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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산 이쪽과 산 저쪽 (삼상 23:19-29, 엡 1:3-10, 막 4:35-3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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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예수님의 제자들이 부르심을 받고 3년간 예수님과 함께 지나는 가운데 십자가 이전의 일들 중에서 가장 인상에 남는 것은 아마도 변화 산에서의 체험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변형이 되셨는데 그 얼굴이 해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습니다. 그런가 하면 모세와 엘리야가 거기 함께 하였으며 하늘로부터는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어라”고 하는 음성이 들렸다.

이 일이 제자들에게 가장 인상에 남는 사건이라고 하는 것은 베드로의 말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 승천 후 한 세대를 훨씬 지난 후에 기록한 벧후1:16-18에 “우리는 그의 위엄을 친히 본 자라 지극히 큰 영광 중에서 이러한 소리가 그에게 나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실 때에 그가 하나님 아버지께 존귀와 영광을 받으셨느니라. 이 소리는 우리가 그와 함께 산에 있을 때에 하늘로부터 난 것을 들은 것이라”고 회상했습니다.

제자들은 거기서 하늘의 큰 영광을 체험했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감격스러웠든지 베드로는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겠사오니....주께서도 원하신다면 내가 천막 셋을 짓겠습니다”라고 제의하기 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베드로의 이런 제의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을 데리고 산 아래로 내려오셨습니다. 그런데 거기에는 간질병 들린 아들을 데려온 아버지가 있었고, 그 환자를 고쳐주지 못해서 쩔쩔매는 9제자가 있었습니다. 저 산위의 영광과는 너무나도 대조되는 그런 광경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일단 하늘 영광을 체험한 제자들로 하여금 이 소란한 현실 속에서 다른 사람을 섬기도록 주선하셨습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은혜 주시는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나서 곧 바로 하늘나라에 가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이 세상에서 살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살아가야하는 현실은 이상적인 세상이 아니라 항상 긴장이 있고, 갈등이 있고, 또 다툼이 끊이지 않는 세상입니다. 이것이 우리 삶의 현장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우리가 어떻게 처신할 것이냐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난 우리들은 성령과 말씀으로 계속 성장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하여 여러 가지로 연단과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막4:에 보면 예수께서는 주변에 몰려든 수많은 사람들에게 말씀을 가르치시고, 병을 고치시고 나서는 제자들을 명하여 바다 건너편으로 가자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제자들을 가르치기 위함이요, 또 주님으로서는 조용하게 기도하는 시간을 가지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래서 막4:35에 “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라고 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편”을 떠나서 “저편”으로 가자는 말씀입니다. “이편”은 예수님과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 은혜와 사랑을 나누던 자리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계속 그 자리에 머물러 계신 것이 아니라 “저편”으로 장소를 옮기자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주님 말씀대로 옮겨가기 위하여 배를 타고 호수를 가로질러 건너가는 가운데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큰 광풍이 일어나며 물결이 배에 부딪쳐 들어와 배에 가득하게 되었더라”고 했습니다. 제자들은 이럴바에야 차라리 있던 자리에 그냥 머물러 있었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비록 풍랑은 일고, 장소는 위험한 바다 위였으나 그 배안에 주님이 계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주무시던 주님을 깨우고 이 위기상항을 주님께 말씀드렸을 때 주님은 깨셔서 말씀 한마디로 문제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어디 있든지 어떤 상항에 처했든지 그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주님을 모셨느냐 모시지 않았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내가 당면한 문제가 어떠하든지 간에 주님만 모시고 있으면 아무 염려 없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바람을 멎게 하시고 풍랑을 잔잔케 하신 주님이 바로 나의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2. 그래서 흔히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인생길을 일컬어서 “길 위의 인생” 또는 “도상(途上)의 인생”이라고도 합니다. “도상”에 대하여 몇 가지 예를 들어봅시다.

