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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어버이주일] 하나님 아버지의 심정 (눅 15: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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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당을 건축하고 난 후에 어떤 분이 우리 교회로 옮겨왔습니다. 다른 교회에서 상처를 많이 받고 교회생활을 중단하고 있다가 마침 지나가다가 아름다운 건물이 세워져서 가까이 와보니 교회당이어서 예배드리러 왔다가 등록을 하였습니다. 그분이 말하기를 이 교회는 계속 좋은 분들만 교인이 되면 좋겠습니다. 좋은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교인들이 좋아야 합니다. 다시 말해 악한 사람이나 악의를 품은 사람이 없이 착하고 순하고 신실한 사람들이 교인이 되어야 상처받는 사람도 없게 될 것입니다. 늘 은혜롭고 마음이 편하게 교회생활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저도 그 말을 듣고 공감을 했습니다. '그래 우리 교회에 좋은 사람만 보내달라고 기도해야지'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기도하던중에 이 말은 아주 맞는 말같지만 꼭 그런것만은 아님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교회에 좋은 사람들만 모이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교회안에 질이 좀 좋지 않은 사람들도 들어와서 예수님을 만나고 질이 좋은 사람으로 변화되어야 교회가 역할을 다하는 것입니다. 상처가 많은 사람, 쓴뿌리가 있어서 남을 찌르고 못되게 구는 사람도 교회가 받아주어야지 눈총을 주고 설 곳이 없게 하면 그런 분들은 영영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착하고 좋은 사람들만 모여서 서로 사랑하고 서로 섬기며 즐겁게 신앙생활을 한다면 안전할 수는 있겠지만 진정한 교회가 아닙니다. 세상에 별로 영향을 주지는 못할 것입니다.

어느날 예수님께서 식사를 하시는데 뒤에서 수근거리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이 사람이 죄인들을 맞아 들이고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구먼. 세리와 죄인들과 어울리는 것을 보니 별 수 없이 죄인이로구먼." 돌아다 보니 그들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었습니다.

바리새파는 당시에 율법을 지키는 일에 열심이 대단한 무리들이엇습니다. 이들은 하나님께 대한 열심이 상당했고 성경대로 살고자 하여 생활속에 율법을 엄격히 적용했습니다. 서기관들은 율법을 베껴쓰는 일을 하거나 회당에서 율법을 가르치는 일을 하는 성경에 관한 대단히 실력이 뛰어난 전문가들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항상 예수님과 사이가 좋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뒤에서 비난했습니다. 예수님도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꾸짖으시고 경계하셨습니다. 또 실제로 예수님을 미워하며 십자가에 못박는 일에 앞장 선 것이 바리새인의 무리입니다.

참으로 이상합니다. 성경을 통달한 사람들인데 예수님이 하나님이 보내신 아들이심을 믿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열심이 대단한 사람들인데 하나님의 뜻을 바로 알지 못하고 항상 예수님의 방해꾼이었습니다. 성경대로 철저히 살겠다고 몸부림치던 성경주의자들인데 실제 주님께 인정받지도 칭찬듣지도 못했습니다. 분명 신앙에 관한한 둘 째 가기를 서러워하던 사람들입니다. 지식도 탁월했습니다. 그들의 열심을 흉내내기도 어렵습니다. 십일조도 철저히 드리고 금식도 일주일에 두 번씩 하고 하루에 세 번씩 기도시간을 잘 지켜 시장에서나 거리에서나 가리지 않고 기도하던 사람들입니다. 또 구제도 앞장 선 사람들입니다. 오늘의 교회안에서 이런 사람들을 발견한다면 일등교인이라고 다들 인정할만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오히려 하나님나라의 암초였습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님을 부정하고 공격했습니다. 교회를 훼방하고 핍박에 앞장섰습니다. 예수님도 이들을 독사의 자식이라고 꾸짖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위한 열심이 특별한 사람들이 오히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는 커녕 골치거리가 될 수 있을까요? 자신은 하나님께 충성한다고 생각했지만 하나님께서는 불충성으로 판정하셨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본문으로 돌아가 자세히 살펴 봅시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왜 예수님을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원망했습니까? 예수님이 세리와 죄인들을 영접하고 함께 음식을 먹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야라면 당연히 율법에 열심인 자신들을 한눈에 알아보고 자신들과만 절친하게 지내고 자신들만을 지지해 주리라 생각했는데 예수님은 자신들보다는 더럽다고 여겨지는 무리들과 더 잘 지내셨습니다. 시편 1편1절에 뭐라고 기록되었습니까?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그래서 바리새인들은 세리나 창녀 죄인들을 아주 멀리했습니다. 함께 식사를 금하는 것은 물론 맞닥뜨리면 고개를 돌려버리고 상종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죄인과 함께 앉아서 식사까지 하셨습니다. 그러니 자신들의 눈으로 볼 때 예수님은 이단자입니다. 부정한 사람입니다.

