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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두 제자의 슬픈 이야기 (눅 24:1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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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본문에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의 슬픈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17절에 “두 사람이 슬픈 빛을 띠고 머물러 서더라” 라고 했습니다. 슬픔에는 여러 가지 종류의 슬픔이 있습니다. 이별의 슬픔도 있고 고통의 슬픔도 있고 사랑의 슬픔도 있습니다. 이별의 슬픔과 고통의 슬픔과 사랑의 슬픔은 모두 좋은 슬픔들입니다. 그와 같은 슬픔들에는 눈물도 있고 감동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와 같은 슬픔들은 보석이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 두 제자의 슬픔은 불신과 절망의 슬픔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두 제자에게 이렇게 말씀했기 때문입니다.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25). 저들은 십자가의 주님과 부활의 주님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저들의 슬픔은 또한 절망에서 온 슬픔이었을 것입니다. 저들은 모든 기대와 희망을 포기하고 절망 가운데서 고향으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저들은 바클레이 박사가 지적한 대로 석양을 향해서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엠마오는 지리적으로도 예루살렘으로부터 석양을 향하고 있었지만 영적으로도 석양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두 제자들은 sunrise를 향해서 즉 해돋이를 향해서 걸어가지 않고 sunset을 향해서 즉 석양을 향해서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항상 해돋이를 향해서 걸어가야 하는데 두 제자들은 석양을 향해서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두 제자는 불신과 절망 가운데서 슬픈 빛을 띠고 석양을 향해서 힘 없이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이와 같은 불신과 절망의 슬픔을 지니고 사는 불행한 신자들이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도마처럼 그리고 여기 두 제자들처럼 십자가의 주님과 부활의 주님이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 불행한 신자들이 있습니다. 나름대로 지녔던 기대와 희망이 모두 사라져 버린 듯한 절망의 느낌을 지니고 사는 불행한 신자들이 있습니다. 건강에 대한 기대도 사업에 대한 기대도 물질에 대한 기대도 다 사라져 버린 듯한 절망을 지니고 슬픈 빛을 띠고 살아가는 불행한 신자들이 있습니다.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큰 불행은 불신과 절망이라고 생각합니다. 거기에는 눈물도 감동도 없고 메마름과 삭막함만 있을 뿐입니다. 저는 부족하지만 한 평생 믿음과 소망을 가지고 해돋이를 향해 걸어가면서 살아오고 있다고 고백하고 싶습니다. 항상 내일을 기대하면서 소망을 지니고 기쁘게 살아가고 있다고 고백하고 싶습니다. 이제 불신과 절망의 슬픔을 지니고 석양을 향해서 힘 없이 걸어가던 두 제자들의 모습을 세 가지로 나누어서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두 제자는 눈이 가리워져서 주님을 보지 못했습니다.
  “저희의 눈이 가리워져서 그 인줄 알아보지 못하거늘”(눅24:16). 불신과 절망의 슬픔을 지니게 될 때에 눈이 가리워져서 살아계신 주님이 보이지 않습니다. 십자가의 주님과 부활의 주님을 볼 수 있는 사람은 가장 행복한 사람인데, 두 제자는 십자가의 주님과 부활의 주님이 옆에 오셨는데도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물론 막달라 마리아도 처음에는 부활의 주님을 바로 알아보지 못했고 디베랴 바닷가에 갔던 일곱 제자들도 처음에는 부활의 주님을 바로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사실 우리는 모두 눈이 어두웠던 소경들이었습니다. I once was blind. 우리들은 모두 소경들이었습니다. 얼마 동안 눈이 가리워져서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 어떤 면에서는 당연한 일입니다. 이해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십 년 이상 계속된다면 그것은 큰 일 입니다. 교회에 십 년 이상 다니면서도 십자가의 주님과 부활의 주님을 알아보지 못한다면 그것은 큰 일 입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내 눈을 열어서 주의 법의 기이한 것을 보게 하소서”(시119:18). 욥은 나중에 은혜를 받고 나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용42:5).