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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어버이주일] 어버이의 품, 하나님의 품 (마 11:2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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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안목사님이 쓰신 신앙 에세이 <영혼과 영혼의 대화>라는 책 중에 작은 제목 ‘기도의 곶감’이 있습니다. 거기엔 김항안목사님과 사모님의 삶의 과정을 쓰셨는데,

맨 처음 독일 유학 갈 때, 같은 날 똑같이 여권을 신청하였지만, 목사님은 불요불급이라는 판단에 1년 뒤에 출발하게 되었답니다. 유학생활 중 학교생활도 사모님은 매사에 순탄하게 잘 풀려간 반면에 목사님의 경우는 목표를 세우고 기도한 것이 결국 이루어지기는 했지만, 그렇게 되기까지는 피눈물 나는 기도와 엄청난 고통이 항상 뒤따랐다는 겁니다.
“왜 그런가? 그래도 사모보다야 목사가 하나님과 더 가까운 것 아닌가?” 그런 생각을 했는데, 어느 날, 어느 권사님과의 대화 속에서 그 원인을 알았답니다.

사모님의 가정은 3대가 권사로 재직하고 있다는 것이 증명하듯이 오래된 신앙의 연조 속에 살아온 반면, 목사님의 경우는 스스로, 그것도 늦은 나이에 예수님을 영접했다는 차이였다는 겁니다.
사모님의 경우, 3대가 권사였던 믿음의 조상들은 예배는 말할 것도 없고, 새벽기도, 철야기도 등 열심히 기도했다는 겁니다. 이북에서 예수 잘 믿었다는 이유로 반동분자의 가족이 되어서 가문의 남자들은 무참하게 학살되고, 27살에 과부가 된 어머니가 어린 핏덩이를 안고 신앙의 자유를 찾아 이남으로 피난 나온 후 지금까지 그 남은 자식들을 위해서 눈물 적시며 기도하였답니다.
그 사모님의 어머니는 오직 예술을 신랑으로 섬기는 생활을 했답니다. 그 사모님에 비하면 목사님은 자신을 위해 누구 하나라도 하나님께 저축해둔 기도가 없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김항안목사님은 그것을 ‘기도의 곶감’이라고 비유하신 겁니다.

‘곶감’을 만들기 위해서는 감의 껍질을 벗긴 후 한 겨울을 넘겨야 맛이 나는 법입니다. 어제 감을 깎아 매달았다고 오늘 아침 먹으면 그것은 떫은맛만 냅니다.
따라서 그 아내 사모님은 3대의 권사와 “나는 이렇게 살다 죽어도 애비 얼굴도 모르는 이 자식들만큼은 예수 신랑 당신이 책임져 주시라”고 매달리면서 한 그 기도들이 마치 단맛이 든 대로 든 곶감같이 꿰어 있었고, 그 자녀들이 이제 그 맛이 든 기도의 곶감을 빼먹고 살고 있으니, 그 일거수일투족이 순탄할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는 겁니다.

반면에, 목사님은 손수 만든 기도의 곶감을, 그것도 맛이 들기도 전에 빼먹어야 하고, 정작 기도의 곶감을 만들었어야 하는 어머니를 예수 믿게 하고, 형제자매들을 예수 믿게 하기 위해 나누어주어야 하는, 그분들의 몫까지 만들어야 하니 얼마나 힘들고 고달팠겠느냐 하는 겁니다.
어떠세요? 느낌을 가지셨어요?
기도의 곶감을 많이 만들어 놓으신 부모님의 신앙에 늘 감사하시길 바랍니다. 또한 여러분의 자녀들을 위해서 기도의 곶감을 많이 만드시기 바랍니다.

세상이 바빠졌습니다. ‘빠르다.’ ‘빨라졌다.’ 바로 이것이 우리를 바쁘게 만듭니다. 정신없이 살다가 돌아보니 어느새 “벌써 이리 되었나?” 싶은 겁니다. 문제는 그렇게 바쁘게 살아가면서도 제대로 쉴 곳이 없다는 겁니다. 물론, 쉴 곳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 산을 찾기도 하고, 때로 낚시질도 하고, 때로 여행도 하고, 때로 잠을 푹 자보기도 합니다. 하다못해 술집을 찾는 것도, 노래방을 찾는 것도 따지고 보면 쉬고 싶어서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한다고 진정한 쉼을 얻는 것 아닙니다.