그럼 왜 예수님은 가까이 오는 세리들과 죄인들을 영접하고 함께 식사를 하셨습니까? 하나님의 눈으로 그들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눈으로 바라보니 그렇게 불쌍할 수 없습니다. 또 죄가운데 살던 그들이 하나님을 향하여 나아오는 모습이 그렇게 사랑스러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반면 바리새인들은 사람의 눈으로 보았기 때문에 그들이 그렇게 싫을 수 없습니다. 구역질 납니다. 미워 죽겠습니다. 그래서 그들과 함께 잡수시는 예수님까지도 밉고 원망스러우며 못마땅했던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성경을 알았지만 하나님의 뜻은 몰랐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있었지만 하나님의 마음을 몰랐습니다. 하나님이 죄를 미워하시는 것은 알았지만 하나님이 죄인을 불쌍히 여기시고 사랑하신다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심정을 품지 않고 사람의 심정을 품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들도 바리새인들이 걸어간 삶을 똑같이 흉내낼 수도 있습니다. 성경만 알고 하나님의 참 뜻을 모르면 그럴 수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알면서 하나님의 심정을 모르면 자신도 모르게 사단에게 충성할 수 있습니다. 죄를 심판하시는 하나님은 알면서 죄를 용서하시려고 외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시고 십자가에서 죽음으로 죄값을 대신 지불하게 하신 사랑이 충만하신 하나님의 심정을 모르면 하나님과 상관없이 살게 됩니다. 하나님의 심정을 품지 않으면 하나님이 붙여주신 사람을 거부하고 하나님의 은혜에서 멀어지는 삶을 살 수 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성경을 문자 그대로 순종한다고 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성경을 아무리 많이 알고 외우고 있어도 하나님의 마음을 모르면 그 사람은 하나님을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오래 교회에 다니고 성경지식이 많은데도 하나님을 위한 열심이 대단한데도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예수를 오래 믿어도 마음이 변화되지 않으면 현대판 바리새인이 될 수 있습니다. 열심이 대단해도 하나님의 심정을 품지 않고 사람의 심정을 고집하면 오히려 더 위험할 수 있습니다. 그런 분들을 위해 예수님께서는 눅15장에서 비유를 세가지 들어 말슴하십니다. 잃은 양을 찾는 목자의 비유, 잃은 동전을 찾는 여인의 비유, 잃은 아들을 기다려 반겨 맞이하는 아버지의 비유가 그것입니다.

