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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어린이주일] 어린 아이 같이 (마 1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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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난 한 주간은 바빴습니다. 주초에는 대구 집회를 다녀오고 목요일 오전에는 희년감사예배, 오후에는 임직, 퇴임예배를 드렸습니다. 밤까지 평신원 강의가 있었고 금요일은 한마음체육대회로 바빴습니다.

이제 바쁜 행사는 끝나고 모든 것이 일상으로 돌아올 시간이 되었습니다. 다시금 우리가 누구며 무엇을 해야 하는 사람인지를 생각할 시간이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 말씀은 언제 있었던 일일까요?

여러분이 알다시피 예수님은 열 두 사람을 택하셔서 삼년 간 투자를 하셨습니다. 그 삼년 말에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장사한지 사흘 만에 부활하시고 하늘로 돌아가시면서 모든 것을 몇 안 되는 제자들에게 맡기셨습니다.

그 엄청난 사명을 맡게 될 핵심 분자들의 대화 내용을 들어보십시오. 무슨 심오한 철학적인 이야기도 아니고 깊은 영적인 내용도 아니고 무슨 비전이 담긴 대화도 아닙니다. 종종 상당히 한심스러운 내용을 나누는 제자들입니다.

오늘 어린이 주일을 맞이해서 한 어린이를 세워 가신 말씀을 가지고 우리가 앞으로 가야할 영적인 여정을 그려보길 원합니다. 이 여정에는 지상에 사는 모든 성도들이 통과할 세 단계가 있습니다. 이 세 가지를 달성했는지 여부에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삶을 기쁘게 받아주실지 여부가 결정됩니다.

1. 그 생각을 바꾸고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정으로 말한다. 너희가 죄에서 돌아서서 하나님께로 돌아와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너희는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열 두 제자가 모여서 열띤 토의를 했습니다. 주제는 누가 제일 잘났나 하는 것입니다. 이런 문제를 가지고 제자들이 논쟁을 한 것은 처음도 마지막도 아닙니다.

몇 장 뒤에 보시면 야고보와 요한은 어머니까지 동원해서 청탁을 합니다. “주님의 나라가 서거든 저의 이 두 아들을 하나는 주님의 오른편에 하나는 왼편에 앉게 해주십시오.” 다행이 하나님의 나라는 청탁에 따라 움직이지 않습니다.

운동장 한 구석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 모습을 보십시오. 모두들 누가 잘났는지, 선생님이 누구를 좋아 하는지 열심히 주장들을 합니다. 이런 상황이 되면 우리 주님께서는 그냥 지나가지 않으시고 꼭 한마디 하십니다. “모두들 잘못 생각들 하고 있어. 신분과 지위가 아니야. 하나님 나라에서는 칭호나 교육수준, 성공여부는 아무 상관이 없어. 하나님 나라에서는 세상 것과 전혀 달라.”

아직도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문제를 말하고 있다면 여러분은 여전히 하늘나라 밖에 있습니다. 여러분 모두는 이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여러분은 날 때부터 죄인으로 태어났고 결과로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어 있습니다. 하늘나라 밖에 있습니다.

우리중 아무도 자동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 태어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가족으로 태어난 것은 아닙니다. 아무도 “나는 언제나 크리스천이었어.”라고 말할 순 없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그리스도인이었던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오늘 아침 우리는 가장 중요한 질문에 대한 답을 하려고 합니다. 살면서 수 없는 일을 바르게 하더라도 이 문제를 잘못 생각하면 여러분은 그 값을 영원히 치루어야 합니다.

제자들이 둘러앉아서 ‘누가 제일 크냐’로 논쟁을 할 때 어린아이 하나를 등장시킵니다. 어린아이를 예화로 삼아 어떤 사람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지를 말씀해 주십니다. “어린아이처럼 되지 아니하면 천국에 들어갈 수가 없다.”고 선언하십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하늘나라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아이들은 단순합니다. 정직합니다. 잘난 체 하지 않습니다. 신뢰하고 쉽게 의지합니다. 어른처럼 자리다툼에 민감하지 않습니다. 신분이나 위치에 신경 쓰지 않습니다.

네 살짜리 아이가 유치부실에 들어가면서 “내가 제일 잘 났어.” 라고 스스로 생각할 리가 없습니다. 단순하고 순진무구함이 어린아이의 특징입니다. 금요일 한마음 체육대회장에서 어린이들과 함께 잠간 축구를 했습니다.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슛을 날렸는데 골인이 되었습니다.

