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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탕자의 귀향 (눅 15: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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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는 말

오늘 강동교회를 찾아주신 새가족여러분들과 모든 성도님들에게 주님의 은혜가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해마다 저희 교회는 두 번의 이웃초청축제행사를 갖습니다. 이 행사를 갖을때마다 하나님께서 예비해두신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그분들을 보면 하나님을 만나면서 삶의 새로운 풍성한 복을 경험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오늘 본문 누가복음 15장은 성경 중에서 우리들에게 너무나도 잘 알려진 비유의 말씀입니다.그 대략적인 내용은 어떤 사람에게 두아들이 있었습니다.어느날 둘째 아들이 아버지로부터 자신에게 돌아올 재산의 몫을 선택하여 먼나라에 가서 허랑방탕하게 재산을 허비합니다. 그리고 궁핍하여 고생하던 끝에 깨닫고 아버지께로 돌아오게 된다는 내용입니다. 주님께서 이 비유에서 지칭한 둘째아들은 바로 하나님 아버지를 떠나 세상을 살아가는 죄인된 인간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본문의 아버지는 바로 하나님을 의미합니다.

오늘 이 말씀 속에서 집을 나간 둘째아들이 고향집으로 어떻게 귀향을 하였고 그 귀향으로 말미암아 어떤 축복이 있었는지 살펴보기로 합니다.이것을 한편의 영화로 보듯이 여러분들이 머리에 연상하면서 함께 말씀으로 은혜나누기를 원합니다. 오늘 이 말씀을 여러분이 마치 영화를 보듯이 크게 4가지 장면으로 나누어서 바라보시기 원합니다.

첫 번째 장면은 둘째 아들이 아버지를 거역하고 먼나라로 갔습니다.
12절 그 둘째가 아비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비가 그 살림을 나눠주었더니
둘째아들의 비극은 아버지를 떠나는 것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이 청년은 어느날 아버지에게 찾아와서 독립을 요구했습니다. 그 마음 속에는 혼자서 자유롭게 사는 삶에 대한 동경이 있었을 것입니다. “내 인생 이제 내마음대로 자유롭게 하고 싶은대로 살아야지”이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그리고 이 아들은 아버지에게 자기 몫의 재산을 요구했습니다.인격적인 아버지는 이 아들이 불순종하고 거역하였지만 자기의 생각을 강요하지 않았습니다. 사랑으로 아들의 자유를 허락하여주었습니다.
둘째아들은 아버지의 사랑을 거역하고 “먼나라”로 떠났습니다. 아버지가 보지 못하는 곳,내 자유대로 맘대로 살 수 있는 곳으로 떠났습니다. 아버지의 명령도 없고,훈계도 없고,어떤 구속도 없는 그곳으로 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아들의 불행의 시작이었습니다.

아버지를 떠난 이 청년에게 어떤 불행이 찾아옵니까?
먼나라에 간 아들은 거기서 ‘허랑방탕’하였습니다.
그래서 재산을 다 허비하고 다 날리고 말았습니다.거기에서 설상 가상으로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었습니다. 이 아들은 이제 먹을 것도 구할 수 없는 완전히 궁핍한 삶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 아들은 아직까지는 자존심이 있었습니다. 아버지께로 돌아가면 되는데 그렇게 하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결국 이 아들은 그 나라 백성중 한 사람의 집에 들어가서 돼지치는 더러운 종의 신세가 된 것입니다. 날마다 돼지먹는 여물도 제대로 먹지 못하는 비참한 신세가 된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하나님 아버지를 떠난 인간들은 죄가 나를 주장하게 되어집니다. 죄는 우리를 허랑방탕한 삶을 살게 합니다. 혹시 우리 중에는 허랑방탕하게 사시는 분은 없습니까? 허랑방탕한 삶은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없는 사람의 삶입니다.에베소서2:3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라고 합니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의 삶의 모습은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삽니다.

육체의 욕심을 따라 허랑방탕한 삶은 어떤 모습입니까?
인간으로서의 품위와 인격이 아닌 동물적인 수준에 머무른 삶의 모습입니다.
인간과 동물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가장 큰 차이점이 인간은 “절제”하면서 품위를 지킬줄 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죄가 나를 주장하게 될 때 인간은 절제하면서 품위를 지키지 못합니다. 그래서 과욕을 부립니다. 먹는 것도 과식합니다. 섹스도 도를 넘어서 원조교제까지 하는 것입니다. 노는 것도 도를 넘어서 과도하게 노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는 결과가 무엇입니까? 철저한 타락,철저하 파멸 속의 황폐한 인생을 살 수 밖에 없습니다. 인간으로서 모든 품위를 잊어버린 동물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오늘날 세상의 문제는 과욕에서 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단절되어진 불안의 결과입니다.

