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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행복한 관계의 법칙 (빌 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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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한마디로 관계입니다.
인생의 행복은 좋은 관계를 맺는데 있습니다.
보통 인간은 매일 최소한 3가지 관계를 하면서 살아갑니다.
행복한 삶을 위해서는 행복한 관계가 있어야 합니다. 먼저 자신과 잘 관계해야 합니다.내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내가 나를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행복합니다. 그러나 내가 나를 부정적으로 생각하면 불행합니다.
다음 우리의 행복한 삶을 위해서는 타인과 좋은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가정에서 남편과 아내가 좋은 관계를 맺을때 행복합니다.교회에서 성도 서로간의 좋은 관계를 맺을때 행복합니다. 사회에서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맺을때 행복합니다.
가장 중요한 관계는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내가 하나님과 좋은 관계를 맺으면서 영적인 삶을 살아갈 때 우리는 근본적인 행복의 풍성한 삶을 살아갑니다.
그런데 이 3가지는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내가 나에 대해서 좋은 관계를 맺으면 다른 사람과도 관계를 잘 맺을 수 있습니다. 또 이웃과 좋은 관계를 맺으면 하나님과의 관계도 잘 맺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사람은 저절로 관계가 좋아지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관계를 새롭게 하고 행복한 관계를 맺으려면 기술이 필요합니다. 운동을 하는데 의욕만 갖고 운동을 제대로 할 수 없습니다. 의욕과 열정만으로 운동하려고 하면 몸에 이상이 오고 재미가 없습니다. 그러나 기술이 있으면 운동효과도 보고 운동의 재미도 있습니다.

인생을 살아가는데 있어서도 재미있고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관계의 기술이 필요합니다. 왜 많은 사람들이 사랑한다고 하면서 결혼했지만 실패합니까? 관계의 기술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때때로 남이 볼때에는 완벽한 부부인 것 같은데 깨어집니다. 왜 그렇습니까? 결혼이란 완벽한 사람을 만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서로가 얼마나 잘 적응하는가 능력을 배양하는데 있습니다. 왜 많은 교회가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 교회에서 싸우고 분열합니까? 이 세상에 완전한 교회란 없습니다. 완전한 교회를 향해서 서로가 함께 관계하면서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많은 경우에 관계에 문제가 일어나는 이유는 관계의 기술이 없기 때문입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읽은 책 중에 아주 영향을 많이 준 책이 바로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이란 책입니다. 이 책의 핵심 내용은 사랑에도 기술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평생을 함께 하는 사랑은 우연히 생기는 것이 아니라 배우고 실천하고 갈고 닦아야 하는 기술이라고 합니다. 매일 새로운 사랑의 기술을 닦으면서 살아갈 때 오히려 60-70대에 새로운 행복을 경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소개되는 빌립보교회는 두 여자 집사가 서로 싸우는 관계가 있었습니다. 두사람의 관계에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이런 빌립보교회를 향해서 바울이 권면하는 것은 올바른 관계의 자세에 대해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빌립보교회의 두사람의 관계의 문제는 단지 두사람 당사자 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에서도 얼마든지 나타날 수 있는 문제입니다. 과연 어떻게 우리는 관계해야 합니까?


1. 자신과의 관계에서 기뻐하셔야 합니다.

4절 주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먼저 바울은 기뻐하라고 명령합니다. 바울은 빌립보서를 기록하면서 가장 강조한 것이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빌립보서는 기쁨의 서신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든지 기뻐해야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볼 것은 바울이 기뻐하라고 하면서 본인이 먼저 기쁨의 삶을 살은 것을 봅니다. 남보고 기뻐하라고 하고 자신은 기뻐하지 않는다면 이렇게 바울이 반복해서 강조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바울 자신이 기뻐하고 또 성도들을 향해서 기뻐하라고 하면서 그 기쁨의 이유로 제시하는 것은 ‘주안에서 항상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여기 기뻐하라고 하면서 그 앞에 “항상”이라고 합니다. 항상 기뻐하라는 것은 삶의 어떤 상황 어떤 조건을 초월하여 그리스도인들은 기뻐해야 합니다.

