하나님 같이 될 것이라.”는 말에 사탄의 유혹을 받아서 파렴치한 손을 내밀어서 먹지 말라고 한 금단의 열매를 먹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절대 권위에 침범을 했을 때 하나님이 이것만은 안된다고 에덴에서 인간을 죄 아래로 떨어뜨렸습니다. 이로 “하나님은 우리를 자유롭게 하고 우리를 행복하게 해야 할 의무가 있지 않습니까? 그 의무를 이행하십시오. 나는 이제 하나님의 간섭 없이 살아가고 싶습니다.” 라고하며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해서 작은아들과 같이 생각을 합니다. “인간 행복의 의무는 하나님이다! 왜 하나님이 인간을 만들어 놓으시고 불행한 고난 속에 인간을 살게 하시느냐? 하나님이라면 당연히 인간을 행복하게 만들어 주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을 향해서 말합니다. “인간 불행의 모든 책임은 하나님이다! 자신이 없으셨다면 인간을 만들지 말았어야지, 무슨 이유로 나와 모든 인간을 세상에 이렇게 태어나게 하시고 불행한 삶을 살게 하시는가? 그러므로 마땅한 내 행복의 몫을 신이시라면 나에게 주십시오. 나는 이제부터 하나님 없이 살아가겠습니다.”
  에덴 동산의 아담과 하와에게도 자유의지를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자유의지를 잘못 쓰므로 죄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사랑하시는 어버이
    기다리시는 사랑의 어버이

  아버지께서 언제나 대문 밖에서 집 나간  자식을 기다시는 모
습이 영력하게 나타납니다. "아직도 상거가  먼데..."라는 부사구가 바로 이것을 대변해 줍니다. 아버지는 이렇게 날이면 날마다 대문 밖에서 아들을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오늘이면 돌아오려나, 내일이면 돌아오려나...  기다리셨기에 아직도 상거가 먼데  그 아버지가 그 아들을 발견한 것입니다. 우리 부모님은  이렇게 날마다 자식들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비록  집 나간 못난 자식이  아닐지라도 어버이는 언제나  자식들을 보고 싶어 하시면서 집에 찾아  오기를 기다리십니다. [자라선 문  기대어 기다리는 맘]그것이  바로 우리를 사랑하시는 어버이의 심정입니다.

이것 역시 우리 하나님의 마음이요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들을 여전히 기다리고 계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태복음 11:28)하십니다. 하나님은 무거운 죄 짐이 하나도 없는 그런 완전한 자를 부르시고 기다리시는 것이 아니라 바로 아버지가 싫다고 집 나간 그 아들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 얼마나 가슴이 뭉클하고 콧등이 시큰해 오는 감격적인 멧세지인가요?

  측은히 여기는 사랑의 어버이
유대에서는 만일 아버지가 생존해 있을 때 재산을 물려받았을 경우 상속자는 이를 자신의 임의대로 사용할 수 없었습니다. 만일 아버지가 생존해 있을 때 상속자가 그 재산으로 장사를 해서 이익금을 남겼다 해도 그 이익들을 임의대로 사용하지 못하고 아버지에게 돌려야 했습니다(Jeremias,Parabes of Jesus,P.128-29).
그런데 아버지의 집을 떠난 그는 걷잡을 수 없는 타락의 길을 걷게 되었고 종국에는 그가 가진 모든 재산을 다 탕진해 버리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그러한 아들의 회개의 말을 듣기도 전에 힘들고 지친 모습으로 돌아오는 아들의 모습에 측은(側隱)한 마음을 느낍니다. '측은히 여기다'(스플랑크니조마이)란 도와주지 않으면 마음이 아파 견딜 수 없게 된 상태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아들의 참회 고백 이전에 아버지의 불쌍히 여기는 느낌이 선행합니다.

