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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죄에서 자유를 얻게함 (롬 7:7-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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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살아가는 동안 일을 하는 과정에서나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갈등을 겪을 때가 있습니다. 성격이 나빠서만이 아니라 때로는 성격이 좋은 사람도 심지어는 믿음이 좋은 사람도 갈등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법없이 살만한 점잖은 사람도 갈등을 가질 때가 있고, 때로는 믿음의 강력한 리더쉽을 가진 사람도 갈등을 가질 수가 있습니다.

엘리야의 경우를 보면, 그가 갈멜산에서 바알과 아세라 제사장들과의 엄청난 영적 전쟁의 현장에서 수백명의 우상숭배자들과 당당하게 싸워 승리하는 모습을 기억하지만, 한편으론 이세벨 왕후의 협박과 도전에 무기력하게 무너지는 모습을 동시에 보게 됩니다. 갈멜산상에서의 불로 응답받는 역사의 현장에서의 엘리야의 모습과 군사들의 추격을 받아 광야로 도망을 치다가 지쳐 로뎀나무 아래에서 숨을 헐떡거리는 엘리야의 모습은 그 이미지가 정 반대입니다.

"하나님, 이제 족하오니 내 생명을 거두어 주옵소서" 이젠 지쳤다는 것이지요. 사탄 마귀들과 싸우는 일도 진절머리가 난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그만하면 좋겠습니다. 이제는 나를 좀 불러가 주세요...." 그렇게 하나님께 원망하면서 갈등하는 엘리야의 모습이 우리에겐 이상하게 느껴질 뿐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있어서 엘리야는 그저 완벽한 불의 종, 능력의 종으로 인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에게도 까마귀가 필요할 때가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쳐 쓰러져 있는 그에게 물과 빵을 공급하신 줄로 믿습니다. 이 장면을 흔히 "까마귀 역사"라는 우리는 부릅니다. 우리가 기대하기 어려운 어떤 어려운 상황에서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통하여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우리는 그렇게 부르곤 합니다.

믿음의 사람들 중에 마틴 루터와 같은 종교 개혁자들에게도 갈등과 좌절이 있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원래 카톨릭대학의 교수이면서 신부였습니다. 하지만 중세 이후 썩을 대로 썩은 종교로서의 카톨릭으로는 안되겠다고 생각하고 결단을 내린것이 종교개혁의 깃발이었습니다. 자신이 가르치던 학교 정문에 95개 조항의 개혁항목을 써붙인 그는 길고도 외로운 싸움을 시작해야 했습니다.

사실 지금도 카톨릭의 파워는 크다고 합니다. 우리 개신교 같으면 각 교단별로 행동을 하기 때문에 아무리 몇 백만 성도가 있는 교단이라고 해도 한계가 있습니다만, 카톨릭은 종교단체일 뿐만 아니라 정치적인 단체이기에 시민들이 피부로 느끼는 힘은 훨씬 더 커보이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 힘은 입니다. 교황청에서 모든 나라에 대사를 파송합니다. 카톨릭의 문제를 검찰이 손을 대려고 하면 그것은 곧 외교문제와 결부되어 결국 흐지부지될 수 밖에 없습니다. 음성 꽃동네 사건이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지난 주 여러분들은 한 방송국의 특별 프로그램이 취급한 내용에 대하여 큰 상처를 받으셨을 것입니다. 필리핀에서 사역하던 한 장로교단 선교사가 현지인 소녀를 성추행한 일로 인하여 큰 파눈이 일었습니다. 이일은 분명 잘못된 것입니다. 결코 있어서는 안 될 일이었기에 그 여파는 매우 컸습니다. 하지만 방송은 이러한 문제를 마녀사냥식으로 몰고가는 행태를 보였습니다. 쉽게 이야기해서 기독교를 매도하는 분위기였습니다. 필리핀에 가 있는 선교사는 다 수준 이하의 사람들이고 그들에게 선교비를 보내는 한국의 교회는 의식없는 교회들로 치부되는 분위기였지요.

그 많은 선교비를 보내면서 감독하나 제대로 하질 않는다는 것이지요. 생각해 보세요. 넉넉지 않은 선교비 보내면서 그것 어디다 썼는지 영수증 첨부해서 보고하라고 할 수 있습니까? 매달 선교보고 하나 쓰기도 벅차서 분기별로 하는 곳이 대부분인데 말입니다. 보냈으면 신뢰해야지요. 때때로 그릇된 행동을 하다가 주님의 영광을 가리는 이들이 간혹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전부를 매도해서는 결코 안될 일입니다.

