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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근사한 하나님의 사람들(1) (창 9:18-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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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선거에서 구 의원으로 당선 된 사람 하나가 산에서 목을 맨 채 죽은 시체로 발견되었답니다. 선거 도중 상대 후보들의 흑색선전에 상처를 받고 집을 나가 자살을 한 것으로 보도되고 있습니다. 가족들이 후보가 자살 한 줄 모르고 열심히 대신 선거 운동을 하여 막상 구 의원에 당선 되었지만, 당사자는 자살하여 죽은 후 이었던 것입니다.

무슨 흑색선전을 어떻게 하였기에 사람을 죽게까지 만들었을까를 생각해 보면 참 마음이 불편합니다. 그러나 사실 별로 놀랄만한 일은 아닙니다. 그와 같은 일은 늘 있는 일이기 때문에 그와 같은 일을 당하여도 눈 하나 까딱하지 아니하고 살아가는 용기와 담대함이 생존을 위하여 꼭 습득하여야할 기술 중에 하나가 되어 버렸습니다.

저와 여러분을 포함한 우리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고 즐겨하는 것 중에 하나는 남의 실수와 허물을 파헤치는 것과 그것을 퍼트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남이 퍼트리는 남의 허물과 실수를 열심히 그리고 즐겨 보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우리 인간의 심리 때문에 생겨난 직업이 하나 있는데 그것이 바로 파파라치라는 직업입니다. 파파라치는 우리 사람들이 만일 다른 사람의 실수와 허물 보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면 생겨나지 않았을 직업입니다. 개인의 인격이나 프라이버시를 무시하고 사람을 쫓아다니고, 특히 그 사람의 허물과 실수가 발견되면 그것을 특종인양 환호성을 지르는 파파라치들의 모습은 별로 아름다운 모습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이 일부 파파라치들만의 문제가 아니라는데 있습니다. 많은 반듯한 언론들도 그와 같은 파파라치의 속성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많은 언론들의 생명은 사람들의 주목을 끌만한 특종 뉴스를 누가 먼저 발견하여 그것을 보도하는가에 달려 있는데 언론사들은 사람들의 알 권리를 내세워 인기가 있고 시청률과 청취율이 높을 뉴스를 좇아 파파라치들처럼 행동하고 있는 오늘 우리들의 현실입니다. 그것은 교계 언론도 크게 다를 바가 없는 것 같아 보입니다.

말로는 개혁을 위하여서라고 하지만 제가 보기에는 개혁과는 상관없는 자신과 자기 회사의 생존을 위하여 속된 파파라치 근성처럼 보이는 기사도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별로 보기 좋지 않습니다.

그와 같은 특종을 위해서라면 사람의 생명과 인격은 상관도 하지 않습니다. 그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인격적인 모욕을 당하고, 사회에서 매장되고 따돌림 당하고 있으며 심한 경우 죽음으로까지 내 몰리고 있습니다. 영국의 다이애너비의 죽음이 바로 그와 같은 경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한 나라의 세자비의 허물과 잘못이 아무것도 아닌 것은 아니었지만 그것을 찾아내고 퍼트리어 돈을 벌겠다고 비열하리만큼 따라붙어 그것을 피하고 따돌리려 하다가 결국 사람을 죽게까지 만드는 파파라치들의 모습은 결코 아름다운 인간의 모습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당대의 의인으로 하나님께 까지 인정을 받았던 노아가 술에 취하여 벌거벗고 누워 자고 있었습니다. 아들 함이 그것을 보고 자기 형제에게 고하였습니다. 함에게 파파라치 근성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함에게 그와 같은 노아의 모습은 뉴스 꺼리였습니다. 혼자 보기 아까운 광경이었습니다. 아버지의 허물과 실수를 덮어 드리지 못하고 그것을 자기 형제에게 알려 주었습니다.

그런데 참 놀랍고 근사한 일은 그와 같은 사실을 형제 함으로부터 전해들은 셈과 야벳은 옷을 들고 뒷걸음쳐 들어가 아비의 허물과 수치를 보려하지 아니하고 그것을 덮어 드렸습니다. 아비의 수치와 허물을 보지 않기 위하여, 남에게 계속 구경꺼리가 되게 하지 않게 하려고 옷을 들고 뒷걸음쳐 들어가 아비의 허물과 수치를 덮어주는 그 마음씨와 그와 같은 마음씨를 가진 셈과 야벳의 인간됨이 너무 훌륭하고 근사합니다. 그와 같은 셈과 야벳의 모습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을 닮은 하나님의 형상을 발견하게 됩니다.

