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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산 돌이신 예수 (벧전 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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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전에 우리는 찬송가 259장 “빛의 사자들이여”를 불렀습니다.
저희 교회가 대성전 바깥벽에 ‘목양감리교회’라는 백색 아크릴 간판을 부착하고 지난 수요일 저녁에 처음으로 불을 밝혔습니다.
불을 밝히면서 드린 예배를 시광(始光)예배라고 했습니다.
현판(懸板)예배라고 할 수도 있고, 점등(點燈)예배라고 할 수도 있으나 ‘빛을 발하기 시작한다.’는 뜻으로 시광예배라는 새 말을 만들었습니다.
원래는 저녁 일곱 시에 밖의 경비실 앞에서 간판을 바라보면서 시광예배를 드리고 불을 밝히려고 했으나 그 날 비가 와서 교육관 2층 로비에서 드렸습니다.
성경적 기도와 Q,T, 세미나의 강사와 저녁 식사를 하고 2층 로비에 오니까 성도들이 모여서 예배 시작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자발적으로 이 찬송을 부르고 있었습니다.
그 찬송을 들으면서 잔잔하면서도 깊은 감동을 느꼈습니다.
그 간판, 낮에도 보기 좋지만, 밤에 보면 정말 아름답고 감동적입니다. 환상적입니다.
새벽기도회에 와서 자신도 모르게 주차장에서 발을 멈추고 환하게 빛을 내고 있는 그 간판을 한참 바라보다가 교회당으로 들어가는 일도 있습니다.
그 때, 성도들이 스스로 택해 부른 찬송가 가사 그대로 이 교회가 복음의 빛을 비추는 교회가 되기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은 한 분도 빠짐없이 주의 진리 모르는 백성에게 복음의 빛 비추는 빛의 사자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런 모습이 오늘 2부 예배 뒤에 갖는 2차 노방전도를 통해 구체적으로 나타나게 되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에는 돌이 많이 등장합니다.
5절과 6절에는 “산 돌”이 나옵니다.
6절과 7절에는 모퉁잇돌, 모퉁이의 머릿돌이 나옵니다.
7절에는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나옵니다.
8절에는 부딪치는 돌, 또 걸려 넘어지게 하는 바위가 나옵니다.
돌 전시장과 같은 느낌을 줍니다.
사실 그렇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말씀들은 ‘산 돌’을 제외하고는 모두 구약에 나오는 돌에 대한 말씀들을 한 자리에 모은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렇게 돌에 대한 말씀들을 모아놓고 ‘이 돌들이 모두 예수님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본문에 나오는 돌들을 중심으로, 특히 산 돌을 중심으로 해서 은혜와 교훈을 얻기 원합니다.
첫째, 나는 예수님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다시 한 번 생각해야 됩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은 나에게 있어서 어떤 존재가 되는지 재정립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과 나의 관계를 재확인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돌이 있는데 그 돌을 대하는 태도는 하나님과 사람이 다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람과 사람들 사이에도 차이가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4절을 보세요, 예수님이라는 돌이 있는데 사람들은 그 돌을 버렸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사람’은 예수님 당시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단 사람들, 당시 종교 지도자들, 군중들을 말합니다.
동시에 오늘날에도 예수님을 부인하는 사람들,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 예수님을 비난하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예수님을 택하셨습니다.
보배로운 산 돌이 되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보배로 여깁니다.
그런데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예수님이 부딪치는 돌, 걸려 넘어지게 하는 바위가 됩니다.

어떤 건축자는 ‘이 돌은 쓸모가 없어!’ 하면서 내다 버렸습니다.
다른 건축자는 그 돌을 가져다가 모퉁이의 머릿돌로 삼았습니다.
모퉁이의 머릿돌은 건축물의 한 면과 다른 면을 연결하는 역할을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인간을 연결하고, 유대인과 이방인을 연결하고, 나와 이웃을 연결하는 분입니다.

같은 돌인데 대하는 태도가 다릅니다.

