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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지성의 눈을 밝히시는 이유 (엡 1:1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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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인체 중에서 가장 예민하고 민감한 부분 중의 하나가 바로 ‘눈’입니다. 눈은 안구와 시신경으로 이루어져 있고, 안구에 딸린 안검, 결막, 누기, 안근이라는 것이 있어서, 사람의 눈으로 볼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다고 합니다. 안구는 뒤쪽으로 시신경과 연결되며, 보통 구상체(球狀體)로서 성인의 평균 지름은 24 mm라고 합니다. 제가 안과 전문의가 아니기 때문에, 대충 이정도만 눈에 대해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한가지 비교만 하겠습니다. 요즘 디지털 카메라가 유행하고 있습니다. 디지털 카메라의 성능을 가늠할 때, 사용되는 단위가 있습니다. 화소라는 말을 들어 보셨을 것입니다(200만, 300만, 400만 등등 이러한 단위가 높을 수록 성능이 좋다고 합니다). 화소(pixel)는 빛의 신호를 하나의 점으로 표현 가능한 최소단위를 말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망막에는 원추세포와 간상세포가 있어서 외부에서 들어오는 빛을 이미지 신호로 바꿔줍니다. 디지탈 카메라는 CDE라는 반도체가 이러한 역활을 합니다. 원추세포는 밝은곳에서 물체를 인식하는 세포이고, 간상세포는 어두운곳에서 물체를 인식하는 세포입니다.

사람의 경우, 1개의 망막당 약 1억개의 간상세포와 3백만개의 원추세포가 있다고 합니다. 이것은 1억만 화소의 고성능 디지털 카메라를 2대 갖고 있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참으로 대단한 성능의 눈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눈은 참으로 소중하기도 하고, 유용하며, 없어서는 안될 인체의 일부입니다. 그러나 소중한 눈도, 잘 관리하지 않거나, 나이가 들면서 나빠지는 것입니다. 비타민 A가 부족하면 야맹증이란 질병에 걸립니다. 건성안증후군(눈물이 필요 이하로 줄거나 나오지 않았을 때 생기는 눈병), 결막염, 녹내장, 노안(나이 들어 시력이 저하) 등등 눈에도 많은 질병이 있습니다. 눈이 제대로 그 역할을 하지 못하면, 사람은 너무나도 불편합니다. 또한 앞을 보지 못하는 것만큼, 답답하고 어려운 일도 없을 것입니다. 성경은 두 눈으로 볼 수 없는 사람을 가리켜 ‘소경’이라고 말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많은 소경을 고쳐 주셨습니다.

마 9:27-30 [그후 예수께서 그곳을 떠나가실 때, 두 소경이 따라오며 소리질러 말하기를 “다윗의 아들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하더라. 주께서 집에 들어가시니 그 소경들이 그에게 오더라.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내가 이 일을 할 수 있다고 믿느냐?”고 하시니, 그들이 말하기를 “주여, 그러하옵니다.”라고 하더라. 그때 주께서 그들의 눈을 만져 주시며 말씀하시기를 “너희 믿음대로 되라.”고 하시니, 그들의 눈이 뜨이더라.....]

이외에도 많은 소경들의 눈을 고치셨습니다. 육체적인 소경도 불쌍한 사람이지만, 영적 소경은, 불쌍한 정도가 아니라 비참한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분명히 소경의 눈을 고쳐주셨지만, 육신적인 소경보다 더 무서운 것이, 영적인 소경임을 지적하기도 했습니다.

마 15:13-14 [주께서 대답하여 말씀하시기를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께서 심지 않으신 모든 초목은 뽑힐 것이라. 그대로 두라. 그들은 소경이 되어 소경을 인도하는 자들이라.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 다 구덩이에 빠지리라.”고 하시더라.]