사도행전 18장에도 보면 셈과 야벳과 같은 사람이 나옵니다. 그것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입니다. 바울의 후임으로 아볼고라는 사람이 왔습니다. 학문이 높고 성경에 능한 사람으로 인정을 받던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이 전임자였던 교회에 아볼로파가 생길만큼 유능한 사람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치명적인 약점과 허물이 있었습니다. 단번에 교회에서 자기의 자리를 잃을 수도 있을만한 큰 허물이었습니다. 그것은 그가 세례요한의 세례만 알고 예수 그리스도의 세례는 알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학문이 없고, 가난한 노동자였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가 알았습니다. 그것은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습니다. 자신들이 가난하고 무식한 노동자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릴 수 있는 좋은 기회였습니다. 그러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조용히 아볼로 찾아가 예수의 세례에 대하여 이야기 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사실을 아무에게도 알리거나 퍼트리지 않았습니다. 그 문제는 아주 조용하게 해결이 되었습니다.
예수의 세례를 아느냐 모르느냐는 매우 중요한 문제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만일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가 예수의 세례를 알았다라고 하여도 예수의 세례를 알지 못하고 세례요한의 세례만을 알고 가르치는 아볼로 공개 석상에서 비난하고 그의 약점과 허물을 터트리고 아볼로의 사역을 끝내게 하였다면, 그것을 통하여 자기를 과시하려고 하였었다면 예수의 세례를 안다는 것이 뭐 그다지 큰 의미가 있었겠습니까?

예수의 세례를 아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예수를 닮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의 훌륭한 점은 예수의 세례를 알았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진정으로 예수님을 닮았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을 갖추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에게서 그리스도 예수님의 냄새가 나고 향기가 났었다는 데 있습니다. 우리들의 문제는 아는 것은 많은데, 하는 것도 많은데 정작 우리의 성품이 하나님을 닮지 못했다는데 있습니다.

가만히 성경을 묵상하며 그 셈과 야벳의 모습을 생각해 보면 얼마나 은혜가 되는지 모릅니다. 그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의 모습을 생각해 보면 얼마나 큰 감동이 되는지 모릅니다. 저도 셈과 야벳 같았으면 좋겠습니다. 저에게도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 같은 인격의 성숙함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누가 어떤 사람의 실수와 허물을 전해 주어도 그것을 은근히 좋아하지 아니하고, 보려고 하지도 아니하고, 옷을 들고 뒷걸음질쳐 들어가 그 허물과 실수를 덮어주고 다시는 사람들이 그의 허물을 보지 못하게 하도록 하는 그런 마음을 가진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어떤 문제가 발견되면 조용히 찾아가 겸손하게 그것을 말해 주어 상대방으로 그것을 고치게 하고 누구에게도 그것을 발설하지 않는 그런 인격을 갖추고 싶습니다.

예수를 잘 믿어서, 진정으로 성령으로 말미암아 은사 몇 가지 받는 정도를 넘어서서, 성령으로 거듭나 성령의 열매를 맺음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하나님의 마음과 품성을 가진 셈과 야벳 같은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남의 허물과 실수를 즐거워하고 비열하게 그것을 남에게 퍼트림으로 자기의 유익을 구하는 부끄러운 모습이 제게도 있습니다. 있는 정도가 아니라 아주 많습니다. 그것과 싸우고 싶습니다. 그것을 위하여 기도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 응답을 받고 싶습니다. 여러분들도 이와 같은 목적에 도전해 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근사한 응답을 한 번 받아 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저는 허구한 날 뒤에서 남의 흉이나 보면서 살아가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습니다. 좋지 못한 소문이나 만들어내면서 그것을 퍼트리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습니다. 생각해 보면 소름 끼치도록 추한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베드로전서 4장 8절에 보면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죄를 무조건 모른 척하고 덮어 주라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성경은 우리들에게 죄와는 싸우라고 말씀하십니다. 피 흘리기까지 죽도록 싸우라고 말씀하십니다. (히 12:4) 마귀 즉 죄를 대적하라 말씀하십니다. (약 4:7)

