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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구약의 신앙 교육 (잠 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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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 미국 교육국에서 공립학교 중고등학생 선생님을 상대로 설문조사를 하였습니다. 학생들을 교육시키는데 있어 애로 되는 사항이 무엇인가를 조사했는데 가장 많은 답변 네 가지를 발표했습니다. 첫째가 수업태도입니다. 사춘기를 겪는 학생들이 수업 시간에 집중력이 떨어지고 산만하게 행동한다는 것입니다. 옆에 있는 친구들과 무엇인가 속삭이고 딴 세상에 가 있는 것처럼 산만한 수업태도 때문에 힘들다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학생들이 진리 탐구를 위해서 눈을 반짝거리며 쳐다봐야 가르치는 보람과 기쁨이 있는데 듣는 둥 마는 둥 하니까 신이 안 난다 말입니다. 요즘 우리나라는 훨씬 더한 것 같습니다. 절반 이상이 잠을 잔다고 합니다. 학원 갔다가 늦게 들어오고 밤 문화가 만연해 잠들을 안자니 학교 와서 잠을 자게 되고 이런 것이 사회적, 교육의 문제로 큰 골머리를 앓고 있는 중이라고 합니다. 두 번째는 단체 행동을 할 때 질서를 안 지킨다는 것입니다. 개인주의가 발달해 자신의 의사대로 개별 행동하는 것이 고민이라고 합니다. 이때는 이유 없는 반항의 시기라서 교육이 힘들다는 겁니다. 무엇을 시키면 "왜 그런 일을 시키느냐? 안하면 안 되냐?" 전부 그렇게 나오니까 선생님으로서 참 힘들다는 고민의 이야기입니다. 세 번째가 휴지라던가 껌을 씹는다던가 하면 교실 아무데나 집어던져 버리면서 깨끗한 환경을 만드는 의식이 약한 것이 문제라는 겁니다. 네 번째는 숙제를 성실하게 해오지 않는 것, 이 네 가지가 선생님들의 고민으로 나타났습니다. 이런 조사를 30년마다 합니다. 1980년대에도 똑같은 조사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1950년대 문제는 하나도 문제가 안 되는 엄청난 문제의 변화가 있음이 발표되었습니다. 첫째가 선생님을 협박하는 행위입니다. 미국에서는 고등학생들이 선생님을 협박하는 행위가 가끔 일어납니다. 그런데 이 협박하는 정도가 그냥 겁을 주는 것이 아니고 생명의 위협까지 주고 있습니다. 미국은 총의 소지가 합법화 되어 있지 않습니까? 미국의 한 고등학교에서 선생님과 학생들 수십 명을 쏴서 죽여 버리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학점을 안주면 죽여 버리겠다고 해서 그것이 선생님들의 심각한 고민거리가 되었습니다. 그 다음에는 여학생이 임신했을 때의 선생님들이 너무나 힘들다고 합니다. 미국에서 고등학교 졸업하기 전에 남녀 학생들이 성 경험한 퍼센트가 80~90퍼센트라고 신문에 통계가 늘 나옵니다. 그래서 이런 문제로 선생님들이 고민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는 마약 복용의 문제가 심각하다고 1980년대 조사 결과가 나왔습니다. 이때 마약의 맛을 알게 되면 그 학생의 인생은 끝이 나는 겁니다. 거의 치료가 불가능합니다. 이것이 큰 고민이라는 겁니다. 네 번째로 갱단 가입과 살인 행위가 문제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1950년대 문제는 하나도 문제가 안 되는 엄청난 변화가 현실화된 것이 1980년대 선생님들의 고민이라고 발표한 것을 제가 신문에서 봤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문제가 된 아이들을 집중적으로 조사를 했습니다. 가장 높은 퍼센트가 가정의 정서불안으로 나타났습니다. 가정이 편안한 안식처가 될 수 없다고 판단을 아이들이 학교나 사회에서 문제아로 많이 나타나는 통계가 확실해 졌습니다.

