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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부주일] 돕는 배필 (왕하 14: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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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로몬 왕이 그의 집권 초기에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지혜의 왕으로 이스라엘을 통치했습니다. 그러나 40년 집권의 중반기를 넘어서면서 그는 어리석은 왕으로 변해 갑니다. 왜냐하면 솔로몬은 백성들에게 무거운 멍에를 지우며 하나님을 떠난 정치로 나라를 다스렸기 때문입니다. 솔로몬의 성전과 궁궐을 건축하는 과정에서 지나친 토목공사와 중과세 중노동의 부담이 백성들에게 가해졌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가 취한 이방 여인들의 영향으로 우상숭배까지 하는 왕으로 전락한 것이 말년의 솔로몬 왕의 모습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잊어버린 솔로몬이 이처럼 실정을 거듭하는 추태를 남긴 후 세상을 떠나자, 여로보암을 필두로 백성들이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을 찾아온 것입니다. 그들은 르호보암에게 솔로몬이 썼던 강경정책을 온건정책으로 바꾸고 백성들의 부담을 가볍게 해달라는 합리적이고 온건한 건의를 했습니다.
그러나 르호보암은 원로들의 충고를 멀리하고 젊은 동료들의 강경책에 이끌려 이 중대한 시기에 무모한 탄압을 계속 자행했습니다. 왕과 함께 자라난 소년들은 르호보암을 부추겨서 르호보암의 만용이 극에 달하도록 했습니다.
곧 나의 새끼손가락이 부친의 허리보다 굵다고 하고 부친은 채찍으로 너희를 징치(懲治)하였으나 나는 전갈로 너희를 징치하리라 하소서 라고 부추겼습니다.
여로보암은 솔로몬이 밀로를 건축할 무렵에 역사감독이 되어 솔로몬의 가혹한 정치를 보고 나오는 길에 선지자 아히야를 만났습니다.

아히야가 여로보암에게 예언하기를 네가 장차 이스라엘 10지파의 왕이 되리라고 했습니다. 이때 솔로몬은 이 사실을 알고 그를 죽이려고 했습니다. 이에 여로보암은 애굽으로 도망하여 시삭 왕에게 의탁하여 있었습니다.
솔로몬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돌아와서 르호보암의 어리석은 만용의 기회를 타서 북쪽 10지파의 지지를 받아 왕위에 올랐습니다(왕상 12:20).
르호보암은 남부에 있는 유다와 베냐민의 두 지파만을 통치하게 되니 이 나라가 곧 유대국입니다(왕상 12:1-24).
우리의 관심은 르호보암에게 있지 않고 여로보암에게 있습니다. 그러나 여로보암을 말하자면 르호보암과의 함수관계를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솔로몬이 신임하던 신하 여로보암이 솔로몬의 왕국을 분단시키는 데 주역이 된 것은 그 원인이 여로보암에게 있지 않고 솔로몬 자신에게 있었습니다.

그것은 솔로몬 자신이 하나님을 떠난 정치를 했기 때문입니다.
여로보암이 북쪽 이스라엘의 왕이 된 후에 그는 남방 유대국을 적대시 했습니다. 그러던 중에 ① 자기 백성들이 여호와를 섬기기 위하여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는 것이 향후 어쩌면 자기를 배반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② 그는 해결책으로 금송아지 두개를 만들어 하나는 북방(단)에 두고 하나는 남방(벧엘)에 두었습니다. ③ 그리고 백성들로 하여금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지 못하게 하고 그것을 섬기게 했습니다. 이 일로 인하여 국가 분립과 종교 분립이 함께 되고 말았습니다. ④ 이것은 자신이 하나님을 배반하는 죄가 될 뿐 아니라 백성들을 죄에 빠뜨리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습니다(왕상 12:25-33). 더 나아가 일반 백성 중에서 제사장을 세우고, 자기가 직접 제사를 주관하는 행위도 주저치 않았습니다(왕상 12:28-31). 뿐만 아니라 그는 자기의 이익을 위해 여호와가 정해준 종교 절기를 임의로 바꾸는 일까지도 단행하였습니다(왕상 12:31-33).
마침내 여호와께서 그 죄악의 보응으로 여로보암의 집을 치셨습니다. 그 결과 그의 아들 아비야를 죽이고 말았습니다. 여로보암의 아내는 이 엄청난 과정에 아무런 영향력이 없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여로보암의 죄 때문에 그의 아들 아비야가 죽는 과정에 수동적인 여로보암의 아내 문제를 지적코자 합니다.

