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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점진적인 신앙고백 (마 14:2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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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신앙에서 언제나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바르게 아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예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예수님을 제대로 믿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점진적으로 자라고 있는 제자들의 신앙 고백에 대해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오병이어 사건이 있은 후, 예수님은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여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가게하시고, 그 동안 무리들을 흩어 보내셨습니다. “재촉”이라는 단어는 ‘억지로나 강제로 시키다’는 의미입니다. 성경에서 강요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발견하기란 쉽지 않은데, 왜 그러셨을까요? 요한복음은 그 이유를 기록했습니다. 오병이어의 사건 이후, 사람들은 예수님을 모세가 예언했던 ‘그 선지자’ 곧 ‘메시아’로 생각하고 ‘억지로’ 왕으로 추대하려는 마음을 가졌는데, 이를 아신 예수께서 혼자 산으로 떠나가셨다는 것입니다(요 6:14-15).

무리들이 예수님을 성경에 예언되었던 ‘메시아’로 생각한 것은 옳았습니다. 그러나 그 분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을 바르게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죄로부터 구원하실 메시아가 아닌, 로마의 압제로부터 구원하실 정치적 메시아를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가난과 굶주림으로부터 구원하실 메시아를 갈망했습니다. 오병이어의 놀라운 기적을 일으키신 예수님이라면 그들이 기대하던 바들이 모두 이루어질 것 같았기 때문에 강제로라도 붙들어서 왕을 삼으려 했습니다.

그들은 큰 기적을 체험하고 예수님께 열광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예수님을 환호했습니다. 정말 신앙이 좋은 사람들처럼 보일 수 있지요. 그러나 예수님은 열광하는 그들을 속히 떠나셨습니다. 자신뿐만 아니라 제자들 또한 ‘재촉해서’ 그 무리로부터 떠나게 하셨습니다. 왜요? 그들이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을 오해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님 자체나, 그분으로 말미암는 죄로부터의 구원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기적의 결과로 나타난 풍성한 삶에 관심이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그분만 붙들면 앞으로 먹고 살 걱정이 없겠고, 그분만 있으면 식민지에서 해방될 수 있겠다는, 한마디로 땡잡았다는 생각이 든 것입니다.

보다 심각한 문제는 제자들 중 어느 누구도 그런 무리들을 보고 말리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무리들의 열광적인 반응에 그들도 감염될 가능성이 많았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에게는 심각한 기도제목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과 무리들을 보낸 후에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 저물도록 기도하셨습니다(23). 예수님은 무리들의 열광이 바른 신앙이 아님을 아셨습니다. 그들의 바른 깨달음을 위해 기도하셨을 것입니다. 무엇보다 제자들만큼이라도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왜 이 땅에 오셨는지에 대해 바르게 알 수 있도록 기도하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제자들로 하여금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무엇을 하러 오신 분인지에 대해서 새롭게 깨달을 수 있는 환경을 예비하고 계셨습니다.

24절을 보면 배가 이미 육지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는데, 역풍이 불어서 파도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건너편으로 가라 하셨기 때문에 그들은 역풍 속에서도 뱃머리를 돌리지 않고 전진하려 애쓰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쉴 틈조차 없이 사역하다가 그날 모처럼 휴가를 얻어 뱃새다 빈들에 왔었습니다. 그런데 쉬기는커녕 5,000명이 훨씬 넘는 무리들을 해지도록 섬겨야 했습니다. 이제야 호수 건너편으로 가서 쉬려는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역풍을 만난 것입니다. 밤 사경이면 새벽 3시부터 6시 사이입니다. 그때까지도 제자들은 잠도 못자고 역풍과 싸우고 있었습니다. 얼마나 힘들고 고달팠겠습니까?

제자들은 애쓰고 또 애썼으나, 거의 진도를 나가지 못했습니다. 제자리만 맴도는 것 같았습니다. 점점 지치고 힘이 빠져서 이제는 제자리를 지키기도 힘겨웠습니다. 그렇다고 뱃머리를 돌릴 수도 없었습니다. 제자들은 곤궁에 빠졌습니다. 한 가지 이상한 것은 그들의 모든 수고가 예수님의 뜻에 순종하는 가운데 있었다는 것입니다. 뱃새다 빈들로 가자고 하신 것도 예수님이고, 무리들을 섬기도록 한 것도 예수님이고, 강 건너편으로 가라고 명하신 분도 예수님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뜻에 순종하기 위해 수고를 참고 견뎠던 셈입니다. 그런데 이제 탈진해서 더 이상의 고난은 버틸 수 없을 지경이 되었습니다.

묘하게도, 그날 밤에 제자들로 가장 놀라게 했던 것은 예수님 자신이셨습니다. “제자들이 그 바다 위로 걸어오심을 보고 놀라 유령이라 하며 무서워하여 소리지르거늘”(26) 제자들은 예수님이 바다 위를 걸어오시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습니다. 물위를 뭔가가 저벅 저벅 걸어오는 것을 보고서는, 빠져 줄을 때가 되니까 물귀신이 찾아 온 줄 생각했습니다. 다 큰 어른들이 ‘엄마야’하고 소리 질렀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들은 무서워서 소리를 질러댔습니다. 그들은 절망할 수 있는 최대한의 상태까지 이르렀던 것입니다.