삶의 현실은 문제와 갈등의 연속입니다.
특히 빌립보교회처럼 관계가 깨어졌을때 기쁨의 삶을 살기란 쉽지 않습니다.
바울처럼 감옥안에 갇혀버리는 고난을 경험할 때 기쁨의 삶을 사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들 삶을 보면 단지 문제가 있어서 삶이 기쁘지 않고 어려워서 기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가 없는데도 삶이 기쁘지 않고 매사가 우울하고 힘들고 무감각한 경우들이 많습니다. 마음이 병든 사람은 기쁘게 살 수 없습니다.

내적치유의 강사로 유명한 한신대학교의 정태기 교수님이 계십니다.
그는 내면의 상처를 치유받고 나서 자신을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산다는 것이 이렇게도 즐거울 수 있는가!
산다는 것이 이렇게도 감사할 수 있는가!
사람들은 못살겠다고 야단이도 죽겠다고 야단인데 그가 이렇게 삶의 기쁨과 즐거움을 회복한 비결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내면의 마음이 치유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런 인간을 자동차에 비유합니다. 자동차는 저절로 알아서 움직이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운전사가 운전하는 방향으로 움직입니다. 운전사 마음대로 움직이는 것이 자동차입니다. 운전사가 잘 운전을 하면 그 차는 좋은 운행을 할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운전사가 마음이 급하고 삐뜰면 결국 난폭하게 운전하여서 사고를 내고 만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경우에 인생을 잘못 운전하는 운전자가 내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 운전자들을 보면 내가 누구인지 자기의 정체성을 바로 알지 못하고 운전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 구부러진 운전사를 다른 말로 하면 바로 “병든 자아상”이 문제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마음에 장애와 상처를 갖고 그 것에 조종당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만은 경우에 나라는 존재는 실패와 좌절을 통해서 열등감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래서 기죽어 있고 매사에 자신감없는 내가 있습니다. 또 어려서부터 치유받지 못하고 인정받지 못한 나는 항상 내 마음에 분노하고 있습니다. 누군가에게 제대로 인정과 사랑을 받아보지 못한 나는 항상 내안에 울고 있는 내가 있습니다. 이런 상처받은 나를 항상 남을 원망합니다. 남을 탓합니다. 그러면서 세상을 비관하고 원망하고 부정적으로 살아갈 수 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인은 누구입니까?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그리스도를 모시고 사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그리스도를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진정 그리스도인입니까? 우리 모두가 믿음으로 예수그리스도의 복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이제 그리스도인이라면 예수님 안에서 자신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자꾸 사탄은 그리스도 밖에 나를 바라보게 합니다. 그리스도 밖에서 사람을 원망하게 합니다. 그리스도 밖에 나를 바라보게 하면서 열등감을 갖게 하고 우울함을 갖게 합니다. 그리스도 밖에서 나를 바라보면 나는 죄인입니다. 나는 못난입니다. 나는 더러운 사람입니다.
사탄은 얼마나 교묘하게 우리를 공격하는지 모릅니다. 사탄은 우리의 행복을 도둑질하는 도독놈입니다. 사탄은 우리가 잘되는 꼴 잘사는 꼴을 못보아줍니다. 이시간도 사탄은 우리의 마음을 도둑질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나를 방해합니다. 주님의 뜻대로 순종하려고 하는 나를 미혹합니다.