(1) “여리고 도상”이 있습니다. 한 사람이 예루살렘을 떠나 여리고로 가다가 그 도상에서 강도를 만났습니다. 가진 것을 다 빼앗겼을 뿐만 아니라 강도들에게 얼마나 두들겨 맞았든지 거의 죽게 된 상태에서 버림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우리 인생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루살렘을 떠났다는 것이 상징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그곳은 하나님의 도성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는 순간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저 무서운 강도 같은 마귀입니다. 그러나 강도 만난 우리를 구해줄 사람은 없습니다. 제사장도 레위인도 신음소리를 듣고도 외면하고 피하여 지나갔습니다. 그때 사마리아 사람이 거기 와서 보고는 불쌍히 여겨서 응급 치료를 해주고,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계속 치료를 부탁했습니다. 이 분이 바로 우리 주님이십니다. 임마누엘 주님이 계시는 곳에 언제나 구원이 있고 생명이 있습니다.

(2) “엠마오 도상”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후 제자들은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들은 사람들은 한 둘이 모여들기도 했습니다만 아직도 상항은 매우 유동적이었습니다. 그 가운데 두 사람이 아직 부활 소식도 듣지 못한 채 낙심천만하여 엠마오로 낙향하던 중이었습니다. 얼마 전까지 만 해도 그들이 예수님을 따라 다닐 때는 마치 천하를 얻은 듯한 기분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잃고 난 지금 그들에게 남아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텅 빈 것 같았고, 얼굴은 수심으로 어두웠으며, 발걸음은 천근같이 무거웠습니다. 바로 그 길에서 주님이 그들을 만나주셨습니다. 귀가 열려 말씀을 알아들었고, 마음은 마치 불이 타오르듯 뜨거워졌으며, 마침내 눈까지 밝아져서 주님을 알아보았습니다. 그들은 “엠마오 도상”에서 주님을 만나 변화 받았습니다. 그들은 발걸음을 돌이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그리스도 부활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참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단지 머리로만, 입술로만이 아니라 이와 같이 주님과의 인격과 인격의 만남이 있어야 합니다. 이 놀라운 역사를 위하여 주님은 오늘도 나의 인생 도상에 나를 찾아오십니다.

(3) 또 한 가지 도상이 있습니다. 그것은 성경에서 가장 유명한 사건 중의 하나로 “다메섹 도상”입니다. 사울이라고 하는 유대교에 열심이 특심한 공의회 의원이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오기 위해서 대제사장의 위임장을 받아가지고 다메섹을 향하여 달려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정오쯤 되어서 갑자기 하늘로부터 강한 빛이 내려 비치면서 그는 그만 그 자리에 고꾸라지고 그 빛으로 인하여 시력까지 잃게 되었습니다. 그런 와중에 하늘에서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자기 이름을 부르는 음성이었습니다. 그는 “주여, 누구십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뜻밖에도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니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강권적인 그리스도의 임재 앞에 그는 완전히 항복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나중에 바울이라고 개명하고 나서 평생을 그리스도의 종으로 목숨 바쳐 충성했습니다.

여러분, 신앙생활은 물론 우리 인생도 우리 마음대로 좌지우지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십니다. 내 생명을 주관하시는 이도 주님이시요, 내 신앙과 내 사명, 내 열심까지도 주님이 주셔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도 우리 자신을 온전히 주님께 드릴 때 주님은 우리를 맡으셔서 그의 가장 위대한 작품으로 만들어나가시게 될 줄 믿습니다.

3. 이제 오늘 본문을 한번 살펴보십시다.

26절에 “사울이 산 이쪽으로 가매 다윗과 그의 사람들은 산 저쪽으로 갔다”고 했습니다. 여기 “이쪽”과 “저쪽”이라는 말로 서로 다른 장소를 표시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사울이 있는 곳과 다윗이 있는 곳의 지리적 장소만 구분해 주는 단어가 아닙니다. 그들의 영적 현주소입니다.

