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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소유보다 신앙입니다 (창 32:2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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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 전에 집사님 두 분과 사남, 분재도 하고 양어장도 하는 권님 댁에 방문했습니다. 화분에 심은 나무에 철사 같은 걸로 감아서 나무를 모양내느라 휘어지게 한 것을 보고, 장집사님이 나무가 불쌍하다는 식으로 이야기했습니다. 그냥 제 멋대로 자라게 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 이야기입니다. 마침, 그곳을 들어선 주인이 그 이야기를 듣고, “이 나무를 그냥 놔두면 1만원도 안 된다. 그러나 이렇게 해서 만들면 몇 십 만원, 혹은 몇 백만 원도 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함으로 해서 나무의 가치가 올라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냥 나무가 나무 스스로 제멋대로 자라게 두어야 하는지, 아니면 그렇게 억지로라도 구부리고 뒤틀어서 값을 올려야 하는 건지, 그야말로 헷갈리는 순간을 경험했습니다.
그게 환경 문제입니다. 그냥 되는대로 두어야 하는 건지, 아니면 좀 더 좋게 개발해야 하는 건지…….
기왕 분재 이야기가 나왔으니 다시 짚어봅시다. 나무 주인의 입장에서 보면 그것이 몇 만원이나 되느냐 하는 가치가 중요합니다. 그러나 나무 입장에서 보면 자기가 얼마짜리냐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그야말로 백만 원을 받았다고 해도 나무은 일 원도 가질 수 없는 거니까요.
이런 일은 비일비재합니다.

우리나라 보리는 뿌려만 놓으면 거둘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옛날만큼 안 심습니다. 수입해 오는 것이 훨씬 싸기 때문입니다. 내 생각에, 그래도 조금 비싸게 사서 우리 농산물 내가 먹고, 또 우리 농촌에 돈을 주는 거니까, 그래도 보리를 심는 게 나은 거 아니냐 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런 게 아닌가 봅니다.
이런 것들이 환경운동에 발목을 잡습니다. 그래서 개발과 환경보존은 언제나 갈등 관계에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환경운동이라고 거창하게 생각하지 맙시다. 게시판에 붙여놓은 포스터처럼 생명밥상 빈 그릇 운동에 동참합시다.

탈무드라는 유태인 지혜서 속에 나오는 랍비 ‘요한나 벤 자카이’는 지금도 유태인들의 가슴 속에 살아있는 위대한 스승입니다.
주후 70면. 예루살렘이 반란을 음모한다는 이유로 로마군이 성벽을 에워싸고 모든 유태인의 성 밖 출입을 철저히 단절시켰습니다. 그때 비둘기파의 지도자 벤 자카이는 중병에 걸려 죽어가고 있다는 소문을 퍼트렸습니다. 많은 사람이 병문안을 다녀간 얼마 후 벤 자카이가 죽었다는 소문이 퍼져 나갔습니다. 제자들이 관 속에 선생의 시체를 넣고 성 밖으로 나갔습니다. 성문을 지키는 로마 병정들이 관을 내려놓고, 칼을 들어 그 관속을 확인하려고 하였습니다. 제자들이 반발했고, 이렇게 해서 간신히 성문을 통과했습니다.
성문을 통과한 벤 자카이는 급히 로마 사령관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조그마한 방 하나라도 좋습니다. 열 명 가량의 랍비들이 들어가 공부할 수 있는 학교 하나만 남겨주시고, 그것만은 파괴하지 말아 주십시오.”하고 간청하였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사령관은 너털웃음을 웃고, “죽음을 무릅쓰고 나를 찾아온 목적이 그것뿐입니까? 약속드리지요.”하고 대답했습니다.

