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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무익에서 유익으로 ... (몬 1: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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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울은 3차전도 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 성도들에게 구제헌금을 전달하러 갔다가 유대인들에게 고소를 당해 약 2년간의 장시간의 여행 끝에 로마의 감옥에 갇히는 죄수의 몸이 됩니다. 감옥에 수감되어 있는 동안에 오네시모라는 노예를 만났습니다. 그는 자기 주인에게서 물건을 훔쳐서 달아난 도망자였습니다.

  바을은 오네시모에게 복음을 전하여 거듭나게 하였습니다.
  오네시모는 복음을 받은 후 바울의 곁을 떠나지 않고 바울을 도와 복음 사역을 하는 새로운 일군이 되었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오네시모를 계속 자기 곁에 두고 싶어 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오네시모의 주인 빌레몬에게 편지를 써서 오네시모를 용서하고 계속하여 자신의 복음 사역을 도울 수 있도록 허락해 주기를 바라는 내용이 바로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당시 노예는 주인의 소유물이었고 특히 도망친 노예는 잡히면 주인의 뜻에 따라 사형을 받아야 하는 처지였습니다. 어쩌면 사형을 당할지도 모르지만 바울은 빌레몬에게 사도의 입장에서가 아닌 복음을 전하다가 감옥에 갇힌 자로서 오네시모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사실을 말하면서 오네시모를 용서하고 자신의 곁에 머물러 두기를 간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바울이 말하는 오네시모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무익한 사람이었습니다.
  본문에서 바울은 오네시모에 대하여 바울은 오네시모에 대하여 “저가 전에는 네게 무익하였으나”... 라고 표현하였습니다. 그의 주인인 빌레몬에게 오네시모는 무익한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오네시모가 어떻게 무익한 사람이었는지에 대하여는 자세한 설명이 없습니다. 그러나 몬 1:18절에서 “저가 만일 네게 불의를 하였거나 네게 진 것이 있거든 이것을 내게로 회계하라” 라고 한 것을 보아서 오네시모는 주인인 빌레몬에게 두 가지 면에서 무익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불의를 하였거나....
  이 말은 오네시모가 주인 빌레몬에게 고분 고분 순종하는 노예가 아니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주인에게 선하고 의롭지 못한 종이었습니다.

  네게 진 것이 있거든....
  이것은 오네시모가 도망칠 때 주인인 빌레몬에게 재산상의 손해를 끼쳤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물건을 훔쳐가지고 나온 것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아니면 그가 도망침으로서 노동력을 잃었기 때문에 재산상의 손해가 생긴 것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어짿든 중요한 것은 오네시모는 자신의 주인에게 있어서 무익한 종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무익한 종이었던 오네시모가 이제는 유익한 사람이 되었음을 강하게 강조하고 있습니다. 

  본문 1:11-12절에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저가 전에는 네게 무익하였으나 이제는 나와 네게 유익하므로 네게 저를 돌려보내노니 저는 내 심복이라”
  전에는 무익했으나 이제는 바울과 주인인 빌레몬에게 즉 모든 사람들에게 유익한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 안에 오늘 우리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 보시기에 전에는 무익하였을 지라도 이제는 유익한 종이어야 합니다. 무익한 종은 마지막 날에 쫓겨납니다.
  마 25:30절에 보면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 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니라” 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어떤 종이 무익한 종입니까?

  ① 사명을 다하지 못하면 무익한 종이 됩니다.
  예수님이 주신 달란트 비유에서 다섯 달란트를 받고 다섯 달란트를 남긴 종들은 유익한 종입니다. 두 달란트를 받고 두 달란트를 남긴 자도 유익한 종입니다. 그러나 한 달란트를 받은 종은 남긴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받은 사명을 다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곳으로 내어 쫓으라고 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명을 감당합시다. 최선을 다하여 유익한 종이 됩시다. 착하고 충성된 종은 최선을 다한 종입니다.

  ② 다툼과 분쟁을 일삼는 종이 무익한 종입니다.
  유익한 종은 말없이 할 일만 합니다. 그러나 무익한 종들은 일은 하지 않고 다툼과 분쟁을 일으킵니다. 오네시모가 주인의 집에서 도망쳤다는 것은 그가 불만에 쌓여있었다는 것을 반증합니다. 평소에 불만에 쌓여 사사건건 다른 종들과 다투다가 그 주인에게서 도망친 것입니다.

  불평과 불만에 가득 찬 사람의 입에서는 끊임없는 다툼과 분쟁이 일어납니다.
  사사건건 시비를 걸고 불만을 토해내는 것입니다. 그런 종이 있는 곳에는 다툼이 생깁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딛 3:9절에서 “어리석은 변론과 족보 이야기와 분쟁과 율법에 대한 다툼을 피하라 이것은 무익한 것이요 헛된 것이니라” 라고 했습니다.
  다툼을 일으키는 종은 무익한 종입니다.
  그것이 어떤 이유에서든 간에 다툼이 일어나서는 안됩니다.
  이 시대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다투는 일이 아닙니다. 이 시대의 세상 사람들은 다투고 싸운다고 해도 주이 종들은 다투지 말아야 합니다.
  성실하게 주의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주의 나라를 위해 금식하며 울고 기도해야 합니다.