잃어버린 양의 비유에서 예수님은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심정을 자세히 보여줍니다. 백 마리의 양을 치는 목자가 있었습니다. 그 중에 말썽꾸러기 어린 양이 한 마리가 있었는데 어느날 돌아오다가 보니 그 양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혹시나 해서 세어보니 아흔아홉마리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목자는 아흔아홉마리를 들에 그대로 두고 다시 돌아가 찾아 다닙니다. 그러다 아흔 아홉마리를 잃으면 어떻게 하려는지 참 어리석지 않습니까? 찾을 때까지 포기 하지 않고 온 산을 헤메어 드디어 찾았습니다. 그런데 잃은 양을 찾은 목자는 고생시켰다고 양을 때려주고 잡아 먹은 것이 아니고 진심으로 기뻐하며 사람들을 불러 잔치했습니다. 잔치하다보면 양 한마리 값보다 돈이 더 들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목자는 그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양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양이 길을 잃고 헤메다 이리에 물려 죽을 뻔 하엿는데 무사히 돌아왔으니 목자는 한없이 행복한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심정입니다. 여러분이 죄를 범하고 세상으로 나가 하나님의 속을 무지 썩였어도 미운 마음은 하나도 없고 사단의 발톱에 상처를 입고 멸망을 당할까봐 안타까와하시며 애타게 여러분의 이름을 부르며 찾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심정을 알려면 잃어버린 한마리 양을 찾는 목자의 심정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심정이 우리에게 실제로 피부에 와닿기 위하여는 애완견을 잃어버리면 됩니다. 종종 잃어버린 개를 찾는 다는 벽보를 볼 수 있습니다. '찾아주시는 분에게 후사하겠음.' 또는 '우리 뽀삐를 찾아주시는 분에게 100만원을 드립니다.' 하고 말입니다. 차라리 그 돈으로 개를 한 마리 사서 기르면 되지 않습니까? 개를 사랑하기에 돈이 얼마나 많이 들어도 그 개를 찾아 기르고 싶은 것입니다. 사랑하는 양 한 마리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목자의 심정을 달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목자의 심정을 소유하면 분명히 하나님이 맡겨주신 사람들을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정은 가출한 아들을 애타게 기다리는 아버지의 심정입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기다리는 것은 그 아들이 착해서가 아닙니다. 아들이 성공해서도 아닙니다. 아들이 큰 효도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도 아닙니다. 아들은 아버지의 재산을 창기와 함께 순식간에 먹어버린 사람입니다. 아들은 지금 알거지가 되어 냄새가 나고 초라하기 짝이 없는 모습으로 돌아왔습니다. 아버지에게 근심을 안겨주고 불순종하기를 잘하는 아들입니다. 그럼에도 아버지는 날마다 애타게 기다리십니다. 멀리까지 나아가 오늘은 돌아오려나.. 하고 눈이 빠지게 기다립니다. 그러다가 어느날 멀리에서 누군가 나타납니다. 아버지는 한 눈에 아들을 알아보고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춥니다. 거지꼴을 한 아들이 얼마나 더럽겠습니까? 냄새가 많이 나겠습니까? 그러나 상관없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살아온 것만도 고마운 것입니다. 그래서 종들에게 지시합니다. 제일 좋은 옷을 꺼내어 입혀라. 비싼 가락지를 손에 끼워줘라. 값비싸고 고급스런 신발을 신겨줘라. 왜 그럽니까? 행색이 초라하다고 종들에게 무시당하면 안되니까.. 그리고는 송아지를 잡아 요리를 해라. 밴드를 불러와라. 잔치를 벌여라. 온갖 좋은 것을 내어 주고 아들을 위해 마음을 다해 베풀어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잘못한 것은 빨리 잊어버리고 오직 돌아왔다는 사실때문에 그렇게 좋아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하나님 아버지의 이 심정을 이해할 수 있습니까? 잘 이해가 안되면 여러분의 자식을 한번 잃어버려 보시기 바랍니다. 저도 아들을 잃어버려 본 적이 있습니다. 그것도 둘을 한 꺼번에. 오만가지 생각이 스쳐지나갑니다. '누가 유괴해 갔을까? 교통사고가 난 것은 아닐까? 제발 무사히 돌아오기만 해라. 공부못해도 괜찮다. 말썽을 피워도 괜찮다. 말 안들어도 상관없다. 무사히 돌아와서 잘 자라주기만 한다면 잘못한 것 다 용서해 주마.. 돌아오면 이제는 정말 잘 해줘야지'

그러나 큰 아들은 아버지와는 사뭇 다릅니다. 그래서 그런 아버지에게 화를 냅니다. 불공평하다고 원망합니다. 아버지의 권면도 뿌리칩니다. 그는 사람의 심정을 가지고 동생을 보니 밉기만 한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든지 큰 아들과 비슷합니다. 자기 중심적이고 이기적입니다. 그래서 이해를 잘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든 이들을 아버지의 심정으로 바라보십니다. 여러분이 온갖 죄를 짓고 주님을 근심시키며 하나님께 큰 손해를 입혔어도 회개하고 돌아오면 죄 지은 것 때문에 화를 내시며 여러분을 벌 주시려기 보다는 돌아왔다는 사실때문에 다 용서하시고 잔치를 열며 기뻐하시는 분이십니다.