현대 문화의 가장 어려운 인간의 문제는 ‘가정 문화의 해체’로 볼 수 있습니다. 그 몇 가지 이유를 밝히면 서구 사회는 벌써 오래전부터 여성의 사회적 활동이 남성보다 절대 뒤떨어지지 않는 문화입니다. 따라서 여성들의 가치관의 변화로 인해 가정을 지키고 아이를 낳고 양육한다는 가치보다는 자신의 사회적 영역을 더 크게 생각하는 문화로 발전했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이렇게 가정에서 아이나 보고 밥이나 하고 빨래나 하다가 생을 마치느냐? 남자 못지않게 사회적 내 영역을 넓혀야 한다.’ 그래서 가정을 위해서 자신의 사회 활동을 포기한다는 것이 매우 어려운 결정이 되어 여인들이 가정생활을 기피하고 사회로 나오는 문화로 변화되었습니다. 이러한 변화에서 찾아오는 필연적 현상이 몇 가지 나타납니다. 이혼율이 높아집니다. 지금 서구사회는 한 번도 이혼하지 않는 사람이 오히려 소수입니다. 그 사회에서 이혼한 사람이 이혼하지 않은 사람보다 훨씬 더 많습니다. 그러니까 “바보 같은 사람이나 이혼을 한 번도 못하지.”라는 가정 문화의 해체 시대를 살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사회 활동의 가치관 때문에 엄마들은 자기 아이들을 다른 사람에게 맡겨서 양육시킵니다. 베이비시터(Babysitter)라는 직업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은 어린 아이만 봐주고 돈을 버는 사람입니다. 보통 후진국 여성들이 많이 합니다. 그러므로 이 어린아이들은 갓난아기 때부터 엄마의 따뜻한 사랑의 체온을 느끼면서 성장하는 기회를 잃어버리고 성장합니다. 그 충족되지 않은 심리적 불안이 성격 형성에 결정적 손해를 끼쳐서 이런 문제가 많이 생깁니다. 가끔씩 TV에 나오는 방송을 보면 멕시코나 필리핀 여자들이 미국의 백인 아이를 기르는데 수면제를 숟가락에 타서 강제로 먹여서 하루 종일 재우고 자기는 편안하게 있다가 저녁에 가는 사람도 있고 화가 나니까 어린아이 따귀를 때리는데 것이 CCTV에 잡혀서 감옥에 가는 예가 흔하게 있습니다. 그러니 어려서부터 그렇게 성장하는 아이들이 성격 형성이 제대로 되겠습니까? ‘나도 누구에겐 괴로움을 주어야지….’ 이런 성격 형성이 자라나게 됩니다. 지금 우리나라의 경우 아동 학대 80퍼센트가 가정에서입니다. 부모의 교육을 못 받고 자라는 아이들이 현재 6만 명입니다. 이 숫자는 절대 줄지 않습니다. 더 늘어날 것입니다. 이유는 앞으로 더 많은 가정들이 가정적으로 어렵게 될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서구의 그 많은 나라들이 선진국이 되면서부터 가정이 점점 어려워졌고 우리나라도 지금 그 대열에 들어갔기 때문에 똑같은 길을 가고 있습니다. 아무리 막고 노력을 해도 안 됩니다. 몇 십 년 전만해도 우리나라는 산아 제한이 국책 사업이었습니다. 아기 좀 적게 낳으라고 국가가 홍보했습니다. 그러던 것이 이제는 전 세계에서 출산율이 가장 적은 출산장려국이 되어 큰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이제 앞으로 우리나라는 그 존재가 매우 불투명합니다. 인구가 없어지는데 어떻게 나라가 존재합니까? 문명이 발달할수록 인간은 고난을 이기는 힘이 약해지도록 되어 있습니다. 아이들을 낳으면 고난이 생긴다는 판단 때문에 적게 낳거나 낳지 않는 문화가 생기는 것입니다. 이러한 환경에서 자연히 문제는 이 어린이들의 신앙 교육의 문제입니다. 사실 사람이 분명한 삶의 철학과 방향을 가지면 어떤 고난도 이길 수가 있습니다. 고난스럽게 살아왔고 그런 고난을 이긴 민족이 훌륭하게 되지 않았습니까? 성경에 나타난 신앙의 위인들은 모두가 그런 배경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히브리 민족은 전 세계 모든 종족 가운데 가장 고난을 많이 겪은 민족이라는 것이 세계 역사가들의 공통된 견해입니다. 그런데 이 민족은 하나님을 믿는 유일신 사상 때문에 그 모든 고난을 극복하고 인류 정신사에 가장 빛나는 유산을 우리에게 주었다는 것이 역사가들의 평가입니다.

