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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과 사람의 평가 (고후 6: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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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초등학교 다닐 때의 교과서 내용이 기억납니다. 교양 과목 가운데 자기 주관을 훌륭하게 가지고 살라는 교훈으로 제목이“팔러가는 당나귀”라는 이야기를 공부한 적이 있습니다. 무슨 내용이냐 하면 어느 부잣집의 영감이 어린 아들과 함께 당나귀를 시장에 팔려고 끌고 가는 겁니다. 아버지와 어린 아들이 앞에서 걸어가고 당나귀는 뒤에서 끌려오게 되는데, 동네 사람들이 보고 껄껄 웃으며 말합니다. “아니, 당나귀는 타고 다니는 짐승인데 둘씩이나 당나귀를 모시고 다니네!” 이렇게 말합니다. 아버지가 들어보니까 맞습니다. 그래서 “얘야! 안되겠다! 너 당나귀 위에 올라타거라!” 어린 아들을 태우고 아버지가 끌고 갔습니다. 그런데 어디쯤 가니까 또 다른 사람이 말을 합니다. “저런 버릇없는 놈 봤다! 저희 아버지를 태워야지 아들놈이 타고 아버지가 모시고 가는구나!” 이런 말을 한단 말입니다. 들어보니 그것도 맞는 말입니다. “얘! 내려와라! 내가 타야 하겠다.” 그래서 아버지가 타고 아들이 끌고 갔습니다. 어디쯤 가니까 또 다른 사람이 말합니다. “아니! 저 사람은 어린 아들을 태울 것이지 아버지가 타고 어린 아이는 끌고 가는구나! 저런, 저런!” 이러는 겁니다. “얘야! 할 수 없다. 우리 둘이 다 타자!” 그래서 둘이 다 올라타고 가니까 “아니! 아무리 말 못하는 짐승이지만 멀쩡한 사람이 둘이나 올라타고 가니, 여보쇼 짐승이지만 너무 부려먹지 마쇼!” 이런 말을 합니다. 갈 수가 없는 겁니다. 그래서 둘이 모두 내려서 당나귀를 묶어서 작대기를 끼워 둘이 양쪽에서 메고 갑니다. 마침 다리를 건너가는데, 동네 아이들이 보고 막 깔깔대고 웃으면서 “얘들아! 사람이 당나귀를 업고 간다.” 그러니까 당나귀가 놀라서 요동을 쳐 결국 물에 빠져 떠내려갔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아마 이 이야기의 목적은 사람들이 모두 자신의 판단보다는 다른 사람의 평가에 너무나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것을 교육하기 위해 이런 이야기가 교과서에 나왔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여인들은 이런 경우에 더욱 민감합니다. 내가 좋아서 아주 비싼 옷을 샀는데 입고 나가보니까 별로 좋지 않은 평가를 합니다. 그러면 다음부터는 그 옷을 안 입습니다. 그래서 또 다른 옷을 사게 되고 제 생각에는 어느 집이나 여인들의 옷이 가득가득합니다. 자꾸만 사게 되니 그럴 것입니다.

많은 사람의 인기를 얻어야 되는 직업이 있습니다. 선거에 출마하는 사람들이라든가 무대에 서야 되는 사람들은 365일 다른 사람 평가에 신경을 써야 합니다. 말 한마디 잘못하거나 행동 하나 잘못했다가는 치명적 손해를 입게 됩니다. 저는 내 마음대로 직업을 선택할 수 있다면 대통령은 절대 안할 것 같습니다. 그 자리는 언제나 역사에 평가를 받아야 되는 자리로 후손들까지 어려워집니다. 당시에는 꽤 좋은 평가를 받고 잘한다고 했는데 역사 이해는 시대에 따라 변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어느 시대에 가면 정반대의 평가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삶의 철학에 따라서 사람이 행복하게 살고 불행하게 삽니다. 저는 철학이 하나 있는데 이 세상은 소시민으로 사는 것이 제일 행복하다고 늘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렇게 살아왔고 우리 아들, 딸에게도 “절대 유명한 직업은 가지지 마라! 평범하게 소시민으로 사는 것이 제일 행복하다.”고 늘 강조했습니다. 사람이 유명해 질수록 힘들어집니다. 농사짓는 농부가 배를 째고 수술을 했어도 누구에게도 얘기꺼리가 되지 않습니다. 유명해지면 쌍꺼풀 수술만 해도 야단들입니다. 길을 가다가 포장마차에서 어묵을 마음 놓고 떠들며 먹고 노래방 가서 마음 놓고 노래를 불러도 괜찮습니다. 이게 얼마나 좋습니까? 제가 가끔은 은행에 돈 찾으러 가는 일이 있습니다. 저도 돈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목사님도 은행에 오시느냐고 묻는 것이 얼마나 불편한지 그 이후로 저는 은행 갈 때마다 아는 사람을 만날까봐 신경이 써진단 말입니다. 지금 대한민국에 없어진 문화가 있습니다. 사랑방 문화라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어느 동네든지 저녁이 되면 동네 사람들이 모이는 사랑방이 있었습니다. 