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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께서 달리 세우신 칠십 인 (눅 10: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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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에 이런 일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가브리엘 천사가 십자가에서 상하신 못자국을 그대로 지니신 채로 천당으로 돌아오시는 예수님을 보면서 "예수님, 정말 세상에서 고생 많이 하셨군요."라고 맞이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실 그랬지."라고 대답하시니까, 가브리엘 천사는 또 묻기를 "그러면 이제 그 주님의 구원의 복음을 세상 사람들 모두가 다 알게 되었겠군요?"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고개를 저으시면서 "아직은 아니야. 현재로서는 유대와 갈릴리에 있는 소수의 사람들뿐이지."라고 대답하셨습니다.
가브리엘 천사는 의아스러워하면서 "그러면 주님께서 하신 그 중차대한 일을 나머지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알도록 하기 위해서 어떤 조치를 취해 놓고 오셨습니까?"라고 되물었습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나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등 몇 사람들에게 그 사명을 맡겨 놓았지. 그들이 내가 했던 일들을 주위 사람들에게 말할 것이고 그러면 복음은 점점 더 멀리 전해져서 결국에는 땅끝의 모든 사람들에게까지 전파될 것이야."라는 것이었습니다.
충격을 받은 가브리엘 천사는 그 예수님의 '조치'에 대하여 비관적인 생각을 감추지 못하고 멀뚱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그는 그 예수님의 제자라는 사람들이 얼마나 보잘 것 없는 인물들인지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가브리엘 천사는 재차 "하지만 예수님, 만약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 지치거나 약해지면 어떻게 합니까? 만약 그들이 핍박과 박해 때문에 포기하면 어떻게 됩니까? 만약 세월이 흐르면서 사람들이 점점 더 그 사명을 잊어버리고 전도를 하지 않게 되면 나중에 20세기 쯤 가서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럴 경우에 무슨 다른 대안은 준비되어 있으십니까?"라고 걱정스레 여쭈어보았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다른 대안은 전혀 없다네. 하지만 나는 그들이 잘 해낼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어."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상의 이야기는 지어낸 가상적인 스토리입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우리 예수님께서 당신의 십자가 구원 복음을 몸소 완성시켜 놓으신 후에 그것을 온 세상에 전파시키기 위한 '후속조치'를 어떻게 세워놓으셨는지를 잘 상기시켜 줍니다.
그것은 오직 '전도와 선교'일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예수님에게는 이것 외에 '제2차 플랜'이라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전혀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이 계획은 지난 2000년 동안 조금도 약해지거나 단절되지 않고 바로 오늘날까지 진행되고 있으며 땅끝의 마지막 지역을 향하여 줄기차게 전진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시는 마지막 여행길에서 일어난 사건들 중에 하나로서 소위 '칠십 인의 파송'이라 불리는 사건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이제 곧 세우실 신약교회를 위하여 미리 준비하신 일이었습니다.
예수님 승천 후에 일단 예루살렘교회가 세워지면 그것을 시발점으로 하여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복음이 본격적으로 전파되어야 할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열두 사도들 외에 특별히 70명의 전도자들을 뽑아서, 그들이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에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고 당황하거나 시행착오를 반복하지 않도록 미리 숙달된 전도자로 훈련시키셨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총회선교주일을 맞이하여 예수님께서 이 시대에서도 친히 세우시고 쓰고 계시는 전도자들에 대하여 우리가 깨닫고 기억해야 할 사실들을 본문 말씀을 통하여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우리는 하나님께서 '차세대를 위한 전도자'들을 더 많이 보내주시기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본문 1절로 2절에 기록하기를 "이 후에 주께서 달리 칠십인을 세우사 친히 가시려는 각동 각처로 둘씩 앞서 보내시며 /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군이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군들을 보내어 주소서 하라"고 했습니다.