누가복음에 보면 거지 나사로와 홍포 입은 부자 이야기가 있습니다. 세상에 살 때 홍포 입은 부자는 호화 저택 안에서 매일 연회를 베풀며 사치스럽게 생활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하나님은 없었습니다. 이것이 세상에서의 그의 현주소였습니다. 하지만 거지 나사로는 부자 집 담 밖에서 부자 집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로 배를 채웠으며 심지어 개들이 헌데를 핥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오직 하나님만을 믿고 의지했습니다. 이것이 세상에서의 나사로의 현주소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죽고 났을 때 두 사람의 위치는 정반대로 바뀌었습니다. 부자는 죽어 지옥에서 불속에 빠져 손가락 끝의 물 한 모금을 애타게 호소하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나사로는 천사들에 의하여 하늘나라로 들려올라가서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 위로와 안식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물 한 모금을 요청하는 부자에게 아브라함이 말하기를 “이쪽과 그쪽 사이에는 큰 구렁이 있어서 서로 오고 갈 수 없다”고 했습니다. 세상에서는 기회라도 있지만 세상에서 한번 기회를 놓치고 나면 다시는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여기 “산 이쪽과 산 저쪽”은 단순한 지리적 장소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의 그들의 영적 위치를 말해주는 것입니다.

지금 다윗은 사울에 쫓겨서 산 저쪽으로 도망갔습니다. 본문에 보니까 “사울을 두려워하여 급히 피하려 하였으니...”라고 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일부 십 사람들은 사울 편에 붙어서 다윗의 소재를 그들에게 밀고하였습니다. 그러자 사울은 그들에게 복을 빌어줍니다.

그러나 도망 다니는 다윗은 비록 그 신변의 위험이 잠시도 그칠 때가 없었지만 그러나 그 배후에 그를 지켜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대로 하나님은 다윗을 통하여 그 크신 뜻을 다 이루시기까지 결코 그를 떠나지 아니하십니다. 그렇다면 누가 뭐라고 해도 다윗의 신변은 세상 그 누구도 감히 건드릴 수 없도록 하나님이 지켜주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실제로 그 약속을 이루셔서 다윗을 지켜주셨으며 다윗을 통하여 그 뜻을 다 이루셨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어떠합니까? 비록 일부 십 사람들이 다윗의 소재를 밀고하고, 사울이 그들에게 복을 빌어주었지만 과연 사울은 성공했으며 십 사람들은 사울이 빈 복을 받았습니까? 아닙니다. 사울은 저쪽으로 피하여 달아난 다윗에게 결코 손을 댈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사이에 블레셋 사람들이 침략해 왔기 때문에 사울은 불가불 더 이상 다윗을 좇지 못하고 발걸음을 돌려야 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사울의 가는 길을 막으셨습니다. 사울의 시도로 하여금 실패하도록 역사하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현재의 정위치가 어딘지 한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산 이쪽입니까 아니면 산 저쪽입니까? 여러분은 하나님과 함께 있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을 등지고 있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여러분의 위치가 어디입니까?

우리 찬송가에 “주 안에 있는 나에게 딴 근심 있으랴!”고 했습니다. “주님 안”에 여러분의 정위치를 정하시기 바랍니다. 바울 서신 특히 그의 옥중 서신을 보면 수없이 등장하는 단어가 “주 안에”, “그리스도 안에”, “예수 안에”라고 하는 단어입니다. 바울의 육신은 지금 로마 감옥에 갇혀있습니다. “감옥”이 그의 정위치요 현주소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영적인 주소는 “주님 안”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자유인이요, 또한 그는 자신을 가장 복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역사는 바울이 승리자인 것을 증거 해 줍니다.

구약의 요셉도 역시 누명을 쓰고 감옥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진정한 현주소는 “하나님 안”이었습니다. 그래서 감옥에서도 형통하였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그곳이 바로 애굽의 총리가 되는 첩경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물으셨듯이 묻습니다. “여러분은 어디 있습니까?” 이쪽입니까? 저쪽입니까? 그리고 결정하십시오. “주님 안에 나의 정위치를 정하고 주님 안에 나의 현주소를 정하겠나이다”. 그렇게 할 때 여러분은 진정한 승리자, 그리고 가장 복된 사람이 된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김오동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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