Ⅰ. 화목을 가장한 부창부수(夫唱婦隨)는 합당치 못합니다.

여기 부창부수에 대한 사전적 의미는 남편이 주장하면 아내가 무조건 순종하고 따르는 것이 부부화합의 도리라는 뜻이라고 정의 합니다. 부부가 한평생을 같이 하다보면 때로는 남편의 뜻이 아내의 뜻과 다른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최소한의 객관적 의미도 없을 때도 많을 것입니다.
본문 14장 2절에 {여로보암이 그 아내에게 이르되 청컨대 일어나 변장하여 사람으로 그대가 여로보암의 아내임을 알지 못하게 하고 실로로 가라 거기 선지자 아히야가 있나니 저는 이전에 내가 이 백성의 왕이 될 것을 내게 고한 사람이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와를 아담의 돕는 배필로 창조하시기 전에 창세기 2장 18절에 {독처하는 것이 옳지 못하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편에서 볼 때 아직 창조사역이 완성되기 전의 상태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돕는 배필로 하여금 아담의 내적 갈망을 만족시키고자 하신 것입니다.
여기 '돕는 배필'은 적합한 반려자(伴侶者), 응답하는 자(one who answers)란 뜻입니다. 짝(companion)이란 의미 외에 남편과 책임을 나누며 남편의 부족한 기능을 보충하는 데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평등이 아니라 조화(하모니)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와를 아담의 '돕는 배필'로 창조하셔서 그들을 부부로 삼아주셨습니다. 이는 남자가 장성하면 부모를 떠나 여자와 결합하여 한 몸을 이루어 서로의 부족을 채워 완전한 '인간'이 되게 함이 하나님의 뜻임을 말해줍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지 여인의 위치는 남성의 종속물로 전락했습니다. 그들의 역할에 있어서도 남성들의 목적 달성에 필요한 희생 제물이나 도구로 전락해 버렸습니다.

모세의 누이 미리암이나 여장군 드보라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았지만 대부분의 구약시대 여인들이 하와에게 주어졌던 여성의 위치와 사명을 잃어버린 삶을 살았음을 성경은 말해주고 있습니다. 여로보암의 아내는 이스라엘 왕비라는 높은 신분을 지녔지만 평민으로 변장을 해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선지자 아히야를 찾아갔습니다. 선지자로부터 자기 아들과 남편에게 임할 하나님의 진노의 예언을 들어야만 했습니다.
역사가 요세푸스는 "여로보암이 자기 아내를 이렇게 일방적으로 변장시킨 것은 선지자 아히야가 여로보암의 아내인 줄 알지 못하게 하려함이다."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자기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고 선지자의 사역만 이용하려는 정직하지 못한 파렴치한 행위입니다.
여로보암은 아히야의 눈을 속일 수 있을지 모르나 하나님의 눈까지 속일 수는 없었습니다.

Ⅱ. 인본주의적인 삼종지의(三從之義)는 합당치 못합니다.

삼종지의 혹은 삼종지도, 삼종의탁, 삼종지탁이라는 말은 예전에 여자가 지켜야 할 도리입니다. 즉 어려서는 아버지를 따라야 하고 시집가서는 남편을 따라야 하고 남편이 죽은 후에는 아들을 따라야 한다는 과거 우리나라 여자들에게 있는 필연적 굴레입니다.
본문 14장 10절에 {그러므로 내가 여로보암의 집에 재앙을 내려 여로보암에게 속한 사내는 이스라엘 가운데 매인 자나 놓인자나 다 끊어 버리되 거름을 쓸어버림 같이 여로보암의 집을 말갛게 쓸어버릴지라}고 했습니다.
여로보암 집을 쓸어버리면 여로보암의 아내 역시 의지할 곳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여로보암의 아내가 남편의 명령대로 변장을 하고 실로로 가서 아히야의 집에 도착하니 선지자는 나이로 인해 눈이 어두워 보지 못했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선지자 아히야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여로보암의 아내가 그 아들이 병듦을 인하여 네게 물으러 올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변장을 하고 다른 사람인체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로보암의 아내가 문으로 들어올 때 선지자가 그 발소리를 듣고 여로보암의 처라고 폭로했습니다. 그리고 왜 다른 사람인체 하느냐고 했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 너에게 흉한 일을 말하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아히야를 통하여 여로보암의 죄상을 드러냈습니다.
본문 14장 8-9절에 {나라를 다윗의 집에서 찢어내어 네게 주었거늘 너는 내 종 다윗이 나의 명령을 지켜 전심으로 나를 좇으며 나보기에 정직한 일만 행하였음과 같지 아니하고 너는 이전 사람들보다 악을 행하고 가서 너를 위하여 다른 신을 만들며 우상을 부어 만들어 나의 노를 격발하고 나를 네 등 뒤에 버렸노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여로보암 집안에 재앙을 내려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만들겠다는 말입니다. 뿐만 아니라 여로보암의 나라는 사방에 흩어질 것이라고 했습니다. 성급한 결과를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대로 여로보암의 전 가문은 후계자 바아사에 의해서 멸절되었습니다.
본문 14장 13절에 {온 이스라엘이 저를 위하여 슬퍼하며 장사하려니와 여로보암에게 속한 자는 오직 이 아이만 묘실에 들어가리니 이는 여로보암의 집 가운데서 저가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향하여 선한 뜻을 품었음이니라}고 했습니다.
여로보암의 아내는 병든 아들이 어떻게 될 것인가가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떡 열과 과자와 꿀 한 병을 들고 변장하고 아히야를 찾아간 것입니다.

