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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 앞에 서도록 준비하라 (눅 21:2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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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애국가를 보면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나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라는 구절로 시작합니다. 애국가에는 우리나라가 영원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일본의 국가인 키미가요는 “조약돌이 큰 바위가 되어 이끼가 낄 때까지” 천황의 통치가 이어지기를 기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 어떤 국가도 영원할 수는 없다고 말씀합니다. 고대 바벨론 제국이나 메대 바사나 알렉산더의 헬라나 로마 제국이나 징기스칸의 제국은 역사상 드물게 보는 세계적인 대제국을 건설했지만, 그 가운데 오늘까지 남아 있는 나라는 하나도 없습니다.

그뿐 아니라, 성경은 인류역사 역시 시작이 있었듯이 끝이 있다고 증언합니다. 인류가 이룩한 찬란한 문명도 사라질 날이 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은 인류역사의 종말이 올지라도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현세의 종말은 그리스도께서 다스리시는 나라의 시작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하여 구약 성경 다니엘서 7장에 이 같이 말씀합니다. “13)내가 또 밤 이상 중에 보았는데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자에게 나아와 그 앞에 인도되매 14)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각 방언하는 자로 그를 섬기게 하였으니 그 권세는 영원한 권세라 옮기지 아니할 것이요 그 나라는 폐하지 아니할 것이니라”

본문에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인자 같은 이’는 곧 재림하실 예수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그 때 그리스도께서는 세상 나라들을 심판하시고 영원히 폐하지 아니하는 하나님 나라를 세우실 것이며 성도들과 더불어 영원히 다스리실 것입니다.

성도들은 이 세상에 살지만 이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의 시민권은 이 땅이 아니라 하늘에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나라의 시민들입니다. 바로 이 때문에 우리는 이 땅에 사는 동안 항상 주님 앞에 설 준비를 갖추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저는 우리가 주 앞에 서기 위한 준비가 무엇인지 말씀해 드림으로 피차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첫 번째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확실히 믿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은 사도들이나 후대 사람들이 지어낸 말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실 적에 이미 당신의 재림에 관해서 여러 차례 언급하셨습니다. 십자가 고난을 앞두신 시점에서 예수님께서는 유월절 만찬석상에서 근심에 잠긴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1)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2)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3)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 14:)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마태복음 24장과 25장을 읽어보십시오. 예수님께서 당신의 강림에 관해서 여러 가지로 말씀하신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공개적인 석상에서도 재림에 관해 말씀하셨습니다. 가룟 유다의 배신으로 체포되셔서 유대 최고 종교재판소인 공회에서 심문을 받으실 때였습니다.

대제사장이 묻기를 “내가 너로 살아 계신 하나님께 맹세하게 하노니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고 하였을 때, 예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네가 말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마 26:64)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 외에도 사도들의 서신을 통해서도 주님의 강림에 대한 예언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 16절에 이르기를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라고 하였으며, 베드로후서 3장 10절에는 “… 주의 날이 도적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고 했습니다.

사도 요한은 90이 넘은 나이에 밧모섬에 유배되었는데, 어느 주일 환상 중에 주님을 만나 뵙고 종말에 될 일을 계시 받았습니다. 계시록 1장 7절에서 사도 요한은 증언하기를 “볼찌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터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시는 이유는 불의한 세상을 심판하시고 구속받은 성도들을 영원한  하나님 나라로 데려가시기 위함입니다. 계시록 20장 6절에 의하면, 먼저 이 땅에 천년왕국을 세우실 것인데 성도들은 부활의 몸을 입고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년 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 노릇 할 것입니다. 그리고 천년 후에 하나님께서는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시고 성도들을 새 예루살렘에서 영원히 살게 하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세상살이에 지치고 피곤할 때 계시록 21장과 22장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미래에 누릴 영광과 행복을 미리 맛보게 되어 다시금 위로와 힘을 얻게 되실 것입니다. 그렇다고 재림에 대한 소망이 그리스도인들을 현실도피적인 사람으로 만드느냐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정 반대로 주님의 재림을 믿기에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받은 종들과 같이 주님의 칭찬과 상급을 바라보고 더 적극적으로 맡은 일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도 큰 포부와 희망을 갖고 있을 때 절제하고 노력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성도들이 바라는 것은 잠시 잠간 있다가 없어질 이 땅의 영광이 아니라 영원히 빛나는 영광의  면류관을 소망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을 대망함으로 모든 핍박과 환난을 인내하고 주신 사명을 위해 충성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두 번째로, 영적 분별력을 갖고 살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을 믿는 성도들은 영적인 분별력을 갖고 있어야 합니다. 만일 성도들이 영적 분별력을 갖고 있지 못하면 크게 두 가지의 실수를 저지르게 됩니다. 하나는, 주님의 재림을 망각하고 현실에 집착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재림하신다는 이야기는 이미 2천 년 전부터 해 왔지만 어디 재림하셨느냐, 재림은 아주 먼 훗날의 일이니 너무 신경 쓰지 말고 현실에 충실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신앙생활에 열심이 없습니다. 영적으로 볼 때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와 같습니다.

