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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령강림주일]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합 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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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는 것보다 뛰어야 하고, 뛰는 것보다 날아야 합니다. 나는 것도 하느작거리면서 나는 것이 아니라 ‘쌩-’ 하고 날아야 합니다. 남보다 5분 먼저, 10분 먼저 뭔가 해야 큰 소득이 생긴다고 생각합니다. Time is money. 시간은 돈입니다.
신문 한 귀퉁이에서 본 내용. “미국 사람은 평균 기다리는데 5년이란 시간을 들인다.” 많이 기다리는지 적게 기다린 건지는 알 수 없지만, 가끔 외국에 대한 T. V나 영화를 보다보면 굴지어 서서 기다리는 그들의 모습을 봅니다.

홍제동 고개 너머 인왕산 기슭에서 자취한적 있었는데, 그때에 공동수도에 가서 물을 길러다 먹었다. 한겨울 그 추위에 물지게지고 줄을 서서 기다린다고 하는 그것은 차라리 먹지나 말자 그런 마음이 있었습니다. 기다림은 그만치 힘이 듭니다.
성공하려면 남보다 앞서야만 하는 것입니다. 기다리고 자시고 할 겨를이 없는 것입니다. 한탕주의도 기다리지 못해 생기는 것이고, 공사장의 붕괴 사고나 날림공사도 기다림이라는 과정을 무시하거나 단축시키려다 보니 생긴 것이라 생각됩니다.
자식도 5. 6살이 되면 한글은 물론 영어도 알고 그래야 뭔가 안심되고, 그것도 부족해서 각종 학원으로 순례를 시킵니다. “바쁘다 바빠”를 연신 외쳐대야 뭔가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세상은 다윗의 후손으로 태어나시는 구세주를 뵐 때까지 기나긴 세월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예언자의 예언이 있은 지도 수백 년 그들은 기다리고 기다렸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가 있었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 이상한 모습한 사람이 외치고 있어서 그가 곧 하나님의 약속이신 메시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오히려 자기 뒤에 오시는 이를 더 강조했습니다.
그리고선 나타나신 이가 예수. 수많은 사람들, 예수님의 제자들,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오셨으니 뭔가가 이루어지리라 생각했습니다. 이제 그들이 바라고 원하던 일들이 이루어지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일이 전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약하디 약한 한 인간으로 계셨습니다. 가끔 인간 이상으로서의 능력도 행하셨지만, 그래도 로마의 압제를 받던 이스라엘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하시지 않고 계셨습니다. 답답하게 여기던 가룟유다가 예수님을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에게 넘겼던 것은, 꼼짝없는 절박한 순간에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뭔가를 하시리라 생각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냥 계셨습니다. 때리면 맞았고, 십자가에 못 박았을 때를 고통스럽게 그냥 당하셨습니다. 결국 죽으셨습니다. 뭔가 이루어지고 무슨 일인가 생기기를 바랐던 이들은 허탈함에 빠졌습니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인 결과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께서 죽으신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이제는 정말 뭔가가 있으리라 제자들과 수많은 사람들이 기대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죽었던 사람이 다시 살아났으니’ 말입니다. 이보다 더 확실하게 보장 되는 믿을 거리가 어디 있습니까? 성경에는 안 나와 있지만 이때의 제자들의 마음은 붕 떠있었을 것입니다.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을 본 제자들은 어떠했겠습니까? 예수 따라 간다고 집이고 뭐고 다 팽개쳤는데…….

유대인들의 명절인 오순절이 가까워 오자 이들의 마음은 더욱 쿵덕 쿵덕 뛰고 있었을 것입니다. 오순절은 유대인들의 명절이기에 국외에 나갔던 사람들도 예루살렘 성전으로 들어오는 그런 날이었으니, 예루살렘에 뭔가 하시려면 이날이 바로 그날이 되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D-day인 것입니다.

그런데 오순절은 꼭 10일 남겨둔 날. 제자들을 모이게 하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고 하셨습니다.

