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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두려움에서 믿음으로 (창 12:10-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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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셨을 때 그는 즉각적으로 응답하여 우르를 떠났다. 그것은 그가 편안한 자리를 떠났다는 것을 의미하며 안주하는 자리를 버렸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같이 우리의 모든 인생도 하나님이 부르실 때에 즉각적인 순종을 하여야 한다. 이러한 아브라함의 인생에서도 어두운 면이 보이고 있다. 담대함을 가지고 우르를 떠났던 아브라함에게 큰 어려움이 임하고 있다. 이것이 모순처럼 보이는가?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구원하신 후에 그의 도구로 우리를 사용하시기 원하신다. 우리가 세상 가운데서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기를 원하신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이 사용하시기 합당한 자가 되기 위해서 성숙함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리고 성숙을 위해서는 연단과 단련이 필요하고 전쟁과 풀무 속에서도 단련이 필요하다. 하나님은 예외 없이 우리 모두가 성숙으로 나아가기를 원하시고 우리의 영성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기를 원하신다. 빌리 그래함 목사는 많은 연단을 거친 후에 귀하게 사용받은 종으로 유명하다. 그는 ‘산 정상에는 좋은 경치가 있지만 진짜 좋은 열매는 계곡 속에서 발견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것이 하나님의 연단의 원리이고 그 분의 방법이다. 피아노 안에는 240개의 쇠줄이 있다. 이들은 40,000파운드나 되는 엄청난 힘으로 당겨지고 있다. 참으로 대단한 긴장이며 이 긴장을 이용해서 좋은 소리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악기이다. 우리도 긴장과 압박이 필요하다. 이것은 연단을 의미하는데 연단을 통해서 성숙을 이루고 마침내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될 수 있다. 세계 지도를 펼치고 하나님의 도구로서 해야 할 일을 생각해보자. 이 일을 위해서 우리는 우리의 믿음이 계속 성장하고 성숙하도록 해야 한다. 영적각성집회가 열리는 것도 이것을 위함이다. 영적각성집회를 위해서 계속 기도해주기 바란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사용될 수 있도록 믿음의 그릇을 키우기를 바란다.

오늘 말씀 중에서 믿음의 성숙을 기하는 한 가지 모습을 볼 수 있다. 그것은 두려움에서 믿음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성숙함은 두려움의 떨림 속에서도 믿음으로의 전환(Transformation)을 의미한다. 중립적인 자리에서 믿음을 보이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아브라함은 우르에서 떠나는 담대한 결단을 하였지만 이제 두려움으로 실족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자에게도 하나님은 두려움으로부터 믿음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하고 있다.이것이 하나님의 계획이며 뜻이다. 디모데후서1장7절을 보자.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것은 두려움이 아니다.’ 우리는 건강의 문제, 경제의 문제, 신분의 문제, 그리고 관계의 문제등 숱한 문제들로 인해서 두려움에 휩싸일 수 있다. 하지만 하나님은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을 주시려고 하는 것이다. 우리는 오늘 초라한 아브라함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는 가나안에 기근이 생겼다고해서 금방 두려운 마음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가나안을 버리고 애굽으로 내려갔다. 그의 영성이 두려움으로 인해서 무너져 버렸기 때문이다. 