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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後嗣) (롬 8: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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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인들에게 있어서 가장 큰 문제가 하나 있다면 그것은 삶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우리가 빚진 자로서 살면 반드시 죽으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누구에게 빚을 진 것입니까? 일반적으로 물질적인 빚을 진 사람들의 고통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빚을 갚아야 할 채무자의 입장에서 보면 한달이 그렇게 빨리 다가올 수 없지요. 제대로 갚지 못했을 때에는 그 이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것을 실감하기도 합니다. 어떤 이들은 그런 빚에 대한 두려움과 억눌림에서 해방받지 못해 극단적인 방법 즉 자살을 통해 자신의 고통스런 삶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물질적인 것보다 더 큰 두려움의 부분이 있는데, 그것은 곧 영적인 두려움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라고 13절은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육신으로 산다는 것은 곧 사단의 세력에 지배를 받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사단의 지배를 받는 결과는 곧 사망이라고 하는 것을 성경은 강조합니다. 그러나 영으로서 살면 몸의 행실을 죽이기에 산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짓는 대부분의 죄악들은 이미 우리가 알고 행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한 주일 동안 지은 잘못된 것들을 종이에 써 본다면 아마도 수십, 혹은 그 이상의 내용들이 나올 것입니다. 그리고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한 일들이 내가 전혀 알지 못하여 지은 것들인가? 아니면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은 것들인가? 냉정히 생각해 본다면 대부분은 알고도 지은 행위들입니다. 성도여러분,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이렇게 알면서도 죄의 길에 서지 않으면 안되게 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의 육신을 이끌어 가는 힘, 곧 죄의 종으로서의 삶을 살고 있는 우리를 지배하는 세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함께 하지 않는 삶의 특징은 바로 두려움입니다. 삶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계신 분이 계십니까? 우리의 삶 속에 성령이 함께 하지 아니할 때에 우리는 두려워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성령이 함께 하지 않은 삶의 두 번째 특징이 있다면 피곤함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현대인들에게 가장 많이 팔리는 약이 피로회복제입니다. 모 회사의 피로회복제는 1년에 무려 2억병의 매출을 올린다고 합니다. 한 회사의 유명 제품이 2억병이나 팔렸다고 하면 수없이 많은 유사 제품의 피로회복제들을 합친다면 우리가 얼마나 많은 피로회복제를 마시고 있는 것입니까?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인들의 피로는 회복될 기미를 보이지 않는 것이 사실이지요.

요한복음 7장은 말씀합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셔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아무리 우리가 마셔도 갈증을 더 할 수 밖에 없는 피로회복제로 육신의 갈증을 해결할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흘러넘치는 생수의 강으로 인한 회복이 넘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령이 함께 하지 않는 인생은 두려움과 피곤함에 늘 종처럼 이끌려 가는 거예요. 그러나 성령이 임할 때에 우리에게는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성령이 우리에게 임할 때에 우리는 두려움에서 해방될 줄로 믿습니다. 두려움이 없다고 하는 말은 바꾸어 말하면 당당해 질 수 있다는 말입니다. 빚진 사람이 빚을 준 사람 앞에서 당당할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은 빚을 갚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당당하게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죄의 종 노릇하는 삶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장 14절은 말씀합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나니...'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가 우리 안에 있을 때 우리는 그 권세를 사용할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다시 15절입니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않고 양자의 영을 받았음으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아바 아버지라는 말은 아빠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부모를 아빠라고,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다는 것은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부모와 자녀의 관계처럼 정상적인 관계임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처음 예수를 믿으면 기도하는 일이 여간 큰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조금 시간이 지나면 '하나님' 하며 부르는 것에 익숙해 집니다만 '하나님 아버지'라고 부르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요청됩니다. 시간이 지나 하나님과의 관계가 가까워진 사람들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나아가 아바 아버지라고 자연스럽게 부르게 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우리가 종의 영이 아니라 양자의 영을 받을 때에는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이 로마시대에는 이 양자라는 개념이 굉장히 중요한 개념입니다. 우리나라는 아직까지 이 양자의 개념이 정착되어있지 않습니다. 많이 좋아지기는 했지만, 그래도 이해하기가 조금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서양 사람들에게 있어서 이 양자의 개념은 아주 보편적입니다. 이 성경을 쓰고 있는 당시 로마시대 최고의 통치자 황제 네로 역시 양자였습니다. 양자가 보편화된 시대에서 바울 사도는 그들에게 설명합니다.