자, 육체적인 눈에 이상이 있으면, 안과를 찾아서 의사의 진단을 받고, 고쳐야 합니다.
오늘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우리의 ‘눈’에 대해서 알아 보도록 하겠습니다. 만일 우리의 눈에 이상이 있다면, 주님의 말씀으로 고침을 받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눈’에 대한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경에는 ‘눈’이란 단어가, 600번 이상 기록되어 있습니다. 처음 기록은, 창세기 3:5에 뱀이 이브의 교만을 부추기기 위해 사용하였습니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의 눈이 열리고 너희가 신들과 같이 되어서, 선과 악을 알게 되는 줄을 하나님께서 아심이라”(창 3:5)

성경은 인간의 ‘눈’에 대해서 부정적인 측면을, 더 많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분명히 눈을 주신 분은 주 하나님이십니다. “듣는 귀와 보는 눈까지도 모두 주께서 지으셨느니라.”(잠 20:12). 그럼에도 부정적인 면이 더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눈’을 주신 하나님만을 바라 볼 때, 사람의 눈은, 그 유용함이 빛을 발하지만, 사람의 눈이, 롯처럼 세상을 향해 돌려지고, 고정될 때, 죄나 악을 더 선호하기 때문입니다.
이브가 선과 악의 지식의 나무의 열매에 눈을 고정했을 때, 죄악으로 달려갔듯이, 우리 역시, 우리의 눈이 세상과, 탐욕과, 육신의 자랑으로 고정될 때, 여지없이 죄악으로 달려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눈은 소중하지만, 그 눈이 어디를 향해 있느냐에 따라, 부정적이기도 하고, 긍적적이기도 한 것입니다. 여러분의 눈은, 지금 어디에 고정되어 있습니까?

오늘 본문에는 특히 지성의 눈(the eyes of understanding)이 등장합니다. 지성의 눈이란, 명철의 눈이며, 이해의 눈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눈이 있어야만, 그리스도인은 정상적이고, 올바르며, 현명한 판단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만일 지성의 눈이, 그리스도인에게 결여되어 있다면,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 자신의 판단이 정확한지 알 수 없으며, 결국은 교만의 눈과, 자신의 눈에 옳은 대로만 행동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반드시 하나님께서 지성의 눈을 밝혀 주셔야만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분명히 이 눈을, ‘아버지를 아는 지식 안에서’ 하나님께서 주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지성의 눈을 밝히시고, 공급해 주시는 주인은, 분명히 아버지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이 지성의 눈은, ‘아버지를 아는 지식 안에서’만 공급됨을 주목해야 합니다. 아버지를 아는 지식이란 무엇이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진리의 지식입니다.

딤전 2:4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의 지식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인들이 진리의 지식에 이르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진리의 지식은, 하나님의 말씀을 모르고는, 전혀 알 수 없는 지식입니다. 이 진리의 지식을 통해서만, 아버지를 아는 것이며, 진리를 아는 것입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불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 119:105)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말씀의 빛을 통해, 어두움 속에서 진리를 아는 것이며, 영적 분별력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고는, 진리의 지식을 얻을 수 없으며, 아버지를 아는 지식도 얻을 수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경 말씀만이 하나님을 기록하고 있으며, 증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아버지를 아는 지식 안에서, 주 하나님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십니다. 이 지혜와 계시의 영이, 지성의 눈을 밝히는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지혜의 영과, 계시의 영이 아버지를 아는 지식 안에 있는, 그리스도인의 지성의 눈을 밝혀 주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인의 지성의 눈을 밝혀주는 것입니까?
무엇인가를 알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이 눈이 어두워져 있고, 닫혀 있다면, 안되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지성의 눈을 밝하시기 원하시는 것입니다.
눈을 밝혀주시는 것은, 무엇인가를 보고, 보는 그것으로 무엇인가를 알게하시기 위해서,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밝히시지 않으면, 보지도 못하며, 알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지성의 눈을 밝히시는 이유가 있습니다.