그들은 가장 절망적인 상태에 도달했다며 놀랐지만, 우리는 압니다. 예수님께서는 결코 그들의 고난을 모르시지 않았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들이 가장 힘들어 하고 가장 무서워 할 그 때에, 실상 우리 주님은 가장 가까이에 계셨습니다. 죽는 것 외에는 더 이상 방법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는 그 순간에 우리 주님은 구원의 손길을 내밀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두려워하는 그들에게 즉시 대답하셨습니다.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27)

아이들이 잠을 자다가 무서운 꿈을 꾸고서  소리를 지르며 울 때가 있습니다. 어두움 속에서 그들은 현실과 꿈이 분간하지 못합니다. 그 때 그 아이들의 표정은 두려움과 절망뿐인 것 같이 보입니다. 그 때에 부모들은 아이들을 꼭 안아주며 말합니다. ‘엄마 여기 있어. 이제 무서워하지 않아도 돼’ ‘아빠 여기 있다. 이제 괜찮아’ 아이들은 엄마와 아빠 품에서 다시 평안을 찾습니다. 이처럼 소리 지르던 제자들은 예수님의 음성을 통해 일단 안심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때 베드로가 말했습니다. “주여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28) 베드로가 그 상황에서 왜 이런 난데없는 말을 했는지 어리둥절합니다. 다소 엉뚱하기도 하고, 충동적인 것 같기도 하지만, 어쨌든 베드로는 주님께서 말씀하시면 무엇이든지 가능하다고 믿었던 것 같습니다. 또한 주님께서 말씀하시면 언제 어디서든 순종하려는 자세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오라”하셨고 베드로는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갔습니다(29).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베드로가 단순하게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였을 때, 그는 물 위를 걸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강한 바람이 불어오자 갑자기 베드로는 무서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 생각이 들자 물속으로 빠져 들었습니다. 물에 빠지니까 더 두려워졌고, 두려워 하니까 더 물속으로 빠져 들어갔습니다. 베드로는 다시 소리를 질렀습니다.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30). 그러자 예수님은 “즉시 손을 내밀어 저를 붙잡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31). “왜 의심하였느냐”라는 예수님의 대답은 베드로가 의심하였기 때문에, 두려움에 사로잡혔고, 두려워졌기에 물속에 빠져들었다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예수께서 두려워하던 베드로를 구원하시고 그와 함께 배에 오르자 바람이 그쳤습니다(32).

베드로는 예수님의 능력에 대한 확신이 있었습니다. 오병이어로 5,000명이 넘는 무리를 먹이신 예수님이시라면 물 위를 걷게 하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단순하기도하고 충동적이기도 하지만, 사실 그 순간 베드로의 신앙은 위대해 보입니다. 잠시라도 의심 없이 완전하게 믿었던 순결한 믿음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잠시 동안 위대하고 순결했던 그의 믿음은 곧 흔들리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의 믿음을 보시고 “믿음이 적은 자”라고 부르셨습니다. 마치 뒤뚱뒤뚱 걸음마 하다가 넘어지는 아기처럼 보신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물 위를 걷는 체험을 한다는 것은 어지간한 믿음이 있는 사람이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일이라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지속적으로 그 믿음을 유지할 수 없다면 그 사람은 예수님이 보실 때, 믿음이 적은 사람입니다. 비록 한 순간 위대하고 순결한 믿음의 능력을 보였다 할지라도, 그 신앙이 지속적이지 못하고 흔들리는 것이라면 믿음이 적은 것입니다.

믿음이 적은 사람은 환경의 변화에 따라 신앙이 들쭉날쭉한 사람입니다. 한 순간 위대한 기적을 맛보며 하늘까지 치솟았다가, 다음 순간에 두려움에 사로잡혀 깊은 침체에 빠집니다. 이처럼 신앙이 요동하는 것은 눈으로 보고 직접 체험은 주님의 능력을 믿지만, 그 분의 거룩한 속성에 대한 근본적인 신뢰가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주님이심을 확인하기 위해 꼭 물위를 걷는 체험을 해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런 체험이 없더라도, 주님께서는 나를 도우시는 분이라는 것,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에서도 건지시는 분이라는 것, 내 모든 필요를 아시고 채워주시는 분이시라는 것, 나를 지키시며 인도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에 대한 신뢰가 중요합니다. 욥기 38:14절에 “까마귀 새끼가 하나님을 향하여 부르짖으며 먹을 것이 없어서 오락가락 할 때에 그것을 위하여 먹을 것을 예비하는 자가 누구냐”라고 했습니다. 기적이 아니라 하나님 자체에 대한 신뢰가 있어야 환경과 상황이 바뀌어도 놀라서 소리치며 당황하지 않게 됩니다.

33절을 보면 이 모든 사건을 겪은 사람들은 예수님께 절하면서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그들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 되심에 대해 온전하지는 않을지라도 비로소 눈을 뜨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의 순종의 사람이었으나, 여전히 적은 믿음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상황에 따라 흔들리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로 폭풍과 역경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새롭게 인식하도록 만드셨습니다. 무리들과는 조금 다른 차원의 신앙 고백이 있도록 인도하셨습니다.

제자들의 고난은 복합적입니다. 순종하다가 받는 고난, 예수님을 잘 알지 못했기 때문에 받는 고난, 믿음이 적어서 받는 고난 등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때로 그런 고난들을 겪게 하시므로 예수님을 좀 더 바르게 알고 좀 더 바르게 고백할 수 있게 인도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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