‘기다려라.’ 아니 기다리라니? 얼마나 기다리라는 건가? 왜 기다려야 한단 말인가? 그래서 제자들이 답답하고 궁금해서, “주께서 이스라엘을 회복하심이 이때입니까?”하고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예수님은,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바 아니요(마가복음 13:32과 마태복음 24:36에는, “아들도 그날과 그 때를 모르나니”라고 하셨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의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서는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제자들에게 천사가 나타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다시 오신다’고 하는 약속입니다. 아니 다시 오실 분이 왜 하늘로 가셨을까? 능력이 부족해서 그야말로 인자들이 있어야 하는 살아야 하는 집이 없어서 집 마련하시느라고? 어느 분이 천국에 가보니까 새 예루살렘성전이 만들어지는데 이제 거의 다 만들어졌더라고. 그것이 다 만들어지면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거라고. 그래서 가셨다는 건가?
쉬운 말로 “예수 믿는 사람은 구원, 안 믿으면 멸망”이라면, 예수님께서 하늘로 올라가시고 어쩌고 하실 필요 없는 겁니다. 그냥 그때 하늘로 올라가실 때, 예수 믿는 사람들은 데리고 가고, 안 믿는 사람은 이 땅에서 죽든 말든 그냥 내 버려두시면 되는 겁니다.
그런데 “내 다시 오마.” “너희는 성령을 받을 때까지 기다려라.”

“기다려라.” 그것이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입니다.
그래요. 그리스도인들은 기다리는 사람들입니다.
문제는 무엇을 기다리느냐 하는 것인데, 사도행전 1:4은,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이라고 합니다. 그것은 곧 성령세례입니다. 성령세례를 받기위해 기다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령세례 받는 것이 구원에 꼭 필요한 것일까? 요한복음 3:5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성령이 아니라 물로 거듭나도 된다는 것 아닌가?
예수님의 십자가 옆에 달린 강도는 물과 성령으로 거듭날 것도 없이,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하는 말 한마디로 구원 받았습니다.
또 예수님께서 성령 주시려면 기다려야 할 이유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면서 바로 제자들에게 주시고 가실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냥 “기다려라. 성령세례 받을 때까지” 그러시고 승천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다려야 됩니다. 우리는 성령 따라 받을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조금 더 하나씩 살펴보면,
처음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성령임재는 곧 세상 끝 날에 나타나는 하나의 증표로 간주되었습니다.
이미 오래 전 요엘 선지자가 예언했습니다.(욜 2:28-32)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을 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그때에 내가 내 영으로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하나님의 영은 말세 곧 세상의 마지막 때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도 “예루살렘을 회복할 때가 이때 입니까?” 하고 물은 것입니다. 메시아가 오시면 세상은 끝나고, 새로운 세계가 창조되는 겁니다. 그래서 세상 끝날 주어지는 것이 성령입니다. 지금 그 성령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세상은 끝나고 새로운 세계가 열리는 따라 이때란 말인가? 그런 생각을 제자들이 가진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은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른다고 하셨습니다. 심지어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 자신도 모른다고 하셨습니다.
무슨 말씀? 예수님은 임박한 종말에 대한 모든 기대를 포기하게 하셨습니다. 또 재림의 때에 대한 어떠한 질문도 철저히 하나님께서 배제시키셨습니다.
만약 6개월 밖에 또는 1년 밖에 못산다는 선고를 받았다고 하면 어찌될까?
두 가지의 상반된 반응이 있을 겁니다.
만약 2007년 5월 28일이 내 죽는 날이라고 합시다. 하나는, 그 날만 바라보고 안타까워  하는 삶입니다. “어차피 1년 밖에 못 사는데…….” 그리고선 삶을 포기하는 겁니다. 또 하나는,
그 죽는 날을 잊어버리고 하루하루를 최선을 다해 사는 삶입니다.