그러자 한 어린이가 말했습니다. “목사님, 축구 잘 하네요.” 어른들은 아무도 감동하지 않지만 어린아이는 쉽게 감동합니다. 그래서 그들이 바라보는 세상은 경이롭고 기쁨으로 가득한 세상입니다. 십 미터도 떨어지지 않는 자리에서 날린 공에 감동하면 세상은 감동할 만한 것이 많이 있습니다.

어린이의 순진함과 정직함 때문이 아니라 주님께서는 그들이 쉽게 믿는 것 때문에 어린이를 제자들 앞에 등장시키셨습니다. 아이들은 생리적으로 신뢰하는 것을 아는 이들입니다. 어른처럼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어린 시절에 주님께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린이 전도에 주력하고 새로운 전략을 마련해야 합니다. 이번 여름성경캠프를 위해서 창조적인 아이디어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긴 요즈음 아이들은 옛날 같진 않습니다만 그래도 요즈음 어른들보다는 쉽습니다.

어린아이들은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자기 부모를 알아볼 수 있는 정도의 아이라면 하늘 아버지를 만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우리 죄를 용서하시려 죽으셨고 사흘 만에 새 삶을 주시려 살아난 것을 믿을 수 있습니다. 믿고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다.

머릿속에 뭐가 좀 들어가면 자기가 뭣을 좀 안다고 생각합니다. 그 머릿속에 아무 것도 없을 때에도 세상은 돌아가고 그 머리가 존재하지 않았을 때에도 세상이 존재했다는 것을 잘 잊어버립니다.

지적으로 접근해서 우리가 가진 모든 문제의 답을 맞추려고 들면 믿기가 여간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죄에서 떠나 하나님께로 돌아와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너희는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지적인 문을 통해서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렵습니다. 물론 신앙을 설명할 수 있는 수많은 증거들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명할 수 있는 수많은 증거들이 있고 그가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것을 입증할 증거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믿음은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으로 주님을 영접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도마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나를 보았으므로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복이 있다.”(요20:29)

믿음을 갖는 것은 사실 굉장히 똑똑한 두뇌를 필요로 하는 작업은 아닙니다. 오히려 너무 간단하고 너무 쉬워서 그대로 믿기에는 도무지 믿기가 힘들다는 것이 사람들의 고백입니다. 하지만 믿기만 하면 공짜로 얻는 선물입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 받은 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믿게 된 것조차도 여러분의 자발적인 의지로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인 것입니다.”(엡 2:8)

메시지 성경은 쉽게 풀어 설명합니다. “이렇게 구원은 우리가 선한 일을 하여 받은 보수가 아니므로 아무도 자신의 선행을 내세워 자랑할 수 없습니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아이디어요 작품입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것은 다만 하나님께서 구원을 하시도록 신뢰하는 것뿐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우리는 아무런 주도적인 역할을 하지 못했습니다. 만약 우리가 그랬다면 우리는 우리가 모든 것을 했다고 아마 자랑하고 돌아다녔을 것입니다. 아닙니다. 우리는 구원사역을 할 수도 우리 자신을 구원하지도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사역하시고 구원하셨습니다.”(엡2:8-10, 메시지성경)

어린이와 같은 마음으로 예수님을 오늘 영접하십시오. 불신앙으로 이 예배실을 떠날 필요는 없습니다. 마음을 열고 주님을 받아들이십시오. 여러분을 위해서 세상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을 구원자로 모시길 바랍니다.

2. 반갑게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나를 생각해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받아들이면 곧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5절)

이 구절이 말하는 근본 가르침은 이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과 그의 백성을 분리시킬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자녀 하나를 영접할 때 여러분은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자녀 하나를 돌보면 여러분은 하나님을 돌보는 것과 같습니다. 가난한자를 돕는 것은 하나님에게 꾸어 주는 것과 같다고 유대인들의 탈무드에는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을 핍박하던 사울이 들은 말을 기억하십니까? 다메섹으로 가는 그에게 주님은 나타나서 다그칩니다. “사울아, 사울아 어찌 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왜 너는 크리스천을 핍박하느냐고 말하지 않고 왜 너는 나를 따르는 자들을 핍박하느냐고 말하는 대신 “어찌 하여 나를 핍박하느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를 괴롭히는 것은 바로 자신을 괴롭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자기 백성과 자신을 동일시하십니다.