여러분 주안에서 나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안에서 나는 누구입니까? 그리스도안에서 나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나의 아버지는 하나님이심을 믿으십니까? 우리는 그냥 평범한 하나님의 자녀가 아닙니다 . 시편139편 14절“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신묘막측하심이라 주의 행사가 기이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 여러분 여기 “신묘막측"이란 말은 ”걸작품“이란 의미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걸작품입니다. 여러분 믿으시기 바랍니다. 왜 내가 걸작품입니까? 63억의 세계인구 중에서 나는 나 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명품을 많이 찾습니다. 그 명품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명품은 고가이고 귀중하기에 그 수가 적다는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명품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한 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만든 나는 걸작품인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예수님을 믿고 나서도 그리스도안에서 행복한 삶을 누리지 못했습니다. 그이유는 외부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바로 내부의 내 마음때문이었습니다. 교회에서 열심히 봉사도 했습니다. 예배도 열심히 봉사도 열심히 성경도 열심히 읽고 기도도 열심히 했습니다. 그러나 열심이 풍성한 삶을 가져다 주지 못했습니다. 세상에서 승리하지 못했습니다. 무엇보다도 나 자신에 대해서 승리하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가 있었습니다. 바로 내가 누구인지 분명하게 인식하지 못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항상 나를 주님의 관점에서 바라보시고 주님이 주시는 새힘 새은혜가 넘치어서 기뻐하시기를 축복합니다.

두 번째 타인과의 관계에서 관용해야 합니다.
우리는 삶에서 행복을 위해서는 타인과 좋은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5절에 “너희 관용을 모든사람에게 알게하라 주께서가까우시니라”
여기 (관용)은 원어를 번역하기에 대단히 힘든 말입니다. 주석가들은 인내로  온유로 부드러움으로 번역했습니다. (관용)은 인색하지 않고 공정하며 편벽되지 않고 관후하며 융통성이 있고 고집하지 않으며 친절하고 무례하지 않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그리스도인의 성격을 이루는 예절과 품위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관대함으로 자기의 권리를 희생시키는 것입니다.(관용)은 남이 나에게 악감정으로 대할 때 선으로 대해 주며 남이 나에게 손해를 끼칠 때 참고 유순한 태도로 대하는 것입니다. 오른편 뺨을 치는 자에게 왼편을 돌려대는 것이 관용이요,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는 자에게 십리를 동행하는 것이 관용입니다.
본문 5절에서는 모든 사람에게 관용하라고 했습니다. 유오디아 순두게와 같이 서로 다투고 불화하는 가운데 마음의 짐이 있는 사람들에게 우선적인 과제가 바로 관용입니다.관용은 겸손과 함께 가장 우리가 본받고 품어야 할 주님의 마음입니다.

종종 보면 그런 말을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한번 마음이 상하면 세상 사람들보다 더 무섭다’라고 말을 하는 것을 봅니다. 세상 사람들은 한번 마음이 상하고 다투고 나면 서로 한잔 술을 나누고 마시면서 풉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은 그런 일이 있으면 마음에 심어놓고 풀지 않고 혼자 품고 계속해서 오래가는 경우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주님의 마음이 아닙니다.
여기 보면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고 합니다.
어떻게 모든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릴 수 있을까요? 관용을 외적으로 보일 수 있는 어떤 노력들이 우리에게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관용을 표현할 수 있게 “한 번 잘해보자” 악수를 내밀던지 같이 식사를 한번 하든지 교회 속에서 공개적으로 사과를 하던지 많은 사람들 앞에서 공객적으로 표현을 하든지 하면서 관용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성경에 보면 아브라함은 관용의 사람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고향을 떠날 때 조카 롯이 함께 떠났습니다.
그런데 동거하는 가운데 재산문제 때문에 아브라함의 종과 롯의 종이 서로 다툼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그때 아브라함은 롯을 불러서 롯이 원하는대로 좋은 땅을 선택하게 합니다. 그때 아브라함이 이렇게 말을 합니다. “네 앞에 온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라 네가 좌하면 아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고 합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이 양보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이 먼저 포기했습니다. 결국 아브라함이 소유에 집착하지 않고 관용하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더욱 복을 주셨습니다.