"달리 칠십 인을 세우사"라는 말씀은 앞서 9장에서 파송했던 열두 제자 외에 다른 전도자들을 추가로 세우셨다는 뜻입니다.
그들을 세우신 후 "친히 가시려는 각동 각처로" 보내셨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지금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도중에 들르시게 될 서른다섯 동네에 각각 한 팀 씩 미리 보내셨다는 뜻은 아닙니다.
10장 17절 이하의 문맥을 보아서도 그렇고, 또 지금 예수님께서 그렇게 많은 동네들을 일일이 방문하실 시간도 없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은 예수님께서 친히 가시고 싶은 동네로 그들을 대신 보내셨다는 뜻으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둘씩" 짝을 지어 보내신 것은 힘들 때에 서로 돕고 격려하기 위해서, 또 복음 증거에 대하여 합법적인 증인의 수자를 맞추기 위한 목적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나중에 사도들이 전도나 선교 사역을 할 때에도 베드로와 요한, 바나바와 바울, 바울과 실라, 바나바와 실라 등 두 명씩 한 팀을 이룬 것도 꼭 같은 맥락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을 파송하시면서 제일 먼저 하신 말씀이 바로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군이 적으니 더 많은 일군 보내어 주시기를 기도하라"는 명령이었습니다.
추수 때라는 것은 농부에게 얼마나 바쁜 때이겠습니까?
온 집안 식구뿐 아니라 지나가는 사람까지라도 붙잡아서 일을 시키고 싶을 정도로 일손이 달릴 때입니다.
시급하고 방대한 복음 사역을 생각할 때 예수님의 심정이 바로 그러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지금 그 70인들을 파송하시면서도 그들로 하여금 각자 '자기가 맡은 사역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보다도 '자기 뒤에도 계속 전도자들이 파송되기를 위하여' 오히려 더 먼저 기도하면서 전도하러 나가게 하셨던 것입니다.
실로 예수님의 이 말씀은 얼마나 멀리 내다보는 것이었습니까?

우리가 원로목사님의 위대한 비전(vision) 덕분에 이 경향교회를 통하여 조직하고 추진하고 있는 '별들의 모임'이 바로 그런 주님의 뜻을 그대로 이어 받고 있는, 실로 소중한 운동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보통 '복음전도' 하면, 자기에게 주어진 사명만 열심히 하면 그것으로 충분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내게 맡겨진 것 이외의 일들은, 그저 하나님께서 알아서 하실 일이고 나와는 아무 상관없는 일들로만 여기기 쉬운 것입니다.
하지만 앞으로 가면 갈수록 더욱 추수할 것은 많아지고 반면에 신학교에 오고 목사가 되겠다는 일군들은 오히려 점점 더 줄어들게 될 것을 염려하는 '주인'의 마음까지 우리가 읽을 줄 알아야 합니다.
바로 그런 까닭에 우리는 이 '별들의 모임'을 통하여 다음 세대의 추수일꾼들을 미리 준비하는 사명까지 준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일꾼은 일꾼이 부르거나 고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인이 부르고 고용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자신이 다른 일꾼을 불러오는 것이 아니라, 이 모든 구속사 사역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당신의 필요한 일꾼들을 부르시고 세우시는 것 역시 오직 홀로 주장하고 계십니다.
그러니 우리도 역시 차세대의 일꾼을 더 많이 세우시고 보내어주시기를 위하여 그 주인에게 간청하는 마음과 자세로 이 별들의 모임을 위해서 기도하며 후원해야 할 것입니다.

비단 '별들의 모임'을 위해서만 아니라, 우리는 항상 '더 많은 목사, 더 많은 선교사'를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물론 거짓 일군, 삯군들이 많이 양산되는 것은 큰 문제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 때문에 신학교가 너무 많다고, 목사가 더 이상 필요 없다고, 선교사의 숫자를 줄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주 잘못된 사고방식입니다.
왜냐하면 아직도 복음을 들어보지도 못한 나라, 동네, 가정, 개인이 이 땅에 훨씬 더 많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 조국이 전 세계에 더 많은 선교사를 파송할 수 있는 나라가 되게 해 달라고 더욱 기도해야 하며, 우리 교회가 주님의 훌륭한 사자들을 더 많이 배출해 낼 수 있는 교회가 되게 해 달라고 간절한 기도를 계속 드려야만 합니다.