Ⅲ. 주 안에서(in Christ)의 성경적 원리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에베소서 6장 1절에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고 했습니다.
빌립보서 4장 1절에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 이와 같이 주 안에 서라}고 했습니다.
빌립보서 4장 2절에 {내가 유오디아를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노니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관계와 세상 사람들의 관계가 다른 것은 {주 안에서}라고 하는 분명한 경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주께서 허락하신 범위 내에서 순종하고 따르는 원리입니다. 여로보암은 하나님의 뜻을 벗어나는 일을 수없이 했습니다. 그리고 계속할 뿐 고치지 아니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아내는 남편의 말을 따라 행했습니다. 이것은 순종이 아닙니다. 남편에게는 순종일지 몰라도 하나님 편에서는 악입니다. 주 안에 있어야 주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in Christ가 안되면 for Christ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로보암 아내를 생각하다보면 나발의 아내 아비가일이 생각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비가일은 자기 남편 나발이 다윗의 소년들에게 행한 일을 그의 종들에게서 전해 들었을 때 그는 즉각 대처했습니다. 위기의식을 가진 아비가일이 급히 풍성한 음식들을 나귀에 실었습니다. 그리고 자기 남편 나발에게는 말하지 아니했습니다. 다윗이 나발을 치려고 오는 것을 아비가일이 보고 급히 나귀에게서 내려 그 앞에 엎드렸습니다. 그리고 남편의 죄를 자기에게 돌려 달라고 애원했습니다. 자기 남편 나발을 불량한 사람이라고 자백했습니다. 미련한 자라고 했습니다. 주의 여종의 허물을 사해달라고 매달렸습니다. 이때 다윗은 아비가일에게

사무엘상 25장 32-34절에 {다윗이 아비가일에게 이르되 오늘날 너를 보내어 나를 영접케 하신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할찌로다 또 네 지혜를 칭찬할찌며 또 네게 복이 있을찌로다 오늘날 내가 피를 흘릴 것과 친히 보수하는 것을 네가 막았느니라 나를 막아 너를 해하지 않게 하신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사심으로 맹세하노니 네가 급히 와서 나를 영접지 아니하였더면 밝는 아침에는 과연 나발에게 한 남자도 남겨두지 아니하였으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아비가일의 예물을 받고 그녀의 청을 허락했습니다(삼상 25:35). 결국 나발은 대취하였다가 한 열흘 후에 하나님께서 나발을 치시매 죽었습니다(삼상 25:38). 그러나 아비가일은 나발가문에 대가 끊어지는 불행은 막았습니다. 나발만 죽었습니다. 따라서 아비가일의 지혜로운 대처로 인해 나발의 가문에 멸문지화는 면했습니다. 여로보암이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악한 일들을 계속할 때 그의 아들 아비야가 병들어 눕게 되었습니다. 여로보암은 아내를 변장시켜 선지자 아히야에게 보냈습니다. 아히야는 여로보암이 북왕국의 왕이 될 것을 예언한 선지자였습니다. 여로보암은 내심 선지자 아히야를 통해 병든 아들을 살릴 수 있는 예언을 듣기 위해서였습니다. 여로보암의 아내가 백성으로 가장하고 선지자에게 드릴 선물을 준비해 가지고 왔습니다. 눈이 어두워진 선지자 아히야는 그녀의 신분과 온 목적을 정확히 말하여 그녀를 놀라게 했습니다.