종교개혁의 기치를 내걸었던 마틴 루터 역시 카놋사의 굴욕이 가능했던 당시 카톨릭의 위세에 짓눌려 개혁운동에 한계를 느꼈습니다. 종교개혁에 대하여 괜히 내가 나섰나 보다... 그냥 그렇게 가는 건데..... 아무리 호소해도, 아무리 정의를 외쳐보아도 끄떡않는 강력한 권력 앞에 결국 좌절하며 낙담할 수 밖에 없엇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내가 상복을 입고 나타났어요. 우리 집안에 누가 돌아가셨느냐고 물으니 우리 집안에서 돌아가신 분은 없지만, 대단히 중요한 분이 돌아가셧다는 것입니다. 누구냐고 하니 바로 당신이 믿던 하나님께서 돌아가셨다는 것입니다.

지금 무슨 잠꼬대 같은 소리를 하고 있는거냐고 호통을 쳤습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인데.. 지금도 살아계셔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이신데... 그 하나님이 돌아가다니 그렇게 불경스러운 말을 할 수가 있느냐"고 하자 루터의 아내가 대답합니다. "그렇지요? 당신이 믿는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시지요? " 그런데 당신은 지금 왜 낙담하고 있습니까? 아내의 권면을 듣는 순간 루터는 내면에서 불같은 힘이 샘솟는 것을 느낀 줄로 믿습니다. 성도 여러분, 부부가 만나도 이 정도는 만나야 하지않겠습니까? 그런 부인을 만난 남편은 얼마나 좋겠습니까?

SOLA FIDE (솔라 피데) 오직 믿음으로! 마틴 루터가 먼저 새로워졌습니다. 믿음의 용기를 얻은 그는 전능하신 하나님이 오늘도 자신과 함께 하심하심을 믿으며 끝까지 싸워 종교개혁의 사명을 완수한 줄로 믿습니다. 21절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바울 사도가 이제 한 법을 깨달았답니다. 그 전에는 몰랐었는데 이제는 알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내 마음에 하나님의 법만 있는 줄 알았는데, 또 다른 법. 곧 죄와 사망의 법이 득세할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바울사도가 깨달은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내 안에 하나님의 법만 있는 줄 알았는데, 은혜로운 법만 있는 줄 알았는데 놀랍게도 죄와 사망의 법이 또 자리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 법이 내 안에서 좌지우지 하면서 은혜의 법은 쑥 들어가 버렸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법에서 나를 구원하랴..." 하지만 성도 여러분, 이 마지막 24절을 외형적으로 보면 굉장히 신앙이 없거나 믿음이 없는 사람이 하는 탄식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뜨거운 여름철이 다가오고 있습니다만, 이 계절에 가장 많은 사람들이 찾는 기호음식이 냉면일 것입니다. 더위에 지쳐있을 시간에 얼음 가득한 육수가 넘치는 물냉면을 젓가락으로 면발을 둘둘 감아 감칠맛 나게 먹고나서 들이키는 육수맛은 일품이지요. 그런데 알고보면 사실 그 육수 속에는 대장균이 얼마나 많이 들어있는지 몰라요. 하지만 건강에 이상이 없는 이유는 내 몸안에 저항력이 있어 거뜬히 이겨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내 몸이 피곤하고 쇠약해 졌을 때에는, 잘못된 음식 먹기만 하면 그냥 설사가 나고, 몸살이 오면서 감당하지 못하여 절절매지요. 그만큼 내 몸이 약해져있다는 증거입니다. 일상적으로 우리가 맛있게 먹는 김치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늘 기도하고 있고, 말씀을 사모하고 있고, 성령에 충만해 있을 땐 다른 사람들의 말에나 일로 인하여 시험들거나 상처 받지 않습니다.

하지만 기도하지 못하고, 말씀안에 거하지 못할 때에는 왜 그렇게 시험에 자주 드는지 모릅니다. 아무 것도 아닌 말인데 마음에 상처가 되고, 큰 일도 아닌데 시험이 되어 토라지고 삐치고 그러거든요. 왜 그렇습니다. 그만큼 영적으로 약해져 있다는 증거이지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러므로 늘 주안에서 기도와 간구로 충만해 있기를 축원합니다. 건강은 건강할 때 지켜야 한다는 말은 우리 신앙의 세계에서도 잘 적용될 수 있는 교훈입니다.

바울사도는 오늘 고백합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영적인 고민이 바울사도에게 생겼습니다. 영적인 질문이 바울사도에게 생겼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탄식이 있다고 하는 것은 믿음이 있는 증거인 줄 믿습니다. 주님을 만난 경험이 있고, 하나님의 영광을 맛 본 증거를 가진 사람들은 때때로 연약해 지고 부족해 질 때 이런 탄식을 합니다. 그것은 그가 믿음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있다는 증거입니다.