우리는 어떤 사물을 대할 때, 될 수 있는 대로 긍정적인 눈으로 보아야합니다.
거기에서 어떤 가치를 발견하려고 노력해야합니다.
그렇게 하는 사람들이 성공합니다.
그 가운데 좋은 본보기가 되는 사람이 농학자인 조지 워싱턴 카버 박사입니다.
카버 박사는 세상에 쓸모없는 것은 없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은 하찮게 여기는 땅콩 같은 농작물을 잘 활용하는 방법을 많이 개발해낼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사람을 대할 때 특히 그렇게 해야 합니다. 
「삼국사기」에 온달(溫達)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온달은 못 생기고 가난한 젊은이였습니다. 밥을 빌어다가 눈먼 어머니를 봉양하는 처지였습니다. 사람들은 그런 온달을 ‘바보 온달’이라고 불렀습니다.
바보 온달이라는 이름은 왕궁에까지 알려질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평강공주는 그런 온달 속에 숨어 있는 재능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의 아내가 되었습니다.
무예를 수련하도록 해서 그 온달을 뛰어난 장수로 만들었습니다.
나라를 위해 공을 많이 세우는 용장이 되게 했습니다.

우리나라에 교회가 들어올 무렵에 거리에 고아들이 많았습니다.
나라에서는 이 고아들에게 별 관심을 갖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교회에서는 이들을 귀하게 여기고 고아원을 세워 돌보았습니다.
그 가운데 훌륭한 인물들이 많이 나왔습니다.
여러분, 김규식(金圭植 1881~1950) 박사를 잘 아실 것입니다. 이 분은 1900년대 초 연세대학 교수를 지냈고 평신도 지도자로서 교회를 위해서 많은 일을 했습니다.
독립운동가로 임시정부 부주석을 지냈고 해방 이후에 나라가 혼란한 때 중요한 지도자 가운데 한 분으로 힘썼습니다.
6․25 때 납북당해 북한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 분은 언더우드 선교사가 세운 고아원 출신입니다.
언더우드 선교사가 남긴 기록을 보면 김규식 박사가 고아원에 들어오기 이전의 비참한 모습이 자세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노벨상 수상자를 많이 배출했습니다. 그 때문에 유대인의 교육방법에 대해서 관심이 높습니다.
저희 교회 문화원에서 실시하고 있는 ‘오르다’도 유대인들의 교육방법을 어린이들에게 적용하는 프로그램입니다.
유대인 교육방법은 그 학생에게 있는 가능성을 발견하고 그 학생을 격려하고 고무하는 것을 기본원칙으로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머리가 나쁜 사람을 흔히 ‘돌 무엇’이라고 합니다. 여기 ‘무엇’에는 세 글자로 들어간 말이 들어가지요.
유대인들은 그런 말을 쓰지 않을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아까 말씀드린 것과 같이 여기에 나오는 돌은 예수님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사람들은 그 돌을 버리는데.  그냥 버린 것이 아닙니다. 깨뜨려 버리려고 했습니다.
완전히 산산조각을 내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돌을 택했습니다.
보배로운 산 돌이 되게 하셨고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게 하셨습니다.
모퉁이의 머릿돌은 아까 말씀드린 것과 같이 연결하는 돌입니다.
그와 동시에 기준이 되는 돌, 기초가 되는 돌을 말합니다.
모퉁이의 머릿돌이 없으면 건축을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기초로 그 위에 구원의 역사를 이룩하셨습니다.

오늘날에도 예수님을 대하는 태도는 사람에 따라 다릅니다.