1. 부르심의 소망을 알게 하시려고(18절)

부르심의 소망은, 지성의 눈이 닫혀 있으면 모르는 것입니다.
부르심의 소망이란 단어는, 본문에만 등장하는 단어입니다. 부르심에 소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냥 부르심이 아니라, 소망이 포함되어 있는 부르심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분명한 목적이 있습니다.
먼저, 죄인을 부르신 목적이 있다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영원한 생명은, 죄인에게 소망이 되는 것입니다. 영원히 죽을 수 밖에 없었던 죄인에게, 하나님의 부르심은, 그야말로 유일한 소망입니다. 이 부르심에는 분명한 소망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만약 아무런 소망도 없이, 하나님께서 죄인을 부르셨다면, 죄인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했다고 해서,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죄인에게 소망이 없다는 말은, 곧 지옥의 영원한 형벌을 말하는 것입니다. 지옥을 벗어나지 못하는 부르심은,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의 모든 종교는, 사람을 종교로 부르기는 하지만, 소망을 주지 못하는 것입니다. 소망이 없는 종교는, 저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죄인을 부르셨을 때, 그 부르심에는 분명한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소망을 통해, 한 죄인이 하나님의 아들들로써 입양되고, 영생을 소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죄인이 가질 수 있는 부르심의 소망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을, 하나님의 사역으로 부르십니다. 이 부르심에도 목적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사역에 그리스도인들을 불러 사용하시고, 그냥 빈 손으로 방치하지 않습니다. 반드시 그에 따른 보상을 주십니다. 그것이 부르심의 소망입니다. 주님께서는 아무런 보상도 없는데, 자신의 사역으로 그리스도인들을 부르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심는대로 거두신다는, 분명한 원칙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한 사람에게는, 반드시 그에 따른 보상을 소망으로 제시하시는 것입니다.
일을 시키려고 부른 사람에게, 아무런 대가를 지불하지 않는다면, 누구 그 일을 하겠습니까?

룻기 2:12 [주께서 너의 행한 일을 갚아 주시고 이스라엘의 주 하나님께서 그분의 날개 아래 의뢰하러 온 너에게 온전히 보상해 주시기를 원하노라.]

대하 15:7 [그러므로 너희는 강하게 되고, 너희의 손이 약해지지 않게 하라. 이는 너희의 행위가 보상받을 것임이라.]

그리스도인은 아들로써, 하나님의 사역을 수행하기도 하지만, 보상을 기대하는 종으로써도 하나님의 사역에 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혜의 영과 계시의 영을 통해, 지성의 눈이 열려 있지 않을 때, 이 부르심의 소망이 보이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땅을 위해서만 열심히 살게됩니다. 이 땅의 소망을 위해서, 부르심의 소망은 보이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이 눈이 열려 있지 않게 되면, 그리스도인은 육신적인 눈으로, 단지 육신의 눈에 보이는 일에만 집중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소망을 보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의 부유함과, 재미와, 안락만을 추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자기 눈에 옳은 대로” 행했다는 말씀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눈은 지금 어디에 고정되어 있습니까?

2. 그의 유업의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 하시려고(18절)

이 부분의 처음 언급되어 있는 부분을 먼저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성도들 안에 있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세주로 영접한 사람들은, ‘성도’로 부르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르심에 응답한 사람들입니다. 이러한 사람은 ‘성도’라고 불리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모두 ‘성도’라고 불릴 수 있습니다.
로마 카톨릭이 말하는 ‘성인’은, 실제적인 성인이 아니며, 성도라고 불리울 자격을 갖추지 못했습니다. 물론 로마 카톨릭이, 자신들의 유익을 위해, 그리스도 안의 성도를, 성인으로 만든 사람들도 있지만, 로마 카톨릭의 성인은, 성경이 말씀하시는 성도와는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성도들 안에 있는 유업의 영광의 풍성함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성도들 안에 풍성함이 있음을 분명히 말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이미 모든 것을 풍성하게 우리들 “안에” 가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을 우리 안에 모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생명의 창조주이시며, 축복의 근원이시고, 진리 자체이신 주 하나님을, 그리스도인은 “성도들 안에” 소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받으시는, 모든 유업을 동일하게 받을 수 있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이 사실로 인해, 주 하나님께 찬양을 드립니다.