다른 하나는, 주님의 재림이 임박했다고 믿은 나머지 일상적인 생활에 관심을 두지 않는 부류입니다. 교회사를 보면 어느 시대나 이런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1980년대 중반부터 휴거에 대한 열풍이 불기 시작해서 급기야는 다미선교회라는 시한부 종말론자들이 출현해서 1992년 10월 28일에 예수님께서 재림하신다고 선전을 해 댔습니다.

이들로 인해 우리 사회는 큰 진통을 겪어야 했고, 그들의 주장이 허위로 판명되자 기성 교회가 고스란히 그 피해를 입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다미 선교회를 이끌었던 이장림이라는 사람은 추종자들의 재산 34억을 착복하였다가 휴거예정일을 한 달 여 앞둔 때에 사기와 외환관리법 위반 혐의로 구속됐습니다. 이는 시한부 종말론을 선전했던 장본인이 정작 자기는 휴거를 믿지 않았음을 보여 줍니다.

시한부 종말론자들의 잘못은 주님의 재림이 임박했다고 생각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재림 일시를 안다고 주장한 것이 잘못입니다. 그것은 그들이 성경을 올바로 믿지 않는다는 증거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시기를 “…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에 있는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시느니라”(막 13:32)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들이 성경에 기록된 주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었다면 결코 그 같은 행동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성경은 성령의 영감을 받은 선지자들과 사도들이 하나님께 받은 말씀을 기록한 것이므로 우리는 성경을 신앙과 행위의 절대적인 기준으로 삼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혹 누가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성경에 어긋나면 잘못된 것으로 알고 버려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영적인 분별력을 구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29)… 무화과나무와 모든 나무를 보라 30)싹이 나면 너희가 보고 여름이 가까운 줄을 자연히 아나니 31)이와 같이 너희가 이런 일이 나는 것을 보거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운 줄을 알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세상 끝 날에는 세상의 끝이 되었음을 알리는 분명한 징조들이 있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한번은 제자들이 예수님께 와서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라고 여쭈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4)…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5)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나는 그리스도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케 하리라 6)난리와 난리 소문을 듣겠으나 너희는 삼가 두려워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끝은 아직 아니니라 7)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처처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 8)이 모든 것이 재난의 시작이니라”(마 24:)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언급하신 이 같은 일들이 일어나는 것은 세상의 종말에 대한 징조는 아니지만, 인류의 역사가 종말을 향하여 다가가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작금에 민족 간의 분쟁과 국가 간의 전쟁이 빈발하는 것을 보면서 신앙적으로 각성하는 계기로 삼아야 마땅한 것입니다. 또한 지금 세계 여러 곳에서 천재지변이 빈발하는 것을 보면서도 어느 시대나 천재지변이 있었다고 대수롭지 않게 여길 것이 아니라 “이 모든 것이 재난의 시작이니라” 하신 주님의 말씀을 생각하고 종말이 카운트다운 되었음을 알아야 합니다.

