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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께서 금하시는 것, 주께서 원하시는 것 (삼상 24:1-7, 벧전 3: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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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오늘 사무엘서 본문 5-6절 말씀에 “다윗의 마음이 찔려 자기 사람들에게 이르되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부음을 받은 내 주를 치는 것은 여호와께서 금하시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지금 다윗은 자기 목숨을 찾는 사울 왕에게 쫓겨서 엔게디의 굴에 숨어 있습니다. 온 이스라엘을 샅샅히 뒤져서라도 다윗을 찾고야 말겠다는 사울은 마침내 이곳에 까지 쫓아왔습니다. 뿐만 아니라 공교롭게도 사울 왕은 무장도 다 해제한 채 다윗 일행이 숨어 있는 바로 그 굴 안으로, 그것도 모른 채  용변을 보기 위해 들어왔습니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는 속담도 있듯이 이 굴속에서 서로 부딪치게 될 줄이야 누가 알았겠습니까? 다윗의 동료들은 이것이야말로 원수를 처리할 수 있는 천재일우의 기회라고 말했습니다. 당장 사울을 해치우자고 부추겼습니다. 4절에 “다윗의 사람들이 이르되 보소서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원수를 네 손에 넘기리니 네 생각에 좋은 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시더니 이것이 그 날이니이다”라고 했습니다.

지금 이 순간 다윗과 사울이 처한 상황은 그야말로 죽느냐 사느냐의 절박한 갈림길입니다. 다윗은 자기가 살려면 사울을 죽여야 합니다. 만일 다윗이 사울을 살려 보내면 사울은 틀림없이 다윗을 찾아죽일 것입니다. 이런 급박한 현실에 직면하게 되면 누구나 올바른 판단력을 상실하게 됩니다. 형편대로 처신하고 감정대로 일을 처리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와 같이 절박하기 말로 다 할 수 없는 마당에서 다윗이 한 말이 무엇입니까? 원수 갚는 것은 “하나님이 금하시는 일이다”라는 것입니다. 죽고 사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내가 이 상황에서 내 뜻대로 할 것이냐 아니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할 것이냐 이것이 다윗의 입장이었습니다. 우리가 어디서 이런 훌륭한 신앙적 인격을 볼 수 있겠습니까? 이런 다윗의 모습이 얼마나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시게 해드렸겠습니까? 그래서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죽음일보 직전의 절체절명의 위기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먼저 생각한 다윗을 하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사울의 손에서 철저하게 그를 보호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약속하신 것을 지키셔서 다윗이 마침내 왕이 되도록 하셨습니다. 단지 왕이 된 것이 아니라 메시아적 왕이 되었으며 그래서 이스라엘 최고의 왕이 되게 하셨습니다. 다윗이 믿음 따라 행한 대로 하나님이 그에게 보상해 주셨습니다.

예수께서 게쎄마네 동산에서 죽음을 앞두고서도 “아버지여,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하셨던 그 기도를 방불케 해줍니다.

우리는 흔히 내 생각이나 내 방법이 가장 훌륭한 줄로 착각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나 하나님의 방법이 어리석게 여겨지고, 그래서 내 생각대로 일을 처리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아시고 또 보십니다. 우리가 육신을 위하여 씨를 뿌리면 육신으로부터 썩은 열매를 거둘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신령한 씨를 뿌리면 하나님께서 영생의 열매로 갚아주십니다. 그래서 “육신의 생각은 죽이는 것이요 영의 생각은 살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가장 작은 일이라고 할지라도, 또 상당히 힘든 현실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 뜻대로, 하나님의 방법대로 살아서 인정받고 축복받는 여러분 되시기 축원합니다.

2. 벧전3:9에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이는 복을 이어받게 하려하심이라”고 했습니다. 복을 받으려면 이렇게 하라 그 말씀입니다. 그것은 악을 악으로 갚는 것이 아니라 복을 빌어주라는 것입니다.