분명한 한 가지 사실은, 그리스도인은 이미 모든 풍성함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성의 눈이 열려 있지 못하면, 이 사실을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빈곤함 속에 살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바로 앞에, 아니 바로 자신 안에, 모든 풍요함을 소유했음에도, 지성의 눈이 열지지 않아서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불쌍한 상태이겠습니까?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식당의 산해진미가 잘 차려져 있다고 해도, 눈이 보이지 않으면, 그 음식이 어떻게 생겼는지, 또 그것을 어떻게 먹을 것인지 모르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냄새만 맡게 됩니다).
지성의 눈이 열려 있지 못하면, 하나님의 유업의 풍성함을 인지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이 지성의 눈을 밝히시는 분이, 아버지 하나님이심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지성의 눈으로 영적 풍성함을 누리기 원한다면, 아버지를 아는 지식 안에서 찾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공급해 주시는 풍성함을 누리지 못하는 이유는, 눈이 닫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하고,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지성의 눈을 밝혀주시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람은 빈곤함 속에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평안이 없고, 불안하며, 지치고, 한 숨만 가득한 것입니다.
여러분의 눈은 어디에 고정되어 있습니까?

3. 그의 능력의 지극히 위대하심이 어떤 것인가를 알게 하시려고(19절)

하나님께서 얼마나 위대하십니까?
“하늘들을 창조한 주가 이같이 말하노라...나는 주라 아무도 다른 이가 없느니라”(사 45:18)
우리의 유일한 찬양의 대상이시며, 경배와 영광의 대상이 바로 주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오 주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주를 높이고 내가 주의 이름을 찬양하리이다. 이는 주께서 경이로운 일들을 행하셨음이요, 주의 옛 계획들운 신실함과 진리임이니이다.”(사 25:1)
지성의 눈이 열리지 않으면,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알지 못하거나, 잊어 버리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밝히 열어 주신, 지성의 눈으로 보지 못하면, 전능하시고, 위대하신, 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는 이 지성의 눈이 닫혀 있습니다.
그래서 육신의 눈으로,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평가하고, 그 정도만 받아들이려고 합니다.

“영감된 귀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무흠하게 보존되었으면 하는 것은, 우리 모두의 희망 사항이다.”(박창환, 텍스투스 레셉투스의 정체, 성경원문연구, 대한성서공회, 1997.8)

이 말은 하나님의 말씀이 정확무오하게 보존되는 것은, 희망 사항일 뿐이지,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전능하심도, 위대하심도 단지 사람들의 희망 사항일 뿐, 실제적이지 못한 것입니다.
성경변개자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단지 희망사항 정도로만 믿고 있는 것입니다.

시 12:6-7 [주의 말씀들은 순수한 말씀들이라. 흙 도가니에서 단련되어 일곱 번 정화된 은 같도다.
오 주여, 주께서 이 말씀들을 간수하시리니, 주께서 이 세대로부터 영원토록 그것들을 보존하시리이다.]

분명한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사람들과, 단지 희망사항으로 믿는 사람들, 얼마나 많은 차이가 있는 것입니까? 그래서 그들에겐 지성의 눈을 밝히시지 않은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성경을 자기들 멋대로 고치거나, 바꿔도 양심의 가책이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이들은, 하나님을 도와주어야 한다는, 강한 책임감으로 그 일을 열심히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들에게 하나님께서 지성의 눈을 밝혀 주시겠습니까? 아버지를 아는 지식 안에 있지 않은 사람에게는, 지성의 눈이 밝혀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엉뚱한 일들을 하는 것입니다.