더구나 오늘날 종교 다원주의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나와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믿어야 구원 받는다는 복음의 진리를 부인하는 것을 보면서 이단은 초대교회 당시부터 지금까지 늘 있었다고 말할 것이 아니라 말세가 가까워질수록 거짓 선지자와 거짓 그리스도들이 많이 나올 것이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생각하고 말세의 징조로 파악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방에 꽃이 피고 나서야 봄이 왔음을 아는 것이 아닙니다. 찬바람이 불고 얼음이 어는 겨울날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나뭇가지에 물이 오르는 것을 보면서 또는 들판에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것을 보면서 봄이 왔음을 감지합니다. 이는 영적인 차원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작은 일에 불과하지만 믿음의 눈을 가진 성도들은 그 작은 것을 통해서 말세가 가까워짐을 알리는 징조를 발견해야 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세속에 물들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지금 우리는 개인의 자유를 최고의 가치로 인정하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기들이 원하는 대로 살아갑니다. 과거에는 옷을 입는 데도 어떤 격식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현대는 무슨 옷을 어떤 식으로 입든지 그것은 개인의 자유입니다. 무엇을 어떻게 입든지 그 나름대로 잘 입은 것이지 격식을 거론하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이처럼 격식을 파괴하는 경향은 의복에만 한정되지 않고 우리 생활의 전 영역으로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 시대를 일컬어 포스트모더니즘 시대라고 하는데, 탈 권위, 탈 전통, 탈 규범 등이 특징입니다. 사람들은 정당한 권위마저 인정하려 들지 않습니다. 그 결과, 학교에서 선생님들이 학생들에게서 권위를 인정받지 못하고, 가정에서 가장의 권위가 빛을 잃어갑니다. 과거에는 노인이 대접을 받았으나 요즘은 나이가 어릴수록 대접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어딜 가나 어른행세를 하기가 어렵고 아이들의 눈치를 살피게 됩니다.

그러나 한 가지 대단한 위력을 발휘하는 것이 있는데 돈이 그것입니다. 예의범절이나 권위를 무시하는 사람이라도 돈 앞에서는 꼼짝 못하고 최고의 예의를 차리고 굴복합니다. 그러니까 현대는 사람이 대접받는 시대가 아니라 돈이 대접받는 시대인 셈입니다. 그러다보니 누구나 할 것 없이 돈을 벌기 위해 정신이 없습니다. 성경은 이 같은 현상을 말세의 징조 가운데 하나라로 지적합니다.

디모데후서 3장 2절에 보니,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를 것인데 사람들이 돈을 사랑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돈을 사랑하니까 돈을 벌기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점은 돈은 사랑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돈의 주인 노릇을 해야지 돈을 사랑하면 돈의 노예가 되고 맙니다. 무엇보다도 심각한 것은 돈을 사랑하면 주님을 올바로 섬길 수 없다는 것입니다. 주님보다 돈을 더 사랑하니까요. 그리스도인들은 먹고사는 문제조차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주님의 말씀과 같이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세속화되지 않기 위해서 경계해야 할 것은 돈 이외에도 또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쾌락을 탐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에게 무엇을 위해 사느냐고 물어보면 십중팔구는 인생을 즐기기 위해서라고 대답합니다. 이에 대하여 디모데후서 3장 4절에 보니 말세가 되면 사람들이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현대인들이 가장 즐기는 프로그램이 무엇인줄 아십니까? 엔터테인먼트 곧 오락입니다. 엔터테인먼트 사업이 번창하고 있습니다. 영화, 만화, 게임, 음악, 코미디, 놀이시설 등이 호황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락에 마음을 빼앗기다 보면 자연히 영적인 면에 대한 관심이 식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뿐 아니라, 오락은 사람을 방탕에 빠지게 만듭니다. 그리고 방탕함과 술취함은 언제나 함께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세속에 물들지 않으려면 우리 스스로가 조심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창세기 13장에 보면, 아브라함이 오랫동안 함께 기거하던 조카 롯과 헤어지는 내용이 나옵니다. 두 사람이 헤어지게 된 이유는 그들의 소유가 많아서 동거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의 목자들과 롯의 목자들이 목초지를 두고 다투는 일이 잦았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롯에게 “우리는 한 골육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말자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롯이 땅이 넓고 물이 넉넉한 요단 들을 택하고 떠났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이 문제였습니다. 성경은 롯에 대하여 이 같이 증언합니다. “12)… 롯은 평지 성읍들에 머무르며 그 장막을 옮겨 소돔까지 이르렀더라 13)소돔 사람은 악하여 여호와 앞에 큰 죄인이었더라”

롯은 경제적으로 부유해 졌을 때 보다 문화적이고 안락한 생활을 위해서 죄악이 관영한 소돔성에 들어가 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롯과 그의 처와 두 딸이 경건함을 잃고 세속화되었고, 결국은 인생 실패자로서 부끄러운 이름을 후대에 남겼습니다.