이번에 제주를 다녀오면서 세 사람을 만났습니다. 완도 충만교회의 왕전도사님. 16년 된 교회이지만 작고 보잘 것 없는 교회에서 열심히 목회하십니다. 제주 기적의 교회 정성학 목사님. 출석 인원이 150명 넘어 본 게 두 번밖에 없었다는 교회이지만 50억을 드려 교회를 건축하고 있는데 90% 정도 끝났답니다. 앞으로도 10억 정도 더 들 거랍니다. 그리고 살아있지는 않지만 김영갑이라고 하는 분. 오랜 전에 이분에 대한 신문의 글을 읽고 만나고 싶었는데, 마침 그분이 남긴 갤러리에 들를 수 있었습니다.

김영갑님은 1957년생입니다. 1982년부터 제주가 좋아서 제주에 살고 잇는 사진작가입니다. 밥 먹을 돈을 아껴 필름을 사고 배가 고프면 들판의 당근이나 고구마로 허기를 달랬다고 합니다. 어느 날부턴가 손이 떨리기 시작하고 이유 없는 통증에 시달렸답니다. 서울의 한 대학병원에서 진단이 나왔는데 ‘루게릭’이라는 병이랍니다. 근육이 굳어가는 병입니다. 일주일 동안 식음을 전폐하고 누웠다가 일어났습니다. 그리곤 퇴화하는 근육을 놀리지 않으려고 폐교된 초등학교를 구해서 손수 몸을 움직여 사진 갤러리를 만들었습니다. 그 갤러리 이름이 ‘김영갑 갤러리 두모악’입니다.
그의 사진과 글을 담은 책 <그 섬에 내가 있었네>의 마지막에는 이런 글이 있습니다.
“살고 싶다고 해서 살아지는 것도 아니요, 죽고 싶다고 해서 쉽사리 죽어지는 것도 아니다. 기적은 내 안에 일어난다. 내 안에 있는 생명의 기운을, 희망의 끈을 나는 놓지 않는다. 사람의 능력 밖의 세계를 나는 믿는다.”

예수님은 이 두 번째 반응을 요구하신 것입니다. 성령 세례 받는 것은 세상 종말이 아니라 오히려 세상의 시작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적어도 그리스도인들은 위로부터 주어지는 것을 기다려야 하고, 그 주어지는 것으로 새롭게 삶을 시작해 나가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성령 받으면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언이 되라고 하신 것입니다. 성령 세례 받으면 땅 끝까지 이르러 복음의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땅 끝까지 이르러 복음의 증인이 되는 시작이 곧 성령 세례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는 이스라엘에 국한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당시 예수님을 따르는 몇 사람에게 국한된 것도 아니었습니다. 복음이 예루살렘에서 로마로 전파되는 이 교회의 역사가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라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구원 역사 속에서 제자들은 예루살렘에 잠잠히 머물러 기다려야 하고, 하나님께서 하시는 성령의 역사를 따라 땅 끝까지 복음이 증거 되는 이 구원을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
신앙생활 하는 것 내가 하는 것 같지요? 아닙니다. 그것은 성령께서 하십니다. 우리는 그 성령께서 하시는 것을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은 “주께서 이스라엘을 회복하심이 이때니이까?” 하며 조바심을 갖고 흥분했습니다. 이제 우리가 뭔가 나서야 할 때가 되었구나 싶었을 겁니다. “성령 주신다니, 그것 받으면 뭔가 굉장한 일도 해 낼 수 있을 거야. 해보자” 하고 생각했을 겁니다. 그런데 주님은 “기다려라.” 하십니다. 때와 기한은 하나님의 권한이라 하십니다. 오히려 제자들은 기다리면서 스스로 비워야 했습니다. 성령이 하시는 일을 따라 스스로를 비워야 했습니다.