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들은 아직도 십자가의 주님과 부활의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아직도 믿음이 생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둘째, 두 제자는 귀가 어두워져서 주님을 듣지 못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길 가면서 서로 주고 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하시니”(눅24:17). 불신과 절망의 슬픔을 지니게 될 때에 귀가 어두워져서 살아계신 주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습니다. 살아계신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사람은 가장 행복한 사람인데, 두 제자는 십자가의 주님과 부활의 주님이 지금 옆에 오셔서 말씀을 하시는데도 주님의 음성을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저는 요나단 에드워즈가 우주 만물에서 주님을 보고 들었을 뿐 아니라 주님을 읽었다고 고백한 글을 읽었을 때 얼마나 깊은 감동을 받았는지 모릅니다. 두 제자는 주님을 보지도 듣지도 못했습니다. 물론 막달라 마리아도 처음에는 부활하신 주님의 음성을 바로 알아듣지 못했고 디베랴 바닷가에 갔던 일곱 제자들도 처음에는 부활하신 주님의 음성을 바로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사실 우리는 모두 귀가 어두웠던 귀머거리들이었습니다. 얼마 동안 귀가 가리워져서 주님의 음성을 알아듣지 못하는 것이 어떤 면에서는 당연한 일입니다. 이해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십 년 이상 계속된다면 그것은 큰 일 입니다. 교회에 십 년 이상 다니면서도 주님의 음성을 도무지 알아듣지 못한다면 그것은 큰 일 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보는 눈과 듣는 귀가 복이 있다고 말씀했습니다(마13:16). 그리고 “귀 있는 자는 들을찌어다” 라는 말씀을 수 없이 많이 하셨습니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들은 아직도 부활하신 주님의 음성을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아직도 믿음이 생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셋째, 두 제자는 가슴이 굳어져서 주님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불신과 절망의 슬픔을 지니게 될 때에 가슴이 굳어져서 살아계신 주님을 느끼지 못합니다. 나중에는 저들의 마음이 뜨거워졌지만 지금은 부활의 주님이 옆에 와서 말씀을 하셔도 두 제자들은 아무런 느낌이 없었습니다. 가슴에 아무런 감동이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가슴에 아무런 뜨거움도 없었습니다. 주님의 임재하심과 함께 하심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은 가장 행복한 사람인데 두 제자들은 주님의 임재하심과 함께 하심을 가슴으로 느끼지 못했습니다. 주님의 세밀한 손길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한 신자입니다. 배순자 권사님은 수술 후 곧 퇴원하고 저를 찾아와서 하나님께서 목사님의 기도를 들어주시고 저의 기도를 들어주셔서 세밀하게 함께 하신 것을 체험했다고 감사를 드리고 또 감사를 드렸습니다. 정진선 집사님도 일 주일 동안 미국을 다녀온 후 저를 찾아와서 하나님께서 목사님의 기도를 들어주셔서 기도해 주신 그대로 하나님께서 세밀하게 구체적으로 함께 하시고 도와주신 것을 체험했다고 감사를 드리고 또 감사를 드렸습니다. 하나님의 임재하심과 함께 하심을 가슴으로 느끼고 체험할 수 있는 사람은 가장 행복한 사람입니다. 물론 처음에는 주님의 손길을 세밀하게 느끼지 못합니다. 사실 우리는 우리의 영적 존재가 모두 마비되어 굳어졌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조금씩 우리의 영적 존재가 살아나서 주님을 조금씩 느끼게 됩니다.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시고 나의 모든 것을 주장하심을 가슴으로 느끼게 됩니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들은 아직도 부활하신 주님의 임재하심을 가슴으로 느끼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아직도 믿음이 생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24장은 불신과 절망의 슬픔을 지니고 있던 두 제자가 믿음과 소망의 기쁨을 지닌 새로운 사람들로 바뀌어진 사실을 우리들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눅24:33-35에 그 변화가 나타나 있습니다. “그 시로 일어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보니.” 석양을 향해서 슬프게 힘 없이 걸어가던 두 제자가 해돋이를 향해서 기쁨으로 힘차게 뛰어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거기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주님을 믿지 못하던 두 제자가 부활의 주님을 온 몸과 입으로 증거했습니다. “두 사람도 길에서 된 일과 예수께서 떡을 떼심으로 자기들에게 알려지신 것을 말하더라.” 두 제자들은 부활의 주님을 믿었을 뿐 아니라 부활의 주님을 힘 있게 증거하는 예수님의 증인까지 되었습니다. 불신과 절망의 사람들이 믿음과 소망의 사람들로 바뀌어졌고 슬픔을 지녔던 사람들이 기쁨을 지닌 사람들로 바뀌어졌습니다.