성도 여러분, 주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영적인 고민을 하는 것을 보셨습니까? 이 시간 예배를 참석하지 않았다고 "주일을 성수해야 하는데....." 그러면서 고민하는 것 보셨나요? 주일날 등산가고 낚시 가면서 고민하는 것 보셨습니까? 아무런 갈등 없잖아요. 왜입니까? 주님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구원의 감격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영접하여 세례를 받고 집사나 권사로서의 사명을 받은 이들이 혹 주일에 가게 문을 열고 장사를 하고 있다면, 그는 필시 이렇게 고민하고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이러면 안 되는데..." 무슨 이야기입니까? 아직 그의 신앙이 살아있다는 증거 아닙니까? 희망이 있다는 증거입니다.

1738년 5월 24일, 이 날은 요한 웨슬리 목사님이 고민에서 해방된 날입니다. 목사로서의 사역을 계속해야 하나... 미국 선교사로 갔으나 실패하고 돌아온 이후, 더욱 좌절감으로 가득차 있던 시기였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성령의 충만함이 없이 직분으로, 습관으로, 전통으로 주님의 일을 하려니까 너무 힘이 드는 거예요. 성도 여러분들도 어느 정도는 인간적 열심으로도 주님의 일 할 수 있어요. 그러나 그것은 한계가 있어요. 계속 가다보면 짜증만 나고 화가 나고 힘이 들지요.

성경은 말씀합니다. 누가 무슨 일을 하려거든 주님께서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듯 하라고 말입니다. 할렐루야! 성도 여러분들이 주님의 일을 할 때에 주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요한 웨슬레 목사님이 탈진됐어요. 더 이상 목사하고 싶지않고, 더 이상 설교하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던 바로 그날 밤, 올더스게이트 거리를 걸어가고 있는데 찬송소리가 들었습니다. 1738년 5월 24일, 평신도들이 모인 한 작은 밤 집회 자리에 앉아 있는데그들이 로마서 서문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바로 로마서 3장 28절의 말씀이기도 합니다. "사람이 의롭다함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오직 믿음으로써 되는 줄 우리가 아노라....."그 말씀을 듣는 순간 요한 웨슬리 목사님의 가슴 속에 불덩어리가 떨어졌어요, 아, 이거구나... 지금까지 나는 철저하게 율법의 행위로 의한 믿음생활을 했구나. 그렇습니다. 거기에는 힘도 없고 에너지도 없고 열정도 없었습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씀은 그의 마음 속에 새로운 희망으로 다가왔습니다. 웨슬리가 영적으로 고민하던 그 해답을 찾았습니다. 성령의 충만함이 그에게 임했고 그의 마음 속에는 새로운 에너지가 폭발적으로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은혜 받고나면 성령충만 받고나면 제일 먼저 달라지는 것이 무엇인줄 아십니까? 바로 언어입니다. 내가 성령을 받았다고 하는 것을 스스로 얘기 안하셔도 언어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요한 웨슬리가 성령받고 나서 외친 말이 뭐예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삽니다." 할렐루야 !.

웨슬리는 그동안 수많은 설교를 했지만, 늘 율법으로 말미암아 얻는 주제들에 관한 것이었는데, 성령충만 받고 나서 설교의 제목부터 달라졌어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교회 주보를 보면 그 교회 목사님의 설교의 영성을 엿볼 수있다는 말이 실감이 나지요. 설교 제목이 이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세계는 나의 교구라.." 처음에는 자기 한 몸도 감당키가 어려워서 쩔쩔매던 웨슬리 목사님이 이제는 영국 4천만, 더 나아가 세계를 품에 안는 하나님의 사람이 된 줄로 믿습니다.

1738년 5월 24일 오후 8시 45분 웨슬리의 마음 속에 주셨던 성령의 충만함, 바로 268년 전 웨슬리에게 주셨던 그 성령의 뜨거움이 오늘 여러분에게 임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죄에서 자유를 얻게 하는 것은 인간의 노력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로 믿습니다. 인간적 좌절과 갈등을 딛고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는 믿음의 결단이 중요합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는 바울 사도의 고백처럼, 그 고백의 바탕위에 종교개혁을 완수했던 마틴 루터의 용기를 거울 삼아 주의 일 감당하는 평안의 성도들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자비하신 하나님, 오늘도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주의 능력과 권세로 우리와 함께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때때로 일로 갈등하고, 때로는 사람으로 갈등하는 연약한 우리입니다. 그 일로 인하여 낙망하고 좌절하고 어려움을 겪지만, 오늘 웨슬리에게 주셨던 그 성령의 충만함, 마틴 루터에게 주셨던 그 확신의 능력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그리스도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황요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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