근래의 가장 큰 문제 중 하나는, 성령 받았다 하면 뭔가를 자기 손을 이루어 보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성령 보다 자기가 앞서 나갑니다. 아닙니다. 성령께서 하시는 일을 따라 스스로 비워나가는 것이 성령 받은 자의 자세입니다.
“이스라엘을 회복하심이 이때니이까?” “아니다. 그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 있다.” “너희는 성령은 받을 때까지 기다려라. 그리고 성령 받으면 복음의 증인이 되라. 땅 끝까지 복음이 증거 될 때까지 스스로를 비우고 기다리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기다리지 못하는 우리의 성급한 행동으로 얼마나 많은 시행착오와 위기와 실수를 저지르는지 모릅니다. 짧은 기간에 성공하기를 원하고, 한 순간에 성령의 임재를 체험하고픈 유혹에 빠집니다.

사도행전 8:18-19, 시몬이라는 어떤 마술쟁이는 돈으로 성령을 받으려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는 것을 배우기까지 엄청난 대가를 치렀습니다. 고향을 떠나는 것은 약과입니다. 하늘의 별, 땅의 티끌 같은 후손은 약속 받았지만 나이만 먹어갈 뿐이었습니다. 기다리다 못한 그는 서둘러 하갈을 취하였습니다. 그 결과, 기다리지 못한 그 어리석음 때문에 하갈의 몸에서 난 이스마엘과 그 후손으로 인해 엄청난 대가를 치르게 되었습니다.

사무엘상 13:8 이하, 15:22, 사울 왕은 길갈에서 사무엘을 기다리지 못하고 자기가 하나님 앞에 제사를 지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께서 사울을 떠나셨습니다.
모든 시련 과정을 거쳤던 모세가 그의 백성들에게 행한 처음 설교는,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출 14:13)는 것이었습니다.
자기를 비우고 기다리는 기다림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마술쟁이 시몬에게는 돈이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에게는 아직은 아기를 갖게 할 수 있었고 하갈이라는 여인이 있었습니다. 사울 왕에게는 나도 제사 드릴 수 있다는 교만이 있었습니다. 뭔가 가지고 있었다고 할 때 그들은 실패 했습니다. 그들 생각에, “이렇게 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려야지” 했겠지만 오히려 그것은 실패하는 일이 되었습니다.
신약 성경에 나오는 수많은 병자 이야기. 모두가 일정기간이 있었습니다. 나면서부터, 12년, 18년, 38년 동안 주님 만날 때가지 기다려야 했습니다. 그들 모두, 세상 의원들이 더 이상 고칠 수 없다는 선고를 이미 받았습니다. 전혀 가능성 없는 사람들, 그래서 예수님의 능력을 기다릴 수밖에 없는 사람들, 그들이 믿음의 역사를 볼 수 있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는 너무 분주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들을 사이가 없습니다.
우리는 너무 말을 많이 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실 사이가 없습니다.
우리는 너무 강합니다. 성령이 하시기 전에 내가 먼저 해버립니다.

성령의 임재를 통한 주님의 능력과 음성을 원한다면 잠깐 조용히 기다릴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만약 주께서 너무나 오랜 동안 이미 기다리게 하셨다면 지연된 만큼 우리가 받을 은혜는 더욱 커지고 있지 않겠습니까?

선지자 하박국.
초소에 버티고 서서, 눈에 불을 켜고, 망대에 서서, 자기의 질문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을 기다립니다. 그때 하나님은 그에게 말씀하셨고, 기록하시도록 하실 묵시는, ‘때가 되면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겁니다.
“비록 더딜지라도”
비록 더딜지라도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뜻을 반드시 이루십니다.

그런데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결코 더디지 않습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여러분으로 충만케 하시길 원하십니다. 그리고 성령 충만한 여러분을 통해서 또한 당신의 뜻을 이루시길 원하십니다. 초대교회같이 한 마음으로 기도합시다. 그래서 오순절의 성령임재를 경험합시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증인으로서의 삶을 사시는 우리 모두 되길 축원합니다. (이영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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