반면에 아브라함은 요단들과는 반대 방향인 고원지대인 헤브론으로 옮겼습니다. 그곳은 물도 귀하고 목초도 넉넉하지 않았지만 아브라함은 신앙생활에 유리한 곳을 택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오늘날 우리는 마치 사방에 석탄이 쌓여 있는 곳에서 생활하는 것과 같이 완전히 세속화된 환경 가운데서 살아갑니다. 석탄더미 곁을 지나기만 해도 석탄가루가 날려 콧속이 새까맣게 되고 옷에 검정이 묻듯이, 우리가 호흡하는 것, 듣고 보는 것, 어느 것 하나 세속화되지 않은 것이 없다보니 우리가 의도적으로 세상을 좇지 않더라도 세속에 감염되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조심하고 또 조심해서 세속에 물들지 않도록 할 뿐 아니라, 날마다 회개의 생활을 통해서 정결한 성도의 모습을 지켜 나가야 하겠습니다.

네 번째로,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고 하셨습니다.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해져서 멸망의 덫에 걸리는 것을 피하고 강림하시는 주님 앞에 어엿이 서기 위해서 성도들이 힘써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성도는 영적으로 깨어 있는 성도입니다. 또 영적으로 깨어 있는 성도는 기도에 힘씁니다.

운전을 하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운전할 때 조는 것처럼 위험한 일은 달리 없습니다. 지난해 고속도로에서 일어난 교통사고 가운데 20% 이상이 졸음운전으로 인한 사고였다고 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시속 100㎞로 운행할 경우 1초에 약 28m를 주행하게 됩니다. 따라서 1초 동안 졸았다면 28미터를 무턱대고 돌진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 중앙선도 넘고 분리대를 들이박기도 하고 어떤 경우에는 반대차선으로 역주행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졸음이 올 때에는 운전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영적으로도 마찬가지로 졸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졸면 시험에 들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잡히시던 날 밤에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 동산에 기도하시러 가셨습니다. 제자들에게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피곤해서 다 졸며 잤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주님께서 붙잡혀 가실 때 다 도망치고 말았습니다.

“다 주를 버릴찌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마 26:33)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도 가기를 준비하였나이다”(눅 22:33) 그렇게 호언장담했던 베드로조차 여종 앞에서 세 번이나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하는 실패를 맛보았습니다. 깨어 기도하지 않은 결과, 이처럼 처참한 패배를 당했던 것입니다. 그 후 사도 베드로는 성도들에게 권면하기를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벧전 4:7)고 했습니다. 이는 그가 실패를 통해서 배운 귀한 가르침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가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으면 사물을 바로 보고 판단할 수 있듯이, 영적으로도 기도에 힘쓸 때 올바른 분별력을 발휘하여 마귀의 시험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이르기를 “1)형제들아 때와 시기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2)주의 날이 밤에 도적 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앎이라 3)저희가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 잉태된 여자에게 해산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홀연히 저희에게 이르리니 결단코 피하지 못하리라 4)형제들아 너희는 어두움에 있지 아니하매 그 날이 도적 같이 너희에게 임하지 못하리니 5)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이나 어두움에 속하지 아니하나니 6)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근신할찌라”(살전 5:)고 했습니다.

항상 깨어 있어 기도하는 성도들은 강림하시는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갖춘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도적같이 오시더라도 깨어 있는 성도들은 슬기로운 다섯 처녀와 같이 언제라도 기쁨으로 주님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졸며 잠자는 성도들은 미련한 다섯 처녀와 같이 주님께서 오실 때 당황하다가 부끄러움을 당케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제자들의 실패를 거울삼아서 항상 깨어 기도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주님의 강림을 고대하시면 “아멘!” 하십시다. 주의 약속은 더딘 것 같아 보일지라도 정한 때가 되면 지체하지 아니하고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가진 가장 위대한 약속은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입니다.

그 날, 예수 그리스도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 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주님께서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시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님들께서는 항상 주님의 재림을 사모하며 깨어 기도함으로써 강림하시는 예수 그리스도 앞에 어엿이 서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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