그 장소는 온 동네 하루의 뉴스가 방송되는 곳이라서 집집마다 동네마다 가득가득 사람들이 모입니다. 그런데 그곳이 좋은 곳만은 아닙니다. 심판 장소입니다. 사랑방 재판에서 비판받은 사람은 그 동네에서 왕따가 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모였다가 누구도 도중에 나가지 못합니다. 내가 나간 다음에 나에 대한 평가를 나쁘게 얘기할까봐 끝까지 있다가 다같이 헤어지는 곳이 사랑방입니다. 그런데 불행한 것은 교회도 어떤 때 이런 역할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마음을 정하고 살아야 행복하게 살고 자유로이 살 수 있는 것인가를 우리가 복음적으로 생각함으로 모두가 풍성한 크리스천의 삶의 소유자가 되려는데 오늘 제 설교의 목적이 있습니다.

먼저 오늘 성경말씀을 중심으로 생각해보면 다른 사람들의 평가로 사도 바울이 제일 불쌍하다는 결론을 본인 스스로 내리고 있습니다. 자신이 밝힌 주변이 그것을 잘 대변해 주는데, 비참하고 불행한 대표적인 사람이 자신이라고 말합니다. 환난과 궁핍과 곤란과 매 맞음과 갇힘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과 헐벗음 이것이 자기 주변이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양심 고백이 아주 분명합니다. 우리가 열심히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90퍼센트 이상이 내게서 고난이 물러가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예수를 제일 잘 믿는 사람이면서 그 모든 고난을 혼자 다 가지고 있는 대표적 인물이 되었습니다. 우리 이 단어들을 한번 생각해 봅시다. 먼저 ‘환난’이라고 하면, 사도바울은 환난의 끝없는 주인공으로 살았습니다. 그가 정말 조용하고 편안한 순간이 있었다면 감옥에 있었을 때입니다. 그 외에는 주변 상황으로 인해 언제나 환난을 겪었습니다. 환난 속에 빠지는 사람은 세상을 그만 살고 싶습니다. 그것이 환난입니다. 그 다음에 ‘궁핍’이라고 그랬습니다. 이 세상에 모든 사람이 그렇게 열심히 노력하는 목적과 이유는 궁핍에서 벗어나려는 것입니다. 나라마다 경제 성장이 국책 사업의 제일 으뜸입니다. 가정마다 목표가 있는데 보다 나은 풍성한 삶을 누리는 것입니다. 세상이 과거에도 현재에도 앞으로도 변함없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궁핍했습니다. 그 다음에는 ‘매 맞음’이라고 했습니다. 죄도 없는데 한번 얻어터지고 나면 절망감이 옵니다. 요즘에는 학교 폭력 사건 때문에 학생들이 자살을 합니다. 가정 문제 연구소의 발표를 보면 제일 큰 문제가 가정 폭력이라고 말합니다. 매를 맞고 나면 사람이 살기 싫어집니다. 그 다음에 ‘갇힘’을 말했습니다. 우리교회 오네시모선교회에서 한 달에 한 번씩 안양 교도소, 청송 교도소에 갑니다. 매달 경비를 들여서 위로 잔치를 하고 옵니다. 갇힌 자의 소원은 바깥세상 출입입니다. 신체 활동의 제한은 가장 무서운 형벌이기 때문에 죄 지은 사람을 가두어버리는 겁니다. 그 다음에 ‘자지 못함’이라고 했습니다. 성경에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 도다”라고 했습니다. 왜 잠이 오지 않는가? 마음에 평화가 없어졌기 때문에 잠이 안 오는 것입니다. 사람이 며칠 동안만 잠을 자지 못하면 정신적 신체적 건강이 절대적으로 나빠집니다. 그 다음에 ‘먹지 못함’이라고 했습니다. 인간 최대의 슬픔은 굶주림입니다. 다행히 우리나라는 쌀이 남아돌아간다는 것이 문제가 되지만 참으로 행복한 소리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모든 고난을 다 차지하고 있는 사람인데 그것이 일시적 현상이 아니고 평생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런 사람에 대한 사회적 평가가 무엇이겠습니까? 바보입니다. 불쌍하고 미련한 사람입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가장 열심히 가고 있는 모습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핑계할 수 없이 이기주의적 삶을 살려고 합니다. 어떻게 해서라도 자신의 유익을 만들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러면 이러한 세상적 평가에 대해서 바울은 자신을 어떻게 평가하는가? 바울이 전도한 많은 지역 가운데 가장 지식적이고 지혜 추구의 도시는 고린도였습니다. 그곳의 사람들은 바울이 전하는 이 십자가의 도라는 진리를 듣고 나서 “저런 미련한 소리!” 이렇게 평가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전서 1장 18절에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라는 말을 그래서 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께 표적을 많이 요구했습니다. 