그 70년 유대전쟁에서 로마는 예루살렘을 불태우고, 성전을 파괴하고, 9만 여 유태인들을 학살하였으나, 약속대로 작은 랍비 학교 하나만을 남겨두었습니다. 그래서 유태인들은 그 작은 학교를 통해 오랜 세월동안 그들의 지식과 지혜, 전통, 그리고 신앙을 지켜왔습니다. 그리하여 지금도 벤 자카이는 민족의 스승으로 존경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1976년 이 벤 자카이의 영웅적 행위를 오히려 유태민족에 대한 반역행위로 정죄하고 나선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자본주의의 허상 뿐 아니라, 오늘 공산주의, 사회주의의 위선을 폭로하고 나선 20세기의 지성 ‘에리히 프롬’입니다.

그는 <소유냐, 존재냐?>라는 책에서 말하기를, “주후 70년. 로마에 항거하던 유태지도자들이 패배하고, 나라를 빼앗기기 보다는 차라리 죽음으로 민족을 지키자고 결의하였을 때, 자카이 랍비만은 이것을 배신하였다. 비밀리에 예루살렘을 떠나 로마 장군에게 항복하고서는, 그 대가로 유태인 학교 하나를 얻어낸 것이다. 유태전통의 보존이라는 공헌도 있지만, 유태인이 가졌던 모든 것-나라, 성전, 신앙과 종교를 송두리째 내어준 것이다.”
학교 하나를 소유한 대신 유태인을 유태인으로 만들어 온 민족적 양심을 그 존재의 근원에서부터 말살시켰다는 것입니다.

탈무드의 수많은 아름다운 이야기, 정말 지혜서요, 아름다운 책입니다. 그러나 그 아름다움 밑바닥에 깔려 있는 어두움을 에리히 프롬은 예리하게 포착한 것입니다.
그러나 에리히 프롬이 벤 자카이를 배신자로 규정하는 것은 보다 더 심각하고 근원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에리히 프롬은 학교 하나를 얻기 위하여 실상은 민족을 거부한 벤 자카이의 배신적 행위가 오늘 여기서 살고 있는 우리 모두의 행위가 되었다는 것을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벤 자카이는 학교 하나를 소유하려 했지만, 오늘의 현대인들은 끊일 줄 모르는 소유욕으로 병들어 가고 있다고 그는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에리히 프롬은 영국 시인 테니슨이 쓴 시를 인용합니다.
“골짜기 틈바구니 사이의 한 꽃을 보았네. 나는 그 꽃을 틈바구니에서 뽑아냈지. 그리고 나는 그 꽃의 뿌리와 모든 것을 내 손에 들고 있네. 작고 아름다운 너 꽃. 나는 네게서 신이 누구이며, 인간이 무엇인지를 알게 될 거야.”

에리히 프롬은 이 시 속에서 인간의 무자비한 배신적 행위를 읽고 있었던 것입니다. 테니슨은 신과 사람의 자연을 이해하기 위해 그 꽃을 뿌리째 뽑아 그의 손 안에 쥐고 있는 한, 바로 그가 그 꽃을 소유하고 있다는 그 사실 때문에, 그 꽃은 시들고 파괴되어 가고 있다고 그는 말하는 겁니다.
무한대로 퍼져가는 소유욕. 가진 자의 더 많이 가지려는 욕망. 남의 것도 빼앗아 내 것을 만들려는 욕구를 오늘날 20세기는 세 가지의 위대한 약속으로 부채질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약속의 하나는 무한대 생산입니다. 또 하나는 무한대 소비이고, 세 번째는 이 생산과 소비가 무한대의 행복이라는 약속이라는 겁니다. 많이 만들어내고, 많이 쓰는 것이 곧 행복이라고 말하는 겁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가지려고 발버둥 칩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회를 더 파멸시킬 뿐입니다. 자기 스스로를 죽음과 절망의 구렁텅이로 몰아넣는 것 밖에 되지 않습니다.

이제 우리는 성서 안에서 또 한 사람을 만납니다. 야곱입니다. 이 야곱을 통해서, ‘그러면 어떻게 해아하나?’하는 물음의 대답을 찾아보려고 합니다.
야곱은 성공한 사람입니다. 야곱의 이야기 앞부분은 현대인들이 즐겨 들을만한 성공담입니다. 야곱을 잘 연구하면 돈을 벌거나, 사회적으로 성공하는 비결을 찾아볼 수 있을 겁니다.