옛날은 육체 의 노동을 하던 때라, 한 잠 푹 자고나면 되었습니다. 농사지을 때는 아무리 피곤해도 하룻밤 자고나면 또 일 나갈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은 아닙니다. 육체의 피곤보다 정신적 피곤을 더 많이 느낍니다. 몸이 고달픈 게 아니라, 머릿속이 고달프고, 마음이 고달픕니다.
몸이 피곤하면 푹 자면 됩니다. 가벼운 운동도 좋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되는 것 아닙니다. 인간은 정신적 존재이기 때문에 몸만 쉬어서 쉬어지는 것 아닙니다. 마음과 정신이 함께 수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 마음과 정신이 함께 쉴 곳이 어디 있습니까? 푹 쉬고 싶은데, 포근히 쉬고 싶은데, 정말 쉴 곳이 없습니다.

송기득교수님이 쓴 삶과 믿음의 에세이 <살며, 믿으며, 바라며>라는 책에서 그분은 우리의 쉴 곳을 ‘품’이라고 하였습니다. 어머니의 품 같은 품이 있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 책의 작은 제목이 ‘어머니의 품, 하나님의 품’인데, 오늘 이 시간 전 그 제목을 설교 제목으로 삼은 겁니다.

송기득교수님은 “오늘 우리의 사회는 어머니의 품을 잃어버렸다.”고 규정하였습니다. 근대화를 이루겠다는 오늘의 산업사회가 우리로부터 ‘어머니의 품’을 앗아간 것입니다. 몸이 아파 일을 못하더라도, 아니 게을러서 빈둥거리고 놀더라도, 그래도 용납해주는 곳이 식구들이 모여 사는 가정입니다. 가정에서는 생산 능력에 따라 사람이 평가되는 곳이 아닙니다. 그런데 산업사회는 사람의 값어치를 생산능력으로 결정합니다. 기능이 있어야 사람 취급을 받습니다.

청소년의 방황에서 가장 큰 원인은 부모의 품이 없다는 것입니다. 어려서는 이웃 아이에 뒤질까봐 무슨 학원, 무슨 학원으로 내몹니다. 커가면서 성적표에 나타난 성적을 따져서 또 내몹니다. 이 아이들의 잘못된 것, 부족한 것, 몸뿐 아니라 정신과 마음의 피곤을 감싸 안아줄 어머니의 품이 없습니다. 그러니 집에 들어가도 마찬가지 결국. 거리를 방황하는 겁니다. 대부분 어머니들의 말은, “내 아이는 그럴 리 없다. 얼마나 착한 아이인데. 친구 잘못 만나 그랬다.”

착한 아이. 자신의 아픔을 이야기 안했을 뿐입니다. 말해 보아야 품어 줄 품이 없으니까요. 오히려 책망과 야단만 들으니까요. 그래서 그냥 조용히 지내는 겁니다. 그러다 나가보면 또래를 만납니다. 비슷한 처지의 동료를 만납니다. 자기들끼리 아픔을 나눕니다. 결국 그 아이를 품어줄 품이 없었던 것입니다.

부부간의 문제 또한 서로 품어 줄 품이 없을 때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송기득교수는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가족들에게 집(house)은 있어도 가정 (House)은 없다.”고 하십니다.
북한과 같은 사회주의 체제는 처음부터 어머니의 품이 없었습니다. 부부가 다 기획경제의 역군으로 인하여 가야하고, 아이들은 모두 집단적으로 수용하여 아이들이 부모의 품을 모르고 자라기 때문입니다.