우리 눈에 하나님의 표적을 보여주면 믿겠노라 하였고, 헬라인들이 십자가의 진리는 지혜가 아니라고 배척하였을 때 바울은 고린도전서 1장 22~24절에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라는 역설적 설교를 했습니다. 이러한 바울의 말은 “세상적 평가에 하나님의 백성들이 너무 많이 귀를 기울이지 말고 하나님의 평가에 마음을 쓰라. 이것이 자유함이다.”라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 9절을 보면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바울이 이렇게 말합니다. 무슨 뜻입니까? “진정한 삶의 자유함을 누리고 사십시오.” 이것이 크리스천 삶의 가치관의 정의입니다. 사람들의 눈에 비친 나의 모습과 하나님의 눈에 비친 나의 모습을 비교해 보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평가에 너무 많은 관심을 두고 살면 그 사람은 자유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평가에 관심을 둘 때 인간은 가장 자유스럽고 고귀한 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4장 8~9절에 뭐라고 그랬습니까? “종말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할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할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사람이 성령 충만하면 무엇이 달라지는가? 삶의 가치관이 변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모든 조건들을 갖추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합니다. 이것은 선한 노력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될 수 있는 대로 노력의 아름다운 열매를 가지고 행복하게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삶의 가치관이 바로 정리된 사람에게 그런 노력이 행복을 줄 수 있는 것이지 그렇지 못하면 오히려 그렇게 많이 노력해서 얻은 것들이 나에게 고통과 짐을 줄 수가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 나는 다 가지고 있던 사람입니다. 왕손으로 태어나 가문의 혜택을 받는 문화에서 베냐민 지파라는 인격 대우를 받던 사람이요, 중간 할례자가 아닌 출생 8일의 할례자요, 이민자가 아닌 정통 유대인 아브라함의 혈통이요, 율법의 전공자로 가말리엘 문하생이요, 산헤드린 공의회 회원권을 가장 젊은 나이에 소유한 출세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가 된 지금 나는 그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고 살아갑니다.” “그러면 당신은 이제부터 그렇게 좋은 것들을 다 버리고 무엇을 위해서 살겠습니까?”라고 하는 질문에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합니다. “아! 그러면 당신은 참으로 미련한 사람입니다. 어찌 그렇게 살겠습니까?” “네, 맞습니다. 당신들이 보기에, 그리고 당신들의 평가에 나같이 미련한 사람은 세상에 둘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 기준에 미련하고 바보스러운 나의 모습이 하나님의 평가에는 가장 아름답고 칭찬할 만한 삶의 모습입니다.” 세상으로부터의 자유함을 얻는 능력, 사람들의 그릇된 평가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는 담대함을 가지고 살라는 것입니다. 우리 세상 사람들은 누구든지 상대적 행복과 불행을 생각하며 살아갑니다. 노동을 해서, 계를 들어서, 적금을 부어서, 청약을 해 32평짜리 아파트를 하나 샀을 때 그 기쁨과 감격이란 말할 수 없이 큽니다. 그런데 내 옆에 있는 친구가 70평짜리 이름도 외우기 어려운 아파트를 샀다는 말을 들을 때 나의 감격은 별안간 간 곳이 없어지고 그렇게 고맙던 아파트가 원망스러워지고 내 모습이 별안간 초라해 보입니다. 요즈음 학교 입학 시즌이 되는데 중학생 아이들의 교복 문제가 사회 문제화 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가 언제 이렇게까지 되어버렸는가? 중학생들마저 명품 교복이 아니면 안 입고 학교 안가겠다는 것은 나라 망하는 소리같이 들립니다. 다른 사람에게 아름답게 보이고 싶은 본능적 욕구는 나쁜 것이 아니지만 이 세상 기준을 너무 지나치게 민감하게 따르다 보면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나는 없어지고 남을 살아주는 것이 됩니다. 여기서 자유함을 얻어야 합니다.