여러분이 고난당할 때 주님은 그것을 함께 겪으시는 분이십니다. 여러분이 모욕을 당할 때 주께서 모욕을, 여러분이 핍박 받을 때 주님이 핍박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여기서 말하는 바는 천국에 들어가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여러분이 천국시민이 되면 여러분이 다른 사람이 천국시민 되도록 돕는 일에 쓰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늘나라로 들어가는 문을 통과했다면 아직도 그 문 밖에 서서 서성이는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해야할 책임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인도하고 영접할 특권과 책임을 갖고 있습니다. 여기에 복된 소식이 있습니다. 확신을 가지고 초대하십시오.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이 아무도 멸망받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그리고 우리 울산교회는 모든 사람을 영접하는 교회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초대한 사람의 처신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우리는 어떻게 합니까? 우리는 그냥 잘 견뎌줍니다. 그러나 아이들은 같이 어울리면서 즐길 줄 압니다. 예수님은 이처럼 아주 특별한 이유를 가지고 어린이를 제자들 앞에 세우셨습니다. 어린아이들은 어떻게 재미있게 즐기는지를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 “받아들이면, 영접하면”하는 말은 열렬한 환영을 하며 영접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사람들이 잘 단장된 울산교회 예배당으로 발걸음을 옮기고 하나님을 아버지로 영접하면 하늘에서는 잔치를 베푼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 그렇습니다. 다른 번역에는 “한 사람이 하나님 앞으로 돌아올 때 마다 하늘에서는 축제의 나팔이 울려 퍼진다.”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저는 우리 울산교회가 사람들을 초대하는 곳으로, 사람들이 환영받는 곳으로 세상에 알려지기를 원합니다.

구약성경 열왕기하서를 보면 놀라운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때 사마리아 성은 포위를 당해 있었습니다. 아람 군사들이 성을 포위해서 모든 공급을 끊었습니다. 그래서 성중이 매우 굶주렸습니다. 백성을 굶어 죽어가고 있었고 비참한 처지에 있었습니다.

그 때 성문에 네 문둥병자가 앉아서 신세타령을 하고 있습니다. “이 상황에서 우리가 성중에 들어간다고 해서 누가 우리한테 먹을 것 줄 리가 만무하지 않느냐. 성한 사람도 못 먹어서 죽어나가는 판에 문둥이인 우리에게 줄 떡이 어디 있겠느냐?” “여기 앉아 있어도 죽는 것이고 들어가도 죽는 것 같으면 차라리 적진으로 가서 항복하여 혹시 살려주면 살고 죽으면 여기나 거기나 차이 날게 무엇인가?”하고 적군의 진영으로 다가갔습니다.

가서 보니 쥐새끼 한 마리도 없습니다. 적군들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말울음 소리와 병거 달리는 소리를 듣게 하사 밤중에 혼비백산해서 다 도망가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가끔 그런 일을 하십니다. 그냥 소리만 나게 해서 그 아람 군대가 밤중에 모두 줄행랑을 놓았습니다. 얼마나 급했던지 모든 것을 그대로 버려두고 도망을 쳤습니다.

상에 차려진 음식과 마실 것을 배부르게 먹고 훔치고 한참 바쁘게 하다가 생각해보니 자신들이 하는 소행이 옳지 못한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성중에는 기근으로 죽어나가는 사람들이 줄을 잇는데 이처럼 풍성한 먹을거리를 두고 자신들의 배만 채운다는 것이 나쁜 일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사마리아성으로 돌아갑니다.

그래서 문둥병 환자들은 성문으로 달려가서 문지기들에게 큰소리로 그 소식을 알렸습니다. “우리가 아람군의 진지에 들어가 봤는데 군인도 없고 사람 소리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말과 나귀들만 부대 안에 매여 있을 뿐 막사는 텅 빈 그대로 모두 남아 있었습니다.”

사람들의 생명을 구할 좋은 소식을 갖고 있으면서 그것을 사람들에게 알리지 않고 우리끼리만 알고 있다면 그것은 나쁜 일입니다. 그것은 죄악입니다. 그래서 죤 스타트는 “침묵하는 죄”라고 하는 책을 썼습니다. 그리스도인의 공통적인 죄 중의 하나가 침묵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생각 해 보세요. 여러분이 어떻게든 사연들은 달랐지만 예수를 알고 나니까 주일날 교회 나와서 이렇게 찬양하면서 기뻐하고 있는데 우리의 삶이 달라졌는데 아직도 우리가 옛날에 살던 식으로 살고 있는 저 죽어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 우리가 침묵하고 있다면 우리는 범죄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과 저는 온 세상에 나가서 알릴만한 좋은 소식을 갖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알면 가장 기뻐하고 감격할 소식을 우리는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아가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람들을 영접해야 합니다. 예수께서 그렇게 하신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손을 내밀어 서로를 환영하십시오. 예수께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이제 여러분이 그렇게 해야 합니다.”(롬15:6, 메시지성경)

이제 우리 울산교회는 이웃들을 초대하기에 부끄럽지 않는 환경을 구비했습니다. 좋은 인상을 줄 수 있는 아름다운 정원을 마련했고 아늑하게 예배할 수 있는 예배실 환경도 꾸몄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손을 내밀어 서로를 환영해야 합니다. 예수께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이제 여러분이 그렇게 할 차례입니다. 여느 해 같으면 지금쯤 새로운 얼굴들이 밀려들 시점인데 지난 4월 이후에 발길들이 뜸해졌습니다. 희년행사에 바쁘다보니 왜 우리가 이 행사를 해야 하는 지를 정작 잊고 있나 봅니다.