자본주의 여인들은 자신의 아름다운 몸매를 위해서 어린 아이에게 젖먹이기를 거부했지만 사회주의 여인들은 제도상 어린아이들에게 젖을 먹일 수 없었습니다. 이 젖을 먹일 수 없었다는 것이 결국 아이들이 처음부터 ‘어머니의 품’을 가지지 않고 자랐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부모가 다 있음에도 불구하고 품을 잃어버린 아이, 품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우리들의 품이 되어 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나라도, 사회도,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일가족 자살 보도가 난 적이 있습니다. 6살, 1살인가 하는 두 아이와 부부가 함께 차를 타고 저수지에 들어가서 모두 죽었습니다. 빚이 1억 5천인가 있었다는 뒷이야기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빚 1억 5천이 아니라 아무도 이들을 따뜻하게 품어주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들에게는 오히려 빚을 안 갚으면 고소하겠다는 사람만 있었을 뿐입니다.
현대인들에게는 진정으로 쉴 만한 품이 없습니다. ‘가정’도 없고, ‘고향’도 없는 시대를 살아가는 겁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1. 가장 먼저 ‘어머니의 품’을 되찾아야 합니다.

오늘날 여성들의 상당수가 어머니의 품을 포기하고 있습니다. 많은 어머니들이 ‘어머니’라는 자리를 그냥 여인의 자리라고 생각합니다. 가부장 제도에서 억압당하고 억눌리는 여인들이 그래서 여성해방운동을 부르짖었습니다. ]
물론 이해합니다. 남녀는 분명 동등하니까. 그러나 어머니의 자리는 아닙니다. 어머니의 자리는 여자냐 남자냐 하는 그런 차원에서 논의 되어야 할 문제가 아닙니다. 어머니의 품은 작게는 가정을, 나아가서는 세계를 품습니다.

요한복음에 기록된 가나의 혼인잔치 이야기. 잔치가 한창인데 그만 포도주가 떨어졌습니다. 이 딱한 사정을 먼저 알아차린 사람이 누구입니까? 바로 예수님의 어머니였습니다. 예수님의 어머니는 그 주인의 딱한 사정을 자신의 문제로 싸안았습니다. 그리고 어떻게든 그 곤경을 품어보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어머니는 예수님께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고 예수님께 부탁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대답, “그것이 나에게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아직도 나의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 아직도 예수님께서 그런 능력을 행하실 때가 안 되었다고 하신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당신의 때는 아직 아니지만 그 어머니의 부탁을 듣고 기적을 일으키셨다.

어머니는 인간의 곤경을 그의 품에 싸안는 존재입니다. 어머니의 품은 사람의 외로움과 좌절과 절망을 품어줍니다. 사람이 저지른 잘못, 거짓, 실수를 품어줍니다. 심지어 불의와 범죄 악까지도 감싸 안아 줍니다.
가나안 수로보니게 여인. 그 사랑하는 딸을 살리기 위해 개라는 소리도 듣고 견딥니다.
고향. 그런데 고향이란 뭔가? 왜 명절이 되면 고향을 향해 가느라 난리고, 왜 나이가 들면 고향을 더욱 그리워하게 되는 걸까?

그래요. 고향은 품어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지치고 힘들어도 고향은 품어 안아 위로해 줍니다. 설사 실수하고 잘못했다 하더라도 고향은 그냥 받아줍니다. 왜 그랬느냐 따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얼마나 힘드냐고 감싸 안아줍니다.
어쩌다 가는 제 고향. 전에는 어머니가 계셨습니다. 반갑게 맞아 주시고 돌아올 때면 제가 잘 먹는다는 창란, 명란 등 젓갈들을 한 주먹씩 담아 두었다가 주십니다. 지금 어머니가 안 계시는 고향은 그게 없습니다. 따뜻한 품이 없습니다. 언제 다녀왔는지 기억조차 가물거립니다. 이미 고향의 품을 잃었다는 것이 보이지 않는 슬픔일 것입니다.
관용과 용서, 사랑과 희생이 품이 바로 어머니의 품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어머니, 이 어머니의 품을 간직하시기 바랍니다.

그렇다고 어머니의 품은 여성만 가지는 것이 아닙니다. 남자도 마찬가지로 가져야 합니다.
KBS 다큐멘터리, 가시고기의 일생이 있습니다. 홈페이지에 올려놓았습니다만, 둥지를 만들고 암컷이 알을 낳으면 밤낮으로 그걸 지킵니다. 산소공급이 잘 되도록 지느러미를 흔들어주고, 혹시라도 다른 고기라도 나타나면 생명 걸고 싸웁니다. 아무 것도 먹지 않고 그렇게 합니다. 그래서 알이 부화되면 아비 가시고기는 입술이 허옇게 헐고, 지느러미는 너덜거립니다. 그리고 둥지 앞에서 죽어갑니다. 그러면 다음 날 새끼 가시고기들이 모여들어 아비가시고기를 뜯어먹습니다.