어느 날 이스라엘 민족에 국가적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호전 민족 블레셋이 전쟁 영웅 골리앗을 앞장세워 침략해왔기 때문입니다. 이제 사울왕가는 몰락 당하고 이스라엘 민족은 치명적 식민지 백성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골리앗을 보세요. 그는 전쟁 승리에 대한 모든 조건과 장비를 다 갖추고 있습니다. 번쩍이는 갑옷을 입고 예리한 칼을 번쩍이고 있습니다. 그 나라에서 가장 훈련이 잘된 정예부대를 가지고 있으며 전쟁을 오락으로 삼고 즐기는 막강한 군사들이 그 주변에 즐비하게 준비되어 있습니다. 이에 비해서 다윗은 가진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소년으로서 그를 따르는 병사도 없고 칼도 말도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이 두 사람은 누가 보아도 객관적으로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이때 사울왕은 다윗에게 몇 가지 준비를 시켜줍니다. 사무엘상 17장 38절에 “이에 사울이 자기 군복을 다윗에게 입히고 놋투구를 그 머리에 씌우고 또 그에게 갑옷을 입히매” 다윗의 주변을 튼튼하게 마련해 주는 작업이었습니다. “이런 정도는 전쟁하기 위해 주변에 있어야 되느니라”한 것입니다. 그러나 39절에 “다윗이 칼을 군복 위에 차고는 익숙지 못하므로 시험적으로 걸어 보다가 사울에게 고하되 익숙지 못하니 이것을 입고 가지 못하겠나이다 하고 곧 벗고 손에 막대기를 가지고 시내에서 매끄러운 돌 다섯을 골라서 자기 목자의 제구 곧 주머니에 넣고 손에 물매를 가지고 블레셋 사람에게로 나아가니라.” 아무것도 준비 안 된 자가 맨손으로 돌멩이 몇 개 가지고 나아갔습니다. 마치 장난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이 전쟁의 결말에 대해 우리는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느 때 행복하게 하지도 못할 불필요한 것들을 너무 많이 장식하고자 무겁고 힘들게 살아갈 때가 많습니다. 소유나 명예나 인기나 학벌이나 지식 이런 것들은 우리 생활에 어느 정도 필요하기 때문에 노력을 합니다. 그러나 불필요한 세상 기준에 너무 맞추다 보니까 오히려 지쳐서 쓰러지는 불행스러운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하나님을 믿고 사는 것은 자유함을 누리는 삶입니다. 하나님의 평가에 더 관심을 두고 나의 삶을 자유롭게 가볍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너무나도 비참하고 미련하고 보잘것없고 불쌍한 것 같이 보이나 하나님 보시기에는 가장 아름다운 삶,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그런 삶을 사시오.” 이렇게 바울이 권고하고 있습니다. 역사가 2000년이 지났고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오고 가는데 우리 크리스천들이 어떤 평가를 합니까? 바로 그 사람, 자지 못하고 먹지 못하고 헐벗고 갇히고 매 맞고 굶주렸던 그 바울이 기독교 2000년 역사에 가장 주님을 위해서 훌륭하게 살았던 사람이라고 평가를 하지 않습니까?

