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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 (마 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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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본문은 지난주일 본문의 마지막 절만을 다시 뽑은 것입니다.  지난 주일에는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말씀을 우리가 무슨 일을 하든 모든 일의 궁극적인 관심과 목적이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가 되게 해야 한다는 뜻으로 설명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는 일에 우리의 시간과 정력과 물질과 재능과 건강을 탕진하며 살아서는 안 된다는 의미로 이해했습니다.  그러나 막상 그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가 무엇인지에 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을 오늘 다루려는 것입니다.

  우선 우리는 를 어떤 공간적이며 지역적인 를 가리키는 말로 보기보다는 이나 를 염두에 둔 말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주인이시고 왕으로서 다스리시는 나라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는 모든 일이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지는 나라입니다.  그 백성은 누구나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의 뜻에 순종해야하는 나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온전히 복된 삶을 누리는 나라입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죄를 범함으로써 우리에게서 상실되었고 알지도 못하게 된 나라입니다.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는 되찾을 수 없게 되어버린 나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셔서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우리에게 회복시키기를 원하시는 나라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그 나라를 회복시키시는 길로 택하신 것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입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되찾게 되었습니다.  오직 그와 그의 십자가의 도를 통해서만 하나님의 나라를 알 수 있고 다시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요 유일하신 구원자, 약속된 메시야로 믿는 이들만이 들어갈 수 있는 나라입니다.  그 나라를 알고 또 구하라는 것입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주어진 구원의 진리와 영생의 복락을 사모하고 받아 누리라는 것입니다.  그것보다 우리에게 더 중요한 일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외면하거나 다른 어떤 것을 더 중하게 여기는 것처럼 어리석고 불쌍한 일은 없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야말로 우리의 모든 보물을 쌓아둘 곳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마6:20).  진주장사가 자기의 모든 소유를 팔아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사듯이 우리의 모든 소유를 포기하고서라도 놓쳐서는 안 되는 나라라 하셨습니다(마13:45-46).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로 충만한 그 나라가 우리에게 임하기를 날마다 구하라고 명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그들이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를 가르치시며 하신 말씀 가운데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나라가 임하시오며"(마6:10) 하신 것 아닙니까?

  예수님께서는 여러 가지 쉬운 말과 비유로 하나님의 나라를 가르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심으로써 이미 우리 가운데 임했고 예수님께서 다시 오셔서 심판하심으로써 완성될 나라라 하셨습니다.  우리는 그 나라의 완성과 궁극적 도래를 날마다 하나님께 간구해야한다 하셨습니다.  그 나라는 하나님의 뜻에 대한 온전한 순종이 있는 나라이고 또 본래 그 나라를 상실했던 이유가 불순종이었기 때문에 그 나라의 회복을 간구하는 우리는 이 세상에서도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기를 힘쓰는 가운데 그의 나라를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가 회개하며 구해야 할 나라입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은 하나님나라의 도래를 알리며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3:2) 했습니다.  예수님 자신도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시며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4:17) 하셨습니다.  하나님나라의 백성다움을 되찾고 지키려는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또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가 심령이 가난한 자들의 것이고(마5:3),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들의 것이며(마5:10),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욕을 먹고 무고하게 온갖 악한 말을 듣는 이들이 상 받을 나라(마5:11-12)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잘 행하는 이들이 크다고 일컬음을 받을 나라이며(마5:19),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의를 행하는 자들은 받을 상이 없을 나라(마6:1)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런 나라를 예비하셨다는 것은 얼마나 기쁜 일인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까지 교만한 자, 불의한 자, 남을 박해하기 잘 하는 자, 험악하고 욕 잘 하는 자, 근거 없는 말로 험담하고 다니기 좋아하는 자, 진실하게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는 않으면서 자기과시하기를 좋아하는 자들이 설치고 다니고 높은 자리는 다 타고 앉으며 온갖 상은 다 차지한다면 얼마나 짜증나고 살맛 안 나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그런 일이 절대로 없을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 나라는 의인들이 해와 같이 빛날 나라라고 하셨으며(마13:43),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크게 되는 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18:4).