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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염려하지 말라! (마 6:2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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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엘리스테어 맥클린(Alistair Maclean)이라는 학자가 말했습니다. “미래에 대한 염려는 노력의 낭비이다. 실제로 미래는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처럼 나쁠 때가 별로 없다고 해도 좋다. 염려는 무익할 뿐만 아니라 유해하다. 현대의 전형적인 두 가지 병은 위궤양과 관상동맥 질환인데 많은 경우에 염려의 결과로 생기는 것이다. 가장 많이 웃는 사람이 가장 장수한다는 것은 의학적으로 증명된 사실이다. 염려는 정신을 낡아지게 하고 몸도 낡아지게 한다.”

  염려하는 것 자체가 좋아서 일부러 염려하거나 근심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많은 경우에 있어서 필요 이상으로 염려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오늘 봉독한 본문 말씀에도 염려라는 단어가 무려 다섯 번이나 나옵니다.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도 쓸데없이 염려하는 일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주님이 괜히 제자들에게 염려하지 말라고 그렇게 강조하시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염려는 다른 말로 근심 혹은 걱정이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말의 뜻은 마음을 나눈다, 마음을 분열시킨다는 것입니다. 염려가 지나칠 것 같으면 우울증에 걸리기 쉽다고 하지 않습니까? 사람을 가리켜서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지만 염려, 특히 물질에 대한 욕심이나 염려가 사람의 마음을 분열시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 같습니다. 때문에 늘 염려하는 사람들을 향해서 사도 베드로는 권합니다.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벧전 5:7) 사도 바울도 같은 말을 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염려 없기를 원하노라...”(고전 7:32 상반절)

  사실 염려는 우리에게 매우 해롭습니다. 그 옛날 지혜자가 뭐라고 했습니까? “마음의 즐거움은 얼굴을 빛나게 하여도 마음의 근심은 심령을 상하게 하느니라.”(잠 15:13) 사도 바울도 분명히 가르치고 있습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 4:6~7)

  염려는 마치 그네를 타는 것과 비슷한 것 같습니다. 몸은 계속해서 움직이지만 앞으로 나가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염려는 조금도 우리를 성장하게 할 수 없습니다. 특히 우리의 믿음이 자라는 데 염려는 아무 도움도 주지 못합니다. 염려의 시작은 믿음의 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믿음의 시작은 염려의 끝입니다. 이와 같이 염려와 믿음은 결코 함께 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염려는 우리에게 어떤 해를 끼칠까요? 구체적으로 알아야 염려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지 않겠습니까?

  먼저 염려는 맹목적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해롭습니다. 주님이 친히 말씀하십니다.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마 6:26) 새는 염려하지 않습니다. 미래를 위하여 물건을 쌓아 두지 않습니다. 그러나 잘 살고 있습니다. 물론 이 말씀을 오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마치 처분만 바라고 가만히 앉아 있어도 만사형통할 것이라는 식으로 오해하면 안 됩니다. 주님은 나무에 앉아 있는 새를 보라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공중의 새를 보라고 하십니다. 공중의 새는 먹이를 찾아 열심히 일하고 있는 새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오늘 열심히 일했으면 다음은 하늘 아버지께 맡기라는 것입니다.

  유대 랍비 시므온도 말했습니다. “나는 평생 한 번도 사슴이 무화과 말리는 것을 보지 못했다. 사자가 물건을 운반하는 것도 보지 못했다. 여우가 장사하는 것을 본 적도 없다. 그러나 그들은 아무 염려없이 잘 살고 있다.” 동물들에게는 사람들처럼 장래 일을 예측하고 대비하려는 긴장 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미래를 위해서 뭔가를 저장하고 그 저장한 것에서 안전을 확인하려는 모습도 볼 수 없지 않습니까?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에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마 6:11) 오늘 우리 사회의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는 양극화 현상이 왜 발생합니까? 꼭 필요한 것 이상으로 많이 가지려고 하는 자들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 아닙니까? 주님은 또한 말씀하십니다. “...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마 6:28 하반절) 여기서 들의 백합화라고 번역된 것은 들꽃, 혹은 들풀로도 번역될 수 있는 단어입니다. 그 꽃은 팔레스타인 지역 언덕에서 많이 볼 수 있는 것으로서 하루 동안 피었다가 진다고 합니다. 이와 같이 잠시 피었다가 지는 들풀이지만 솔로몬 왕의 모든 영광보다 더 아름답게 입혀 주셨습니다. 마르면 땔감으로밖에 쓸 데가 없는 들풀을...