어느 시골의 한 가정에서 딸이 가출을 하여 자기 마음대로 살기 시작했습니다. 나중에는 돌이킬 수 없는 처지에까지 이르게 되자 소녀는 자살을 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죽기 전에 아버지 어머니가 계시는 고향이 그리워 고향집에 내려갔습니다. 밤중에 가보니 자신이 가꾸던 장미 꽃도 보이고 뛰어 놀던 잔디 밭도 보였습니다. 달 밤에 자기 집을 바라보니 담장 옆 대문이 활짝 열려져 있었습니다. 그 소녀는 문 가까이 가, "아버지-" 조용한 음성으로 불렀습니다. 그러자 아버지가 벌떡 일어나 뛰어 나왔습니다. "어디에 있다가 이제 오느냐? 네가 집을 나간 뒤 대문을 닫아보지 못했단다. 언젠가는 돌아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단다." 혹시 밤중에 딸이 돌아올까봐 깊이 잠들지 못하고 있던 아버지가 딸이 부르는 작은 소리를 듣고 뛰어 나와 그 딸을 맞이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의 심정은 이보다 더 간절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하나님의 심정을 알기때문에 세리들과 창녀들과 죄인들이 예수님께 가까이 나아와 하나님의 말슴을 듣고자 할 때 물리치지 않고 기꺼이 영접하고 함께 음식을 잡수신 것입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그런 하나님의 심정을 모르기 때문에 사람들을 판단하고 주님까지 원망했습니다.

오늘날도 사람들이 하나님의 마음을 품지 않고 있기에 사람들을 바리새인처럼 정죄하는 마음으로 바라봅니다. 이런 하나님의 심정을 모르기 때문에 죄를 뉘우치고도 하나님께 돌아오지 못하고 머뭇거리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돌아와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누리지 못하고 과거의 죄에 대한 죄책감에 시달리며 괴로와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안타까와 하시겠습니까?

여러분, 여러분 한 사람이 돌아온다고 하나님께 무슨 큰 유익이 있겠습니까? 여러분이 얼마나 대단하다고 그렇게 하나님이 찾으시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것 따지며 계산해서 이익이 있을 것 같으면 구원하고 없을 것 같으면 구원안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여러분을 진심으로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모두 하나님의 사랑하는 심정을 느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더 나아가 다른 사람들을 그런 하나님의 심정을 가지고 사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지금은 세상의 유혹에 무너져가고 있는 사람들, 아직 죄의 더러운 습관을 끊지 못하고 하나님의 원수가 되어 사는 사람들, 욕심의 노예가 되어 애타게 호소해도 외면하고 점점 더 멀리 멸망의 길로 빠져들어가는 사람들이 여러분의 주변에 있습니까? 그들을 욕하고 판단하고 미워하는 것은 여러분이 하나님의 심정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불쌍히 여기는 눈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들을 돌이키기 위하여 손해를 감수하며 찾아 다니는 수고를 기꺼이 감당해야 합니다.
그러다가 죄인 한 사람이 돌아오면 하늘에서 천사들과 축제를 벌이며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심정을 함께 느끼며 천하를 얻은 양 함께 기뻐하며 축제를 벌일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은 열린 모임 선포주일입니다. 오늘 부터 시작해서 제 6기 열린 모임이 12주 동안 우리 지체들의 가정 열 곳에서 열린 것입니다. 열린 모임은 우리 주변의 잃어버린 영혼을 찾기 위해 누구나 올 수 있도록 열어 놓은 작은 교회입니다. 누구든지 그곳에 와서 복음을 들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직면한 문제를 이야기하면 함께 기도해주어 응답받을 수 있습니다. 질병도 치유될 것입니다. 마음의 상처도 치유될 것입니다. 누구든지 와서 사시는 하나님을 직접 체험하고 복음을 듣고 구원받을 수 있도록 삶의 현장속에 열린 모임을 열었습니다. 우리 교회는 이 열린 모임을 통해 구원받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열린 모임에 참여하기로 결단한 여러분 참 잘하셨습니다. 여러분이 모두 하나님 아버지의 심정으로 참여하면 놀라운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많은 영혼들을 붙여줄 것입니다. 그들이 모두 복음의 능력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아직 목마릅니다. 더 많은 지체들이 아버지의 심정으로 열린 모임에 참여하면 좋겠습니다. 더 많은 가정에서 직장에서 열린 모임이 열렸으면 좋겠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주변에는 집나가 방황하며 죽도록 고생하는 아들이 딸이 너무나 많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오늘도 안타까운 심정으로 저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십니다. 여러분이 모두 그런 아버지의 심정으로 영혼을 구해내는 일에 참여하시면 좋겠습니다. 물론 바쁘고 시간이 없는 것을 이해합니다. 전도하는 것이 힘들고 때로 무안도 당해야 하는 것임을 압니다. 두려움이 스트레쓰가 되는 것을 잘 압니다. 그렇지만 아버지의 심정을 품게 되면 외면할 수 없습니다. 그 모든 것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의 심정으로 영혼을 구해내는 일에 동참하시고 돌아온 영혼을 따듯하게 맞아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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