이제는 우리가 종의 영이 아니라 양자의 영을 받았음으로 이제는 하나님을 향해서 아저씨, 이웃집 아저씨라고 부르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라고 부른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어떤 아버지, 아바 아버지, 아빠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이제는 부모와 자녀, 자녀와 부모 관계가 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성령이 임할 때에 우리는 두려움이 없게 해 주실 뿐만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양자의 삶도 자녀의 삶을 살게 해 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이것을 누군가 보증을 해 주시는데, 16절에 보면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해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6장에 보면 성령께서 임하시면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알게 해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성령 충만한 사람의 특징 중에 하나가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뜻을 알아갈 때에 그 삶 속에 그 잘 못된 죄의 부분들을 알아가게 되고, 그것으로 인해서 고통스러워 하고, 그것으로 인해서 회개의 눈물을 흘리는 거지요.

어느 교회 청년 집회에 수련회를 했는데, 추운 겨울날 목사님이 청년들을 이끌고, 추운 겨울에 운동장에 나와서 정 그렇게 앉혀 놓고 찬양을 하고, 무릎을 꿇고 기도를 시켰답니다. 강력하게 성령이 임재하는데, 한 청년이 그 운동장에서 데굴데굴 구르기 시작했어요.

목사님이 달려가서 안수 기도 해 주면 조금 좋아졌다가 막 데굴데굴 구르고, 또 기도해 주면 또 데굴데굴 구르고, 목사님의 글을 보니까 무려 그 큰 운동장을 절반이나 데굴데굴 굴렀다는 거예요.

우리가 죄에 대해서 알게 되면 구를 수 밖에 없습니다. 내 안에 죄의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평안할 수가 없잖아요. 가만히 있을 수 없잖아요. 여러분이 죄를 짓고도 태연할 수 있는 것은 성령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지 않았기 때문에, 성령이 임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엄청난 죄를 짓고도 태연할 수 있는 거지요.

하지만 우리에게 성령이 임재 하시고, 성령이 함께 하시면 그리고 그가 그 죄에 대하여 신판에 대해서 알게 주실 때에 우리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주여, 이 내 안에 있는 죄의 문제를 해결하여 주시옵소서. 이 죄의 문제에서 나를 해방시켜 주시옵소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눈물, 콧물을 흘리면서 회개할 수 밖에 없는 거예요. 시간이 10분이 가고, 30분이 가고, 1시간이 가도 시간에 대한 개념이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눈물로 회개해 보셨습니까? 땅을 치면서, 뒹구르면서, 여러분 안에 있는 죄의 문제들을 성령에 임함으로 인하여 나의 삶에 커다란 빛이 들어오면서 그 죄의 문제로 괴로워 해 본 적은 계십니까?

들판에 나가보면 푸른 잔디로, 꽃밭으로 화려한 곳에 돌멩이들이 있는 곳이 있습니다. 그 돌을 발로 툭 차 보면 그 돌 밑에 있던 부분은 녹색으로 햇볕을 받지 못해서 연약한 연두색으로 햇볕이 가려져 있는 부분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속에 벌레들이 숨어 있다가 돌멩이를 뒤집어서 햇빛이 비치는 순간 기겁을 하고 달아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 안에 성령의 빛이 비치기 전에는 우리가 죄악의 삶을 살아도 우리는 두려워 하지 않고, 고민하지 않고, 괴로워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내 안에 말씀의 빛으로 들어오면, 성령이 내 안에 의의 빛으로 들어올 때, 성령이 내 안에 하나님에 말할 수 없는 의의 빛으로 들어올 때에 내 안에 잘못된 것들이 환하게 들어오면서 우리는 괴로워 하지 않을 수 없고, 뒹굴지 않을 수 없는 거예요.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는 것이지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령께서 우리에게 임하심으로 인하여 우리의 문제들이 온전히 해결되고 청산되어지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어제 예수의 이름으로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하고, 너희가 회개하여 세례를 받으면 죄사함을 받으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회개는 우리의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하나님의 자녀됨에 가장 중요한 과정입니다. 이렇게 성령께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실 때에 이제 우리는 종의 자녀가 아닌 사단의 종의 자녀가 아닌 하나님의 자녀가 된 줄로 믿습니다.

