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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님이 좋아서 (고후 5: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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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에게 미쳐버린 사람이 있습니다. 제 정신이 아닐 정도로 거기에 완전히 빠져 버린 사람입니다.
본문 말씀 13-14절에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만일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고 하였습니다. 한마디로 예수님이 좋아서 그렇습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사랑이 남의 눈을 의식하지 않고 미쳤다고 할 만큼 그 행복에 빠져들게 하기 때문입니다.

I. 예수님이 좋은 이유

흔히 사랑에는 이유가 없다고 말합니다. 부모와 자식관계, 형제나 친구 또는 이성간의 사랑도 그것이 순수한 사랑일 경우 거기에 무슨 이유나 조건이 전제되지 않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무조건 좋고 행복할 뿐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에 감격하는 성도의 경우 「예수님」의 이름만 생각해도 마냥 즐거움이 되는 것입니다.

(1) 가장 이상적인 분입니다.

술람미가 예루살렘 여자들의 물음에 대답하면서 솔로몬의 매력적인 부분을 소개한 것을 보면 “머리는 정금 같고 머리털은 고불고불하고 까마귀 같이 검구나”로 시작하여 비둘기 같은 눈, 향기로운 뺨, 몰약이 떨어지는 입술, 황금노리개 같은 손, 상아에 청옥을 입힌 듯 한 몸, 화반석 기둥 같은 다리, 백향목처럼 보기 좋은 입까지 최상의 것으로 묘사하였습니다. 그리고 한마디로 “그 전체가 사랑스럽다”고 하였습니다(아 5:10-16).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 창조주의 능력과 권세를 가지셨습니다. 지혜와 권능과 영광이 충만하신 분입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하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인류의 역사와 개인의 생사화복을 주장하시며 자연과 삼라만상을 통치하시는 분입니다. 다른 한편으로 우리와 같은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나셨으나 죄가 없는 분입니다(히 4:15).

(2) 나를 알고 인정해 주십니다.

옛날 술람미는 신분상으로 솔로몬 왕과 비교가 될 수 없는 천한 여인이었습니다. 아가 1:5-6에 보면 그의 외모는 게달의 장막처럼 검고 못생겼으며, 집안에서는 오라비들의 구박에 포도원지기로 험하게 살았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러나 위대한 솔로몬 왕이 그를 불러 연인으로 삼고 “나의 사랑하는 자”라고 불러주었습니다. 아가 2:2에 “여자들 중에 내 사랑은 가시나무 가운데 백합화 같구나”고 하였습니다. 아가 2:10에는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하고 그를 이끌어 주었습니다.
비록 신분이 다르고 환경이 달라도 사랑으로 이해하며 아껴주고 서로 마음을 같이하며 최상의 즐거움을 만끽하게 하였습니다. 아가 8:3-4에 “너는 왼손으론 내 머리에 베개하고 오른손으론 나를 안았었으리라 예루살렘 여자들아 내가 너희에게 부탁한다 나의 사랑하는 자가 원하기 전에는 흔들지 말며 깨우지 말찌니라”고 하였습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자녀들은 교회생활을 통하여 그리스도와 교통하는 삶을 사는 자들입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마음을 헤아리게 됩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께서는 악마가 들끓는 죄악 세상에서도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고 기도하며 붙들어 주십니다(눅 22:32).

(3) 나를 위해 희생해 주셨습니다.

본문 말씀 14절에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죄와 죽음에서 건지시고자 자신이 십자가 위에서 대속의 죽음을 당하신 것을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로마서 5:8에는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의 사랑은 자기희생을 뜻하는 아가페(ἀϒάπη)사랑입니다. 이 부분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남다른 감회와 감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죽음이 의인을 위한 것이 아니라 경건치 않는 자를 위한 죽음이라는 것과 죄인을 위하여 자기 몸을 희생하셨다는데 의미를 두었습니다(롬 5:6, 갈 1:4).
그 자신의 경우 본래 그리스도를 훼방한 자요, 교회를 핍박한 자요, 주의 종들을 폭행한 자였습니다(딤전 1:13). 그런 자기가 형벌을 받는 것이 당연한데 오히려 용서를 해주시고 자기를 위하여 예수께서 죽어주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1:15에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고 하였습니다.

Ⅱ. 예수님이 좋아서 행복합니다.

사람마다 기쁨이나 즐거움, 또는 행복을 느끼는 양상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가령 아름다운 꽃이나 자연에 대하여 있는 그대로를 보고 즐기는 사람이 있고, 그것을 자기 욕심대로 훼손 하고 이용을 하므로 만족해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예수님이 좋아서 행복하고 언제나 즐거움과 감사의 삶을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특징입니다.

(1) 예수님을 사모하는 것입니다.

사모한다는 것은 가장 존귀하게 여기는 대상을 마음에 담아 두고 항상 그리워하며 즐기는 태도를 뜻합니다. 이런 것은 육체적이거나 물질적인 것보다 영적이고 정신적인 것을 뜻하며, 현세적이거나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내세적이며 영원한 것이어야 합니다. 고린도후서 4:18에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지혜자 솔로몬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실 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다고 하였습니다(전 3:11). 잠시잠간 살다가 끝나는 세상살이에서도 영원한 세계의 실제를 알고 그것을 그리워하면서 사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한 평생을 나그네로 지냈지만 하나님께서 예비해 놓으신 영원한 성을 사모하며 살았더라고 하였습니다(히 11:16).
선지자 이사야는 “밤에 내 영혼이 주를 사모하였사온즉 내 중심이 주를 간절히 구하오리니…”라고 하였습니다(사 26:9). 우리에게 오직 예수 그리스도가 영원히 사모할 대상이기 때문에 항상 그리스도를 마음에 두고 가까이 다가가면서 최상의 행복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히 12:2).