  기독교는 변화의 종교입니다. 어제 결혼한 오명환 군과 이태실 양이 지난 몇 달 동안에 생각이 바뀌어지고 느낌이 바뀌어졌습니다. 삶에 대한 자세가 바뀌어졌습니다. 앞으로 더 많이 바뀌어질 것입니다. 기독교는 변화의 종교입니다. 불신이 신앙으로 변화되고 절망이 소망으로 변화되고 슬픔이 기쁨으로 변화됩니다. 보지 못하던 것을 보게 되고 듣지 못하던 것을 듣게 되고 느끼지 못하던 것을 느끼게 됩니다. 어떻게 이런 변화가 일어납니까?

  첫째, 부활의 주님께서 우리들을 찾아오셔야 우리들에게 이런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런데 부활의 주님께서 황송하게도 못난 우리들을 찾아오시고 또 찾아오십니다.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저희와 동행하시나”(15). 불신과 절망에 쌓여있던 두 제자도 찾아오셨고, 불신과 의심에 쌓여있던 도마도 찾아오셨고, 배신과 좌절에 쌓여있던 베드로도 찾아오셨습니다.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고 느끼지도 못하는 우리들을 찾아오셔서 우리들과 말씀도 하시고 깨우쳐도 주시고 떡도 떼어서 먹여도 주십니다. 너무나 감사하고 황송한 일입니다.

  둘째, 주님께서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풀어주셔야 우리들에게 이런 변화가 일어납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구원도 들음에서 오고 변화도 들음에서 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들을 찾아오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풀어주시고 깨닫게 해 주십니다.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27). 지금은 당신의 종들을 통해서 그리고 성령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풀어주시고 깨닫게 해 주십니다. 저에게는 주일학교 선생님들과 이성봉 목사님 김치선 목사님과 같은 당신의 종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풀어주시고 깨닫게 해주셨습니다. 너무 감사하고 황송한 일입니다.

  셋째, 주님께서 우리들에게 오셔서 떡을 떼어주셔야 우리들에게 이런 변화가 일어납니다. 떡을 떼어주신다는 것은 주님의 살 깊은 사랑을 주신다는 것을 말하고 그리고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께서 당신의 살과 피를 주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살 깊은 사랑을 몸으로 받아먹어야 하고 그리고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려서 주신 주님의 살과 피를 받아 먹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운명이 변화되고 우리의 존재와 삶이 변화됩니다. 영생을 얻게 되고 하늘을 얻게 되고 그리고 죄와 지옥을 이기게 됩니다.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요6:53).

눅24은 우리들이 하여야 하는 일 한 가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들이 주님을 강권하여 우리들의 마음과 집에 영접하는 일입니다. “예수는 더 가려 하는 것 같이 하시니 저희가 강권하여 가로되 우리와 함께 유하사이다”(28,29). 주님을 강권하여 우리의 마음과 우리의 집에 모시는 일은 너무 중요합니다. 유명한 주석가 헨드릭슨은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그들이 강권하지 않았다면 아마 주님께서 그대로 지나가셨을 것이다. 우리들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은 우리 편에서 내리는 결단을 전혀 무시해버리지 않으신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불신과 절망에 빠질 수도 있고 슬픈 빛을 띠고 석양을 향해 힘 없이 걸어갈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부활의 주님께서는 못난 우리들을 찾아오시고 또 찾아오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을 바꾸어주십니다. 눈을 뜨게 해주시고 귀를 열게 해주시고 가슴을 움직이게 해주십니다. 부활의 주님께서 오늘 이 시간에 여러분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가까이 찾아오시기를 바랍니다. 부활의 주님께서 오늘 이 시간에 여러분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가까이 오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풀어주시기를 바랍니다. 부활의 주님께서 오늘 이 시간에 여러분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가까이 오셔서 주님의 살 깊은 사랑을 부어주시고 주님이 찢기시고 흘리신 살과 피를 먹여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의 삶이 변화되기를 바랍니다. 눈이 밝아져서 주님을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귀가 열려져서 주님을 듣기를 바랍니다. 가슴이 뜨거워져서 주님을 느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슬픔이 변해서 기쁨이 되기를 바랍니다. 석양을 향하던 발걸음이 해돋이를 향해서 달려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부활의 주님을 가슴으로 믿을 뿐 아니라 온 세상을 향해서 부활의 주님을 온 몸으로 힘있게 증거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김명혁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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