그러면 그들이 그 끝없는 고난의 현장에서 어떻게 그렇게 훌륭한 신앙을 유산으로 남겼는가에 대해 배워야 합니다. 먼저 유대인들의 신앙 교육은 학교가 아니라 가정이었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46장 31~34절에 이런 기록이 있습니다. “요셉이 그 형들과 아비의 권속에게 이르되 내가 올라가서 바로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가나안 땅에 있던 내 형들과 내 아비의 권속이 내게로 왔는데 그들은 목자라 목축으로 업을 삼으므로 그 양과 소와 모든 소유를 이끌고 왔나이다 하리니 바로가 당신들을 불러서 너희의 업이 무엇이냐 묻거든 당신들은 고하기를 주의 종들은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목축하는 자이온데 우리와 우리 선조가 다 그러하니이다 하소서 애굽 사람은 다 목축을 가증히 여기나니 당신들이 고센 땅에 거하게 되리이다.” 이렇게 말하는 내용을 볼 수가 있습니다. 유목인 생활은 떠돌이 집시 생활입니다. 짐승의 떼를 몰고 풀과 물을 찾아서 끝없이 이동하는 생활입니다. 삶의 장소가 한곳에 정착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아이들도 부모와 함께 항상 끝없는 이동을 해야 되기 때문에 교육의 기회를 가질 수 없습니다. 이 아이들은 들판에서 태어나서 아버지와 어머니를 따라 양육을 받고 그 직업을 그대로 물려받아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학교는 근처도 못 가는 이런 아이들이 지금도 수없이 많이 있습니다. 신앙 교육을 어디서 시키겠습니까? 그래서 가정교육이 된 것입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하나님을 섬기라는 법을 가르칩니다. 그 아들은 아버지에게서 배운 것을 또 자기 자녀에게 가르칩니다. 이렇게 신앙이 유산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가장 열심히 자녀들에게 읽어주고 자신들도 읽는 잠언 전체를 보시면 거의 모두의 글이 “내 아들아 아비의 훈계를 들으며”라는 식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아들아!”하는 말은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여호와 하나님이 부르시는 음성이요, 하나는 부모님이 자녀를 부르는 소리로 해석합니다.

아브라함을 하나님이 ‘믿음의 조상’이라고 이름지어주셨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자녀를 보면 그의 아들 이삭이나 손자들인 야곱, 에서는 교회도 없었고 학교도 없었고 주일학교도 다니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모두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어떻게 해서 되었는가? 가정이 곧 교회요 율법학교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정체성을 밝힐 때 항상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의 조국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네 아비 이삭의 하나님이요 지금은 너의 하나님이라.” 이렇게 밝히십니다. 야곱은 말년에 열두 아들을 앉혀놓고 대제사장적 일을 합니다. 창세기 49장 1절에 “야곱이 그 아들들을 불러 이르되 너희는 모이라 너희의 후일에 당할 일을 내가 너희에게 이르리라 너희는 모여 들으라 야곱의 아들들아 너희 아비 이스라엘에게 들을찌어다.”라고 열두 아들들의 앞날을 예언하면서 축복기도와 책망을 합니다. 그런데 야곱이 예언하고 축복하고 책망한 내용대로 100퍼센트 이루어졌습니다. 그러고 나서 열두 아들들에게 앞으로 어떻게 살라고 하는 법을 가르쳐줍니다. 그러니 가정이 교회요 곧 학교입니다. 아버지가 제사장이며 선생님입니다. 기독교는 처음부터 이런 신앙 문화로 형성이 되었기 때문에 지금도 가정 중심의 신앙 문화를 만들어야 훌륭한 신앙 교육이 되는 것입니다. 가정에서 책임질 수 없는 자녀는 누구도 책임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내 자녀에게 나만큼 관심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천지창조’라고 하는 영화에서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 현장을 아브라함이 이삭을 데리고 가서 보지 않습니까? 잿더미가 된 소돔과 고모라의 현장을 이삭에게 보여주면서 아브라함이 이삭에게 말합니다. “봐라!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한 결과가 네 앞에 있느니라.” 현장학습으로 이렇게 교육시킨 것입니다.