남편이 이중 생활하는 것을 견딜 수가 없어서 목사님을 찾아 온 한 부인이 있었습니다. 얼마나 한이 맺혔으면 목사님 앞에서도 살기등등해서 자기 남편을 “죽일 놈, 살릴 놈”하면서 자신의 억울하고 서러운 사정을 호소했습니다.

이야기를 다 듣고 나서 목사님이 그 부인에게 조용하게 이야기 했습니다. “자매님이 남편을 그렇게 저주하면 남편은 점점 더 완악해 집니다. 그리고 자매님에게도 아주 나쁜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지금 자매님의 얼굴은 아주 말이 아닙니다. 성경에 예수님은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남편이 돌아오고 말고는 그만두고라도 우선 자매님이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고 평안을 누리려면 남편을 저주하지 말고 축복하십시오”.라고 했습니다.

너무 서러워서 목사님께 상담하러 왔던 이 부인은 목사님의 말씀을 듣고 펄쩍 뛰었습니다. 오히려 속이 더 끓어올랐습니다. 그러나 목사님의 계속된 설득을 듣고 남편을 축복하기로 했습니다. 처음에는 억지로 하다가 차츰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진정으로 남편을 불쌍히 여기게 되어 계속 축복하는 기도를 했습니다. 그리고 그동안 속이 상해서 자녀들에게도 폭언을 퍼붓고 신경질 내던 것이 바뀌어 따뜻한 사랑으로 대하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남편이 오랜만에 집에 왔습니다. 전에 같으면 얼음장보다 더 차가울 만큼 쌀쌀하게 대하였을 텐데 이제 달라졌습니다. 웃음으로 맞이하고 반갑게 대해주게 되었습니다. 이미 아내에게 역사하신 성령께서 아내를 통하여 남편에게도 역사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이제까지의 이중생활을 청산했습니다. 그리고 가정으로 돌아와서 잃었던 평화를 다시 찼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정말 복을 유업으로 이어받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복 받는 비결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하나님만이 복의 근원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뜻대로 하나님의 방법대로 살고, 하나님께 기도할 때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께로부터 진정한 복을 받게 되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세계 민족 가운데 하나님의 복을 노골적으로 선언 받은 민족이 유대민족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장본인들이 그들이라고 해서 유대인이라고 하면 꽤 거부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역사를 통하여 그들은 나라를 잃고 2천년을 유랑하면서 숱한 박해를 받아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지금 세계를 움직이고 있습니다. 미국 경제의 80%가 유대인의 재산이라고 한다면 그들이 세계를 움직이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역사상 위대한 인물들, 정치계, 사상계, 예술계 할 것 없이 위대한 인물들 가운데 유대인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어떤 분의 말에 의하면 지금 사해 바다 속에 있는 경제의 가치는 미, 영, 불의 재산을 합친 것 보다 오히려 많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선언한 그 복을 그들이 받고 있다는 증거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래서 벧전3:10에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그리하면 하나님의 복을 받게 되기 때문입니다.