우선 ‘구세주’ ‘가장 귀한 존재’로 여기는 분들이 있습니다.
반면에 나와 관계없는 존재로 여기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인구의 80% 이상이 이런 태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유물론자들은 ‘예수는 허황된 이야기의 주인공’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많은 위인들 가운데 그저 특출한 사람’ 이렇게 여기고 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잘 이해하기 어려운 존재로 여기고 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예수님이 한 말에는 유익한 것이 많은 것을 인정하나 믿기 어려운 기적을 많이 행하고, 죽은 사람을 살렸다고 하고, 심지어는 그 자신도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고 하고, 이런 점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 점이 바로 “부딪치는 돌” “걸려 넘어지게 하는 바위”가 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 사람들은 지구 위의 수 십 억의 사람이 왜 그를 믿고 따르는지 이해하지 못합니다. 왜 수많은 사람들이 그를 위해서는 모든 것을 다 바치는 가운데 목숨까지 바치는 사람도 많은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어떻게 대하십니까?
어떤 돌로 여기십니까?
예수님은 여러분에게 있어서 어떤 존재가 되십니까?
물론 예수님을 구세주라고 믿으니까 오늘, 이 자리에 나와 그 예수님께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혹시 ‘남들이 구세주라고 하니까 나도 따라서 그런가보다 하고 있습니다.’라고 하지는 않습니까?
예전에 어떤 사람이 새우젓 장사를 하게 되었는데 다른 새우젓 장사를 따라 다니며 그 장사가 ‘새우젓 사려!’ 하면 ‘나도!’ 그랬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그 새우젓 사겠습니까?
내가 ‘새우젓 사려!’ 힘차게 외쳐야 합니다.
‘이 새우젓, 참 맛있는 것입니다. 몸에 좋은 것입니다. 비싸지 않은 값으로 밥상을 풍성하게 만들어주는 고마운 것입니다!’ 이런 소신을 가지고 외쳐야 합니다.
여러분, 오늘 나가서 그렇게 외치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구세주라고 하더라’ ‘예수님은 구세주인 모양이다.’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 그 예수님은 언제라도 나와 관계없는 분이 되어버릴 가능성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나의 구세주가 되어야 합니다.
나에게 가장 소중한 분이 되어야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주 예수보다 귀한 것은 없네’ 하는 것을 구경하는 것이 아니라, ‘주 예수보다 귀한 것이 나에게는 없네’ 하여야 합니다.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나의 생명의 반석으로 다시 한 번 확인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둘째, 예수님은 산 돌인 것을 알아야합니다.

아까 말씀드린 것과 같이 구약에는 여러 곳에서 메시아를 돌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다니엘서에는 느부갓네살 왕이 순금, 은, 놋, 철, 진흙으로 된 신상을 보았는데 손대지 않은 돌이 그 신상을 쳐서 부서뜨리는 꿈을 꾼 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손대지 않은 돌, 예전 성경에는 “뜨인 돌”이라고 한 돌, 심판의 돌도 예수님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다니엘서 2장 35절은 우리에게 많은 암시를 주고 있습니다.
그 신상을 이루고 있던 것들 순금, 은, 놋, 철, 진흙은 여름 타작 마당의 겨 같이 되어 바람에 불려 간 곳이 없어져 버립니다.
그 다음에 다니엘서 2장 35절 뒷부분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우상을 친 돌은 태산을 이루어 온 세계에 가득하였나이다

복음이 온 세계에 가득 전해지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신약에도 예수님을 돌에 비유한 말씀이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전서에서 예수님을 생수의 근원이 되는 반석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0장 4절의 말씀입니다.

모두가 같은 신령한 음료를 뒤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니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그런 가운데서 예수님을 “산 돌”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은 베드로의 독특한 표현 가운데 하나입니다.
베드로는 ‘산’ ‘살아있는’ 이 말을 좋아했습니다.
소망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도 “산 소망”을 말합니다.
베드로전서 1장 3절의 말씀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말씀에 대해서도 ‘살아있는 말씀’을 강조합니다.
베드로전서 1장 23절의 말씀입니다.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그리고 예수님을 돌에 비유해서 말할 때도 “산 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아마 베드로가 갈릴리 호수에서 어부 생활을 하면서 살아 펄펄 뛰는 생선들을 늘 대했기 때문이 아닌가 여겨지기도 합니다.

이 “산 돌”은 발음할 때 조심하셔야 합니다.
‘산 돌’은 ‘살아있는 돌’이라는 뜻입니다.
한문 성경은 산 돌을 “활석(活石)”이라고 했고, 영어성경은 “living Stone”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발음을 잘못하면 ‘산에 있는 돌’이 됩니다.
어느 음식점 메뉴에 ‘산 낙지’라고 있는데 어떤 분이 오랫동안 그것을 ‘산에서 잡은 낙지’ 이렇게 알고 ‘매우 특별한 낙지인가보다’ 여겼다고 합니다.
발음에 따라서는 산과 돌이 되는 수도 있습니다.
‘산 돌’이라고 쓸 때는 원칙적으로는 띄어 써야 합니다.

산 돌, 살아있는 돌 무슨 뜻입니까?
산 돌은 생명을 가진 돌입니다.
요한복음 1장 4절은 예수님에 대해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자신은 생명이라고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4장 6절의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으니라

그 생명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사망권세를 이긴 생명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 생명을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기 원하시는 분입니다.
오늘 우리가 노방전도를 나가는 것은 그 영원한 생명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일입니다.
예수님이 원하시는 것을 이루어드리는 일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산 돌입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살아계신 돌입니다.
예수님은 박물관에 계신 분이 아닙니다.
수석 가게에 계신 분이 아닙니다.
바로 지금, 바로 이 예배실에 성령으로 함께 계신 분입니다. 
바로 지금, 나의 사정을 들으시고, 나와 대화하기를 원하시는 분입니다.