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야 할 나라라고 가르치셨는데(마6:13) 아마도 교만하지 말고, 박해를 받더라도 의를 행하기를 택하며, 근거 없이 험악한 말이나 욕을 먹더라도 잘 참고, 진실하게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며, 사람들 앞에서 자기과시하기 위해 선을 행하지 않고, 큰 자리를 차지하기를 탐하지 않으며, 상 받는 일에 욕심내지 말라는 뜻으로 그 말씀을 하셨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 나라만을 구하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나라 말고도 구하는 것이 많은 사람은 들어갈 수 없는 나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재물에 대한 욕심을 버리지 못한 사람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는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렵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19:23-24).  하나님의 나라는 이 세상 사람들의 기계적 계산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의 계산법에 의해 다스려지는 나라입니다.  우리가 비록 이해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언제나 옳고 선하신 하나님의 뜻에 따라 다스려지는 나라입니다.  그 나라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형제와 이웃에 대해 사랑의 관심을 가지고 나누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행복할 수 있는 나라입니다.  입으로 "주여 주여" 하는 자들이 아니라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사랑을 베푸는 이들이 들어갈 나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나라를 구하라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그런 나라라면 또한 우리도 그런 사람 되기를 더욱 힘써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자녀들에게도 그런 사람 되라고 가르쳐야 할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나라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구하라고 하신만큼 반드시 올 나라입니다.  비록 우리의 육신의 눈에는 보이지 않고 언제 완성될지 아무도 모르기는 하지만 반드시 오는 나라입니다.  누룩이 들어간 밀가루 반죽이 부풀듯 소리 없이 그러나 확실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나라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마13:33).  그리고 그 나라는 도둑같이 예고 없이 갑자기 임할 나라입니다.  따라서 항상 깨어서 기다려야 할 나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만 아니라 그의 의를 또한 구하라 하셨습니다.  우리보고 하나님의 의를 구하라 하신 것은 그 이유가 궁금하기도 하고 또 두렵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사실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면 우리는 그 앞에 서있는 것은 고사하고 살아남을 사람이 하나도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고마운 것은 하나님께서 율법의 의가 아닌 다른 한 가지 의를 우리를 위해 예비하셨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에서 그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1:17) 한 것입니다.  또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 한 것입니다(롬3:21-26).  그리고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롬3:28) 한 것입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 나타내신 이 하나님의 의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고 거기 들어가고 영원히 살 수 있게 되었으므로 그의 의를 구하라 하신 것입니다.  먼저 그 하나님의 의를 덧입으면 그 외의 모든 우리의 문제는 다 해결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이 무엇입니까?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편에서의 자비와 관용과 용서를 구하는 것으로 그치는 것은 참으로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것이라 할 수 없습니다.  우리 편에서도 우리의 형제자매와 이웃들 사이의 자비와 관용과 용서를 실천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가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마18:21) 하고 여쭈었을 때에 대답하시기를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하시고는 한 예화로 하나님의 나라 백성의 도리를 가르쳐주셨습니다.  주인으로부터 만 달란트의 빚을 다 탕감 받은 어떤 자가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 한 사람이 빚을 못 갚자 그의 멱살을 잡아 끌고 가서 감옥에 가두었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에게 관용을 베풀지 않은 그 자에게 만 달란트를 탕감해주었던 주인이 그 소식을 전해 듣고는 분노하여 그 종을 다시 불러다가 말하기를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하고는 그 종이 그 빚을 다 갚도록 그를 옥졸들에게 넘겼다는 것입니다(마18:23-34).  이 이야기 끝에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마18:35) 말씀하셨습니다.