여러분 관용하는 사람들의 특징이 있습니다.
이해심이 많다는 것입니다. 이해심이란 상대방의 입장에서 배려하여주는 것입니다.아브라함은 롯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배려하였습니다. 관용을 베푼다는 것은 상대방에게 나의 생각 나의 위치 나의 방식을 강요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의 문제가 아니면 상대방의 입장에서 이해하고 생각하여 주는 것입니다. 상대방을 존귀하게 높이고 인정하여 주는 것입니다.

중세에 어느 수도원에서 일어났던 이야기입니다.
수도원의 분위기가 너무나도 좋지 않았습니다.수도사들은 점점 나이가 들어가면서 영적으로 침체하고 있었고 곧 있으면 성직 생활이 끝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수도원장이 고민 끝에 한 지혜자를 찾았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했으면 좋을지 지혜를 물었습니다. 그런데 지혜자는 어떤 충고도 해주지 않고 막상 떠나려고 하는 수도원장에게 “당신들 가운데 메시야가 계십니다”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수도원장은 이 말을 듣고 돌아와서는 의아해하는 수도원의 수도사들에게 그 말을 전했습니다. “당신들 가운데 메시야가 있습니다”. 처음에는 아무도 이 말을 믿지 않으려고 하다가 수도사들의 마음에 의문이 싹트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들 가운데 정말 메시야가 있다고 생각해봐. 그게 누굴까? 내 오른쪽에 있는 수도사 아니면 내 왼쪽에 있는 수도사일까? 혹시 내가 메시야는 아닐까”  그때부터 서로 수도사들 가운데 서로를 향한 사랑과 존경의 분위기가 생기게되었습니다. 상대방을 좀점 배려하고 높이고 인정하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수도원은 너무 행복한 곳으로 변화되었습니다. 바캍사람들이 찾고 싶은 멋진 장소가 되었고 결국 많은 젊은 사람들이 수도원에 자원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여러분 교회가 그렇습니다.
좋은 관계가 되려면 먼저 남을 인정해야 합니다. 남을 넓은 마음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용납하고 받아들어야 합니다.  관용을 베풀면 존경을 받습니다. 관용을 베풀면 귀한 대접을 받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배려하고 이해하고 높일때 이곳이 바로 천국이 될 줄 믿습니다.
결국 관용은 남을 위해 사는 삶입니다.말을 베풀고 시간을 베풀고 물질을 베풀면서 사는 사람이 관용의 사람입니다. 그 관용하는 사람이 실패할 것같지만 성공합니다. 관용하는 사람이 결국은 인생에서 진정한 승리자가 될줄 믿습니다.

세 번째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기도해야 합니다.
6절 염려하지 말고 기도해야 합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빌4:6).

먼저 중요한 것은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라”고 합니다.염려는 하나님께 나이것아가는것을 방해하고 하나님 안에서 받는 축복을 잊어버리게 합니다.혹시 여러분은 지금 염려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아마 우리들 중에 한가지 이상은 염려할 문제가 있을 것입니다.
지금 빌립보교회 입장에서 어떤 염려가 있었을까요?
아마도 가장 큰 염려가 생활의 염려였을 것입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생활의 염려는 항상 모든 사람들에게 있는 문제입니다ㅣ. 특히 그 당시는 생활의 문제가 더 심각했습니다. 로마의 기독교 핍박과 함께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안정된 생업의 현장에 있지를 못했습니다. 당시에 기독교인들은 일체의 공직을 박탈당했고 때때로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됩니다. 그로 인해서 현실적인 삶에서 많은 가난과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서 삶에 대한 염려가 있을 수 있엇을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도 그렀습니다. 우리가 믿음 생활을 하면서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러나 세상에 나가 생활하다보면 생활의 염려로 인해서 우리가 낙심할때가 있습니다. 주님은 이런 우리의 상황을 아시고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6장에 보면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고 합니다.  그러면서 염려가 얼마나 비생산적인가를 지적합니다. 마태복음 6장 27절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자나 더할 수 있느냐“라고 하십니다. 염려하여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 염려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염려하면서 살아갑니다. 내가 인생의 주인이기 때문에 불안한 미래에 대해서 이렇게 저렇게 염려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아버지를 믿는 사람들입니다. 염려의 문제를 오직 기도함으로 하나님께 아뢰고 맡기고 그 인도함을 받으면서 살아가는 줄 믿습니다.