아까 산 돌을 영어로 “living Stone”이라고 한다고 했는데 NIV 성경을 보니까 “living”의 ‘l’자는 소문자로 썼고  “Stone”할 때의 ‘S’자는 대문자로 썼습니다.
다 뜻이 있어 그렇게 한 일이겠지만 living도 대문자로 시작하는 것이 예수님은 살아계신 존재라는 것을 제대로 알리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보았습니다.

수석을 좋아하는 분이 있습니다. 그 분이 아끼는 수석 가운데 돌에 굵고 가는 줄들이 퍼져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 분은 그 줄을 핏줄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 돌을 잘 바라보면 그 핏줄에 피가 흐르는 것 같이 느껴진다고 합니다.
그 돌을 살며시 만지면 따스한 체온이 느껴지는 것 같다고 합니다.
생명이 없는 돌도 애정을 가지고 대하면 생명이 있는 것처럼 여겨집니다.
하물며 생명이 있는 예수님을 대하면서 생명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바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산 돌, 생명을 가진 존재로 알고, 그 생명을 받고, 그 생명을 나누어주는 일에 힘쓰시기 바랍니다.

셋째, 나도 산 돌인 것을 알아야합니다.

5절을 보세요.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너희도 산 돌 같이”는 ‘산 돌과 같은 존재’라는 뜻입니다
참 황홀한 말씀입니다.
우리를 산 돌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또 우리를 거룩한 제사장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본문 뒤의 9절에서는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개신교의 만인제사장(萬人祭司長)교리가 나왔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귀한 존재입니다. 여러분, 자기의 가치를 새롭게 인식하시기 바랍니다.

퍽 올곧은 성품을 가진 감리교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그 성품 때문에 적이 많았습니다.
이 분은 이런 자기의 처지를 가슴 아프게 생각하면서 자기 호를 기석(棄石)이라고 했습니다. ‘포기한다.’라고 할 때의 그 ‘기’자입니다. ‘사람들에게 버림 받은 돌’이라는 뜻입니다.
원로목사님 한 분이 그래서는 안 된다고 하나님은 사람들이 버린 돌을 가지고 모퉁이의 머릿돌로 삼으시는 분이라고 하시면서 우석(隅石)이라는 호를 지어주었습니다.
‘우’는 ‘모퉁이’라는 뜻을 가진 글자입니다.
감리교회는 1970년대 중반까지 한 분 감독이 교단을 책임지다가 그 후에 감독을 여러분 두는 제도로 바뀌었는데 마지막 단일감독이었던 고 김창희(金昌熙) 목사님의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나는 버림 받은 존재야!‘ 하지 마세요.
사람은 여러분을 버리더라도 하나님은 끝까지 버리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어떻게 해서 산 돌입니까?
산 돌이신 예수님께 나아가 그와 연결되었기 때문에 산 돌입니다.
예수님과 연결이 끊어지면 우리는 죽은 돌이 됩니다.

우리가 어떻게 해서 산 돌입니까?
산 돌이신 예수님 위에 지어진 집에 살고 있기 때문에 산 돌입니다.
이 집은 바로 교회입니다.
이 집을 떠나면 우리는 산 돌이 아닙니다.

산 돌인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합니까?
믿음이 성장해야 합니다.
성장하지 않으면 살아있는 존재라고 할 수 없습니다.
원로목사님 가운데 북한 중강진(中江鎭)이 고향인 분이 계신데 그 분은 자기 고향에는 자라는 돌이 있다고 자주 말씀하십니다. 돌이 저절로 커진다는 것입니다.
그런 돌이 어디 있느냐고 하면, 아니라고 틀림없이 있다고 하십니다.
글쎄, 확인하고 싶어도 지금은 갈 수 없는 곳이니까 기다리는 수밖에 없지요.
돌도 자라는 것이 있다고 하는데 생명을 가진 존재인 우리가 자라지 않으면 산 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나는 이제 나이가 많습니다. 나는 성장이 멈춘 지 오래입니다.’ 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아닙니다. 육신은 나이가 어느 정도 들면 성장을 멈추지만 믿음은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는 날까지 성장합니다. 또 성장해야 합니다.
저도 이번에 ‘성경적 기도와 Q.T. 세미나’를 통해서 기도에 대한 성경적 이해가 많이 성장했습니다.