3. 그런데 여기서 다윗이 사울에게 손을 대지 않은 가장 큰 이유가 무엇입니까? “여호와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가 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a. 아합 왕 때에 이스라엘의 유명한 선지자가 엘리야였습니다. 왕과 온 나라가 우상숭배에 빠졌기 때문에 그 나라에 무서운 가뭄이 왔습니다. 그때 엘리야가 사르밧이라는 땅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때 마침 한 과부가 마지막 남은 양식으로 떡을 만들어 먹고 속절없이 죽음을 기다리려고 나뭇가지를 줍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엘리야가 그 여인에게 “먼저 떡을 만들어서 내게 가져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 여인과 아들을 위하여 떡을 만들어서 먹으라고 했습니다. 이 여인은 마지막 양식으로 떡을 만들어 하나님의 선지자 엘리야에게 갖다 드렸습니다. 이것이 기적을 이루는 씨앗이 되었습니다. 놀랍게도 그 여인의 통에 가루가 그 가뭄이 끝날 때까지 없어지지 않았고 병의 기름도 계속 흘러나왔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나중에 그 아들이 병으로 죽었을 때 엘리야의 기도로 살아나게 되는 축복까지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선지자를 대접한 것이 이와 같이 놀라운 기적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종들에게 대하여 마구 말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마구 대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옛날에는 박해자들이 여러 가지 고문 구를 이용해서 주의 종들을 괴롭혔으나 오늘 같이 박해가 없을 때는 많은 성도들이 세치 혀를 가지고 주의 종들을 괴롭힙니다. 그래서 상처받고 고통하게 되는 일들이 많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스가랴서에 보면 이것이 하나님의 눈을 촉범하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대접하면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저 사르밧의 과부는 엘리야 선지를 그가 선지자이기 때문에 대접해서 선지자가 받을 상급과 축복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입니다. 다윗은 사울이 하나님의 기름 부음을 받은 사람이기 때문에 그의 목숨을 보호해 주었더니 하나님은 다윗의 생명을 철저하게 지켜 주셨습니다.

b. 여기서 좀 더 확대해서 생각할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여기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지극히 작은 자”는 누구를 말합니까? 마25:에 의하면 “주린 사람”을 말하는데 그것이 바로 주님이 주릴 때라고 했습니다. “목마른 사람”인데 그때 주님이 목마르셨다고 했습니다. “나그네”라고 했는데 그때 거기서 주님이 나그네 되셨다고 했습니다. “헐벗은 사람”이라고 했는데 그때 헐벗은 사람이 바로 우리 주님이셨다고 했습니다. “병 든 사람”이라고 했는데 그때 병으로 고생한 사람이 바로 우리 주님이라는 것입니다. “수감자”라고 했는데 그때 그 감옥에 갇혔던 그 사람이 우리 주님이셨다는 것입니다.

그들을 돌아 본 사람들에게 우리 주님은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 된 나라를 상속 받으라”고 했습니다. 영원한 복이 선언되었습니다. 이것이 우리 주님이 원하시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들을 돌아보지 않은 사람들을 향해서는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 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고 했습니다. 저주가 선언되었습니다. 이것은 우리 주님이 원하시지 않는 일이었습니다.

c. 예수님 비유 가운데 “선한 사마리아 인의 비유”가 있습니다. 여리고 도상에서 강도를 만나서 거의 죽어가는 사람이 신음하고 있을 때 그 길로 제사장과 레위인이 지나갔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피하여 지나갔습니다. 마침 사마리아 사람이 여행 중에 거기 이르렀습니다. 그는 강도 만나 죽어가는 사람을 보고 불쌍히 여겼습니다. 그리고 응급치료를 해주고 자기 짐승에 태워서 여관까지 데려다 주고 뒷일까지 부탁하고 떠났습니다. 이 사람이 바로 강도 만난 사람의 이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거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주님이 원하시는 일입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 명하시는 일입니다.

사람이 세상을 살아갈 때 주위 사람들이나 환경으로부터 절대적인 영향을 받습니다. 그래서 친구나 측근이 어떤 사람이냐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사실 다윗의 주변에 모인 사람들은 거의 현 정권으로부터 소외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니 사울에 대하여 원한이 사무친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지금같이 사울을 해치울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얻었을 때 그들은 주저해야할 이유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다윗으로 하여금 사울을 해치우라고 끈질기게 채근했습니다. 다윗이 이 말들을 거부한다는 것은 자칫하면 동료를 잃을 수도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설사 사람을 잃는 한이 있어도 하나님을 잃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의 결심은 확고했습니다. 7절에 “다윗이 자기 사람들을 금하여 사울을 해치지 못하도록 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윗은 오직 하나님께만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이와 같이 하나님만 섬긴 다윗이 오히려 주변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성도의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런 확고한 믿음으로 세상의 빛이 되고 소금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김오동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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