제가 LA에서 갈보리교회로 간다는 소문을 듣고 나를 아끼는 친구 목회자 여러 명이 찾아왔습니다. 나를 걱정해주는 진실한 충고를 해주기 위해 찾아와서 무척 고맙게 들었습니다. 그 충고 내용은 가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목회자들은 소신껏 목회를 하는 비결이 있습니다. 자신이 교회를 창립하고 목회를 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대한민국 안에서나 해외에서 그런 교회들이 대형 교회가 되었고, 저도 그 중에 한 사람으로 지금까지 5번 교회를 창립하고 어디서나 소신껏 목회를 해서 교회들이 잘 성장한 행복한 목회를 해왔습니다. 그 열매가 생각보다 더 훌륭하게 된 것이 사실입니다. “이 목사! 그런데 더 좋은 것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이 왜 불리한 환경을 선택하느냐? 지혜롭지 못한 결정이다. 우리는 친구를 사랑한다.” 그러면서 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내가 불리한 조건을, 내가 모르는 분야를 객관적으로 나한테 이야기를 좀 해보시오.” 그랬더니 “여러 가지가 있는데 첫째, 그 동네가 이 목사 고향이라고 들었다. 맞느냐?” “맞다.” “아니, 성경에 고향에서는 예수님도 안 되었다고 이야기하셨는데 왜 거기를 찾아가느냐?” 사실 여기 고향에서 옛날 친구를 어쩌다 만나면 반가워합니다. 내 동기들입니다. 그런데 저한테 뭐라고 그러는지 아십니까? “고스톱 치러 와라! 응?” 그 다음으로 “너무 큰 나무가 계시던 목회지다. 박조준 목사님은 대한민국이 인정하던 설교자다. 그런데 그분이 설교하셨던 그 강단에 가서 이 목사가 설교하면 며칠이나 가겠냐? 안 된다.” 그러니까 점점 심각해지는 겁니다. 그 다음에 “한국 문화는 50세만 되면 물러나는 문화가 되어서 사오정이란다. 60이 다 된 사람이 가서 환영을 받겠느냐? 40대가 아니지 않냐? 이제 그만 둘 나이가 다가오는데….” 그것도 또 맞는 말이지 않습니까? 또, “이럭저럭 외국 문화에서 수십 년 살아서 외국 문화에 젖었다. 한국가면 교인들이 이질감을 많이 느껴서 하모니가 안 이루어질 것이다. 비판만 받을 것이다.” 그것도 또 맞습니다. 제일 걱정이 있는데 그게 뭐냐 하면 “이 목사 한국을 오래 전에 떠나서 모르지? 강남과 분당 사람들은 대한민국에서 제일 잘 나가는 사람들이다. 그 쟁쟁한 사람들의 비위를 다 어떻게 맞추겠느냐? 못한다. 우리나라 역사에 대형화된 교회의 창립 목사가 아닌 후임 목사는 날마다 비판의 대상이 되는 것을 알고 있지 않느냐? 잘 된 사람이 없다. 박조준 목사님도 그래서 영락 교회 계시다가 갈보리교회 창립하신 것 아니냐? 그 역사가 뻔한데 그곳에 왜 가려고 하느냐?” 여러분, 다 객관성이 있고 진실이고 옳은 말입니다. 이 몇 가지를 다 듣고 나니까 ‘이게 사실인데 나는 벌써 그때 박 목사님과 약속 했는데 이걸 어떡하나? 큰일 났다.’ 그래서 저는 이렇게 생각하고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한분의 비위만 맞추겠다. 하나님이다.” 저는 지금 그렇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거 하나면 된다. 그 수천 명의 교인의 비위를 내가 어떻게 다 맞추겠냐? 나는 하나님이 좋아하실 하나님의 일만 열심히 하겠다.’ 앞으로도 그렇게 할 것입니다. ‘그 이상은 나는 생각하지 않겠다.’ 사람들의 평가에 너무 신경을 쓰면 자유함이 없어집니다. 일의 방향도 잃어버립니다. 하나님이 나를 보실 때 어떤 평가를 하실 것인가? 그 기준으로 크리스천은 삶의 담대함과 자유함을 가지고 살라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다소 안 좋은 평가라도 괜찮다는 것입니다. 그로 인하여 좀 고난이 와도 괜찮다는 것입니다.

미국도 남북 전쟁이라는 내전을 겪었습니다. 남쪽의 군인들도 열심히 예배드리고 전쟁을 했고, 북쪽의 군인들도 누구의 배낭이든지 다 성경이 들어있었습니다. 치열한 전쟁터에서 사람들이 수없이 쓰러져 죽을 때 병사들은 신앙적 갈등이 생겼습니다. ‘하나님은 어느 편에 계신가?’ 그때 링컨 대통령이 연설을 했습니다. “하나님이 어느 편에 계신가를 생각하지 말라. 내가 하나님의 편에 있는가 생각하라.” 결국 링컨 군대의 승리로 끝이 나서 오늘의 미국을 이루지 않았습니까? 오늘 바울의 목소리!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얼마나 담대하고 자유함이 넘치는 모습을 보느냐 말입니다. 왜 하나님이 이새의 여덟 명의 아들 가운데 막내인 다윗을 선택하셨는가? 성경에 이르기를 “그는 내 마음에 합하나 자라. 그래서 내가 선택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여러분, 하나님 믿는 사람들이 세상 평가 기준에 그렇게 너무 바삐 맞추려고 애쓸 것 없습니다. 하나님의 평가 기준에, 하나님의 음성에 맞추어서 자유함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 하나님 아버지! 바울 선생의 삶의 자유로운 모습에서 우리의 삶의 방향을 찾게 하여 주시옵소서. 사람들의 평가에 너무 귀를 기울이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 기뻐하시는 일에 관심과 마음과 두고 노력할 수 있게 하여주시옵소서. 우리 모두의 삶을 지켜주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이필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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