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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스승주일] 선생의 길 (히 5: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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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시골의 총각 선생님이 출근길에 시냇물을 건너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징검다리를 잘못 밟아 신발과 바지가 물에 흠뻑 젖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때마침 서울에서 올라오신 어머니께서 집에 머물고 계셨습니다. 그가 어머니에게 되돌아온 이유를 말씀드리자 어머니가 물었습니다.
“네가 밟았던 잘못 놓인 돌은 바로 놓았느냐?”
“미처 그 생각은 하지 못했습니다”
“그런 식으로 해서 무슨 선생이 되겠다고 그러느냐? 얼른 가서 돌을 바로 놓고 오너라. 그리고 옷을 갈아입도록 해라!”
어머니의 말씀이 조금 야속하게 들리기는 했지만 백 번 생각해도 옳은 말씀이었습니다. 그는 얼른 가서 잘못 놓인 돌을 바로 놓고 돌아왔습니다.
이후 그는 무슨 일을 하든지 늘 돌을 바로 놓는 마음으로 임했습니다. 그 결과 그는 모든 사람들이 존경하는 훌륭한 교장 선생님이 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돌을 바로 놓는 마음이 우리에게도 있어야 할 것입니다.
먼저 내가 하나님 앞에 바르게 서고 다른 사람도 바르게 설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스승 주일을 맞아 며칠 전 스승의 날을 안타까운 마음으로 돌아봅니다. 선생들에게 드리는 감사의 선물이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다 보니 그만 스승의 날에 학교 문을 닫고 쉬는 학교가 많았습니다. 존경하는 선생님이 있냐고 물었더니 단 15%만이 그렇다고 대답을 했답니다. 무엇이 이렇게 스승의 권위를 떨어뜨리고 이렇게 비참하게 만들고 말았습니까? 결국 스승을 대하는 우리들의 태도가 스승으로 하여금 이런 비애와 고통을 감수하도록 만든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교회 안에서는 어떻습니까? 우리만 보더라도 어린이 교회 학교에 남자 선생님이 부장 선생님 외에는 한 분도 없는 현실입니다. 무엇 때문에 우리는 선생되지 않으려 합니까?

랄프 M. 스미스는 다음과 같이 회고했습니다.
“아홉 살 때에 나는 핫스프링 제2침례교회 주일학교에 다녔다. 주일학교 교장 선생님은 우리 반 교사를 구하는 데 무척이나 애를 먹었다. 왜냐하면 우리 반 친구들은 모두 장난꾸러기들이었고 다루기가 힘들어서 교사가 임명되었다가도 우리들에게 질려 곧 그만두고 마는 것이었다. 어느 날 목사님이 우리 반을 맡으실 선생님 한 분을 소개했다. 그분은 별로 교육을 받지도 못하였고 글도 간신히 읽는 정도였다. 공과공부를 지도할 때면 학생들을 한 사람씩 호명하여 성경구절을 읽게 하고는 그 본문에 대해 설명해주셨다. 그렇지만 그 선생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데 있어 꼭 필요한 조건을 갖추고 계셨다. 바로 사랑이었다. 그분은 우리를 사랑했고 우리도 또한 선생님을 사랑했다. 언제나 선생님은 우리를 위해 건전한 활동이나 친목을 도모할 수 있는 순서를 준비해 오셨다. 그 분은 우리들의 거친 행동 속에서 오히려 하나님과 이웃을 위한 훌륭한 봉사자로 변화할 수 있는 감추어진 자질을 보고 계셨던 것이다. 나는 3년 간이나 그 선생님께 배웠다. 우리와 우리 반을 향한 그 분의 믿음과 성실성은 실로 놀라운 복으로 보답되었다. 그 반 학생들 가운데서 변호사와 판사가 각 각 한 명씩 나왔고. 목사님이 세 명이나 배출되었던 것이다.”

먼저 기억할 것은 가르치는 자가 더 큰 심판을 받는다는 사실입니다.
