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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럴 수는 없습니다 (롬 6: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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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사상태에 빠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뇌사상태란 폐나 심장은 움직이지만, 뇌 기능이 완전히 멈춘 상태를 말합니다.
뇌사상태가 되면 다시 살 가망이 없습니다. 아니 죽은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구주로 고백하고 그분을 내 마음에 영접하는 순간, 죄의 몸은 죽습니다.
내가 원하던 원치 않던 이 놀라운 일이 우리 안에 나타납니다.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롬6:2) "죽으심과 합하여...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롬6:4)
"우리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롬6:6)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 옛 사람이 죽습니다.
아니 죄의 몸이 죽었습니다. 장사되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자세히 보십시오. 과거완료형입니다. 이러한 일들이 이미 우리 안에 일어났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고 나서도 죄의 몸은 여전히 죽지 않고 살아 꿈틀댑니다.
이 죄의 몸은 우리를 죄의 법 아래로 끌고 갑니다.
영적으로 죄의 몸은 뇌사 상태와 다를 바 없습니다. 이미 사망선고가 내려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세상을 향해 있던 심장과 폐는 여전히 세상을 향해 쉬지 않고 뛰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은혜에 있다가도, 마귀가 달콤한 말로 꾀면 여지없이 넘어갑니다.
사탄이 놓은 덫에 걸리고 또 걸립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 가운데 다윗만큼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았던 사람도 드물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를 목동의 자리에서 이스라엘 왕이라는 최고의 자리에 올려주셨습니다.
나라를 부강케 하셨습니다. 부귀와 영화를 주셨습니다. 지혜와 용맹도 주셨습니다.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시18:1)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23:1)
이러한 고백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깊은 관계를 가진 사람만이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 순간에 다윗은 밧세바라는 여인 앞에서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다윗 역시 죄에 대해 '뇌사'판정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그의 육체는 살아있었습니다.
썩어질 구습을 사모하고, 세상을 향해 동경하고, 가슴 뛰던 심장박동은 아직도 멈추지 않고 있었습니다.
우리 또한 예외일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것보다 더 큰 문제가 있었습니다.
예수를 믿는 우리가 이런 죄를 지은 자기 자신의 행동을 교묘히 합리화한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말입니다.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롬5:20)
'봐라! 죄가 더한 곳에는 은혜가 더욱 많다고 하고 있지 않는가?
그러므로 내가 이렇게 죄를 짓는 것은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를 더 많이 받는 거야,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은 이제 죄의 문제에 대해서 고민할 필요가 없어, 죄가 많은 곳에는 언제나 은혜가 정비례하니까' 이 본문만을 보면 그렇게 오해 할 여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의 강조점은 죄를 많이 지은 사람이 용서를 받으면, 그 감사와 감격이 더욱 크다는 뜻입니다.
누가복음 7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한 바리새인의 집에서 식사를 하십니다.
그때 한 여자가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붓고, 눈물로 그 발을 씻겨 드립니다.
그 모습을 본 바리새인이 비꼬는 투로 이렇게 말합니다.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더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이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눅7:39)
이때 주님께서 '너에게 이를 말이 있다'고 하시면서 오백 데나리온 빚진 자와 오십 데나리온 빚진 자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둘 중에 누가 더 감사하며, 사랑하겠는가?" "그야 물론 오백 데나리온 탕감 받은 자죠?"
"바로 그거야, 너는 나에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않았고, 발에 입 맞추지도 않았어. 그러나 저는 내게 향유를 붓고, 눈물로 내 발을 씻겼다.
이유가 무엇인줄 아느냐?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눅7:47)
사람은 자고로 배가 고파봐야 밥의 고마움을 알며, 목이 탈 정도로 갈증을 느껴봐야 물의 시원함을 절실히 깨닫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더한다'는 말씀의 뜻은 깊은 죄악의 시궁창에서, 도무지 헤어나지 못하던 자가 그 죄 사함을 받았을 때 감사와 감격이 더욱 크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 글을 쓴 바울자신도 이 5:20절이 불필요한 오해를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을 염려한 듯 합니다.
그래서 롬6장을 이렇게 시작합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롬6:1~2)
이것은 더 이상 이 부분에 대해 왈가왈부하지 못하도록 일방적으로 선언하는 듯 한 어투입니다.