염려 대신 삶에 “감사함”으로 기도하라고 합니다.
삶을 살아가면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항상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이 바로 감사입니다.
특별히 우리가 모든 일에 감사해야 합니다. 여기 모든 일은 지금 내가 경험하는 모든 일입니다. 그런데 지금 바울같이 감옥 안에 있는 고난의 상황에 있더라도 감사해야 합니다. 실제로 바울은 감옥 안에 있는 고난을 감사했습니다. 인간적인 관점에서는 불행이고 고통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감옥에 있는 것을 하나님이 주신 복음의 진보의 기회로 여겼습니다. 영적인 관점에서 볼때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감사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사람이 감사합니다.
가정의 소중함을 깨달은 사람이 가정을 감사합니다. 교회의 중요성을 깨달은 사람이 교회에 감사합니다. 일의 소중함을 깨달은 사람이 일을 감사합니다. 건강의 중요성을 깨달은 사람이 건강을 감사합니다. 범사에 감사하는 사람은 범사에 하나님이 주신 감사를 깨달은 사람이 감사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마귀는 “염려 불평의 영”입니다.
그리스도인와 자연인을 볼때 가장 차이점은 바로 감사하는가 염려하고 불평하는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잘 맺고 있는가 아닌가를 알 수 있는 것은 바로 감사가 있는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매일 만나는 사람 하나님과 매일 대화하는 사람은 감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찬송가 가사를 많이 사람 중에 파니 그로스비여사가 있습니다. 그는1820년3월24일 뉴욕주푸르남 가이것운티에서 출생했습니다. 출생겨우 6주일만에 간질병에걸려서 병원에서 치료한 것이 의사의 잘못으로 소경이 되었습니다. 철이 들자그는 비관하기 시작했습니다.어려서부터 총명한 머리를 타고난 그는 자살을 여러번 기도했습니다. 마침내 그는 예수를 믿고 신앙의 길에 들어가 이것은혜를 받게 되었는데 그로부터 새로운 희망과 용기를 얻어 기쁨과 감사의 찬송시를 짓기 시작했습니다. 38세에 맹인 학교음악 선생과 결혼하여 82세에 세상을 떠나기까지 6천편의 찬송을지었는데 우리찬송(나의 갈길 다가도록)(십자가로 가까이)(예수로나의 구주삼고)등의 13편이 들어 있습니다.

그를 말하기를 (지금 그 의사를 만날수 있다면 나를 실명케 한 데 대해 서 몇 번이고 감사할 것이다. 비록 신체적으로 는 는 잘못되었을 지라도 하나님의 편에서 는 잘못된 것이 아니라 나로 하여금 신체적으로는 어두움에서 사나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를 더 잘 짓고 다른 사람에게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를 부르게 하도록하시려는것이 하나님의 목적이라고 나는 믿는다)고 말했습니다.

어려운 환경이 왔습니까? 어려운 인간관계로 마음에서 평강을 잃버버렸습니까?
먼저 마음 속에서 감사가 회복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기도하십시오.
헨리워드 비쳐라는 사람은 말하기를 “기도는 아침의 열쇠이며 저녁의 자물쇠다”라고 말을 했습니다. 오스왈드 샌더스 목사님은 “우리가 일할때는 단순히 사람이 일하지만 기도할때는 하나님께서 역사하신다”고 말을 했습니다.
기도하면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응답하여 주십니다. 평강의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응답하여 주십니다. 우리모두 평강의 하나님이 주시는 응답을 받아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박춘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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