종교인들은 부르심의 소망을 알지 못합니다. 유업의 영광의 풍성함도 알지 못합니다. 능력의 지극히 위대하심도 알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지성의 눈이 열려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방언이나 하고, 신유집회에 쫓아 다니는 것입니다. 그리고 젊은이들은 CCM 같은 혼을 자극하는 노래와 춤에 매료되어 있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마지막 교회인, 라오디케아인들의 교회에게, 안약을 사서 바르라고 명령하셨는지를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계 3:18 [내가 너에게 권고하노니 내게서 불로 단련된 금을 사서 부요하게 되고, 흰 옷을 사서 입음으로 너의 벌거벗은 수치를 드러내지 않게 하며, 또 안약을 네 눈에 발라 보게 하라.]

바로 영적인 눈을 밝히지 못하고, 육신의 눈만으로 판단하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과연 우리 자신은, 하나님께서 알게 하시기 위해, 밝히 열어주신 지성의 눈을 가지고 있습니까?
이 지성의 눈을 통해 볼 때에만, 하나님의 부르심의 소망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지성의 눈을 통해 볼 때에만, 하나님께서 주신 유업의 영광의 풍성함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지성의 눈을 통해 볼 때에만, 하나님의 능력의 지극히 위대하심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것들을 알게 하시기 위해, 지성의 눈을 밝히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버지를 아는 지식 안에 있지 않으면, 이 지성의 눈은 밝혀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읽어야 하는 것이며, 그 말씀을 통해 지혜의 영과 계시의 영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눈은, 지금 어디에 고정되어 있습니까?

만일 그리스도인이 성경을 읽지 않게 되면, 이 지성의 눈은 닫히게 됩니다. 지성의 눈이 닫히면,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인지, 유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인지, 하나님의 능력의 위대하심이 무엇인지 모르게 되는 것이며, 영적 눈이 닫히게 되면, 영적 소경으로써,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도 말씀과 멀어지고, 기도에 전념하지 않으면, 순식간에 영적 소경이 되는 것을 경험해 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자신이 본다는 교만과, 착각 속에 빠질 때문입니다.
순간적으로 보이지 않으면, 또한 이 지성의 눈이 닫혀서 영적 안목이 흐려지면, 즉시 주님 앞에 구하면 됩니다. 치료해 달라고 간구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 구하지 않고, 자신은 본다고 계속 주장하기 때문에, 문제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요 9:41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만일 너희가 소경이라면 죄가 없을 것이나, 이제 너희가 말하기를 ‘우리는 본다.’고 하므로, 너희 죄가 남아 있느니라.”고 하시니라.]

여러분은 지금, 주님께서 무엇을 알게 하시기 위해, 지성의 눈을 밝히셨는지 아셨을 것입니다. 분명한 목적을 가지신 주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지성의 눈을 밝히시기 원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부르심의 소망을 알기 원하시고, 유업의 영광의 풍성함을 알기 원하십니다. 또한 그의 능력의 지극히 위대하심을 알기 원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진리의 지식 안에 있지 않으면, 지혜의 영도 계시의 영도 주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공급해 주시지 않으면, 우리의 지성의 눈은 열리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그리스도인들이 해야 할 일은 분명합니다. 진리의 지식을 알기 공부하시기 바랍니다.
지금 여러분의 눈은 어디에 고정되어 있습니까?
저는, 여러분의 눈이 하나님의 말씀에서 떠나지 않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잠 3:21-26을 읽고 마치겠습니다.
[내 아들아, 건전한 지혜와 분별력을 지켜, 그것들이 네 눈에서 떠나지 않게 하라. 그것들이 네 혼에 생명이 되며, 네 목에 은혜가 되리니, 그리하면 네가 네 길에서 안전하게 행하며, 네 발이 걸려 넘어지지 아니할 것이요, 네가 누울 때에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정녕, 네가 누울 것이요, 네 잠은 달리로다. 너는 갑작스런 두려움이나, 악인의 멸망이 닥칠 때, 두려워하지 말지니, 이는 주께서 너의 신뢰가 되시어, 네 발이 넘어지지 않게 지켜 주실 것임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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