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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은혜 아래 살면 (행 4:3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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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세상 사람들과 다른 것이 무엇이 있을까요? 세상 사람들은 우리들을 가리켜서 예수쟁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물론 그 말은 우리들을 비아냥거리는 뜻으로 사용하고 있지만 사실 이 말보다 더 귀한 말은 없습니다. 흔히 어떤 말끝에 쟁이라는 말을 붙일 때는 그 분야의 전문가라는 뜻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이 말을 좀 점잖은 말로 말할 때 그리스도인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은 예수 전문가라는 뜻도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기에 합당한지 우리 스스로를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말로만의 그리스도인인지 아니면 정말 그 이름으로 불리기에 합당하도록 살아가고 있는지를 생각해 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때 성령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하나님을 믿게 될 때 나타나는 첫 번째 결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달아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라고 고백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진정 나의 구주요 주인이 되신다면 마땅히 우리는 주님의 말씀대로 살아야만 합니다. 그런데 과연 나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사람인지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은 한쪽 귀퉁이로 넘겨버리고 내 생각에 옳은 대로 살아가려고 하지는 않은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령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계신 것은 단지 함께 하시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내 온 마음을 사로잡아 은혜로 살아가도록 이끌기 위해서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말씀으로 우리 마음이 채워져야 하고 우리 생각이 항상 하나님의 마음과 하나로 통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자연스럽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갈 수 있게 되기 때문이요 그 말씀대로 살아갈 수 있는 힘과 능력이 성령 하나님으로부터 우리에게 넘쳐나게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성령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함께 계실 때 어떤 모습으로 우리가 살아가게 되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모습이야말로 참된 하나님의 사람들의 모습이요 천국의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초대교회가 보여주고 있는 그리고 초대교회의 성도들이 우리들에게 보여주고 있는 본보기로서의 모습이 어떤지 다시 말해서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할 때 나타나는 결과가 무엇인지를 함께 살펴봄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첫째로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면 한 마음과 한 뜻으로 살게 됩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우리로 하나님의 자녀 되게 하시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우리들의 심령이 그 성령 하나님으로 충만하게 될 때 나타나는 첫 번째 모습은 많은 성도들이 다 한 마음과 한 뜻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 마음이 주님의 마음과 하나가 되니 그 마음이 하나가 될 수밖에 없고 우리의 뜻이 주님의 뜻과 하나가 되니 또한 그 뜻이 하나가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주님과 하나가 되니 주님 안에서 하나가 된 나와 네가 또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서로가 하나가 되게 되니까 더 이상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 하지 않게 되더란 말입니다. 이는 곧 주님 사랑 안에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다른 성도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어지게 되니 서로를 만나는 것이 즐겁고 이 즐거운 마음으로 서로를 격려하게 되고 칭찬하게 되니 주님을 섬기는 일에 즐거움이 넘치게 되고 이 즐거움을 가지고 살아가게 되니 또한 내가 가진 것을 조금도 아까워하지 않고 주님을 위해 사용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사랑 안에서 살아가게 되니 더 이상 내 것 네 것을 따지지 않게 되는 것이요 따라서 모든 것을 공동으로 사용하게 되는 것은 오히려 당연한 결과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은혜 아래 들어가서 생각해 보면 우리의 가진 모든 것이 내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을 내게 잠시 맡겨 주신 것이요 주님의 뜻을 따라서 사용하도록 맡겨 주셨다는 사실을 또한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내 마음이나 네 마음이 똑같으니까 그것을 사용함에 있어서도 공동으로 사용하게 마련입니다. 여기 공동으로 사용한다고 하는 것은 함께 기도하면서 무엇을 주님이 기뻐하실까를 살펴서 사용한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거기에는 내 뜻이란 하나도 없으니 불만이 있을 수 없고 모든 것을 기쁨으로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가진 것을 사용함에 있어서 무엇을 주님이 기뻐하시는가를 먼저 살피게 되고 그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위해 가진 것을 사용하게 되니까 조금도 아까운 것이 없게 됩니다. 또한 아까운 마음이 없이 즐거움으로 모든 일을 하게 되니까 거기에 기쁨이 넘치게 되고 은혜가 더욱 넘치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이렇듯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살아가며 하나님을 섬기게 될 때 나타나는 또 한 가지 유익한 일은 사도들이 더욱 큰 능력으로 주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한 마음이 되지 못하고 서로 갈등하고 대립하게 되면 말씀을 전하는 입장에서도 결코 마음이 편하지를 않습니다. 그리고 이렇듯 마음이 불편한 가운데 말씀을 전하게 되면 그 말씀이 큰 능력으로 나타나기가 결코 쉽지 않은 것은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모두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가진 것도 자기 것이라 하지 않고 공동으로 사용하며 기쁘게 서로를 섬기니 말씀을 전하는 사도도 큰 능력으로 말씀을 전하게 되는 것은 오히려 당연하다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그 말씀을 듣는 사람들 역시도 모두 큰 은혜를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큰 은혜를 받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가운데 살아가기 위해서는 모든 성도들이 주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일에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야만 합니다. 그럴 때 앞서서 말씀을 전하는 목회자도 큰 능력으로 주님의 부활을 전할 수 있고 그 말씀을 받아 성도들이 큰 은혜를 받아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가 다 주님의 말씀 안에서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사랑을 나누며 살아가는 귀한 역사가 우리 모두에게 넘쳐나기를 축원합니다.