  오네시모는 빌레몬에게 있어서 위의 두 가지 면에서 무익한 종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오네시모가 더 이상 무익한 종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전에는 무익했으나 이제는 유익한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무익이 유익으로 변했을까요?
  그리스도의 복음 때문입니다.
  바울은 오네시모를 갇힌 자 되어 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불만과 반항심에 가독하여 주인의 집에서 뛰쳐나온 그가 갈 곳은 없습니다.
  노예가 도망치면 수배령이 내려지고 그의 신분은 어디에서라도 탄로 나게 되어 집니다. 당시 노예는 팔뚝이나 등짝에 불에 빨갛게 달군 주인의 인장으로 불도장을 찍어두기 때문에 평생 노예의 신분을 벗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숨을 곳이 없는 그가 어떻게 바울을 만나서 복을 듣게 되었는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복음으로 낳은 아들이라는 표현을 봐서 바울의 복음을 처음 들었고 도망자 신세였던 그는 바울 곁에 머물러 있으면서 바울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하여 확신을 얻었을 것입니다.

  복음은 그를 변화시켜 새사람이 되게 하였습니다. 복음은 그의 마음에 있던 불만과 반항심을 잠자게 하여 순종의 사람이 되게 했습니다.
  복음은 사람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습니다.
  캐나다의 ‘존 케디’ 라는 선교사는 식인종이 사는 작은 섬으로 복음을 들고 갔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그들을 돌보고 언어를 습득하여 성경을 번역하고 교육을 시켰습니다. 그가 죽었을 때 그의 기념비에는 이렇게 씌여 있었습니다.
  "1848년에 그가 이곳에 처음 상륙하였을 때에는 이곳에 그리스도인이 한 명도 없었다. 그러나 그가 세상을 떠난 1872년에는 여기에 식인종이 한 명도 없다."
  즉 그는 복음을 전하여 섬 사람 모두를 식인종에서 그리스도인 되게 한 것입니다.
  복음은 이렇게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습니다. 식인종도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복음은 우리를 어떻게 변화 시킵니까?
  무엇보다도 하나님 앞에서 죄인 된 자를 그의 자녀로  삼으셔서 신분이 바뀌게 합니다. 요 1:12-13절에 보면 “영접하는 자 곧 그이름을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라고 했습니다.

  복음은 우리를 무조건 하나님이 자녀가 되게 합니다.
  이것은 신분이 먼저 바뀌는 것을 의미합니다. 신분이 바뀌고 상태가 변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먼저 되고 그 다음 자녀로서 합당한 삶을 살도록 축복하시는 것이 복음입니다.

  엡 5:8절에서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라고 했습니다. 빛의 자녀 되었으니 이제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는 것입니다.
  투정과 불평과 원망으로 가득 찼던 사람이 감사하고 노래하며 밝게 살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복음이요, 죄 의식과 좌절로 누추하게  살던 사람이 자유함과 희망으로 청결한 삶을 살게 하는 것이 복음입니다.

  늦게 예수님을 믿게 된 아버지가 다른 지방에 사는 세 아들을 불러 주일마다 교회에 나갈 것을 당부했습니다. 세 아들은 아버지의 말씀을 거역할 수 없어서 그 주부터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한 달이 지난 후 아버지는 세 아들을 다시 불러 모아놓고 교회 나간 후 무엇이 달라졌는가를 물었습니다.
  큰 아들은 자신의 삶이 보다 경건해졌고 사업도 잘된다고 말했습니다.
  둘째 아들은 덕분에 좋은 친구들을 많이 만나서 더 이상 외롭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세째 아들은 보이질 않고 대신 편지가 와 있었습니다.
  그 편지에는 요즘 마을의 장애자들과 노인들을 돌보느라고 도저히 올 수가 없었다며 죄송하다는 말을 덧붙였습니다.
  아버지는 세 아들 중 교회에 가서 진정으로 예수님을 만나고 변화 받은 아들은 세째 아들 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복음은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오네시모는 무익한 사람에서 유익한 사람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어떤 유익한 사람이 되었습니까?

  ① 바울의 심복이 되었습니다. 
  심복이란 말은 헬라어로 스풀랑크나(σπλἀγχνα) 라는 단어입니다. 문자적으로는 “내장”을 의미하는 단어지만 여기서는 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즉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심히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이 되었다 는 것입니다. 그만큼 과거의 잘못을 회개하고 새사람이 되어 바울에게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될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주님에게 심복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리고 복음을 위해서라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주의 사역자들의 심복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이러한 심복이 된 사람들에 의해 확장되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철저한 심복이었습니다.
  히 3:5절에 보면 모세가 하나님의 심복이었다는 사실을 “하나님의 온 집에서 사환으로 충성하였고....” 라고 표현하였습니다.
  바울도 철처하게 자신을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심복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주인인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오네시모가 계속 자신의 심복으로 남아있도록 그의 법적 주인인 빌레몬에게 간절하게 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② 복음을 위해 필요한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은 갇힌 상태에서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그 곁에 있어줄 사람이 절실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내 복음을 위해서....”  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나의 사역을 위해서 라는 말입니다. 바울의 사역을 위해서 필요한 사람이 바로 오네시모였습니다. 주님과 복음을 위해 교회와 복음 사역자들에게 필요한 일군이 됩시다.
 
  이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떤 사람입니까? 과거에는 어떠했든지 상관없습니다. 무익한 종이었다 할지라도 이 시간 복음으로 변화를 받으십시오.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혜에 감격하여 자신을 그리스도의 종으로 헌신하여 유익한 종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 복음의 진리를 깨달아야 합니다. 영원히 죽을 내 대신 예수께서 죽으셨음으로 그는 죽고 나는 살았으며 내가 받을 영원한 형벌을 대신하여 그가 십자가 고난당하심으로 영원한 하나님의 자비를 받게 된 복음의 진리를 믿으십시오. 그리고 그 은혜에 감격하여 이제는 주님을 위해 기꺼이 죽을 수도 있는 유익한 종들이 되어 주의 복음을 위해 충성합시다.  (박재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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