한국도 이제는 학교가 지식을 전달하는 역할 밖에 하지 않게 됩니다. 정서 교육은 선진국과 똑같이 다 사라졌습니다. 옛날에는 학교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과목이 도덕, 윤리, 철학 같은 과목을 얼마나 잘 가르치고 중요시 했습니까? 그런데 이런 과목이 다 없어져갑니다. 인간됨의 교육은 학교도 이미 다 포기를 했습니다. 이렇게 가정에서도 안하고 학교에서도 안하고 교회에서는 할 시간이 일주일에 한 시간뿐인데 그러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LA에서 고등학교 졸업반인 한 학생이 학교에서 싸움을 하는 바람에 문제가 되어 그 부모와 함께 제가 학교에 카운슬러를 만나러 간 적이 있습니다. 학생이 사고를 쳤기 때문에 퇴학을 시키겠다고 해서 갔습니다. 제가 동양식으로 말했습니다. “이 아이는 이제 고등학교 졸업이 두 달 남았습니다. 아이들끼리 싸운 것을 가지고 이 아이를 퇴학시키면 아이의 장래에 결정적인 타격이 되는데 이게 교육입니까? 이 아이의 장래를 생각해서 두 달 남은 졸업 때까지 잘 선처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랬더니 그 카운슬러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하는 말이 “저 아이의 장래와 내가 무슨 상관입니까?” 상관없다는 겁니다. “이 학교의 규칙에 의해서 이 아이가 문제를 일으켰으므로 퇴학시키는 겁니다. 잔소리 마십시오.” 결국 그 학생은 퇴학당했습니다. 우리의 옛날 교육은 선생님이 학생의 장래 문제도 상관하는 교육을 했습니다. 이런 교육은 이제 점점 더 필요도 없어지고 하지도 않는 문화로 점점 흘러가고 있습니다. 인간됨의 교육은 이제 없어지고 생산 위주의 교육만 늘어가는 것입니다. 지난번에 어와나 담당 목사님께서 발표하셨습니다. ‘학교 교육 일주일에 46시간, 가정교육은 하나도 없고, 교회는 한 시간뿐이니 이래서 되겠습니까?’

자녀에 대한 성서적 정의는 우리가 늘 청지기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를 내가 맡아서 관리하는 것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큰일을 하지 않아도 내게 맡겨주신 자녀를 훌륭하게 양육하면 그 자체가 인생의 성공이요 큰 수확입니다. 왜냐하면 나는 큰일을 못했어도 내 아이는 어떤 일을 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민 간 가정에서 흔하게 있는 일입니다. 아이들을 빼앗깁니다. 멀쩡하게 내 아이를 빼앗깁니다. 뺏어가는 이유는 어린이로서 당연히 받을 권리를 받지 못한 것이 발견되었을 때 가차 없이 경찰관들이 총을 가지고 들어와서 데리고 갑니다. 일주일 또는 한 달간 빼앗기는 일이 있고 영원히 빼앗기는 일이 있습니다. 그것이 청지기 철학입니다. “당신은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아이를 관리할 능력이 없습니다. 이 아이를 당신보다 훨씬 더 훌륭하게 키워줄 사람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다른 집에 양육 보내서 그곳에 맡기겠습니다.” 그래서 빼앗기는 사람이 많습니다. 이런 일은 거의 목사들이 관계해서 “내가 이 부모를 잘 교육시켜서 다시는 이 어린이가 그런 불이익을 당하지 않을 것이니 교회도 하나의 교육기관이니 담임 목사에게 맡겨주십시오.” 그래서 사인하고 오는 일을 제가 수없이 하다 왔습니다. 그런데 또 그런 일이 다시 일어나면 그때는 제게 책임을 묻습니다. “당신은 교육을 어떻게 시켰기에 다시 이 모양으로 했습니까?” 그러면 또 가서 써야 합니다. 교육이라는 것이 하루 이틀로 됩니까? 이런 글 쓰는 일을 참 많이 했습니다. 제가 대학부 학생들과 대화 시간을 가졌습니다. “우리 허심탄회하게 마음을 열어놓고 이야기를 좀 하자. 