“나의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은 선생이 되려고 하는 사람이 많아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이 아는 대로 가르치는 사람인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라고 야고보서 3장 1절은 말씀합니다. 아무나 선생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선생은 더 큰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고도 말합니다. 왜 그런고 하면 “우리는 모두 실수를 많이 저지릅니다. 누구든지, 말을 하면서 실수를 하지 않는 사람은 온 몸을 제어할 수 있는 온전한 사람입니다.”라고 2절에 계속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결국 우리 모두는 실수가 많은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특히 말에 실수가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고 말합니다. 결국 실수가 많은 사람이 가르치는 자가 되면 그를 보고 따르는 많은 사람들을 시험에 들게 하고 믿음에서 떨어지게 만들고 그래서 심지어는 생명을 잃어버리게까지 만들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어린아이 하나를 넘어지게 만드는 것은 차라리 연자 맷돌을 목에 달리우고 바다에 던져짐만 못하다고까지 하셨습니다. 그렇듯 한 생명을 귀히 여기시며 아무 짝에도 쓸모없어 보이는 사람까지도 귀하게 보시는 하나님이신데 어찌 함부로 선생이 되어서 하나님이 귀히 보시는 생명들로 시험에 들게 할 수가 있단 말입니까?
하지만 여기서 야고보가 이런 부탁을 하는 참된 뜻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가르치는 분들은 마땅히 실수가 없도록 힘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지혜와 은사로 가르치는 직분을 감당해야 하고 선생으로서 먼저 하나님의 뜻을 옳게 분별하는 자가 되지 않으면 안됩니다. 아울러 가르침을 받는 자들의 믿음이 떨어지지 않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누가복음 22장 31절로 32절에서 “시몬아 시몬아,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겠다고 요구하였다. 그러나 네 믿음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도록 내가 너를 위해 기도하였다. 너는 뉘우치고 돌아온 후에 네 형제들을 굳세게 하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렇듯 제자의 믿음이 떨어지지 않도록 기도하셨다면 가르치는 자들이 마땅히 배우는 자들을 위해서 기도하되 그들이 믿음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날마다 기도할 필요가 더욱 클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가르치는 분들은 먼저 지혜의 은사와 가르치는 은사를 하나님께로부터 받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내 능력과 내 지혜와 내 힘으로 가르치려고 하다 보니 쉽게 지치고 마는 것입니다. 한 생명을 가르쳐 온전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키워내는 일이야말로 정말 중요할 뿐 아니라 엄청난 영적 싸움이기 때문에 그 중요성을 잘 아는 사탄은 어떻게 해서든지 가르치는 자들이 지쳐 쓰러지게 만들려고 기를 쓰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가르치는 자들이 먼저 영적으로 무장되어야 하고 성령으로 충만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이는 곧 생명을 사랑하는 마음으로부터 시작이 되기에 그만큼 가르치는 일이 어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가르치는 분들이 하나님 앞에 서게 될 때 더 큰 심판을 받는 것이 아니라 큰 상급을 받을 수 있도록 온전히 살아가며 맡은 바 사명을 다 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미국 매사추세츠 주의 한 작은 동리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열네 살 된 윌리암이라는 소년은 동리에서 평판이 대단히 나빴을 뿐 아니라 학교에서도 지도를 할 수 없었던 거칠고 못된 소년이었습니다. 더구나 그는 많은 학생들에게 점차적으로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치고 있어서 학교 당국에서도 큰 문제였습니다.
그때에 새로 부임해 온 교사가 한 사람 있었습니다. 이 새 교사는 윌리암 소년에 대한 말을 듣고 그를 한 번 지도해 보겠다고 했습니다. 동료 교사들은 모두 말렸습니다. 공연히 봉변이나 당할 터이니 손을 대지 말라고 만류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교사는 윌리암 소년을 차근차근 관찰해 가면서 그의 형편과 성격을 분석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희망이 없다고 낙인이 찍히고 틀임없이 악한 사람이 될 것이라는 인정을 받고 있는 윌리암 소년을 친절과 이해와 끈기로 지도해 갔습니다.
교사는 못된 그 소년에게 사랑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선과 악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었습니다. 참된 자존심과 포부를 넣어 주었습니다. 그 교사는 눈물로 씨를 뿌린 것이었습니다. 놀라운 일이 생기기 시작했으니 그것은 뿌려진 씨앗이 싹을 트고 땅에 뿌리를 내고 자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소년은 나쁜 버릇을 버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밤잠을 안 자며 공부를 하였습니다. 그는 대학에 진학을 했습니다. 대학을 졸업할 때에는 우등이라는 명예로 졸업을 했습니다. 윌리암은 계속 법률을 공부했습니다. 그는 결국 미국 대법원의 부판사가 되었습니다. 윌리암은 뉴욕 주의 주지사가 되었고 드디어는 미국의 국무장관의 자리에까지 오르게 되었습니다.