여기서 죄를 덮어주라는 말씀은 어떤 사람이 죄를 지었을 때 그것을 만인에게 퍼트리지 말고 덮어주고 감싸줌으로 그 죄를 회개케 하라는 말씀입니다. 죄와 싸우는 것과 아무 상관 없이, 죄와 싸우는 것처럼 빙자하여, 죄를 지은 사람을 함부로 정죄하고 만인에게 폭로하여 죄를 죽이는 것이 아니라 죄를 지은 사람을 죽이는 일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현장에서 간음하다가 잡혀 온 여인을 사람들이 돌로 치려하였을 때 예수님은 그를 감싸 주셨습니다. 그의 허물을 덮어주셨습니다. 그러나 죄를 간과하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고 엄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를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함부로 정죄하지 않으셨습니다. 다시 그에게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것이 우리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가장 하나님 다우신 모습은 예수님의 십자가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셔서 피 흘리시고 말도 못한 고난을 당하시는 예수님의 모습 속에서 우리는 진정한 하나님의 모습과 형상을 찾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모든 죄와 허물과 수치를 덮어 주시기 위하여, 용서해 주시기 위하여 말도 못할 십자가를 스스로 지시고 그 대가를 치르시는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아비의 수치와 허물을, 그것도 당대의 의인이라고 하는 노아의 수치와 허물을 보고 싶은 마음이, 그리고 ‘의인도 별것 아니구나’ 하며 깍아 내리고 그것을 통하여 어떤 만족을 느끼고 싶은 마음이 셈과 야벳에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셈과 야벳은 그와 같은 비열한 모습과 싸웁니다. 그리고 승리합니다.

당대의 석학이요 성경의 능 한자로 정평이 나있는 아볼로의 약점과 허물을 지적하여 자신이 그보다 더 성경에 능한 자임을 증명하고 싶은 마음이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에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들의 믿음이 저들을 정말 사슴처럼 높은 곳에 있게 하였습니다.

예수 믿으면 부자가 된다고 믿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럴 수 있습니다. 예수 안 믿는 사람들 중에도 부자 참 많습니다. 부자가 되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부자가 되려고 예수를 믿는 것은 별로 지혜로운 일 같아 보이지 않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건강하게 된다고 믿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럴 수 있습니다. 저는 신유의 은사를 믿습니다. 저도 병에 걸리면 기도합니다. 병원에서 고치기 어려운 병에 걸리게 된다면 열심히 기도할 겁니다. 신유의 은사를 받은 분이 있다면 기도도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제가 예수를 믿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아닙니다.

제가 정말 욕심나는 것은 예수 믿으면 부자가 되고 예수를 믿으면 어떤 병에 걸렸든지 다 낫는다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를 잘 믿으면 예수님을 닮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훌륭해지고 근사해 진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예수님을 닮지 못했는데 부자가 되면 뭐하고 건강하면 뭐하겠습니까? 그게 무슨 그리 큰 일이 되겠습니까? 극단적인 예이지만, 우리가 예수를 잘 믿어 예수님을 닮은 사람이 되었다면 좀 가난하면 어떻고, 좀 건강치 못하면 그것이 뭐 그리 큰 문제가 되겠습니까?

아비의 벌거벗은 수치를 형제에게 알려주고 싶은 파파라치 같은 함의 모습과 마음이 오늘 제 모습과 마음입니다. 저는 제가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셈과 야벳 너무 근사합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 너무 멋있습니다.

사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는 천막 깁는 일을 하던 노동자였습니다. 셈과 야벳도 성경에 보면 별 큰일을 하였던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저들은 유명한 사람들도 아니었고, 특별한 능력이 있는 사람들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저들은 근사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모습과 성품이 하나님을 닮은 사람들이었습니다.

큰일을 하는 유명한 사람이 되기보다 아비의 수치와 허물을 보려하지 않고, 그것을 덮어 주려고 옷을 들고 뒷걸음질쳐서 들어가는 셈과 야벳 같은 사람이 먼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볼로를 꺽고 자기를 들어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생각하지 아니하고 조용히 아볼로를 찾아가 예수의 세례를 전한 후 아무에게도 그것을 말하지 않고 덮어 두었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 같은 사람이 먼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여러분들에게는 함과 같은 모습이 없으십니까? 개혁과 정의를 표방하면서도 사실은 정의와 개혁보다는 개혁의 대상자들을 파헤치고 저들의 허물과 죄를 들춰내는 것에서 어떤 쾌감을 느끼시지는 않으십니까? 뒤에서 남의 흉을 볼 때 신이 나시지는 않으십니까? 남의 허물과 수치를 드러냄으로 저를 매장하고 그것을 딛고 일어서서 자신의 유익을 구하시고 계시지는 않으십니까? 여러분은 여러분이 마음에 드십니까?

하나님을 닮은 근사한 하나님의 사람들 첫 번째 시간에 생각한 인물은 셈과 야벳 그리고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였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소개 된 셈과 야벳 그리고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의 인격과 성품과 삶이 저와 여러분의 간절한 소원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기도의 제목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하여 저와 여러분들이 모두 셈과 야벳을 닮았으면 좋겠습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 같은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를 열심히 믿어 사랑으로 모든 사람들의 죄와 허물을 들추어 내지 아니하고 덮어주며 근사하게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저와 여러분들이 있는 교회와 가정과 직장과 세상에 저와 여러분들 때문에 그리스도 예수의 향기가 진동할 수 있게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김동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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