다음으로 생각할 것은 은혜가 넘치게 되니 아낌없이 드리고 필요에 따라 나누며 살아가게 됩니다.
성도들 가운데는 가난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고 했습니다. 어찌 그들 가운데 가난한 사람이 없었겠습니까? 그런데도 그들 가운데 가난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고 하는 이유는 땅이나 집을 가진 사람들이 그것을 팔아서 그 판돈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놓았고, 사도들은 각 사람에게 필요에 따라 나누어주었기 때문입니다.

이미 성도들은 다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아무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 하지 아니하고 공동으로 사용하였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재산이 있는 성도들이 자기 재산을 팔아 교회 앞에 드렸고 그 드려진 예물을 가지고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주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당연히 그들 모두는 필요를 따라 부족함이 없이 살아갈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미 은혜로 충만한 성도들이기에 그들은 먼저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무엇인지를 살폈습니다. 그런데 은혜 아래서 그들이 깨달은 바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란 섬기며 베푸는 일이요 따라서 서로를 섬기며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나가는 일에 가진 재물을 사용하는 것은 오히려 당연한 일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들의 재산을 팔아 그것으로 가난한 자들을 섬길 수 있도록 사도들의 발 앞에 놓았고 사도들은 그것을 필요를 따라 나누어줌으로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어 나갔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성도들 가운데서도 대표적인 인물을 뽑는다면 바로 바나바입니다. 그의 본명은 요셉이었는데 그가 얼마나 은혜롭게 성도들을 돌보았으면 그에게 사도들이 별명을 붙여주었는데 그 별명이 바로 위로의 아들이라는 뜻의 바나바였던 것입니다. 우리는 사도행전을 통해서 이 바나바에 대해서 더욱 자세히 살펴볼 수가 있는데 바나바는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다음 사도들을 포함한 120여 성도들이 함께 모여 말씀과 기도로 주님 앞에 엎드리던 다락방의 주인 아들이었던 마가의 삼촌이기도 합니다. 당연히 바나바도 다락방에 함께 모여 말씀 듣고 기도하던 120명 가운데 한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이 임하면서 바나바가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다른 성도들을 위로하고 격려하고 붙들어 주는 것만큼 귀한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성도들을 계속해서 돌보며 붙들어 줍니다. 그런 가운데서 위로하고 격려하는 일이 단지 말만 가지고는 부족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우선 너무도 가난한 사람들을 볼 때 그들이 살아갈 수 있도록 돕기 위해서는 그들의 필요를 따라 물질로 도울 필요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 그래서 그는 조금도 아낌없이 자기가 가지고 있던 밭을 팔아서 그 돈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놓아 사도들로 하여금 성도들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줄 수 있도록 하였던 것이요 그런 바나바의 행동이 다른 성도들을 감동시켜 그들 역시도 은혜 가운데서 재산을 팔아 사도들에게 드려서 이 사랑의 나눔을 실천할 수 있도록 동참하였던 것이 초대교회의 아름다운 전통이 되었던 것입니다.