오늘날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내가 누군지 알지 못하고 살고 있습니다.
진정한 나를 상실한채 마음에 기쁨을 잃고 평안을 잃고 어두움의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자존심” 하나로 나를 지켜가고 있습니다. 그 비참한 지경에서도 자존심으로 무장한채 우울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만일 이대로 인생을 끝낸다면 얼마나 비극이겠습니까?

두 번째 장면은 둘째아들은 자신의 현실을 정직하게 직면하게 됩니다.
17절 “이에 스스로 돌이켜 가로되 내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군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 구나”
여기 비참한 지경에서 둘째아들은 “스스로 돌이켜”라고 하고 있습니다.
“스스로 돌이켜”라는 말은 “자기 자신을 되찾고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왔다”는 의미입니다.
사람이 자기를 바라보고 깨닫기가 얼마나 힘이 든지 모릅니다.술에 취한 알콜 중독자들은 자신이 술에 취한 사실을 인정하지 않습니다.이와 같이 죄로 취하여 중독된 우리의 몸과 마음은 정확한 자기 인식을 할 수 없도록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다행스러운 것은 인간에게는 양심이 있습니다. 그 양심은 우리로 하여금 생각하게 합니다.둘째 아들은 비참한 고난의 상황에서 자신을 살펴보면서 생각하엿습니다.
이 아들은 아버지를 떠날 때 자신을 잃어버렸습니다.자신의 신분이 누구고 어떤 존재인지를 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내가 누구인가?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생각하였습니다. 둘째 아들은 비로서 현실을 냉정하게 지각하게 되었습니다. 인간은 바른 깨달음이 있을 때 변화할 수 있습니다.
둘째아들을 깨닫게 한 것은 고독한 현실이었습니다.
처음에 돈이 있고 좋았을 때에는 친구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둘째아들은 모든 재산을 다 잃었습니다. 그리고 비참한 종의 신세로 가난하게 되었습니다. 그가 돈이 있을때에는 사람들이 주변에 많았습니다. 그러나 돈이 떨어지자 사람들도 다 떠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아들은 졸지에 거렁뱅이 신세가 된 것입니다.아버지와 있을 때 모든 풍성함을 잃어버린 현실 그 속에서 비로서 반항하고 불순종하는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아버지께 돌아올때가 언제입니까?
궁핍하고 고독할때입니다. 모든 재산을 잃고 건강을 잃고 비참해진 외로움이 있기까지 돌아올 수 없는 탕자들이 많습니다. 권력을 즐기는 탕자들은 그것이 침몰하기까지 돌아오지 않습니다. 건강을 자랑하고 젊음을 자랑하는 탕자들은 그것이 몰락되기까지 주께로 돌아오지 않습니다.
우리가 소유하고 있을때는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지식을 소유하고 있을때 그것이 오히려 하나님을 멀리하게 합니다. 돈을 소유할 때 그 돈으로 하나님을 더욱 멀리합니다. 명예와 권력을 갖고 있을때 그것이 더욱 주님을 멀리하게 합니다. 그런데 알아야 할 것은 내가 무엇을 소유함으로 그것으로 하나님을 가까이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오히려 저주라는 사실을 바라보기 원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명심할 것은 하나님없는 지식이 화입니다. 하나님없는 돈이 오히려 저주가 될 수 있습니다. 그 지식과 돈이 나를 더욱 비참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궁핍한 현실 앞에서 청년은 고독하게 되었습니다.
이 고독을 통해서 청년은 자신을 돌아보았습니다. 그는 이제 혼자였습니다. 돈이 있고 좋았을때에는 친구도 많았고 인기도 좋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돈이 떨어지자 친구들은 모두 사라지고 오직 혼자였습니다. 주변에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이 고독의 순간 청년은 자신을 생각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인간에게는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특히 모든 것이 떨어진 상황에서 고독한 시간은 큰 의미가 있습니다. 돈도 떨어지고 친구도 사라지고 궁핍한 상황에서 혼자만이 남았을 때 인간은 비로서 자기 자신의 모습을 진지하게 생각합니다.
“나는 참으로 누구일까?”
“나는 어디에서 왔을까”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자기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나를 생각하고 나를 바라볼 때 민감한 반응들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고독한 둘째아들은 아버지에 대한 깨달음의 축복을 얻엇습니다.
여기 둘째 아들은 궁핍한 상황에서 비참한 자신을 바라보면서 무엇을 깨닫게 되었습니까?
나에게 풍성한 아버지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17절“이에 스스로 돌이켜 가로되 내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군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주려죽는구나”
아들은 고독한 현실,비참한 자신을 바라보면서 자신의 풍성한 아버지를 비로서 바라보게 된 것입니다. 아버지 집에는 없는 것 없이 종도 있고,먹을 것,입을 것,쓸 것 모든 것이 다있는 부자입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얼마나 좋은 분입니까? 늘 오래참으시고 사랑과 평화가 가득한 선하신 아버지이십니다. 부족함이 없도록 풍성하게 채워주시는 아버지이십니다. 둘째 아들은 이 아버지를 바로 깨닫고 기억함으로 돌아가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먼저 그 생각을 바꾸게되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떠나있으면서 지금 궁핍한 삶 속에서 절망하고 계신 분이 있습니까?
비참하고 외로운 삶 속에서 두려워하고 계신 분이 있습니까? 그 현실 속에서 그 무엇도 나를 탈출시킬 수가 없고 나를 새롭게 할 수가 없습니다.
내가 택할 수 있는 유일한 길 가장 축복된 선택 그것은 바로 하나님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먼저 마음의 결단과 생각을 아버지께로 돌아가겟다고 바꾸십시오.
둘째아들은 궁핍한 자리에서 먼저 마음의 결단하엿습니다.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로 가서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습니다. 나를 품군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작정하였습니다.
이제 둘째아들은 비참하고 추하고 힘든 현실에서 더 이상 ‘자존심’을 앞세우지 않았습니다.
체면을 따지지 않았습니다. 진실하게 마음에서 죄를 시인하고 뉘우치고 생각을 바꾸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나의 생각을 바꾸시기 바랍니다. 내인생에 대한 나의 교만한 생각을 전환시키십시오.하나님께로 나아가는데 주저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사야55:7“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나아오라 그가 널리 용서하시리라”고 합니다.