지난 주간으로 축제도 지나갔습니다. 이제는 일상으로 돌아가서 우리가 누구며 무엇을 하기 위해 세상에 존재하는지를 다시금 새겨야 할 때입니다. 우리에게 소중한 사람들을 이제는 말씀 앞에 초대하는 일들을 시작해야 합니다.

그분들을 맞이할 외부적인 환경을 꾸미는 일에 신경을 썼다고 하면 이제부터는 그분들을 초대해 와야 되는 그 일에 마음을 모아야 되겠습니다.

그래서 5월 마지막 주일부터 4주간 동안 울산시민이라면 누구나 관심을 가질만한 주제를 가지고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말하자면 나흘 동안 집중해서 생사나 축제를 했지만 이제는 주일마다 매번 여러분이 태신자 누구를 데리고 와도 좋을만한 수준의 예배를 준비하고 말씀을 전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이웃과 친구들을 초대할 수 있도록 지금부터 준비에 들어가야만 됩니다. 어느 날 갑자기 느닷없이 나타나서 “교회가자” 그러면 “이 사람이 무엇을 잘못 먹었나?”그러잖아요. 사람들이. 그러지 말고 5월말부터 시작할거니까 지금부터 시작해서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가면서 관계를 만들어가야만 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나를 생각해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받아들이면 곧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5절) 그렇습니다.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주님을 영접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웃이든 친구든 누구든지 영접하면 주님을 영접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존경하는 마음으로 여러분의 구역모임과 교회당에 초대하십시오. 그 때 하나님을 초대하는 기쁨을 여러분은 맛보게 될 것입니다. 신앙생활의 두 번째 단계는 집을 열고 이웃을 환영하며 그들을 기쁨으로 영접하는 것입니다.

3. 다른 사람들을 인도하고 모델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읽은 본문의 마지막 절은 무서운 구절이고 정신을 번쩍 들게 하는 구절입니다. “그러나 만일 나를 믿는 이 작은 사람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가 누구든지 간에 목에 연자맷돌을 달고 깊은 바다에 던져지는 편이 나을 것이다.”(6절)

부모라고하면 이런 책임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이들을 우리 가정에 위탁하셨습니다. 우리의 사명은 좋은 모델역할을 하므로 그들이 우리가 알고 믿고 사랑하고 섬기는 하나님을 섬길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단지 자녀들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울산교회 성도라면 우리를 따라서 신앙의 걸음을 걷는 초신자들을 위해서 우리 모두가 부모의 역할, 좋은 모델의 역할을 감당해야만 합니다.

예수께서 어린아이를 세우신 또 다른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린이는 쉽게 영향을 입습니다. 동시에 그리스도인도 쉽게 영향을 입습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을 하는 우리들의 책임이 막중합니다.

제가 아는 어떤 그리스도인은 교사로서 시골학교에 부임해서 학생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우연한 기회에 이웃 동네 청년들에게도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그 그룹들이 모여서 예배를 드리면 특징이 하나 있습니다. 그게 뭐냐면 찬송가를 부를 때 찬송가를 두 손으로 받쳐 들고 찬송을 불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떤 청년의 어머니가 연락을 했어요. “우리 아들 고기반찬을 먹으라고 해 주십시오.” 그렇게 연락을 한 것입니다. 이 선생님 식탁에 생선이 오른 적이 없었던가 봅니다. 고기를 안 먹으니까 곁에서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이 “예수 믿는 사람들은 고기를 안 먹는가보다.”이렇게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말하지 않았는데도 집에 가서 자기도 고기를 안 먹은 것입니다. 엄마가 아들 먹이려고 고기반찬 했는데 안 먹어 보세요. 얼마나 속상하는지. 그래서 먹어도 된다는 이야기를 해 달라고 한 것입니다.