기근 속에서 그는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지 못했고 그의 비전도 볼 수 없었으며 그의 음성도 들을 수 없었다. 나중에는 그의 아내의 아름다움으로 인해서 자신이 해를 받게 될 수 있다는 엉뚱한 생각에 참으로 비겁한 행동을 하게 된다. 이 꼴이 뭔가? 모든 것이 망가지고 말았다. 그는 마침내 아내를 잃게 되고 홀아비로 전락하고 말았다. 믿음으로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그의 음성을 듣지 못하니 이같이 초라하게 되어 버렸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믿음의 조상으로 세우시기 위해서 그를 회복시키기 시작하신다. 이같이 극과 극의 모습은 엘리야에게서 볼 수 있다. 그는 정말로 강력한 능력의 선지자였다. 그는 450명의 이방선지자들 앞에서도 끄떡없었고 그들의 멸망시켰지만 그 직후, 그는 한 여자(이세벨)의 공갈이 두려워 도망가는 초라한 신세가 되고 말았다. 하나님의 사람들도 두려움을 느끼면 이렇게 되고 만다. 큰 믿음으로 우르를 떠난 아브라함이 곧바로 두려움에 휩싸이는 것을 보라. 우리는 어떠한가? 우리에게 두려움으로 다가오는 것은 어떤 것들인가? 건강 문제, 부부 관계, 자녀 문제, 신분 문제, 경제 문제등의 모든 문제들이 우리에게 두려움을 주는 요소가 된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가운데서도 우리들이 오히려 성숙해지기를 원하고 계신다. 하나님의 소망은 우리들로 하여금 다음 단계로 계속 전진해 나아가게 하기 위함이다. 높은 영성과 성숙한 신앙의 수준까지 인도하시기 위해서이다. 아브라함은 두려운 환경 속에서 어떻게 회복되고 있는가? 그는 벧엘로 올라갔다. 그 곳은 그가 처음으로 단을 쌓고 하나님을 찾았던 곳이었고 그는 그것을 기억하였다. 그는 회복을 위해서 그 곳을 다시 찾았고 처음의 모습처럼 단을 쌓고 하나님을 부른 것이다. 우리도 우리의 회복을 위해서 ‘우리의 벧엘’로 올라가야 한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1)가장 중요한 것 한가지를 다시 붙잡는 것을 의미한다.

아브라함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단을 쌓고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것이었다. 물론 우르를 떠나는 것도 중요한 것이지만 하나님을 마주 대하는 것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 우리가 하는 사역과 봉사는 대단히 중요하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욱 중요한 것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마리아와 마르다의 경우가 그러하다. 마리아는 마르다같이 일을 하며, 들려오는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일 수 있었다. 하지만 마리아는 예수님과 그의 말씀에 집중하고 싶었고 모든 것을 다 뒤로 놓고 싶었던 것이다. 12절후반을 보면 아브라함은 이렇게 중요한 하나님과 관계를 소홀히 했던 것처럼 보인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다윗을 보자. 그는 왕이었고  선지자였다. 또한 그는 찬양과 예배의 인도자였다. 그는 말씀을 선포하는 위치에 있었고 그의 백성들을 잘 인도하여야 하는 책임이 있었다. 그의 사역은 참으로 바쁘고 위대한 사역이었다. 그러나 시편27장4절에서 그가 노래하는 것을 들어보자. ‘내가 여호와께 청하였던 한 가지 일 곧 그것을 구하리니곧 나로 내 생전에 여호와의 집에 거하여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앙망하며 그 전에서 사모하게 하실 것이라’ 그는 자신에게 정말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집에 거하며 그를 찬양하고 사랑하고 예배하는 것이라고 고백하고 있다. 벧엘로 올라간 아브라함에게 중요한 것은 벧엘에서 여호와를 예배하는 것이었다. 모세는 그의 백성과 함께 가지 않겠다고 말씀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당신께서 같이 가시지 않으시면 아무 의미가 없다’고 애원하고 있다.다윗의 마음을 좀 더 자세히 읽어보기 위해서 시편27장1절부터 6절까지를 읽어보기 바란다. 그가 찾는 가장 중요한 한 가지…하나님의 뜻과 소망이 내 심령에 가득 채워지기를 바라는 것, 그것 한 가지가 가장 중요한 것이다. 그 가운데서 우리는 모든 두려움을 다 극복할 수 있다. 그 한 가지를 찾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란다.