'추수할 것은 많되 일군이 적은 것'을 제대로 깨닫는 성도는 이처럼 현재의 신학생과 선교사 지원뿐 아니라 다음 세대의 복음 전도자들까지 생각하고 후원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 경향을 시발점으로 하여 세계를 향하여 뻗어가면서 점점 더 크게 급속도로 확장되고 있는 선교사역지에 그 일군들이 부족하지 않도록 미리 기도하고 준비하는 이 요긴한 '별들의 모임'을 더욱 귀중히 여기고 전력을 다해 후원하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우리는 복음 전도자들을 '영적으로 영접'하면서 동시에 '물질적으로 후원'힐 줄 알아야 합니다.

본문 3절로 9절에 기록하기를 "갈지어다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어린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 전대나 주머니나 신을 가지지 말며 길에서 아무에게도 문안하지 말며 /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먼저 말하되 이 집이 평안할지어다 하라 / 만일 평안을 받을 사람이 거기 있으면 너희 빈 평안이 그에게 머물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 그 집에 유하며 주는 것을 먹고 마시라 일군이 그 삯을 얻는 것이 마땅하니라 이 집에서 저 집으로 옮기지 말라 / 어느 동네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영접하거든 너희 앞에 차려놓는 것을 먹고 / 거기 있는 병자들을 고치고 또 말하기를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에게 가까이 왔다 하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세우신 전도자를 파송하시는 심정을 "어린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다"고 극단적인 표현으로써 토로하셨습니다.
이리 가운데 양을 보낸다는 것은 위험한 정도가 아니라 죽을 것이 뻔한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파송하시는 복음 전도자들이 이 불신 세상으로부터 당할 핍박과 박해를 잘 알고 계셨기에 그렇게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그 파송 받는 70인으로 하여금 특별한 준비를 더 많이 하도록 하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전대," 즉 돈주머니는 물론이고, 비상식량이라도 담을 "주머니"도 안 되고, 여벌의 "신"조차 가지고 가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지금 가야 할 곳은 '이리'들이 득실거리는 곳인데, 그 곳으로 가는 '어린 양'은 그야말로 맨몸만 가지고 가라고 명하시는 것입니다.
도대체 예수님께서는 왜 이처럼 앞뒤가 맞지 않아 보이는 말씀을 하고 계시는 것이겠습니까?

그 까닭은 바로 뒤에 이어 나오는 말씀에 나타나 있습니다.
"길에서 아무에게도 문안하지 말고"라는 말씀은 전도자는 사람의 예의 따위는 무시해도 좋다는 뜻은 물론 아닙니다.
당시 유대사회에서 서로 인사를 나누는 것은 우리나라 전통적 예법에서도 볼 수 있듯이, 제대로 격식을 차려서 하자면 꽤 시간이 걸릴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다른 쓸데없는 일에 시간을 허비하지 말고 오직 전도에만 최우선을 다하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나중에 9절에도 나오듯이 어느 동네에 들어가든지 "병자를 고치는 것"과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전파하는 것"에만 전념하라고 명하셨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전도자가 그처럼 자기가 영적 사명에만 전념할 때, 그의 육신적인 필요는 어떻게 충당되는 것입니까?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 말씀을 받고 그 전도자를 영접하는 성도들을 통해 자연히 충당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어떤 동네를 가게 되든지 아무 집에나 들어가서 "평안을 빌 때," 그것을 "받을 사람이 거기 있으면" 그 평안이 그 집에 머물게 될 것이고 만일 그렇지 않으면 "그 평안이 되돌아 올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그 평안의 축복은 무슨 주문처럼 전도자가 기도해 주는 대로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것이 결코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서 그 평안의 축복을 받도록 작정하신 자에게만 임하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처럼 전도자를 영적으로 영접하는 자의 집에서 육신적인 대접도 함께 받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 집에 유하며 주는 것을 먹고 마시라," "이 집에서 저 집으로 옮기지 말라," 또 "너희를 영접하거든 너희 앞에 차려 놓은 것을 먹고" 라고 하셨습니다.
그처럼 전도자를 영접하고 대접해 주면, 그것을 두고 이러니저러니 투정하거나 혹은 더 잘 대접받을 만한 곳을 찾아 돌아다니지 말고, 그저 대접해 주는 대로 감사함으로 받으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런 모든 일은 "일군이 그 삯을 얻는 것이 마땅한 것"처럼, 전도자에게도 지극히 당연한 보상이라고 예수님께서 선언하신 것입니다.