산 돌인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산 제사를 드려야합니다. 살아있는 예배를 드려야합니다.
5절의 뒷부분을 보세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 이것이 산 제사, 살아있는 예배입니다.

바울 사도는 로마서 12장 1절에서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산 돌인 우리는 산 제물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살아있는 예배를 드려야합니다.
감동이 있고, 은혜가 넘치고, 변화가 되고, 힘을 얻고,  헌신의 결단이 있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를 드려야합니다.

5절의 “너희도 산 돌 같이” 성경 원어를 보면 복수로 되어 있습니다.
산 돌들의 모임이 교회입니다. 산 돌들의 모임인 교회는 산 돌 공동체가 되어야합니다.
살아있는 교회가 되어야합니다.
생명력을 가지고 힘차게 움직이는 교회가 되어야합니다.

우리나라에 교회 이름을 산돌이라고 지은 교회들이 참 많습니다.
대강 살펴보아도 백 개가 넘지 않을까 여겨집니다.
‘산돌중앙교회’도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산돌교회라는 이름을 가진 교회들만 산 돌 공동체가 아니라 모든 교회가 산 돌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저희 교회는 목양교회인데, 양들의 공동체인데 이 양들은 살아있는 양들이어야 합니다.
털과 젖으로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고 새끼를 끊임없이 낳는 양들이어야 합니다. 
우리나라가 출산율 저하로 고민하고 있는데 교회의 영적 출산율이 저하되는 것은 더 염려스러운 일입니다.
그런데 한국교회에서는 실제로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이것을 극복해야 합니다.

여러분 손양원(孫良源) 목사님을 잘 아시지요?
여수 애양원에서 나환자들을 위해 평생을 바친 분입니다.
일제 때는 신사참배를 반대해서 6년간 옥살이를 했습니다.
1948년에 여수․순천에서 좌익군인들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자기 두 아들 동인이, 동신이가 좌익학생의 손에 죽었습니다. 반란이 진압되고 주동자들이 체포되었는데 손양원 목사님의 두 아들을 죽인 안재선이라는 좌익학생도 체포되었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지역계염사령관을 만나 그를 자기의 아들로 삼을 테니 용서해 달라고 했습니다.
지역계엄사령관은 감동이 되어 안재선을 석방했습니다.
손 목사님은 그를 데리고 와서 같이 살았습니다.
이 때 손 목사님의 일기 한 구절이 참 많은 것을 생각나게 하는데 ‘재선이와 같은 식탁에서 밥을 먹을 때는 꼭 모래를 씹는 것 같았다.’라고 했습니다.
마음의 고통을 이기며 그를 사랑한 것입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6․25 때 피난 가지 않고 나환자들을 지키다가 인민군에게 총살당했습니다.
얼마 전에 저희 교회에서 목사님들의 모임이 있었는데 참석한 목사님들을 소개하는 순서가 있었습니다. 사회자가 한 젊은 목사님을 소개하면서 ‘이 목사님은 순교자 손양원 목사님의 손자입니다.’ 하기에 주목해서 보았더니 안 무슨 목사라는 명찰을 달고 있었습니다.
제가 금방 알고 ‘안재선 씨의 아들이냐?’고 했더니 그렇다고 합니다.
언제 모셔다가 간증을 듣기 위해 전화번호를 받아 놓았습니다.
안용준이라는 목사님이 손양원 목사님의 전기를 썼는데 그 제목을 「사랑의 원자탄」이라고 했습니다. 참 적절한  제목입니다.
이 손양원 목사님의 호가 산돌입니다.
산 돌이신 예수님을 본받고 산 돌로 살아가기 위해 그런 호를 갖게 된 것 같습니다.
그렇게 살았기 때문에 그와 같이 살아 있는 사랑을 베풀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하며 마칩니다.

여러분, 예수님에 대한 고백을 다시 한 번 새롭게, 분명하게 하시기 바랍니다.
산 돌이신 예수님과 항상 연결되어 그 생명을 공급 받기 바랍니다.

‘나도 산 돌!’ 이것을 분명히 알고 산 돌답게 사는 여러분이 되고 제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유관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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