왜 그런지 압니까? 그 동네에서는 이 선생님이 유일한 크리스천이었어요. 유일한 역할모델을 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예배드릴 때 찬송가를 두 손으로 받쳐 드니까 찬송은 저렇게 불러야 되는 줄 알고 다 그렇게 부른 것입니다. 식탁에 고기가 안 오르니까 편식 때문인 줄 모르고 예수 믿는 사람은 그래야 되는 줄 알고 안 먹은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역할모델 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좋은 모델이 되기 위해서 여러분이 해야 될 또 하나 중요한 게 있어요. 그것은 서로 비판하지 않는 것입니다. 서로 비난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는 서로 비판하지 마십시오. 형제가 나쁘다고 생각하는 일을 보란 듯이 해서 그를 걸려 넘어지게 하는 생활은 하지 마십시오.”(롬14:13)

교회에 세운 지도자들을 함부로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초신자들에게 그렇게 말하는 것은 그 영혼을 위험에 빠뜨리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어린아이들이 있는 자리에서 여러분의 목사를 비난하는 것은 정말 삼가야 됩니다. 그것은 어린아이의 영혼을 바다에 빠뜨리는 것 같은 도박입니다.

“내 마음대로 할꺼야.”라고 말하는 것은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태도가 아닙니다. 성숙한 그리스도인은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서 행동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역할모델을 잘 감당하는 사람입니다. 내 행동이 처음 신앙의 길을 걷는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줄 것인지를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살면서 자기 뒤에 따라오는 사람들의 역할모델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과거의 삶이 어떠했더라도 지금부터라도 좋은 역할모델 노릇을 해야 합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처럼 여러분도 나를 본받으십시오.”(고전11:1)

오늘 우리는 좋은 모델을 찾기 어려운 망가진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좋은 역할모델을 하기로 결심하는 성도들이 많아져야 내일의 세상이 희망이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사람들은 우리가 하는 말에 감동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우리의 삶을 보기를 원합니다.

가끔 우리는 초신자들에게 말합니다. 신앙생활을 할 때 사람을 보지 말고 하나님을 바라보라고 말하곤 합니다. 맞는 말입니다만 때로는 무책임한 말이기도 합니다.

여러분도 하나님만 쳐다보는 게 쉽지 않은데 처음 시작하는 사람보고 그렇게 말하는 것이 맞는 말입니까? 바울이 말한 것처럼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은 것처럼 여러분도 나를 본받는 자가 되시오.” 이렇게 말해야 옳지 “사람 보지 말고 하나님만 보고 믿어야 돼.” 그렇게 하는 것은 우리 역할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하지만 살과 피를 가진 우리 같은 사람들의 모델이 그들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현실 속에서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보여줄 역할모델이 필요합니다.

바울은 디모데를 향해서 말합니다. “나이가 젊다는 이유로 얕잡아 보이게 하지 마시오. 오히려 그들에게 모범이 되시오. 말과 생활로 모범을 보여 그들이 따르게 하고 그대의 사랑과 믿음과 순결한 사상으로 그들에게 본보기가 되시오.”(딤전4:12)

디모데만 아니라 우리 모두가 신앙의 삶을 시작하는 이들에게 본보기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다른 사람들을 넘어지게 할만한 언행을 삼가야 합니다. 특별히 10년, 20년, 30년 오랜 신앙생활을 한 사람들은 정말 좋은 역할모델이 되어 주셔야만 됩니다.

말씀을 맺기 전에 왜 예수께서는 어린이를 사용하셔서 이런 진리를 보여주려고 했을까요? “그때 사람들이 어린아이들을 예수께 데리고 와서 머리에 손을 얹어 기도해 달라고 청하였다. 그러자 제자들이 데리고 온 사람들을 보고 ‘우리 선생님을 괴롭히지 마시오’하고 나무랐다. 그러자 예수께서 ‘어린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막지 말라. 하늘나라는 이런 어린아이들과 같은 자들의 것이다’하시고 그들의 머리 위에 손을 얹어 축복해 주시고 그곳을 떠나셨다.”

여러분에게 마지막으로 부탁합니다. 아직도 믿음의 출발을 하지 못하신 분들이 여기 앉아계신다고 하면 어린아이와 같은 신앙으로 주님께로 돌아오십시오. 이미 신앙의 길을 나선 여러분들은 다른 사람들을 주님께로 인도하는 역할을 감당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신앙생활을 오래 하신 분들은 마땅히 신앙의 좋은 본보기가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누구라도 이 길을 걸을 때는 마땅히 따라야 할 세 단계를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으로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여만 합니다.

어린아이 하나를 인도하는 것이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과 같은 특권을 여러분은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세상사는 날 동안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모델이 되고 있다는 것, 여러분의 행동을 주시하면서 닮아가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됩니다. 그것이 어린이날 여러분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아멘 (정근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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