실로 이상하게도, 전도자들을 대접하는 일을 지극히 부자연스럽게 여기는 교인들이 종종 있습니다.
설교나 기도해 주신 목사님에게 응분의 사례를 드리는 것을 전혀 안 해도 될 일처럼 여기는 교인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또 목사 편에서 그런 대접받는 일을 스스로 거북하게 여기는 경우도 없지 아니합니다.
그런 마음이 드는 것은, 교인 편에서는 전도자를 통하여 어떤 영적인 은혜와 평안의 축복을 실제적으로 받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이며, 그 목사는 자신의 사명에 정말 전념하여 충성하지 못하고 있음을 자기 양심적으로 부끄럽게 여기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영적으로 줄 것을 주고 받을 것을 받는 전도자와 성도들 사이에는 육신적, 물질적으로도 또한 줄 것을 주고 받을 것을 받는 것이 지극히 당연하다고, 예수님께서는 여기서 뿐만 아니라 성경 곳곳에서 누누이 가르치고 계시지 않습니까?

무엇보다도 우리는 오늘도 주님께서 '어린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내시는 심정으로 파송하신 선교사님들을 위하여 주님께서 마련해 놓으신 유일한 대비책을 깨닫고 몸소 참여할 줄 알아야 합니다.
전 세계의 선교사님들은 오늘도 실로 냉정하고 적대적인 분위기 가운데서도 오직 복음 전파에만 전념하면서 고군분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분들에게 힘과 용기를 줄 수 있는 유일한 지원 세력은 바로 여러분의 기도와 후원헌금인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세계 각국에 파송되어 계신 오십 여 명의 선교사님들은 문화와 언어의 차이, 인종 차별, 정부의 탄압, 우상종교의 핍박에 둘러싸여서 사역을 하고 계십니다.
그런 사면초가의 한 가운데 외롭게 서서 싸우고 계시는 선교사님들에게 유일한 격려와 힘이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경향교회에서 새벽마다, 금요일 밤마다 기도드리는 경향의 믿음직한 후방부대입니다.
매달마다 정성껏 선교헌금을 드리고 있는 경향의 수많은 지원병들입니다.
선교사님들이 병을 얻어 큰 수술을 하기 위하여 돌아오실 때마다 또 잊지 않고 특별헌금을 모으는 이 경향의 든든한 성도들인 것입니다.
그것은 실제로 '이리 가운데' 사는 위협을 몸소 매일 느끼고 겪고 계시는 선교사님들에게 있어서는 우리 스스로가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 몇 배, 몇 십 배의 큰 힘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선교사님들이 현지의 교회와 성도들을 통하여 대접 받는 것도 큰 힘이지만, 아직 그럴만한 배경이 잡히지 않은 초기 단계에서는 오직 이 교회에서 보내는 기도와 헌금만이 그분들에게 유일한 지원군이 되고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선교사님들이 그런 경향의 성도들을 위하여 기도해 주며 축복해 주는 강도와 뜨거움은 얼마만한 것이겠습니까?
'경향선교회'를 통하여 이처럼 복음의 일군들에게 '마땅한 삯'을 후히 대접하고 후원함으로써 그들이 진심으로 빌어주는 '평안의 축복'을 더욱 풍성히 받아 누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우리는 복음 전도자들이 바로 오늘날의 '예수님의 전권대사(全權大使)'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10절로 16절 말씀에 "어느 동네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영접지 아니하거든 그 거리로 나와서 말하되 / 너희 동네에서 우리 발에 묻은 먼지도 너희에게 떨어버리노라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을 알라 하라 /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저날에 소돔이 그 동네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 화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면 저희가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 심판 때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 너희 말을 듣는 자는 곧 내 말을 듣는 것이요 너희를 저버리는 자는 곧 나를 저버리는 것이요 나를 저버리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저버리는 것이라 하시니라"고 기록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복음을 거부하는 자들 역시 많이 있을 것이라고 미리 알려주시면서 그런 자들에게는 두 가지 사실을 확실히 선언해 주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는 "발에 묻은 먼지를 떨어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 지역에 여행을 하고 자기 나라 땅으로 돌아올 때 그 신발의 먼지를 털어버리고 들어오곤 했습니다.