그는 어려서 몹쓸 인간으로 점 찍혀 버림받았으나 그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본 한 교사의 지도로 이처럼 위대하고 뜻 있는 일생을 보내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기억할 것은 마땅히 가르치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여러분은 지금쯤 선생이 되었어야 할 터인데도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기초적인 원리를 다시 배워야 할 형편에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단단한 음식을 먹지 못하고 젖을 먹어야 할 사람이 되었습니다. 젖을 먹는 사람은 아직도 어린아이라서 의의 말씀에 익숙치 못합니다. 그러나 어른이 되면 단단한 음식도 먹게 됩니다. 성인은 지각을 사용하여 계속 훈련함으로써 선과 악을 분별합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들이 마땅히 가르치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시간이 흐르고 점차 믿음이 자라서 선생이 되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되지 못합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기초적 원리를 온전히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교회에 나와 예배드리는 분들이 많이 계시지만 체계적인 말씀의 교육을 받는 분들이 많지 않은 현실입니다. 그래서 주일 예배를 통해서 연속 강해로 말씀을 드리고 또 삼일 예배 역시 체계적으로 말씀을 전하고 있지만 이 시간들 역시 참석하는 분들이 많지 않다 보니 결국 우리가 말씀의 기초적인 원리조차도 겉 핥기 식으로만 알고 있는 것이 우리들의 현실입니다. 그리고 설교가 마치 젖을 아이들에게 먹이는 것처럼 알아듣기 쉽게만 전해지다 보니 어린아이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말씀을 통한 제자 훈련과정이 필요한 것이요 우리 모두는 이런 훈련 과정을 반드시 거쳐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도 우리 교회는 말씀을 배우고자 하는 분들이 적지 않고 또 계속적으로 말씀을 배우고 가르치는 일을 힘쓰고 있기에 참 감사합니다. 디모데가 바울에게 말씀을 배워 다른 충성된 자들을 가르쳐 그들로 하여금 다른 사람들을 또 가르치도록 하는 것처럼 말씀은 단지 내가 배우고 나 혼자 실천하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배운 말씀을 가르칠 기회를 만들어야 하고 또 그렇게 가르침으로 내가 더 깊은 말씀의 세계로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따라서 이미 말씀의 훈련을 받은 분들은 다른 연약한 자들을 가르치기 위해서 힘써야 할 것이요 교사들 역시 계속해서 교사 훈련을 받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잘 훈련되어지고 준비가 된 상태에서 성령의 은사와 능력을 힘입어 가르치는 일에 힘쓰게 되면 이제는 하나님 앞에 서게 되는 날 더 큰 심판이 아니라 큰 상급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모두가 교회 학교 교사로 그리고 또한 자신있게 나서서 구역을 이끌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다 되어야 할 것입니다. 모든 것이 다 그렇지만 말씀 역시 가르치면서 내가 더 은혜 받게 되고 내가 더 깨닫게 됩니다. 그저 배우기만 하는 것보다는 다소 부족하더라도 가르치다 보면 내가 먼저 은혜를 받는 복을 누리게 되고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주시는 놀라운 은혜를 체험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힘써 말씀을 배우는 일에 전진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들 모두가 하나님의 말씀을 날마다 익히기 위해서 힘쓰는 분들이요 먼저 배우기를 힘쓰는 분들이 되십시오. 그리고 그 말씀을 실천하며 가르치는 본보기와 같은 아름다운 삶을 살아가는 성도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전쟁에서 승리하면 장군이 훈장을 받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승리자는 무명의 용사들입니다. 교육학자들은 보통 학문의 업적을 자랑하지만 현장에서 이를 실천하는 사람은 무명의 교사들입니다. 선생님은 갈채도 없고 금메달도 없습니다. 단지 내일의 소망인 학생들에게 희망의 촛불을 밝혀줄 뿐입니다.
지혜로운 교사는 학생들의 미래를 사랑의 망원경으로 바라봅니다. 그러나 우둔한 교사는 학생들의 행동을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며 실수만을 찾아냅니다. 사랑과 격려가 최선의 교육입니다.
교사는 연을 날리는 사람과 같습니다. 연이 땅에 떨어지려고 할 때마다 적당히 줄을 잡아당겨 하늘로 향하도록 조절합니다. 그리고 한시도 연에서 눈을 떼지 않습니다. 연이 푸른 창공에 날아오를 때는 기쁜 마음으로 그것을 바라봅니다. 이것이 교사의 마음입니다. 스승이 존경을 받아야 청소년들이 건강하게 자랍니다. 자녀 앞에서 스승을 비난하면 최대의 피해자는 바로 그 자녀입니다.