  만 달란트란 사실상 그 가치가 얼마나 되는지 정확히 알 수조차 없는 어마어마하게 큰 돈입니다.  종이 주인에게 만 달란트를 빚졌다는 것은 인간이 스스로의 힘으로는 무슨 수를 써서도 갚을 수 없을 만큼 하나님 앞에 크나큰 죄인이라는 뜻입니다.  주인이 종에게 만 달란트의 빚을 탕감해주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의 모든 죄를 거저 용서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무조건적이고 순수한 은혜를 말하는 것입니다.  말로 다할 수 없이 죄인인 우리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무한하신 긍휼과 사랑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반면 데나리온이란 보통 근로자의 하루 품삯에 해당하는 돈이었습니다.  만 달란트와 백 데나리온 사이의 차이는 최소 6000배에서 최대 100만 배에 이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비유 속에서의 악한 종은 최소한의 비율로 말하자면 자기는 6000만원을 탕감 받고도 자기에게 겨우 만원 빚진 사람을 옥에 갇히게 만든 사람입니다.  그리고 최대한의 비율로 말하자면 자기는 100억원을 탕감 받고도 자기에게 단돈 만원 빚진 동료를 옥에 갇히게 만든 자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악한 종의 비유를 통해 가르치시려고 의도하신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첫째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신 것에 비해 우리가 우리 사람들 사이에서 용서하는 것은 너무나도 작은 일이라는 것입니다.  둘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작은 용서 하나 하지 못하면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모 신학대학의 교수이신 어느 젊은 목사님의 경험담입니다.  박사학위를 받고 유학에서 돌아와서도 전임교수 자리를 얻지 못하고 강사생활을 하며 월 60만원으로 아내와 아이를 먹여 살려야 했던 때의 일이랍니다.  아이를 한 달에 20~30만원 하는 유치원에 보낼 수가 없어서 고심하던 중에 정부의 지원을 받기 때문에 석 달에 19만원만 내면 되는 어느 초등학교의 병설 유치원을 알게 되고는 기뻐했답니다.  경쟁률이 매우 높았지만 그 목사님의 아이는 입학이 되었답니다.  그런데 예비소집을 마치고 돌아온 목사님의 사모님이 우울한 얼굴로 돌아오셨다는 것입니다.  우셨는지 눈도 퉁퉁 부어있었다는 것입니다.  사모님이 우신 것은 아들의 입학허가 때문에 감격해서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생활이 어려운 가정들이 많은 지역이어서 맞벌이 일을 나가야 하는데도 아이가 유치원에 들어가지 못해서 안타까워하던 몇 몇 부모들이 있어서 그 유치원 원장 선생님이 이미 입학이 된 아이들의 학부모들에게 정원 30명 외에 다섯 명만 더 받으면 안 되겠냐고 호소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하자고 이 사모님이 찬성했더니 주위의 눈총이 싸늘해지더라는 것입니다. 대다수의 어머니들이 "애들이 늘면 교육환경이 나빠지니 절대로 그렇게 할 수 없다"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 반대에 부딪쳐 뜻을 이루지 못한 원장 선생님의 눈에는 이슬이 맺히고 추가입학을 기대했던 부모들은 울며 돌아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반대한 사람들의 상당수가 교인들이었다는 것입니다.  한 사람의 크리스천으로서 그 사모님은 원장 선생님과 입학이 불허된 아이들의 부모들에게 너무나 죄송해서 울며 돌아오셨다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는 지금 어디든지 장애인들을 위한 복지시설이라도 만들려고 하면 온 주민이 팔 걷어 부치고 나와 격렬히 반대시위를 하는 사회입니다.  요즈음 묘지나 납골당 세우기도 얼마나 힘든 줄 모릅니다.  그런 건 다 혐오시설이라는 것입니다.  혐오시설 들어서면 집값 떨어지고 땅값 떨어진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부모 없이 태어난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자기 부모의 묘를 가리켜서도 혐오시설이라 할지 물어보고 싶습니다.  자기 부모의 묘가 혐오시설 아니면 다른 사람 부모의 묘도 혐오시설 아닙니다.  어떤 학부모들은 자기 아이가 학교에서 선생님에게 야단맞았다고 학교에 몰려가 선생님을 자기들 앞에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게 하는 무도하기 이를 데 없는 행패를 부리는 우리 사회입니다.  교사의 권위가 추락하고 교권이 상실되면 그 악영향은 전체 학생에게, 아니 나라 전체에 미치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 아이만 손해 안 보면 남이야 어찌 되든 나라가 어찌 되든 상관없다 여기는 자들이 늘어만 가는 것 같습니다.  지독하게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이며 돈밖에 모르는 추악한 민족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이 땅에 정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져야지 우리는 사람답게 살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그 놀라운 은혜를 생각하며 감사와 사랑과 나눔의 삶을 실천함으로써 하나님의 나라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수영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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