너희들이 부모를 떠나 너희들의 의사가 아닌 이민을 왔는데 만족하냐, 불만이냐?” 90퍼센트가 만족하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부모의 관계 속에서 가장 미안하게 생각하는 점을 말해라!” 분명합니다. 부모들이 바라는 대학에 진학 못한 것이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렇게 공부를 열심히 해서 좋은 대학에 가라고 말씀하셨는데도 그 기대에 실망시킨 것이 지금 내 마음에 가장 괴로움입니다. 내가 부모가 원하는 대학에만 들어갔어도 부모님이 행복했을 터인데….” 그게 제일 많은 대답이었습니다. 선진국일수록 거리에 거지가 많습니다. 한국 부모들은 차를 타고 거리를 지나가다가 옆에 있는 아들에게 반드시 이런 말을 하고 지나갑니다. “저거 봐! 공부 안하면 저렇게 돼!” 그러니까 이제는 아이들이 먼저 말합니다. “공부 안하면 저렇게 되지요?” 좋은 대학에 가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인생의 최고의 가치로 지나치게 평가하는 것은 금물입니다. 그것은 교육이 아닙니다. 오늘 성경말씀에 7절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어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좋은 대학 진학시키는 것보다 가정에서 훌륭한 신앙 문화 만들기에 노력해야 합니다. 그런데 부모들이 안 합니다. 그러한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서 매일 같이 가정 예배를 드린다든지 TV는 전혀 보지 말라고 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제일 좋은 것이 있습니다. 내가 훌륭하게 사는 것을 보게 하는 것입니다. 삶 자체가 곧 교육입니다. 그러면 아이들이 저절로 교육이 됩니다. 기도가 곧 삶인 어머니가 계셨는데 그분은 아마 이 땅에 기도하기 위해서 태어나신 분 같이 보였습니다. 그런데 그의 아들이 어려운 일을 당했습니다. 60년대, 70년대 초 우리나라는 중앙정보부라는 곳이 있었는데 모든 사람의 인식이 “그곳은 아주 무시무시한 곳이다. 거기 한번 잘못 끌려 들어갔다가는 살아서 돌아오기 힘들다.” 이런 소문이 나있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그 아들이 학생 운동을 하다가 그곳에 잡혀 들어갔습니다. 그 청년을 담당한 사람이 그 청년을 취조하는데 아주 이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렇게 때리려고 하면 급하게 팔을 내리고 신음하고 주저앉는 겁니다. 그 청년만 때리려고 하면 그런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병원에 가서 진단을 해봤지만 아무 이상이 없는 겁니다. 그 청년만 문책하기 시작하면 그런 일이 자꾸 벌어지니까 그가 입에 대지 못할 험악한 욕을 해대가면서 한 말 “야! 너의 집에 기도하는 사람 있지?” 어머니가 기도한다고 했다가는 더 맞을 것 같아서 “아닙니다. 없습니다.” “거짓말 마라! 이 놈아! 너만 때리려 하면 내 팔에 힘이 빠지고 쥐가 나는데 이건 기도 때문이야!” 그래서 자기는 그 사람한테 은혜 받았다고 합니다. 어머니가 철야 기도를 하고 계셨습니다. 저는 성장한 그 아들과 함께 선교 일을 많이 했습니다. 그분이 저한테 해주신 이야기입니다. 지금도 그는 그 어머니의 기도를 늘 생각합니다. 지금은 돌아가셨는데 어머니 주일만 되면, “어머니”란 말만 나와도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는 겁니다. “우리 어머니! 365일 나를 위해서 기도하시던 어머니 그 손때 묻은 성경을 항상 책상 위해 두시고 돋보기로 보시던 어머니!” 이것이 교육입니다. 가정에서 교육이 되어야 합니다. “나는 사실 매우 험악한 삶을 살아야 하는 사람인데 어머니의 기도가 나를 잡았다.” 삶의 무언의 대화가 되어야 능력으로 영향을 주는 것입니다. 말 많이 안 해도 이래라 저래라 자꾸 잔소리 안 해도 괜찮습니다. 삶 자체가 교육입니다.