값싼 팥죽 한 그릇으로 형 에서의 장자권을 살 수 있었던 지혜. 큰 아들로 위장하여 아버지로부터 장자의 축복을 받아낼 수 있었던 기교. 7년 종살이로 레아를 그리고 또 7년 종살이로 사랑하는 여인 라헬을 아내로 맞이하는 끈기. 버드나무와 살구나무 껍질을 이용하여 점 있는 양으로 바꾸어서 삼촌의 재산을 자기 것으로 바꾸는……. 그러한 야곱의 지혜, 융통성, 순발력, 끈기 등은 현대인들이 닮고 싶어 하고 추구하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이것저것 소유한 야곱이 고향으로 돌아가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머문 곳이 얍복강 나루입니다. 이 시간, 이 밤을 지나면, 20년 만에 형을 만납니다. 그러나 그 만남은 기쁨이 아니었습니다. 두려움이었습니다. 야곱은 불안하고 초조했습니다. 숱한 재산, 아내들, 자식들……. 소유할 거라고는 거의 소유한 야곱이지만 이 시간과 이 공간에서는 오히려 철저하게 절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형에게 뇌물을 보냈습니다. 답답함, 불안과 초조, 형에게 대한 죄책감……. 이런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야곱은 자기가 소유한 것을 가지고 해결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상처받은 형과의 관계가 치유될 수는 없었습니다. 그것은 오히려 야곱의 소유욕을 나타내는 또 다른 표현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23-24절. 모든 재산. 모든 소유와 가족을 얍복강 건너편으로 건너게 한 후 야곱은 혼자 남았습니다. 혼자 있는 야곱. 적어도 이 순간만큼은 아무 것도 가지지 않았습니다. 전혀 소유가 없는 가난의 순간입니다. 아무 것도 필요 없는 그런 순간입니다. 이러한 순간을 에리히 프롬은 “구원의 길”이라고 불렀습니다. “현대인이 가난을 선택하는 순간” “욕망을 포기하는 순간”이 곧 “구원의 길”이라고 프롬은 외친 것입니다.
그럴까? 사실 그럴까? 가난을 선택했다고 해서, 욕망을 포기한다고 해서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는 것일까?

이 야곱의 이야기에서 에리히 프롬이 보지 못한 또 다른 이야기를 발견합니다.
뇌물을 써 보기도 하고, 재산과 가족을 다 떠나보내는 가난을 선택했는데도, 홀로 남은 야곱의 마음은 더욱 처절하고 고독했던 것입니다. 프롬의 말대로라면, 그 순간만큼은 야곱이 뭔가 기쁘고 평안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았던 겁니다. 모든 가진 것을 포기하고 가난을 선택할 때, 갖고자 하는 욕망을 버릴 때, 기쁨과 평안이 있어야 하는데 오히려 그는 더 고독하고 괴로웠습니다.
많이 가져도, 그렇다고 하나도 가기지 않아도 인간의 근본문제는 해결되지 않는 것입니다. 법정 스님이 말한 무소유상태에서도 마음이 평안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제 야곱은 하나님의 사자를 붙잡고 씨름합니다. 그는 환도뼈가 부러지는 고통이 있었지만, 하나님의 사자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내게 복을 주고 가라”고 매달렸습니다. 그것은 야곱이 하나님의 사자로부터 복을 받아 더 가지려고 하는 소유욕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절망과 불안, 초조, 그 고독 등의 해결은 하나님뿐이라는 겁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을 믿는 신앙으로만 해결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는 오랫동안 잊었던 하나님을 비로소 찾게 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그 ‘가짐’에서 자신의 존재의미를 찾습니다. 어떤 사람은 가지려고 하는 욕망이 아닌 철학과 지혜, 지식, 이런데서 그 자신의 존재의미를 발견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오히려 우리를 공허하게 만들뿐입니다. ‘너와 나’ 사이의 담을 높이 쌓아올릴 뿐입니다. 진정한 우리 존재의미는 하나님과 영적 씨름에 있는 겁니다.