여로보암은 하나님의 사람을 속여 아들에게 일어날 일을 알려했지만 하나님은 그의 간교한 마음을 아히야를 통해 드러낸 것입니다. 그리고 그녀를 통해 여로보암의 죄악을 꾸짖었습니다. 그 죄과 때문에 아비야는 죽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여로보암과 그의 집안은 멸종하고, 그의 나라는 사방에 흩어질 것임을 선포했습니다. 여로보암이 왕이 되고, 하나님을 배반한 숱한 죄악의 발자취를 남기는 과정에서 그의 아내가 한 역할에 대해서 성경은 언급하지 않고 있습니다. 당시의 대다수 여인들처럼 그녀도 남편의 의지대로 움직인 수동적인 삶을 살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따라서 여로보암이 시키는 대로 선지자 아히야를 찾아 나선 그녀의 행동은 남편에게 순종하는 여인의 모습으로 이해하고 넘어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세계에서는 용납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남편의 뜻에 따라 변장을 하고 선지자 아히야를 찾아 가는 그녀의 가슴 속엔 아들 아비야를 살리고 싶은 어머니의 간절함이 있었습니다. 아비야가 살아날 것이란 희망적인 예언을 소망한 그녀에게 전해진 여호와의 메시지는 그녀를 진정 슬프게 했을 것입니다. 아비야는 죽고, 남편과 그의 집안은 멸망하리란 절망적인 예언을 아히야가 그녀에게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기막힌 소식을 듣고도 그녀가 할 일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아픈 가슴을 안고 돌아와 아들의 죽음을 눈물로 바라보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께 범죄 한 악한 왕 여로보암의 아내였기에 남편의 죄과로 찾아 온 저주에 대해서 할 말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잘 훈련된 수동적이고 소극적인 태도는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왜 평소에 남편에게 내조할 수 없었습니까? 왜 수동적인 여인이 되어야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죽는다고 한 선지자는 살릴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죽일 수도 있었으니까 살릴 수도 있었던 하나님입니다. 죽은 자를 부활시키시는 것이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잘못하는 남편을 내조하는 여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남편에게 바른 충고를 못했으면 남편의 잘못된 것을 인정하는 여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더욱 바람직한 것은 남편의 잘못을 인정할 뿐만 아니라 해결책을 강구할 수 있는 여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남녀평등 성취도 58개국 중 우리나라는 54위입니다. 1위는 스웨덴(7점 만점에 5점), 중국이 33위로 아시아권에서는 최고라고 합니다. 그러나 평등이 아니라 조화입니다. 지금 우리나라 가정에서의 여성들의 지위 또한 흡족할 만한 것은 아닙니다. 호주제가 폐지되고 여성들도 종중회원이 되어 법적보장을 받고 있는 이때에 신앙생활마저도 이른바 부창부수가 되어야 하고 삼중지도 정신이 상처하나 입지 않고 그대로 존재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여성들이 신앙생활에 수동적인 자세를 벗어 버리기 바랍니다. 남성들은 여성들에게 신앙생활의 영적 활동이 극대화되도록 배려가 있어야만 합니다. 목사가 여러분들이 망하는 것을 뻔히 알면서 바로 일깨어 주지 못하면 현대판 여로보암의 아내입니다.

죽는 것, 망하는 것을 뻔히 알면서 말 한마디 할 수 없어서야 되겠습니까? 우리 가정에 있는 불신 남편들을 더 이상 방치해두는 죄를 범치 말아야 합니다. 지혜로운 아내는 어쩔 도리가 없어 꼼짝 못하는 이른바 속수무책의 자세를 취하지 아니합니다. 불신 남편에 이끌리어 수동적 삶을 사는 여인들은 그리스도의 신부된 자들의 삶이 아닙니다. 주 안에서 남편을 순종하는 성경적 삶을 살아야만 합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들입니다. 오늘의 성도는 그리스도의 신부된 것을 자랑으로 여깁니다.
그렇다면 죄를 우리의 남편으로 삼을 수는 없는 일입니다. 뿐만 아니라 불신앙, 불평, 하나님 앞에 불순종도 우리의 남편이 될 수 없습니다.
이제부터 우리는 이러한 남편과 짝하여 수동적 삶을 살아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남편 예수 그리스도는 의의 남편입니다. 그는 희고도 붉은 남편입니다. 그는 우리에게 일방적인 수동의 자세를 원하지 아니하고 얼마든지 능동적 자세를 원하시는 남편입니다. -아 멘 -
(강구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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