이제 우리의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결단이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아버지여 내가 지금까지 아버지 앞에 범죄하면서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나를 긍휼히 여기시고 나를 불쌍히 여기셔서 받아주소서“ 마음 속에서 결단하시기 바랍니다.

세 번째 장면은 둘째아들의 귀향의 결단입니다.
먼저 돌아가야하겠다는 마음의 결단을 하고 나서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생각에만 멈추어 있다면 그것은 후회입니다. 그것은 참된 회개가 아닙니다.둘째아들은 그런마음의 결단과 함께 행동의 결단을 했습니다.
20절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돌아가야지 마음만 먹는 것으로는 소용이 없습니다. 깨닫는 차원으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마음 먹은 대로 깨달음대로 결단하는 행동입니다.
아마도 이 아들은 마음먹은 것을 행동에 옮기기까지 많은 망설임이 있었을 것입니다.
“ 내 모습이 너무 흉하고 추한 것은 아닌가?”
“내가 돌아가면 과연 아버지께서 받아주실까?”
“아니 문을 닫고 이 못된 자식아! 돌아가라! 고 하지 않으실까?"
" 혹시 이웃의 사람들은 나를 보고 욕을 하지는 않을까?“

여러분 회개란 무엇입니까?
방향을 돌리는 것입니다.
회개란 먼나라를 떠나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을 말합니다. 마치 둘째아들처럼 먼나라에서 아버지께로 돌아오는 것이 회개입니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 교제하면서 살 수 있도록 지음을 받았습니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 아버지와 교제하면서 살 때 풍성한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먼나라에 떠나서 하나님 없이 혼자 살다가 아버지께로 돌아오는 것이 회개입니다.
회개 할 때 모든 것을 두고 떠나야 합니다. 누구와 상의할 필요가 없습니다. 누구에게 자문을 구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늘 둘째아들은 누구에게 자문을 구하거나 누구에게 의논하지 않았습니다.