불신자인 이방인들에 비해서 이스라엘 자손은 택함 받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는 행위였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런 행위를 비단 이방 지역 뿐 아니라, 바로 이스라엘 백성의 동네들 안에서도 행하도록 명하신 이유는, 이제는 이방인이 아니라 이스라엘 자손이라 하더라도 그 주님의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할 사람이 되는 것을 선포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즉 전도자가 전하는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바로 자신이 하나님께서 구원하시는 택자의 반열에 들어가기를 거부하는 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 자들에게 둘째로 선언해 줄 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을 알게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그처럼 복음 거부한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심판이 가까이 왔다'는 의미입니다.
왜냐하면 전도자의 복음을 거부하는 것은 바로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거부하는 것과 꼭 같은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거부는 예수님께서도 "고라신, 벳새다, 가버나움" 같은 갈릴리의 동네들, 예수님께서는 특히 많은 기적을 행하시고 말씀을 전하셨던 곳에서도 흔히 당하셨던 일이었습니다.
그런 동네는 예수님 보시기에는, 그 당시 돈벌이 하느라고 정신없고 우상 신이 가득했던 "두로와 시돈"보다도 오히려 더 악했던 것입니다.
그런 거부는 곧 자신이 "하늘에까지 높아지는," 즉 하나님 앞에서 최악의 교만이었으며 그런 죄의 결과는 오직 "음부에까지 낮아지는" 지옥 영벌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파송하신 전도자의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친히 사역하시고 말씀 전해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거부한 것과 조금도 다름없는, 똑 같은 죄이며 똑 같은 심판을 자청하는 것이라고 선언하시는 말씀입니다.
"너희 말을 듣는 자는 곧 내 말을 듣는 것이요 너희를 저버리는 자는 곧 나를 저버리는 것이요"라는 논리가 그렇게 해서 성립되는 것이며, 더 무서운 것은 "나를 저버리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저버리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죄용서와 구원의 주님으로 오신 구세주 예수님을 저버리는 것은 바로 성부 하나님의 무서운 영벌 심판에 빠져 들어가는 것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는데, 그 출발점이 바로 전도자를 '영접지 아니하는' 데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복음 전도자들을 개인적으로 숭상하라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하지만 영생과 영벌을 가름 짓는 이 복음을 선포하는 권위만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전도자들에게 친히 부여해 주신 것인 줄을 깨닫고 실로 높이 받들고 귀중히 여겨야 한다는 뜻입니다.
간단히 말해서 복음 전도자들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구원을 위하여 친히 임명하시고 파송하신 전권대사 그 자체인 것입니다.

대사의 권위는 그가 대통령의 위임장을 받고 임명되었으며 대통령의 뜻을 대신 전달해주기 때문에 생깁니다.
바로 그런 까닭에 대사는 적어도 그 파송 받는 국가를 대하여서는 자기 모국의 대통령과 같은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보낸 선교사들은 경향교회의 대사가 아니라 바로 예수 그리스도 왕국의 대사들입니다.
이들은 교단 총회에서 파송한 선교사가 아니라 바로 예수님께서 파송하신 직속대사요 특별대사요 전권대사인 것입니다.