(2)옳은 펄스펙티브(Perspective)를 얻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롯과 이브라함이 헤어지는 장면을 생각해보자. 아브라함이 조카 롯에게 헤어지기를 제안할 당시는 모든 것이 풍부할 때였다. 여유가 생기게 되면서 그들의 시각과 보는 눈과 Perspective가 모두 바뀌었던 것이다. 그에게는 인생의 성공의 기준이 풍부한 물질과 건강과 평안한 가정에 있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제 보니 하나님을 향해서 올라가며 그를 향한 가슴이 뛰고 그를 향하여 비전이 생기는 것이야말로 성공의 비결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는 사건 한 가지 때문에 내 심장이 뛰고 내 심장의 크기가 커질 수 있다면 그것이 곧 성공이다. 롯에게 그의 재산을 나누어 주어도 문제될 것 없었고, 그의 유일한 관심이 하나님을 향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이 그의 성공이 되었다. 그것은 그의 Perspective의 전환이었다. 우리들의 가슴이 하나님을 향하여 뛰고 있다면 그것은 곧 성공을 뜻한다. 땅 위에 있는 뭔가를 획득하려하고 뭔가를 추구하려한다면 이제는 그것들을 향하여 ‘이제부터는 아니다’라고 선언할 수 있어야 한다. 내 몸과 정신이 쇠약해지더라도 나의 심령이 부유해진다면 그것은 분명한 영적 성공이다. 예레미야17장7절과 8절을 보자. ‘그러나 무릇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 그는 물가에 심기운 나무가 그 뿌리를 강변에 뻗치고 더위가 올지라도 두려워 아니하며 그 잎이 청청하며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고 결실이 그치지 아니함 같으리라’ 아무리 힘든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의 은혜의 강물은 마르지 않는다. 그리므로 우리는 그 안에서 요동치 않고 믿음의 과실을 맺는 자가 될 수 있다.

(3)우리 가운데 진치고 계신 하나님을 발견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브라함은 담대하게 우르를 떠난 후 벧엘에서 단을 쌓았다. 하지만 애굽으로부터 나와서 벧엘로 올라갈 때에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그런데 하나님의 모습을 보자. 하나님은 어떠한 상황속에서도 전혀 변하지 않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늘 그와 함께 계셨다. 요셉도 이 사실을 깨닫고 나니 노예 생활과 감옥 생활에서도 전혀 요동치 않을 수 있었다. 이스라엘 민족들은 사막에서 tent를 치고 살았다. 그러나 그곳에는 또 하나의 거룩한 tent가 있었다. 그것은 그들과 항상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임재였다. 신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우리는 지금까지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며 살 수 있게 되었다. 곁에 계신 하나님을 느끼며 우리도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다. 오순절 다락방 때에 하나님의 영이 우리 안으로 임하셨고 지금의 우리들도 우리가 성전됨을 선포할 수 있게 되었다. 우리를 축복하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마음을 열기만 한다면 하나님의 뜻을 깨달을 수 있고 하나님의 깊은 영성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시대를 Survival하는 인생들이 아니라 말씀을 듣고 비전을 보며 하나님의 역사를 미리 바라다 보는 존귀한 인생들이다. 계시록21장3절과 4절을 보자.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그의 장막을 우리 안에 세우시고 그곳에 진을 치신 하나님, 내 곁에 계신 하나님, 우리 가운데 계신 하나님을 봄으로써 우리는 회복되고 일어나며 강해져서 하나님의 사람들이 될 수 있다. 어떠한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추상적인 하나님이 아니라 살아 계셔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 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것이다. 어린 시절에 기억되는 나의 아버지는 참으로 큰 사람으로 보였다. 지금 보면 아버지는 그리 크신 체격이 아니었지만 어린 시절에 아버지는 큰 분이셨다. 그렇다면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은 얼마나 큰 분일까? 써커스에서 공중 곡예를 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몸을 공중으로 던지난 후부터는 Partner에게 자신을 맡긴다고 한다. 그리고 힘을 빼고 가만히 있기만 하면 나머지는 Partner가 알아서 한다는 것이다. 인간들도 그리하는데 우리의 하늘 아버지가 우리를 잡아주시지 않겠는가? 이 자리에서 두 손을 들고 하나님 앞으로 걸어 나아가자.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고 그 분의 마음을 구하며 그 분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분의 뜻과 계획 앞에서 우리의 마음과 심장을 크게 하는 것이다. 우리 모두 어려움 속에서도 성숙해지고 오히려 큰 믿음으로 나아가는 하나님의 큰 꿈들이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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