신앙의 결단은 외롭지만 힘들겠지만 내가 스스로 결단해야 합니다.내 남편,아내,자식들과도 의논할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내가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외롭게 내려야할 결단입니다.
나는 너무 추하고 더러운 몰골이어서 이대로 돌아갈 수 없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나는 너무 큰 죄를 지었으니까 안된다고 하지 마십시오. 추하고 더러워도 내 모습 그대로 돌아오십시오. 냄새나고 누더기를 입고 피묻고 상처난 모습 그대로 돌아오십시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고 하십니다.
“너희 목마른 자들아 내게로 오라.돈없는 자로 오라.돈없이 값없이 내게로 오라”고 하십니다. 아버지에게 돌아가는 귀향의 결단이 있기를 바랍니다. 지금 이 순간이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축복의 시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네 번째 장면은 둘째아들이 아버지를 만나는 기쁨의 장면입니다.
둘째아들이 아버지 품으로 돌아올 때 아버지가 어떻게 맞이합니까?
20절 “아직도 상거가 먼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맟추니”라고 합니다.
여기 아직 상거가 먼데 라는 것은 사람을 분간할 수 없는 먼거리입니다.
그러나 그 먼거리에서 아들은 아버지를 보지 못하였지만 아버지는 아들을 보았습니다.
피곤한 탕자,굶주린 탕자,거지꼴이 된 볼품없는 아들입니다. 이 아들은 집이 가까울수록 또 그 속에 죄책감이 일어났을 것입니다. “내가 어떻게 아버지를 대할까”“내가 무슨 면목으로 아버지 얼굴을 볼까? 고민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들이 아버지를 보기 전에 아버지가 먼저 아들을 보았습니다.
우리가 먼저 하나님을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보십니다.
자비의 아버지의 눈이 우리의 회개의 눈보다 먼저 우리를 보십니다. 아버지는 우리의 더러운 얼굴,냄새나는 옷,보기싫은 몰골을 바라보십니다. 죄로 찌들고,슬픔과 고독으로 찌든 추한 내모습을 바라보십니다.여기 아버지는 아들을 보고 “측은히 여겨”라고 합니다. 그 눈은 정죄의 눈,심판의 눈이 아닙니다. 그 눈은 긍휼의 눈이요 아버지의 눈은 사랑의 눈이십니다.

둘째아들을 본 아버지는 아들을 보고 나서 달려가서 목을 안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내 사랑하는 아들이 돌아온 것을 너무 기쁜 나머지 보고 한걸음에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아들의 목을 안았습니다. 그리고 그 입을 맞추었습니다. 안아주고 입을 맞추는 것은 무엇입니까? “내가 너를 받아들인다”는 아버지가 아들을 영접한 것입니다. “너는 나의 사랑스런 자녀이다” 이것은 자녀와 아버지로서 회복의 표시입니다. “나는 너를 용서하였다”이것은 모든 죄를 사하여주시는 용서의 표시입니다. 여기 아버지는 둘째아들에게 어떤 죄도 묻지 않았습니다. 조금도 책망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아버지의 모습입니다.

여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아버지는 둘째아들에게 새의복을 입히라고 하십니다.손에 가락지를 끼우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발에 새신을 신기라고 하십니다. 송아지를 잡아서 잔치를 벌였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기뻐하십니다. “내 아들은 죽었다가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하십니다. 그리고 잔치를 벌이면서 그 기쁨을 나누는 것을 봅니다.
당신이 회개하고 하나님 아버지께로 돌아갈 때 이 일이 하늘에서 벌어지는 것입니다.
당신이 회개하고 아버지께로 나아올 때 아버지는 뛰어달려나와서 당신을 안아주시고 입을 맞추시면서 하늘나라에서 잔치를 벌이면서 온천사들과함께 기뻐하면서 즐거움의 잔치를 벌일 것입니다.이렇게 해서 대단원의 막은 내립니다.

하나님은 무조건 집으로 돌아온 둘째아들을 사랑하셨습니다.
아들의 잘못된 과거 많은 실수 무조건 아버지는 받아주시고 사랑하셨습니다.
오늘 그리스도인들이 누구입니까? 바로 둘째아들처럼 아버지 하나님을 의식하면서 그분이 주시는 복을 지금 여기에서 누리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께로 돌아가면 풍성한 아버지와 늘 함께 살 수 있습니다.
아버지의 도움을 받으면서 아버지의 사랑을 받으면서 아들로서 부족함이 없는 풍성함의 생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축복이 오늘 새가족여러분들에게 있으시기를 축원합니다.

나가는 말) 오늘 우리에게 아버지는 “돌아오라”고 하십니다. 어서빨리 집으로 돌아오라고 하십니다. 아버지께로 돌아오라고 하십니다.그 눈물의 자리,고통의 자리,슬픔과 상처의 자리에서 마음에 결단하고 아버지께로 일어나 돌아와야 합니다.
그러나 마귀는 이렇게 말합니다. “돌아가서는 안된다”“자존심을 포기해서는 안된다”“ 이대로 살다가 죽어라”고 합니다.마귀는 돌아오는 것을 원하지 않고 방해합니다.
중요한 것은 오늘 지금 결단하시기 바랍니다. 모든 것은 때가 있습니다. 지금이 구원받을 만한 때요 지금이 은혜의 때입니다. 내일은 나의 날이 아닙니다. 오늘 지금 하나님께 돌아오는 귀향을 서두르시기 바랍니다. 아버지가 있는 그 집에서 아버지의 사랑을 받으면서 풍성한 삶을 사시는 복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박춘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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