"무슨 말이냐? 무슨 말도 안되는 논리를 펴느냐" 이런 식입니다.
이 로마서 6장의 결론은 더 결연합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다"(롬6;23)라고 말입니다.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더 넘친다고 해서, 죄를 자꾸 범하는 우를 범해서는 되지 않습니다.
죄를 범하고, 또 용서받고, 범하고 용서받는 이런 일들이 반복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예수를 다시 십자가에 못 박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교회 양택조 집사님이 있습니다.
예전에 간경화로 상당히 위급한 상황에까지 내몰렸습니다.
얼굴은 새까매지고, 각혈을 했습니다. 그렇게 되기까지 몸을 너무 혹사했습니다.
방송 스케줄, 더 나아가 술 담배도 많이 했습니다. 몸이 성할 리가 없습니다.
병원에서도 고개를 가로저었습니다. 마지막 남은 방법은 간 이식수술 뿐이었습니다.
어디에서 구할 것인가? 고민할 때 아들이 나섰습니다.
이것은 자신의 생명을 떼어 주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식 수술이 끝나 뒤, 아버지는 이쪽 중환자실에서, 아들은 저쪽 중환자실에서 만났습니다.
아들의 손을 꼭 잡고, '고맙다'하시는 집사님의 모습을 잊을 수 없습니다.
지금 집사님의 얼굴이 얼마나 환하고 밝은 지 모릅니다.
그 힘든 제자훈련도 받고 있습니다.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요1:16) 이 말씀의 진정한 뜻은 무엇일까요?
앞의 은혜는 무엇이며, 뒤의 은혜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은혜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용서의 은혜입니다.
용서의 은혜란 눅15장에 나타나는 탕자가 받은 은혜입니다.
요8장에 나타나는 '현장에 간음하는 여자'가 받은 은혜입니다.
일만 달란트 빚진 자가 그저 탕감 받은 은혜입니다. 우리들은 이 용서의 은혜를 받은 자들입니다.
그러나 용서의 은혜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두 번째는 부어주시는 은혜가 있습니다. 이것은 말씀에 순종해서 받은 은혜입니다.
말씀대로 살려고 애쓰는 자들에게 나타나는 은혜입니다.
승리의 은혜, 축복의 은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무엘이 받았던 은혜입니다.
요셉이 받았던 은혜입니다. 다니엘이 받았던 은혜가 바로 부어주시는 은혜입니다.
이 은혜야 말로 '은혜위의 은혜'가 아닐까요? 용서의 은혜, 물론 중요합니다.
그러나 이 은혜는 우리로 하여금 원점으로 돌아오게 하는 은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들의 자리로, 의인의 자리로 돌아오게 하는 은혜입니다.
그런데 매일같이 마치 다람쥐 채 바퀴 돌듯이 이 은혜만 받아서는 되지 않습니다.
이 은혜위에 부어주시는 은혜, 승리의 은혜의 주인공들이 되기를 힘써야 합니다.
이 부어주시는 은혜의 주인공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먼저, 죄에 대해서 절교선언을 해야 합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롬6:11)
선언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입술로, 절교를 선언해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멈추어서는 안 됩니다. 피 흘리기까지 죄와 싸워야 합니다.
깡패 조직에 몸담고 있다가 절교를 선언하고 빠져나오면 그 조직이 그를 그냥 놔둘까요?
아닙니다. 그렇지만 내가 그 조직에 몸담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면 피 흘리기까지 싸워야 합니다.
그러나 내 힘으로는 부족합니다. 그래서 성령을 의지해야 합니다.
성령에 기대야 합니다.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갈5:16)
성령을 의지할 때 죄와 싸워 이길 수 있는 힘을 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그럴 수는 없습니다.
은혜를 더 하려고 자신을 합리화 할 수 없습니다. 우리 모두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산 자로 선언해야 합니다. 용서의 은혜에 머물지 않고 은혜위의 은혜 받기를 사모해야 합니다.
오직 성령의 은혜로만 가능하다는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이 성령을 사모해야 합니다. 이러한 자는 주님이 승리하신 것처럼 승리하게 될 것입니다.
(옥성석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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