그것을 성령이 보증하시고, 인쳐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전에는 우리가 죄의 종, 사단의 종이었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고 하는 말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세계를 우리가 그대로 유업으로 받을 수 있는 후사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한 나라의 황제의 양자가 된다면 그는 한 나라의 모든 통치권을 그대로 이양받는 그리고 그대로 황제에 이르고, 왕이 되어지고, 통치자가 되어진 줄로 믿습니다. 곧 하나님의 후사라고 하셨습니다. 이제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의 후사인 줄로 믿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한 후사로서 이제는 하나님이 허락하신 권세를 모두 누리게 되었는데, 오늘 말씀 마지막 부분에 보면 우리가 그와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종종 성도들 중에서 이러한 질문을 하면서 고민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내가 신앙생활을 그래도 꽤 잘 한 것 같은데, 왜 이런 어려움이 오지요? 왜 이런 실패가 오지요? 그러면서 힘들어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여러분, 어느 제재소 직원이 열심히 일하면서 어느 날 통보를 받았습니다. 당신은 더 이상 제재소에서 일할 필요가 없습니다. 해고 통지를 받았습니다.

그 직업이 자기 가정에게는 중요한 삶의 근거였는데, 근거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고민했습니다. 아주 신실한 크리스찬이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내가 신실한 신앙의 삶을 살고 있는데 우리 가정에 이런 고통을 주시는가 그는 갈등했습니다.

시련 중에 그는 기도하는 생활을 잊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그에게 시련중에 기도하고 있는 그에게 지혜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주신 지혜와 용기를 작은 우리나라로 말하면 작은 여인숙같은 그런일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점점 하나님께서 산업에 복을 주셔서 호텔업에 진출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여러분들이 전세계 어디를 가시더라도 꼭 중요한 자리, 중요한 도시에 있는 모텔 집입니다.

홀리데인 인 호텔에 주인이 되었습니다. 얼마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신 계획이 크신지 모릅니다. 시련 가운데에서도 기도할 수 있기를, 시련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뜻을 헤아릴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한 시험, 테스트에 항상 대비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용하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무엇인가 시련을 요구하십니다. 무언가 우리에게 테스트를 요구하신다는 것입니다.
큰 빌딩을 지으려면 초가집을 부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내 인생의 전부라고 움켜쥐고 있는 초가집을 하나님은 그것을 허물어 버릴 때가 있어요. 그 초가집이 허물어 졌다고 실망하고 낙심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은혜가 하나님의 축복이 무엇인가를 믿음의 눈으로 바라볼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영광이 없이는 부활의 영광이 없는 것처럼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자녀로, 하나님의 후사로서의 삶을 누리기 위해서는 때때로 우리는 고난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테스트가 필요하다는 말씀입니다.

생각건대, 우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바울은 고백합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고난으로 힘들어 하는 성도들이 계십니까?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을 살면서 다가오는 고난 때문에 갈등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이 오늘 예비하신 그 놀라운 영광은 현재 고난과 족히 비교할 수 없는 것인줄 믿습니다.

견디시기를 축원합니다. 참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온전히 인내를 이룰 때에 옳다 인정함에 이를 줄로 믿습니다. 이제 우리에게 있어서 두려움은 사라졌습니다. 이제 우리에게 육신의 피곤함은 사라졌습니다. 내 생명의 생수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샘솟기 때문입니다.

두려움이 사라지고, 양자의 영, 곧 자녀의 삶으로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게 된 이 축복된 삶이 오늘 평안의 모든 성도들 삶 속에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자비하신 하나님, '누구든지 목 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셔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넘쳐나리라' 고 약속하셨습니다. 바라기는 이 말씀을 듣는 사랑하는 성도들에게도 주의 은혜가 임하셔서 이제는 종의 영이 아니라 양자의 영으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후사로서의 삶을 누리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황요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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