사실 품이란 여성이냐 남성이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누가복음의 탕자 비유. 그 탕자를, 그 못된 아들을 품어주는 아버지의 품이 있었습니다.  “그는 일어나서 아버지에게로 갔다. 그가 아직도 먼 거리에 있는데 그의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서 달려가 그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눅 15:20)
“달려가 그 목을 껴안고”
생각해 보세요. 그 자식이 어떤 자식인가를. 아마도 우리 같으면 천번 만번 “그 놈은 내 아들이 아니다”하고 되뇌었을 그런 아들이 아닙니까? 그런데 그 아들이 돌아오자 먼 거리인데도 알아보고 달려가 그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는 아버지입니다. 이런 품이 있어야 합니다.

바로 그런 품이 아버지 곧 하나님의 품입니다. 누가복음 15장의 탕자 비유에서 탕자는 바로 여러분의 저를 의미 합니다. 아버지는 곧 하나님이시고요. 하나님을 떠나 죄 가운데 있었지만 뒤늦게라도 죄를 깨닫고 회개하여 하나님께 돌아올 때 하나님은 당신 품에 품어 주십니다. ‘나쁜 놈’이라고 책망하지 않으십니다. ‘왜 그랬느냐?’고 다그치지도 않으십니다. 그냥 돌아왔다는 사실에 기뻐하실 뿐입니다. 그래서 품에 안으시고 다시 당신의 상속자로 세워주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품입니다.

오늘 본문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편히 쉬게 하리라”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여러분을 그의 품으로 초대 합니다. 진정으로 쉴 수 있게 하시기 위한 겁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나아가 쉼을 얻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 그들은 유대의 집권자들에게 정치적으로 억눌리고 경제적으로 빼앗겼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예수님께 나아갔습니다. 죄인들. 그들은 율법을 지킬 형편이 되지 못해서 율법을 어겨 죄인이 되었다. 그들이 예수님께 나아갔습니다. 병자들, 나병환자, 눈 먼 자, 앉은뱅이, 귀신들린 자들. 그들은 그 병이 곧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결과라고 취급되어 사람대접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께 나아갔다. 창녀와 같이 손가락질 받으면 살던 밑바닥 사람들 그들이 예수님께 나아갔다.

예수님은 이들은 아무 조건 없이 받아서 모두 감싸 안아줄 품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을 그의 품에 싸안기 위해 유대의 전통과 권위에 도전했고, 권력자들에게 대들었으며, 마침내 영원한 품이 되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것입니다.
“내가 주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과 다르다.”
그래요. 그분이 주시는 평안은 곧 영원한 안식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의 품에서만 경험되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도바울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다.”(고후 5:17)
그리스도 안에서 그 말은 곧 그리스도의 품에서를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의 품 안에서 사람은 진정한 안식, 쉼을 얻을 수 있으며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구원, 그것은 영생입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의 품에서 영원한 쉼을 얻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유는 그 죽음 끝이 아니라, 하나님의 품에서 영원한 쉼을 얻는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도 그 구원은 오늘 우리 삶에도 나타난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쉼은 지금 이 순간 수고하고 무거운 짐 때문 허덕이는 사람들이 언제라도 예수님께 나아갈 때 주시는 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안병무교수는 본문을 다음과 같이 고쳐 읽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세상에서 천대 받고 억압받은 민중들아, 다 내 품으로 오라. 내가 너희를 품어 평안히 쉬게 하리라.”
그래요. 예수님은 지금도 당신께 나아오는 사람들을 품어 주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여러분 예수님께 나아오십시오. 그러면 포근한 하나님의 품에 안김으로써 진정한 안식 쉼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이제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있어 품이 되어주어야 합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 2:5)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고, 다른 사람을 그 품으로 감싸 안아 주어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서로에게 품이 되어 되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쉴만한 품을 찾으십니까? 여기 예수 그리스도의 품이 있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예수 그리스도 품에서 쉼을 얻고, 우리 역시 다른 사람에게 따뜻한 품이 되어 주십시다.
(이영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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