  다음으로 염려는 무익하기 때문에 우리에게 해롭습니다. 주님이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마 6:27) 사람의 생명은 염려로 자라거나 또는 연장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 있습니다. 요즘처럼 사람들이 많은 것을 염려하는 때가 별로 없었던 것 같습니다. 원인이야 어떻든지 간에 많은 사람들이 많은 염려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늙은이도 염려하고 젊은이도 염려합니다. 영혼에 대해서 염려하고 육신에 대해서도 염려합니다. 특히 아직 일어나지 않은 미래 일에 대해서 심히 염려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염려라는 것이 대부분 무익한 것입니다. 아무 유익도 없습니다. 때문에 오히려 해롭습니다. 대부분의 성인병이 염려와 관계가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우울증의 원인도 주로 염려에 있다고 합니다. 분명한 것은 염려가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염려가 우리 이마의 주름살을 펴 줄 수 없습니다. 오히려 주름살이 늘어날 뿐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늙는 것이 싫어서 자기 나이를 밝히지 않습니다. 그래 봐야 아무 유익이 없습니다. 실제 나이를 밝히지 않는다고 해서 나이를 먹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에게 딸이 둘 있었습니다. 그 딸들이 장성하여 시집을 갔습니다. 큰 딸은 야채 장사에게 시집을 갔고 작은 딸은 옹기 굽는 사람에게 시집을 갔습니다. 하루는 아버지가 큰 딸 집에 갔습니다. 장사가 잘 되느냐고 물었습니다. 큰 딸은 그런 대로 잘 되지만 한 가지 걱정이 있다고 했습니다. 비가 오지 않아서 채소가 시드는 것이 걱정이라고 했습니다. 큰 딸은 아버지에게 비가 오도록 기도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 후 아버지는 작은 딸 집에도 갔습니다. 작은 딸에게도 잘 지내고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작은 딸도 그런 대로 잘 지내고 있지만 비가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비가 오면 옹기를 굽는 데 지장이 많다는 것입니다. 작은 딸은 아버지에게 비가 오지 않도록 기도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 후 아버지는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근심과 걱정으로 세월을 보냈다고 합니다. 참으로 어리석지 않습니까? 차라리 비가 오지 않으면 작은 딸네 사업이 잘 될 것이니까 좋다고 생각하고 비가 오면 큰 딸네 채소 농사가 잘 될 것이니까 좋다고 생각하면 염려할 것이 전혀 없지 않겠습니까?

  끝으로 염려는 불신앙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해롭습니다. 주님이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마 6:30)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마 6:32 하반절)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 아버지를 믿지 않으면 안 됩니다. 염려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고아는 염려할 수밖에 없습니다. 부모가 없기 때문에... 그러나 우리는 염려할 것이 없습니다. 왜냐 하면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시기 때문입니다.

  염려는 눈에 보이는 형편과 처지에 따라서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같은 조건에서도 어떤 사람은 초연한데 어떤 사람은 염려합니다. 염려는 마음으로부터 나옵니다. 일찍이 시인이 말하지 않았습니까? “네 짐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가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원히 허락하지 아니하시리로다.”(시 55:22) 까마귀를 시냇가로 보내사 먹을 것을 엘리야에게 주신 하나님, 사자굴 속에서 다니엘을 보호하신 하나님, 뜨거운 불 속에서 다니엘의 세 친구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구하신 하나님, 폭풍 속에서 사도 바울에게 평화를 주신 하나님, 바로 그 하나님이 우리를 도우십니다. 지금까지 우리를 보호해 주신 하나님은 앞으로도 우리를 보호해 주실 것입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 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사 41:10)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하나님이 도우시는데 왜 염려합니까? 주님이 친히 말씀하십니다. “믿음이 작은 자들아...”(마 6:30 하반절) 믿음은 우리를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 우리의 모든 것을 맡겨 버리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가 어머니 품에 자신을 완전히 맡기는 것과 같습니다. 그와 같은 믿음이 세상을 이기는 것입니다. 믿음이 생명의 역사를 이루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람은 생각하는 존재입니다. 문제는 무엇을 생각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크게 두 부류로 사람을 나눌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는 하나님을 생각하는 사람이요, 다른 하나는 염려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을 우리는 믿음이라고 부릅니다. 믿음은 우리에게 희망을 주지만 염려는 우리를 결국 불행으로 인도합니다. 과연 어떤 삶을 살고 싶습니까? 염려함으로 불행한 삶을 자초하고 싶지는 않을 것입니다.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주님을 믿고 그 말씀에 순종함으로 말미암아 하늘 아버지께서 베푸시는 은혜와 평강을 지금 여기서부터 마음껏 누리는 참으로 복된 여러분 모두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강석공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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