(2) 예수를 닮아가는 것입니다.

성숙된 그리스도인은 날마다 예수님의 성품으로 닮아가며 그의 삶에 동화되는 것입니다. 간혹 개성이 강하고 자기중심의 삶을 고집하는 사람은 예수님을 닮아가지 못하는 문제로 인하여 깊은 회의와 갈등을 가지게 됩니다.
사도 바울의 경우 그의 속사람은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지만 그의 겉사람이 육신의 법을 좋아하여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멀어지게 한다고 하였고, 이것이 가장 큰 고민거리라고 탄식하였습니다(롬 7:22-25).
그러나 신앙적 의지를 가지고 매진하는 사람은 성령의 강권적인 은사에 힘 입혀져서 점차 예수님을 닮아가며 그리스도로 행동하게 됩니다. 빌립보서 2:5에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에베소서 4:13에는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까지 이르리니”라고 하였습니다.
본문 말씀 14절에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삶의 비결이 오직 그리스도의 사랑의 힘에 의한 것임을 말해줍니다.

(3)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입니다.

생태계에서 애벌레가 자라 성충이 되고 번데기가 되면 거기서 꺼풀을 벗고 나방이 되어 공중으로 날아다니는 새로운 차원의 세계가 열리게 됩니다.
일찍이 예수님께서는 유대인의 랍비 니고데모에게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게 되는 중생(重生)의 도리를 말씀하셨습니다(요 3:5-7). 본문 말씀 17절에는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 하였습니다. 새로운 피조물이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된 사람을 뜻합니다. 육신의 사람이 성령의 사람으로 거듭났다는 의미입니다.
이 경우 지금까지 육신에 얽매여서 자기의 정욕대로 살던 사람이 이제부터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의지에 맞도록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롬 7:8-14). 그뿐 아니라 예수님과 호흡을 같이 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며 거기서 최상의 행복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Ⅲ. 예수님을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본문 말씀 15절에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이전에는 자기를 위하여 살았던 사람이 이제부터 나를 대신하여 죽어주신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아야 된다는 말씀입니다.

(1) 주와 복음을 위하여

예수님께서 하늘로 올라가시면서 그의 교회와 성도들에게 분부하신 지상명령(至上命令)이 모든 족속에게로 가서 복음을 전하라고 하신 것입니다(마 28:19-20).
사도 바울은 평생 동안 예수 그리스도에게 빚을 갚는 심정으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로마서 1:14-15에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가 좋은 만큼 그를 위하여 전도하는 열정도 대단하였습니다. 사도행전 26:24-29에 보면 그가 베스도 총독과 헤롯 아그립바 앞에서 그리스도의 부활을 논증하자 총독은 바울을 향해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고 하였습니다.
전도의 사명을 인식하는 사람은 시도 때도 없이 누구 앞에서나 입만 벌리면 예수를 전하곤 합니다(딤후 4:2). 다른 사람이 볼 때 제 정신이 아니거나 「예수에 미친 사람」정도로 취급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바울 자신은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만일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고 하였습니다(13-14절). 

(2) 몸된 교회를 위하여

골로새서 1:24에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고 하였습니다. 사랑하는 남편을 잃은 여인이 유복자(遺腹子)를 키우면서 남편에 대한 애정을 거기에다 쏟는 것처럼 예수의 사랑에 감격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모든 정성을 쏟게 됩니다.
사도 바울이 에베소 장로들에게 당부한 말을 보면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를 인하여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꺼림이 없이 너희에게 전하여 가르쳤다”고 하였습니다(행 20:19-20). 참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어떤 멸시나 수모도 감내하면서 교회를 위하는 일념으로 헌신한다는 것입니다.
솔로몬의 재판에 나오는 산 아이의 어미가 자식의 생명을 위해서 자기의 옳은 것을 주장하지 않고 권리마저 포기해 버리듯이(왕상 3:16-28), 교회에 유익되는 일이라면 자존심과 명예를 다 내어 놓는 자세로 살아갑니다.

(3) 그리스도를 존귀케 하기 위하여

자기가 죽도록 좋아하는 사람이거나 자기에게 가장 큰 은혜를 베풀어준 사람이라면 그를 위해서 몸을 던지고 헌신하는 것을 더 없는 기쁨으로 생각하게 됩니다.
중국 춘추전국시대 위나라의 장수 오기(吳起)는 전쟁터에서 죽어가는 병사에게 다가가서 직접 입으로 고름을 빨아주고 살려내었습니다. 그 사실을 안 병사의 어머니는 ‘이제 내 아들이 장군에게 충성을 바치다가 전쟁터에서 죽을 것’이라고 하며 울었다고 합니다.
존귀하신 예수님께서 크신 사랑을 베푸시고 자기 생명을 희생하여 구원해 주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을 때 나도 또한 주님을 위하는 일에 무엇이든지 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게 될 것입니다. 사도바울의 경우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고 하였습니다(빌 1:20-21).
(손상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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