데카르트는 “나는 사고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고 말했습니다. 생각하고 있기에 나는 존재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에게 진정한 사고가 없습니다. 말하자면 어떻게 많이 소유하느냐에 대한 궁리는 있지만, 진정한 사고에 따른 물음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선 자신에 대하여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이 되어야 하느냐?” “나는 왜 사느냐?”는 등의 근본적인 사고 물음이 전혀 없습니다. 또 하나, 사회나 이웃에 대한 물음이 없습니다. “이 사회 속에서 나는 누구인가?” “옆에 앉은 사람(낮 모른다 하더라도)에게 있어서 나는 누구인가?” 하는 물음이 없습니다.

또 물음이 있다 한 들 누가 대답하겠습니까? 이런 인간 존재에 근본 물음에 대해 누가 대답하겠습니까? 우린 분명히 말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존재 근거가 되시는 하나님에서만 그 대답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을. 우리를 향하여 예수님은 여전히 말씀하십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라고... 다시 말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는 진정한 내가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하였습니다. 모두 다 죽어야 합니다. 가졌든 못 가졌든 죽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생명을 얻습니다. 그는 가졌든 못 가졌든 살아있습니다. 지금 살아 있는 그는 나중에도 살아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인자는 머리 둘 곳조차 없다.”고 하셨습니다. 가진 것이 없다는 겁니다. 그러나 그 분은 너무나 많은 것을 주셨습니다. 병든 자를 고쳐 주셨습니다. 죽은 자를 살려 주셨습니다. 절망 가운데 있는 자에게 소망을 주셨습니다. 당시 죄인, 창녀 등등 소망이 없는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소망을 주셨습니다. 끝내는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가졌느냐가 아닙니다. 얼마를 주느냐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 역시 이미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준다고 하면 물질적인 것만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교회가 세상에 줄 것이 있는데, 사랑을 줄 수 있습니다.
교회가 세상에 줄 것이 있는데, 믿음을 줄 수 있습니다.
교회가 세상에 줄 것이 잇는데, 소망을 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것들을 구체적으로 주는 삶을 사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적어도 함께 나누어 먹으라고 누가 준 것도 챙겨 가는 사람은 아닙니다. 그렇게 주는 사람이 복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주는 사람이 받는 사람보다 복이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불교의 위대한 사람들 물론 주기도 했지만, 그러나 자신의 깨달음을 위해 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기독교의 성자들 진정으로 주는 사람들입니다. 마더 테레사는 지극히 가난한 사람입니다. 옷 두 벌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사랑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성자라고 일컬음을 얻게 되었습니다. 웨슬리 역시 가진 것을 다 나누어주는 삶을 살았습니다.

소유냐 무소유냐? 그게 중요한 것 아닙니다. 가졌든 못 가졌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어떻게 사느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웃과의 관계에서 어떻게 사느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자기의 돈 벌이를 위해 나무를 비튼다면 그것은 바람직하다고 볼 수 없습니다. 그것은 더 소유하기 위한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환경에 대해 우리가 보아야 할 것은 그것이 무엇을 위한 것이나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내가 기준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지역사회나 심지어 국가가 기준이 되어서도 안 됩니다. 팔은 안으로 굽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교회 건축. 동네 주민들이 결사반대합니다. ‘결사반대’ 그 말은 죽어도 안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결국 어떤 타협을 하게 되고 교회 건축을 합니다. 뭡니까? 이참에 뭐 좀 이득을 보자는 거 아닙니까?
개발도 또는 환경운동도 이래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그렇기에 이래야 하나 저래야 하나 갈등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기준은? 그래요. 사람이 아닌 하나님이셔야 합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좋구나!” 하시도록 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얼마나 가졌느냐? 물론 중요 합니다. 없는 것 보다 있는 것이 좋으니까?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앙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앙이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앙이 우리에게 세상이 줄 수 없는 평화를 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앙이 우리에게 늘 감사하게 하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신앙이 우리에게 늘 기뻐하게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앙이 우리에게 늘 두려움 없는 담대함을 줍니다.
(이영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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