따라서 우리들은 가르치는 분의 가르침을 잘 따라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가르침을 받는 자들로서는 선생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를 생각해 봅니다.
“말하기를 ‘내가 어찌하여 훈계를 싫어하였던가? 내가 어찌하여 책망을 싫어하였던가? 내가 스승에게 순종치 않고, 나를 가르쳐 주신 분에게 귀를 기울이지 않고 있다가 온 회중이 보는 앞에서 이런 처절한 재난을 당하는구나! 할 것이다.’”라고 잠언 5장 12절로 14절은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가르치는 자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순종치 않았던 자가 나중에 크게 후회하면서 말하는 내용입니다. 따라서 가르침을 받는 분들은 가르치는 분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순종하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가 처음에는 마치 어린아이와 같아서 의의 말씀에 익숙치가 않았다고 히브리서에서 말씀하시는 것처럼 우리가 과연 그렇지를 않습니까? 따라서 말씀에 익숙해지도록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여기 청종한다는 말은 히브리어로 사마인데 이는 귀담아 듣는다, 경청한다, 즐거이 듣는다, 순종한다 하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따라서 말씀을 귀담아 듣고 즐거이 듣되 듣는 것으로 그치고 순종하지 않는다면 나중에 크게 후회하고 또 후회하게될 날이 올 것임을 잠언서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말씀에 익숙해지도록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귀담아 듣고 또 배워야 하며 그 배운 말씀을 실천해야 하는데, 그 하나가 바로 말씀을 배운 자로서 다른 자들을 가르치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언제까지 그저 쉽게만 살려고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마치 아이가 독립하려고 하지를 못하고 나이가 먹도록 부모 품에만 의지하게 된다면 스스로는 그것이 편할는지 몰라도 결국에는 부모에게도 고통이요 자기 자신에게도 불행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기까지는 먼저 내가 가르치는 분의 말을 귀담아 듣고 실천하는 자로서 살아야 할 것입니다. 언제까지나 영적인 어린아이로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말씀을 깊이 깨닫고 그래서 말씀에 관한 한 누구에게도 뒤떨어지지 않으며 선과 악을 올바로 분별하는 깊이 있는 생각의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를 위해 가르치는 분의 말에 귀를 기울여 즐거이 말씀대로 실천하는 귀한 삶을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여섯 살 된 꼬마가 잠들기 전 침대 밑에 신발 한 짝을 던져놓았습니다. 이렇게 하기를 하루 이틀 사흘...
엄마는 왜 그럴까하고 이상하게 생각했습니다.
“얘야, 너 침대 밑에 신발을 던져놓으니? 무슨 이유가 있니?”
꼬마는 머리를 긁적이며 “교회 선생님이 그렇게 해보라고 하셨어요.”라고 말했습니다.
“왜?”
“신발을 침대 밑에 던져놓으면 아침에 그 신발을 찾으려고 침대 곁에서 무릎을 꿇잖아요. 그때 무릎을 꿇고 기도하라고요. 무릎 꿇을 생각이 나라고 신발을 던져 놓으라는 거고요.”
무릎 꿇고 기도할 때 마음과 생활이 올바로 펴집니다.
기도는 비 개인 아침 햇살처럼 마음과 생활을 환하게 한답니다. 기도는 사람들의 무한한 희망입니다.

너희가 선 줄로 생각하거든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선생의 직무를 조심성 없이 하지 말 것입니다. 아울러 내가 선생이 되어 너희에게 본을 보였으니 너희도 이같이 하라고 하셨던 주님의 말씀처럼 모든 일에 본이 되어야 하고 끈기를 가지고 돌아보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가르침을 받는 자는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을 것을 함께 하라고 갈라디아서에서 말씀합니다. 하지만 우리 모두는 꼭 배우는 입장이 아니더라도 가르치며 수고하는 분들을 존경하며 그들의 수고에 아름다운 격려를 아끼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치열한 영적 전쟁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따라서 기도로 저들을 후원하지 않으면 또한 안될 줄 압니다. 모든 가르치는 분들은 정말 부끄러움이 없이 수고하고 있는가 다시 한번 돌아보시고 모든 성도들은 가르치는 분들의 수고를 격려하며 감사하며 위하여 기도하는 귀한 역사가 함께 있어야 하겠습니다. 이런 귀한 은혜를 함께 나눌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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