  용서하시는 사랑의 어버이
달려가 맞이합니다. 나이 많은 동양인의 경우 아무리 급할 때에라도 달려 나가지 않는 것이 보통인데 이 비유의 아버지는 그 자신의 품위가 떨어지는 것을 전혀 개의치 않고(Jeremias) 행동하고 있습니다.
이는 죄인이 하나님께로 돌아올 때 그분께서 얼마나 기뻐하시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행위입니다. 또한 아버지가 아들에게 달려갔음은 아버지의 용서 행위가 아들의 사죄 행위보다 우선한 것이었음을 의미합니다. 인간은 하나님께 천천히 다가가지만 회개한 인간에게 하나님께서는 급히 달려 오셔서 그의 은혜를 베푸십니다.
  목을 안고 입을 맞춥니다. 입맞춤은  요압이 왕께 나아가서 그 말을 고하매 왕이 압살롬을 부르니 저가 왕께 나아가 그 앞에서 얼굴을 땅에 대어 절하매 왕이 압살롬과 입을 맞추니라(삼하 14:33)하신 말씀에 비추어 보면 아들에 대한 무조건적인 용서를 뜻합니다.

'입맞추니'(카테필레센')는 많은 입맞춤 즉 여러번 거듭한 입맞춤으로, 단 한번의 의례적 인사와는 달리 돌아온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기쁨을 그대로 드러내는 행위입니다. 죄를 자백하고 벌을 받으려고 돌아온 아들에 대한 끝없는 용서의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우리들의 부모의 마음이 바로 이와 같이 깊고도 넓으십니다.  남이야 뭐라고 하든, 자신들의 속에서부터 우러나오는 그 용서와  사랑은 이 땅 위의  그 어떤 사람도 감당할 수  없는 넘칩니다.

하나님은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이사야  1:18)고 용서를 전제로하여 우리를 부르시고 계시는 분이 바로 우리 하나님  아버지입니다. 이처럼 우리들의 부모님들도 자식들의 잘못이 그 무엇이었던지 간에 깨끗이 잊어  버리시고 용서와 사랑으로만 일관하십니다. 참으로 좋으신 우리들의 어버이들에게  그 사랑에 보답 해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회복시키시는 사랑의 어버이
그 동안 동네 사람들이 온갖 소문을 다 가지고 와서 아버지한테 괴로운 소문을 전합니다. “당신 아들은 이제 거지꼴이 되었소. 내가 보았소. 내가 보니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를 주워 먹으면서 살고 있더이다. 가지고 나간 돈은 한 푼도 없이 창기들에게 다 주어 버렸소.” 그렇게 고통스러운 소문을 다 듣고 있었는데 과연 소문대로 비참하게 돌아왔습니다. 그때 아버지는 얼마나 신속하게 행동을 했는지, 큰아들이 들에서 돌아오기도 전에 했기 때문에 큰아들의 불평을 사게 된 것입니다. 비단 옷과 큰 가락지를 장식했다는 말은 뭡니까? 옛날 부자 집 둘째아들의 권위 회복입니다.
아버지의 마음은 아들의 추한 모습을 누구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아서 원래의 모습대로 회복시켜 놓고 동네 사람들을 급히 초대하여 변함이 없는 권위 있는 아들의 모습을 자랑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많은 죄를 짓고 돌아왔지만 회개하는 즉시 “과거는 없어졌다! 너는 내 아들이다!” 과거를 다 깨끗하게 청산하고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의 권위의 회복을 신속히 지켜주십니다.