그 다음에, 우리 한국 부모들이 잘못하는 것이 있습니다. 아이들의 징계를 두려워말아야 교육이 됩니다. 아이들이 잘못될 경우 미국 사회에서는 목사가 무슨 의견 제시를 하면 해결이 됩니다. 그런데 아이들이 무슨 문제가 생겨 법적으로 문제가 되면 100퍼센트 저한테 온단 말입니다. 그때 저한테 얘기하는 부모들의 바람이 있습니다. 99퍼센트의 한국 부모들은 아이들이 잘못한 것이 분명해서 벌을 받아야 되는데도 “잘못 없다고 써주세요. 무죄석방!” 이렇게 부탁하십니다. 여러분! 때로는 경찰서나 감옥도 인생 스승의 장소가 됩니다. 부모들이 도저히 할 수 없는 노력을 그곳에서 해줍니다. 그럴 때는 겁내지 말고 그런 곳에도 보내야 교육이 됩니다. 무조건 감싸고도는 것은 교육이 아니고 아이들을 오히려 나쁜 길로 인도합니다. 미국인 목사가 저를 찾아와서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예배당을 좀 빌려달라는 겁니다. 저도 미국 교회를 빌려서 예배드린 기억이 많이 있으니까 그러시라고 즐겁게 허락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누구인가? 미국에서 제일 유명한 척 스미스 목사의 지교회 담당 목사입니다. “어떻게 해서 당신 같은 분이 저한테 오셨습니까?” 그가 얘기하기를 자기는 청년 시절에 구제불능적 타락 인간이었다고 합니다. 갱단 두목으로 자기의 생활은 1년 365일 마약과 창녀가 자기 생활의 전부였답니다. 히피 생활을 했는데 머리를 자기 엉덩이까지 기르고 오토바이를 타고 뒤에 창녀 한명을 태우고 머리를 휘달리면서 거리를 헤맨 것이 자기 생활의 전부였다고 합니다. 어느 날 그는 마약 사범으로 경찰에 체포가 되어 감옥살이를 하게 되었는데 자기를 경찰서에 고발한 사람이 엄마입니다. 아들의 죄상을 낱낱이 일기장으로 기록해서 경찰서에 갖다 주며 자기 아들을 고발했습니다. 그래서 자기 엄마의 도움으로 그를 체포했습니다. 그는 교도소 생활에서 회개했고, 주님을 영접하였으며 히피 생활을 청산하고 신학 공부를 해서 목사가 되어 지금은 과거 자기 모습의 사람들에게 가서 전도합니다. 저더러 교회를 빌려달라고 해서 빌려드린 적이 있습니다.
“아비의 훈계를 들으며 네 어미의 법을 떠나지 말라.” 기독교 교육의 네 가지 방향을 말씀드리면 첫째, 건강하게 살도록 노력하는 겁니다. 나는 아가페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주체가 되기 때문에 건강을 해치는 일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기독교가 마약, 금주, 금연 운동을 열심히 하는 겁니다. 그 다음에, 심리적 평화입니다. 항상 불안하고 불만하는 사람이 있지 않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평안이 내 안에 있는 상태가 늘 계속되어야 합니다. 세 번째, 정상적 인간관계입니다. 많은 사람을 사랑하고 나도 사랑받는 존재가 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사람에게 사랑스러워 가시더라.”라고 했습니다. 그다음에는 영적 충만입니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은 성령의 인도인가? 성령의 인도를 따라서 살 수 있는 능력! 이것이 기독교 교육의 네 가지 방향입니다. 이 방향을 가지고 교육하는 겁니다.
우리 교인 가정이나 교회를 가보면 “자녀를 위한 맥아더의 기도”는 원문이 많이 나와 있습니다. 여러분도 많이 보셨을 것입니다. 록펠러를 위한 어머니의 십계명이란 것이 있는데 이것은 한국에 많이 알려지지 않은 것 같습니다. 미국에서는 흔하게 접할 수 있는데, 록펠러는 한때 세계에서 제일 부자였습니다. 뉴욕 사람들은 한때 수도세를 안냈습니다. 록펠러가 혼자서 다 냈기 때문입니다. 그의 어머니가 록펠러에게 교육한 십계명이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 아버지를 육신의 아버지보다 조금 더 섬겨라. 두 번째, 목사님을 하나님의 심정으로 섬겨라. 세 번째, 주일에는 가능한 한 본 교회에서 드리라. 네 번째, 오른쪽 주머니는 항상 십일조 주머니로 하라. 다섯 번째, 아무도 원수를 만들지 마라. 여섯 번째, 아침에 하루의 목표를 세우고 기도로 시작해라. 일곱 번째, 일 마친 저녁은 반성의 기도를 드리라. 여덟 번째, 성경말씀은 날마다 읽으라. 특히 아침에 읽으라. 아홉 번째, 남을 도울 수 있을 때 힘껏 도우라. 열 번째, 예배 시간에는 일찍 가서 항상 앞자리에 앉으라. 이것이 아들을 위한 교육이었습니다. 그 교육대로 했습니다. 그래서 세계에서 제일 부자가 되었고 이 세계에서 십일조를 제일 많이 낸 사람은 이 사람입니다. 오늘 잠언 말씀 “하나님을 아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어늘” 이것이 여러분 가정에 목표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아버지, 5월 가정의 달을 맞이해서 드리는 가정 문화의 신앙을 열심히 보고 있는데 오늘 잠언에서 나타난 귀중한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이 우리 가정의 신앙 목표가 되고 가정의 신앙 문화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가정을 축복해 주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이필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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