어떤 나라에서 불법체류자들을 본국으로 송환하는 것은 별 하자가 없지만, 만약 다른 나라에서 파송된 대사를 본국으로 추방한다면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됩니다.
그것은 바로 양국이 서로 적대국가가 되는 것을 선포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것입니다.
현재 파송되어 있는 선교사님들 중에서는 법적 체류 문제로 어려움을 겪는 분들이 많고 추방의 위험은 항상 도사리고 있는 중에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 왕국에서 파송된 대사라면 이 사단의 졸개 노릇하는 정권이나 우상숭배 국가로부터는 자연히 당할 수밖에 없는 일입니다.

우리가 파송하는 선교사님들은 그 나라에 가서 무슨 문화사업이나 구제활동 따위를 선교라는 미명으로 하는 분들이 결코 아닙니다.
이분들은 지옥에서 천당으로 옮겨질 생명을 찾아내고 그 중생받은 성도들이 모인 교회를 세우는 것만을 목적으로 뛰고 있는, 바로 예수님께서 파송하시면서 주신 그 사명만을 수행하는, 진짜 복음의 대사들인 줄을 깨닫고, 오대양 육대주에 파송되어 있는 우리 선교사님들 한 분 한 분을 다 지극히 존경하고 귀히 여기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님 여러분, 1차 걸프전에서 승리하고 개선했던 다국적군 총사령관 노먼 슈워츠코프 장군이 미 국회에서 연설하던 중에 "정말이지 여러분(미국민)들은 전쟁 기간 내내 우리 장병들의 사기를 단 한 순간도 떨어뜨리지 않았습니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그 순간 그는 목이 메었고 미 국회의원들은 오랫동안 기립박수를 했었습니다.
저는 노먼 슈워츠코프 장군이, 옛날 베트남 전쟁 때 일부 미국민들이 파병미군들을 지지하지 아니하고 반전운동을 함으로써 자기 선배 장군들과 병사들의 사기를 극도로 떨어뜨렸던 일을 바로 그 순간에 상기하고 있었지 않았나 하는 짐작을 했었습니다.
전선에 나가있는 군인들에게는 자국민의 변함없는 지지야말로 유일한 격려요 힘이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파송한 선교사님들의 선교지에서도 매일 일어나고 있는 일입니다.
경향교회의 선교사 지원은 이 교회가 아직 지극히 미약할 때에도, IMF라는 경제대란을 통과하던 시기에도, 이 강서성전을 짓던 때에도, 그 어떤 어려운 때에도 조금도 흔들리거나 약해지지 않았습니다.
바로 그 천군만마의 지원을 받는 듯한 든든함이 오늘도 이 오십 여명의 선교사님들의 사기를 충천하게 하며 백전백승의 승전보를 연이어서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마지막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면서 '달리 세우신 칠십 인'들에게 미리 연습시키셨던 일, 승천하시면서 사도들과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완전히 전권을 위임하시면서 맡기셨던 일은, 이처럼 오늘 우리 경향교회를 통하여서 고스란히 계승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분들뿐 아니라, '앞으로 파송될 전도자'들이 끊이지 않도록 이 '별들의 모임'을 위하여 더욱 기도해야 합니다.
이 전도자들이 '사방에 이리들로 우겨쌈'을 당하고 고군분투하는 가운데서도 용기와 힘을 잃지 않도록 변함없는 물질의 후원을 '경향선교회'를 위하여 계속 보내어주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땅끝까지 전파되기 위하여 가장 높이 드시고 제일 멀리 보내신 '전권대사'임을 기억하면서 한 분 한 분 빠짐없이 기억하고 사랑하며 존경하는 마음과 자세를 늘 발휘할 줄 알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오늘날 파송하신 '칠십 인'들과 앞으로 또 '보내어주실 추수일군'들을 이처럼 '영접하고 대접함'으로써 이미 더욱 가까이 다가온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을 만방과 열국에 널리 전파하는 사명에 함께 쓰이는, 충성된 '보내는 전도자'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석기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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