  포기하고 희생하시는 어버이
우리는 보통 둘째 아들을 탕자라고 규정을 합니다. 실은 맏아들도 마찬가지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맏아들은 지금까지 자신을 오늘 성경말씀에 나온 대로 아버지의 말씀을 한번도 거역하지 않았습니다. 아주 충실한 생활을 하여 왔습니다. 문제는 방탕한 둘째 아들에게 돌아가는 아버지의 혜택 때문에 불평이 터져 나왔습니다. 그가 생각하기는 이와 같은 아버지의 처사는 공정성을 잃었다고 판단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공의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죄를 지은 자는 반드시 그 죄 값을 받아야 되는데 왜 죄 지은 자가 영광을 누려야 되느냐?’ 나같이 성실하게 살아온 사람이 마땅히 영광을 누려야 되는데 지금 이 아버지의 처사는 그 반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집의 재산을 절반이나 탕진하고 온갖 죄를 지은 저런 자식은 들어오지 못하게 내쫓아야지, 오자마자 비단 옷을 입히고 금가락지를 끼우고 송아지를 잡아서 잔치를 벌이다니 … 그러면 나도 나가서 작은아들과 똑같이 살다가 돌아와야 될 것이 아닌가?’ 맏아들은 아버지를 그렇게 보고 있습니다. “탕자가 비단 옷을 입고 금가락지를 끼고 쇠고기를 파티를 받아야 한다면 나 같은 사람은 그보다 열 배도 더 대접을 받아야 마땅한데, 아버지께서는 염소새끼 하나도 나한테 준 적이 없나이다.”

이 불평하는 맏아들에게 아버지는 또 다른 선언을 하고 계십니다.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이제 그 아버지는 자기 소유는 모두 다 포기합니다. 다만 두 아들이 모두 자기 곁에 있다는 그 하나만이 중요합니다. 그것이 십자가입니다. “나는 나를 다 포기했다. 그러나 이 포기하는 과정을 통해서 나를 사랑하는 자에게 구원의 길이 열린다면 …” 그 하나만이 하나님의 사랑의 관심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죽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주고 모두가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는 그것만이 하나님의 기쁨이 되기를 바라시며 포기하시고 희생하셨습니다.

  아버지의 자녀답게라는 기도문이 있습니다.
구하기 전에 내게 있어야 될 것을 미리 아시는 하나님 아버지, 내가 구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을 주시는 아버지 하나님, 당신의 나라를 송두리째 주기를 원하시는 나의 아버지, 내가 잠자는 동안에라도 나를 위하여, 지금도 일하고 계시는 내 아버지, 나 자신을 부인하는 것을 기뻐하시는 우리 아버지, 만유보다 더 크신 하나님 아버지, 진리의 원천 되시는 나의 아버지, 나의 호흡이 끝나는 순간, 영원한 생명으로 나를 붙잡아 주실 나의 아버지, 언제나 나의 아빠 되어 주시는 내 아버지, 이 좋으신 아버지를 다시 깨닫게 해 주시고, 아버지의 자식으로서의 삶을, 새롭게 시작하게 하여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다시는 나로 인하여, 아버지의 탄식 소리가 울려 퍼지지 아니하도록, 아버지의 자녀답게 바른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날마다 아버지와 동행하는, 아버지의 자녀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아버지를 믿지 못해, 아버지 곁에서 마치 고아처럼 살아가는 어리석은 자는, 더더욱 되지 말게 하여 주옵소서, 그리하여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아버지의 자녀 삼아 주신 그 귀한 뜻들이, 아버지의 자녀 된 우리의 삶을 통하여, 이 땅에서 아름답게 드러나게 하여 주옵소서

교회가 어버이주일이라고 하는 이름을 내세워서 기념하는 이유가 바로 이 어버이 속에 하나님의 그림자가 있기 때문입니다.
(요 14:9) 예수께서 가라사대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하신 말씀을 적용해서  “어버이를 보면 하나님을 보았거늘 어째서 하나님을 보이라 하느냐?” 라고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오늘은 어버이 주일입니다. 우리 속에 하나님의 그림자가 있습니다. 어버이 앞에서 어떻게 살아야 될 것인가를 생각하는 주일이 어버이주일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변에서 우리를 바라보고 있는 수없이 많은 인생들에게 탕자 인생의 아버지와 같은 어버이가 되고 그런 어버이기에게 효도해야 겠다고 다시한번 다짐하며 효도를 실천하며 나아가 하나님의 사랑을 다시한번 깨닫고 감사하는 어버이 주일이 되기를 바랍니다.

  분깃도 자유도 주시고  기다리시며 측은히 여기시며 용서하시며 회복시키시며 사랑하시고 포기하시고 희생하시는 어버이요 하나님이십니다.  (강성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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