왜 우리 교회가 재정의 절반을 선교비로 지출합니까? 왜 우리가 장학금과 구제비로 예물들을 즐겨 나누고 있습니까? 그것이 바로 은혜 아래 살아가는 성도들의 본된 모습이기 때문이요 그것을 하나님께서도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잠언 19:17에 말씀하기를 “가난한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은 주님께 꾸어드리는 것이니, 주님께서 그 선행을 넉넉하게 갚아 주신다.”고 하셨고 시편 112:5에서는 “은혜를 베풀며 꾸이는 자는 잘 되나니 그 일을 공의로 하리로다.”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 말씀하심으로 지극히 작은 자 즉 가난한 자를 돌보는 것이 곧 주님을 섬기는 것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또한 신명기 15장 7절로 10절에서는 “주 당신들의 하나님이 당신들에게 주시는 땅의 어느 한 성읍 가운데에 가난한 동족이 살고 있거든, 당신들은 그를 인색한 마음으로 대하지 마십시오. 그 가난한 동족에게 베풀지 않으려고 당신들의 손을 움켜쥐지 마십시오. 반드시 당신들의 손을 그에게 펴서, 그가 필요한 만큼 넉넉하게 꾸어 주십시오. 당신들은 반드시 그에게 꾸어 주고, 줄 때에는 아깝다는 생각을 하지 마십시오. 그러면 주 당신들의 하나님이 당신들이 하는 모든 일과 당신들이 손을 대는 모든 일에 복을 내려 주실 것입니다.”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꾸어주기만 해도 이렇게 복을 받는다고 했는데 꾸어주는 것이 아니라 한걸음 더 나아가서 그들의 필요를 따라 도울 때 하나님께서 우리들이 하는 모든 일과 손을 대는 모든 일에 복을 내려주실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향남교회와 우리 모두를 복 주시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 가운데 아무런 문제도 없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직장에서 받는 스트레스로부터 시작해서 가정 안에서도 나타나는 부부와 부모 자녀 간에 나타나는 긴장과 갈등, 어떻게 하면 부족함이 없이 좀 더 넉넉하게 살아볼까 하는데서 오는 고통, 이웃이나 성도들 사이에서 나타나는 대인 관계의 크고 작은 부조화와 서로 비교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상실감, 꿈과 비전을 실천해 나가는 과정에서의 좌절, 사업을 이끌어나가는 과정에서 생기는 크고 작은 문제들, 건강하게 살고자 하는 욕구로부터 나타나는 불안, 성격적인 차이에서 나타나는 자괴감이나 지나친 자신감 등등 불안과 불만 요소들을 누구나 다 한 두 가지는 가지고 있더란 말입니다. 그런데 그를 어떻게 극복하느냐가 또 하나의 관건이 아니겠습니까? 내 스스로 해결할 수도 있을 때가 있는 반면 내 힘만으로는 극복할 수 없는 문제들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서로 도와야 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의 가장 큰 문제 중 하나가 바로 이런 경제적인 문제였고 그래서 그들은 자기들의 재산을 팔아서 사도들 앞에 둠으로써 사도들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어 그 부족한 부분을 보충하여 줌으로서 문제를 해결해 나갔던 것이요 또한 낙심하고 좌절하는 사람이 있었기에 위로의 아들이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요셉이 위로자로서의 역할을 감당했던 것이 아니겠습니까? 따라서 우리 모두가 바나바처럼 성도들 안에 있는 크고 작은 문제들을 살펴서 위로하고 격려하여 줌으로써 붙들어주어야 할 것이고 또한 서로의 약하고 부족한 부분을 채워줌으로 도울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렇듯 우리가 말과 행동으로 붙들어 주고 채워줌으로 그 사람에게 필요한 돕는 자로서의 역할을 감당해야 할 것입니다. 이렇듯 우리가 선교하고 봉사하며 섬기며 나누는 일에 하나가 될 때 그로 인해서 성경을 통해 하나님께서 약속하여 주신 대로 모든 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요셉에게 붙여진 바나바라는 이름이 지니고 있는 위로의 아들이라는 뜻처럼 우리 모두가 위로하고 격려하며 칭찬함으로 서로를 붙들어주는 귀한 사랑의 실천자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이미 우리는 초대교회의 아름다운 모습을 함께 누리고 있습니다. 그 아름다운 사랑을 실천하고 있습니다. 모든 성도들이 바나바처럼 살아가고 있는 그 모습이 얼마나 감사한지요! 물론 때로는 이게 아니다 싶은 모습이 보일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서로를 아껴주고 붙들어주는 성도들의 사랑을 볼 때 정말 감사할 뿐입니다. 그리고 그런 아름다운 모습들이 제게도 얼마나 힘이 되는지 모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다시 한 번 우리 주위를 살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누가 나를 도와줄 사람은 없는가를 생각하기에 앞서서 내가 먼저 다른 사람의 도움이 되기를 소망하십시오. 내가 먼저 다른 사람들을 찾아가 작은 사랑을 함께 베풀어가는 귀한 삶을 살겠다고 다짐을 해 보십시오. 그리고 그런 마음으로 주위를 돌아보게 되면 우리의 사랑을 필요로 하는 이웃들이 얼마든지 눈에 들어올 것입니다. 그들을 찾아가십시오. 그리고 그들에게 주님의 사랑을 전하십시오. 그럴 때 내 마음이 먼저 기쁘게 되는 것은 내가 축복의 통로가 되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은혜를 사모합니까? 내가 하는 모든 일에 복을 받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바나바처럼 먼저 드리는 자요 먼저 섬기는 자요 위로의 사람이 되도록 하십시오. 그럴 때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는 복된 자녀로 살아갈 수 있게 되고 우리의 가정과 범사에 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이 풍성한 은혜의 사람, 섬김의 사람, 나눔의 사람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홍인덕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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